"비행기를 타면 섹스가 하고 싶어져요." 2년 전 우연히 만나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3살 연하 친구 P가 말했다. 여행을 떠날 때면 항상 이상하게 설레고, 일탈에 대한 욕구가 뭉개뭉개 피어난단다."누나는 어때요?" 난 솔직히 대답했다. "난 비행기 타는 게 그냥 지하철 타는 것 같아."B는 황당한 듯 말했다."출장 말구요. 여행 갈 때 말이예요.""글쎄....난 비행기를 너무 자주 타나 봐.비행기에서 여행가이드 읽으면서 어디 갈까 생각하고 그런 게 아니라, 전자계산기 두드리면서 징그러운 숫자들로 가득 찬 보고서를 쓰는 게 내 일상이야. 비행기를 타면 설레이고 그런 게 없어. 아쉽게도."말하다 보니 정말이지 귀를 틀어막고 싶었던, 몇년 전 호주 출장길이 생각났다.그 날은 서울 시내 모든 예식장이 터져나가는 "길일"이었다. 일요일 저녁 비행기는 머리를 100개가 넘을 것 같은 실핀으로 틀어 올리고커플 티를 입은 신혼부부들로 가득 찼다. 공항에 늦게 온 신혼부부들은 옆자리에 앉지 못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앉거나 앞뒤에 앉아 크게 떠들고, 옆자리에 앉은 신랑은 신부 실핀을 뽑아 주고, 손을 꼭 잡고 앉아 끊임 없이 재잘거리고....비행기는 거대한 돗대기 시장 같았다.그날 비행기는 3,5,3이었는데, 난 재수 없게도 최악의 자리인 5명이 앉는 좌석 가운데 앉았다.그러니까 두 신혼부부 사이에 10시간 동안 앉아 있어야 했다. 그 닭살 돋고 시끄러운 상황에서 난 말 없이 전자계산기를 두드렸다.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옆자리 신혼부부의 대화는 계속 귀에 들어 왔다. 그들은 누구누구 선물을 사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일부러 귀엽게 말하려는 건지, 원래 혀가 짧은 건지 옆에 앉은 여자는 "실땅님, 실땅님"하는 최지우 같은 발음으로 친척들 이름을 하나하나 말하고 있었다. " 아버님, 어머님, 우리 아빠, 우리 엄마, 큰 고모님, 작은 고모님,누구누구......." 이러다가 음료수를 든 스튜어디스가 한 번 지나가거나, 기내 면세품 판매를 하면 다시 처음부터 "아버님, 어머님,우리 아빠, 우리 엄마...." 를 계속했다. 대여섯번 들으니까 짜증이 나서 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기요, 아까 이모님까지는 하셨거든요. 노트 한장 찢어 드릴까요? 쓰시는게 좋지 않을까요?"신혼부부들 가운데서 10시간을 앉아 있는 건 참으로 괴롭고 쓸쓸한 일이다. 그 속에서 전자계산기까지 두드리는 건 굉장한 인내심과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이런 상황도 몇 번 겪고 나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익숙해 질수록 비행기를 타는 건 지하철을 타는 것처럼 일상이 되어간다. 설레이거나 괜시리 가슴이 뛰고 하는 현상은 자연소멸된다. 어쩌면....나도 "신혼여행"이란 걸 간다면 그 때는 설레일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법으로 합법적으로 내 남자가 된 남자 옆에 앉아 몰디브로 날아간다면 어떤 기분일까?설레이기도 하겠지만, 서울의 한 거대한 예식장에서 "쌩쇼"에 가까운 결혼식을 하고 나면 피곤해서 곯아 떨어질지도 모르겠다.어제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피로연장에서 칼질을 하고 있는데,무도회처럼 커다란 융단이 깔리면서 신랑,신부가 손을 잡고 들어왔다.마이크를 잡은 사회자가 말했다."신랑,신부 인사가 있겠습니다."무대에 올라선 신랑,신부는 제일 먼저 커다란 촛대에 점화를 하고, 꽃게처럼 옆으로 걸어서 그 옆에 있는 <헨젤과 그레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커다란 케이크를 자르고, 또 꽃게처럼 옆으로 걸어서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는 글라스들에 샴페인을 따랐다. 속으로 생각은 해도 말은 못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대학생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 하나만 하지. 멍청해 보여."하하, 더 "럭셔리"한 결혼식에 가면 마술 쇼처럼 퍼포먼스를 할지도 모르겠다.결혼식장에 가면 뭔가 자극을 받거나,"아....나도 저런 드레스를 입고 싶어." 그런 생각이 들어야 결혼을 한다는데, 난 계속 삐딱한 생각만 들었다. 도대체 이런 엄청난 예식장에서 결혼 비용만 얼마일까?기본으로 5~6천은 가볍게 넘을 것 같은데 내 연봉도 넘는 돈을, 그러니까 일년 동안 가끔은 증발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버는 돈 보다 훨씬 많은 돈을 하루에,아니 한두 시간에 다 써 버린다니....그리고....그런 요란한 드레스도 입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요란하고 뭐가 많이 달린 꽉 조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으려면 얼마나 배에 힘을 줘야 할까? 폐백까지 끝나고 옷을 갈아 입으면 아마 쓰러질 것 같을 거다. 내가 원하는 결혼식은 가족들과 친한 친구 몇 명만 초대한 조용하고 조촐한 결혼식이다. 얼마 전, 감우성이 호주에서 그런 조용한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나도 그런 결혼식을 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결혼식에 천문학적인 부주를 쏟아 부은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그래도 원하는 결혼식을 하려면 "본전 의식"을 버려야 한다. 내일 또 결혼식에 가야 한다.그것도 양평에. 연휴 마지막 날 양평에서 올라 오려면 오징어를 세 마리는 먹어야 서울에 도착할 것 같아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학교 다닐 때 MT 가본 이후 처음으로 청량리역에 간다. 거 참...두 번의 결혼식 나들이로 황금같은 연휴가 간다. 난 절대 연휴에 결혼 안 해야지.나도....설레이는 여행을 가고 싶다. 혼자 가도 좋고, 편안한 남자 어깨에 기대서 가면 더 좋겠다. 여행,여행, 여행이 가고 싶다. 언젠가, 불쑥,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