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사랑하는 친구 수경이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수경이의 고등학교 때 별명은 "영구"였다.
어제 정오가 다되어 겨우 일어나 pc를 켰다.
방명록에 수경이가 금요일에 남긴 글이 있었다.
그러니까 수경이가 결혼식 하루 전에 쓴 글이다.

제목은 "영구 기분더럽구나!!".

아....정말 하루 이틀 만나온 친구가 아니지만
진정 엽기적이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신부가
"기분 더럽다"고 글을 쓰다니....

수선

영구가 드디어 내일 결혼을 하는구나!!
기분이 한마디로 약간 더티하고, 약간 흥분되고, 약간 걱정되고......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다...
너도 언젠가 좋은 사람과 나와 같은 시간이 오겠지
한마디로 2번은 겪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네가 출장 일정까지 조정을 하였다니 정말 고맙구나!
그냥 깍깝한 마음에 친구한테 하소연 하는 마음으로 지껄여 봤다..
내일 보자꾸나

p.s: 전쟁기념관은 삼각지역 12번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인단다..
그럼 4시에 보자
청첩장은 쑥스럽고 친구사이에 주기가 뭐해서 따로 안보낸다


아....역시 내 친구다.
어찌 이리도 솔직하고 터프할까?
공주병이 무좀 보다 흔한 시대에
이쁜"척",착한"척"과 담쌓고 사는 내 친구 수경.

수경이 결혼식에 가려고
금요일밤 마지막 비행기로 Tokyo에서 날아왔다.
몸이 방바닥으로 가라앉을 것 같이 뻐근하고 피곤했는데
수경이의 글을 보니 엔돌핀이 솟아 올랐다.

드디어 4시 전쟁기념관.
기분 더럽다던 수경이는 이 세상 어떤 신부보다 예뻤다.

고등학교 때,
맨날 학교에 따끈한 도시락을 갖다 주시던
수경이 할머니를 정말 오랫만에 뵈었다.
아흔이 다되어 가시는데도
분홍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신 할머니는 참 고우셨다.
할머니를 한번 꼭 안아 드렸다.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시며 "고맙다"고 몇번이나 말씀하셨다.

주례가 끝나고 사회자가 말했다.
"축가가 있겠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신랑이 직접 축가를 부르겠다고 합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랑이 피아노에 앉았다.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신부에게>를 불렀다.

아.....그 감동이란....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피아노를 치면서 부른
<사랑해도 될까요> 보다 100배, 1000배 더 감동적이었다.
정말 가슴이 뻐근하도록....

신랑이 직접 부르는 <신부에게>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수경이 이모들도 눈물을 닦고 계셨다.

그런데....신부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라이브 연주를 감상하듯이
피아노 치는 신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진정....
독한년!

노래 가사처럼
우리 수경이가 더 이상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기쁨과 슬픔 또 사랑 함께 나눌 사람과
이 세상 누구 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수경이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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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5-05-15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기분더럽다에 맞먹는 표현-독한년 입니다....ㅎㅎㅎㅎ

비로그인 2005-05-1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 해도 그 마음이 느껴지네요^^ '멋진 친구들'입니다~!

플레져 2005-05-1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반전!!
신부가 눈물 흘리지 않아 맘에 듭니다... 아냐, 그래도 눈물 흘리는 신부도 이뻐요.
저는 신랑이 축가를 부른 것도 아닌데 청승맞게 통곡했다지요.
아, 우리 아빠가 눈물을 많이 흘리셔서... 참던 눈물을 토해냈군요... ㅠㅠ
암튼...저는 지금도 결혼식장에 가면 그 사람과의 친분은 상관없이
훌쩍거립니다. 세상의 모든 결혼식을 감동적이라서요...

야클 2005-05-15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흠... 피아노를 배워야겠군... -_-;

바람돌이 2005-05-1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식 하루 앞두고 "기분 더럽다" 하하~~ 전 충분히 이해갑니다요.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결혼한다는거 진짜로 얼마나 기분 더러운 일 많은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기분, 완벽한 표현입니다요.
그래도 결혼식에서 신랑이 직접 축가를 부른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신부에게 축가는 별로 아닌것 같군요. 신랑은 당연히 축가를 받아야겠지만....
제 결혼식때는 남편과 제가 각자 부모님께 편지를 쓰서 낭독하기로 했는데 이 망할놈의 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저만 우리 친정 부모님께 편지를 낭독했더랬어요. 근데 읽다보니까 진짜 저 인간(남편) 좋은 일만 시키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내가 그동안에 엄마 마음 고생시킨거 생각나기도 하고 등등등 엉엉 울었더랬어요. 남편 말로는 내 편지 들으면서 울엄마는 물론이고 우리 시어머니도 우시더라나요. 그래도 결혼초에는 내가 왜 결혼했나 하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더랍니다. 그냥 연애나 할 걸 하고...
그런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더군요. 두사람의 애정과 믿음이 있으면 다 이기고 행복해 지실거예요.

코마개 2005-05-16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1000%. 정말 기분 더럽죠. 그리고 생각하죠. 결혼 여러번 하는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고. 바람돌이님은 망각의 힘을 빌리셨군요. 전 아직도 망각이 안되어서 매일 괴로워하며 산답니다. 내가 내 발등 찍었다고 한탄하면서. 그리고 사실 결혼식에서 누가 무슨 감동적 이벤트를 해도 눈에 잘 안들어와요. 오로지 '빨리 끝내고 가서화장지우고 좀 쉬자' 그 생각밖에 안나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결혼 후의 여성의 지위가 낮은 사회일수록 결혼식에서 신부를 화려하게 만든다는거. 인생의 단 하루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그 담에는 종처럼 부리게 된다는거...

글샘 2005-05-1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날 기분이 더럽군요. 저도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이해가 갑니다. 결혼은 끝도없이 열려있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는 점에서 '이게 올바른 판단이었을까?'로 혼란스러워하는 그런 기분 아니었을까요? 저도 그랬지만, 아마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십 삼년을 같이 산 지금, 저는 아내가 <폭탄>이 아니어서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주변엔 종교적인 폭탄, 인격적인 폭탄, 탐욕의 폭탄, 배려를 모르는 폭탄, 악다구니의 폭탄, 폭언의 폭탄, 폭력의 폭탄, 자식 사랑을 모르는 폭탄들이 얼마나 숱하게 많은지요...
저는 요즘 사람들이 결혼하면 이렇게 혼자 속으로 빕니다. '제발 폭탄을 만나지 마시길...'
그리고 행여나 어떤 제자가 주례를 서 달라고 부탁을 한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살면서 절대로 상대에게 폭탄이 되지 말 것, 자기 안의 폭탄을 제거해 나가며 살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2005-05-18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5-05-1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수선님은 친구분도 멋지시네요. ^^ 요즘 결혼식에선 신랑이 직접 축가를 부르는 경우가 많은가봐요. 얼마전 결혼한 제 후배도 그랬다더군요. 수선님의 그분도 지금 열심히 피아노연습하고 계실 거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