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불완전성에 의해 질식당하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들』 1928년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온다. 올해 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키스하는 대회를 열었다던데 무려 50시간 25분 1초 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간동안 키스를 한다면 입술이 부르트고 호흡이 가빠질텐데 흰색 천을 얼굴에 덮어 씌운 채 키스를 실제로 한다는 건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천을 뒤집어쓴 채 입맞춤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서글프게도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도 그들에게 무의미하고,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 전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런 사랑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숨을 가로막는 것 또한 그 사랑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행복하지만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사랑을, 작품 속 연인들은 알고 있을까? 사랑하지만 전부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림 속 연인들처럼 우리는 소통의 불완전성에 의해 질식 상태에 이르렀다. 편지 등 아날로그 방식에서부터 인터넷, SNS 메신저, 휴대전화 등 디지털 방식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 수단은 점점 발달해왔지만, 타자와의 소통은 의외로 더 불가지론에 빠지는 현실을 반영한 아이러니의 ‘천’인지 모른다. 그런 현실의 사랑을 마그리트는 달달해야 할 연인들의 키스를 삐딱하게 봤던 것이다.

 

 

 

 라디오 같은 찰나의 사랑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 시인의 시적 화자 또한 누가 라디오 단추를 누르듯 자신을 눌러줘 소통하길 갈구한다. 누군가에게 ‘전파-의미’가 돼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참된 관계를 맺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연의 3행을 보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 찰나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애초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 피우는 꽃 같이 순수한 것이지만, 이 시대는 사랑도 미국식 햄버거처럼 즉흥적이고 편리한 방향으로 진화되었나 보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 같은 편리한 사랑을 마그리트의 연인들과 겹쳐서 본다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현대인은 기업체, 학교, 국가 등 거대한 조직에서 사원증, 학생증, 주민등록증 등의 문서로 소속감을 느끼라고 공식적 추궁을 받으면서 타자와의 접촉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서로를 길들이면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공리적으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면 길들여진 척하다 쓸모없어지면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처럼 상대를 사물화·수단화한다.

 

 

 

“이제 우리는 사유재산, 이윤, 힘을 지주(支柱)로 삼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취득하는 것, 소유하는 것, 이윤을 남기는 것이 산업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양식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양식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중에서)

 

프롬이 보는 산업화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고 봤다. 상품의 가치는 쓸모가 결정한다. 인간에 대한 판단도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쓸모가 있는가’다. 판단의 계량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결혼정보 회사다.

 

 

 

 

 

 

신랑, 신붓감의 학력과 직업, 연봉과 재산, 신체조건 등 이들의 기준이 대부분 숫자로 이뤄졌다. 결혼이 계량화되고 숫자화 되는 세태 속에 진정한 사랑의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까?  결혼이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정신적 공유가 없는 조건에 따른 육체적 결합이란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다. 숫자를 앞세운 혼인의 병폐는 가끔 신문 가십을 통해 접할 수 있다. 혼수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고 마는 부부를 볼 때 숫자에 얽매인 결혼의 비참한 말로를 보게 된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거나 사람이 숫자에 함몰될 때 소통에 의한 인간미는 사라지게 된다.


  

 

 타자의 윤리학

 

어떤 이는 속도숭배와 물질만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자연과 교감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생활전선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일상인의 처지에서 시적 화자의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친화적 삶은 배부른 사치이거나 사회 부적응에 대한 도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 타자와의 참된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 소통해보아야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플라톤 이래 서양은 타자를 ‘어떤 이상(서양적 가치)’으로 융합하는 자기동일시였다고 일갈했다. ‘나/너, 서양/동양, 남자/여자, 백인/유색인, 기독교/비기독교’ 등등의 이항대립 쌍을 상정하고,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경향이었다는 지적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른, 나에게로 도무지 환원할 수 없는 ‘무한자’다. 그러므로 내 식대로만 타자를 자기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 타자의 단절과 차이로 인해 공리주의는 좌초하고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배가 닻을 올린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타자성)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중에서)

 

  

구약성경은 과부, 고아, 빈자, 이방인을 대표적인 약자로 그린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그들에게 빗댄다. 타자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단지 ‘나와 다르다’는 사실, 바로 이 ‘타자성’으로 인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자를 사회 약자처럼 ‘나’가 먼저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와 연대의식의 강조다. 타자와 잘 만나는 동기는 ‘주고받기(give and take)’ 같은 공리성이 아니라, ‘나와 타자’ 사이에 교환이 불가능한 ‘어떤 도덕’이다. 예컨대 물에 빠질 위험에 놓인 아기를 구하거나 기아 난민, 이주노동자, 종군위안부 할머니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혜택이나 명예 등을 바라지 않고 그냥 윤리적 호소에 의해 타자를 배려해야 진정한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하고,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뿌리(근원)는 두 가지 관계(근원어)로 뻗어난다고 한다.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이다. ‘나-너’는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타자(너)를 만나는 인격의 세계다. 주체와 주체가 서로 평등하게 만난다. ‘나’는 ‘너’로 인해, ‘너’는 ‘나’로 인해 삶이 더 풍성해진다. 참된 만남이다.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쏟은 시간”이라는 여우와 어린 왕자의 깨달음 같은 서로를 길들이는 참된 소통의 대화다. 현대인들 또한 여우를 만나기 전의 어린 왕자와 같지 않을까.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물질적으로는 날로 풍요로워지고 있는 요즘, 과거 참된 소통의 대화가 오고가는 관계를 되돌리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 삶이 정말 살 만한 날들로 이어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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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여기저기서 ‘융합의 시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놓곤 한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학문 분야들이 뭉치면서 내는 시너지 효과가 창의적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 보니, 융합에 어울리는 인재를 키우기 위한 노력들도 다양하다.

 

하지만 통섭형 인재가 인문학과 과학의 지식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는 인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Consilience(통섭)'를 처음으로 제시한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을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른 학문 분과를 넘나들며 인과 설명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물리학과 화학, 화학과 생물학, 그리고 보다 어렵겠지만 생물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통섭형 인재란 인문학, 과학을 넘어서 다양한 학문의 지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상 통섭형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은 아니다 .이과와 문과로 나눠 가르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서로 저쪽은 몰라도 된다고 판단하는 이런 교육 체계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이과-문과’, ‘과학-인문학’으로 만들어 낸 불신과 단절의 골은 너무나 깊어졌다. 이 골짜기를 매꾸지 않는 이상 통섭형, 융합형 인재는 단시간 내에 나오기가 힘들다.

 

 

 

 

 

 

 

 

 

 

 

 

 

 

 

 

 

 

과학자와 인문학자 간의 불신과 몰이해에 대한 이 같은 우려는 이미 반세기 전에 영국에서 제기되었다. 195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유명한 리드 강연에서 C.P. 스노우은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인 문화 간의 단절은 문화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발전에도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고 강조했다. 50여 년 전의 문제 제기는 그러나 21세기 첨단과학기술혁명을 맞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사회의 특징이 분업과 전문화라고는 하지만, 지나친 전문화는 오히려 영역 간의 단절과 고립을 가져올 수 있다. 원래, 학문이란 진리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 뿌리가 하나였다. 과학이라는 용어는 보통은 자연과학을 가리키지만, 보편적 법칙이나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체계적 지식이라는 광의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나 프랑스어의 ‘science’는 모두 어떤 사물을 안다는 라틴어 ‘scire'에서 연유된 말로 넓은 의미의 학(學)이나 학문(學問)을 가리킨다. 그래서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이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에 들면서 학문의 분화현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특히 인문학과 과학간의 간극은 엄청나게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이런 단절의 상황에서 스노우가 두 문화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단수로 사용되는 문화를 복수로 표현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같은 지식인이라고는 하지만, 인문학적 지식인과 과학자간의 문화적 이질감은 극심했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영국에서 반세기전에 제기했던 두 문화의 괴리 문제를 심각하게 겪고 있다. 고등학교에서의 문과와 이과 문화는 이런 극단적인 ‘두 문화’의 전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학문 간의 단절현상이 더욱 심각하고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유사 인접학문들이 모여 있는 사회과학계만 보더라도 정치학자들은 경제를 모르고, 경제학자들은 기본적인 사회학이론조차 모른다. 이웃학문일지라도 학문과 학문 간에 서로 높은 담을 쌓고 지낸다. 교수채용에서 학부·석사·박사의 동일성이 절대적인 요건이 된다는 점만 보더라도 학문적인 폐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절감할 수 있다.

 

전공의 벽과 상관없이 널리 공유해야 할 고귀한 지적 유산이 많다. 그런데 현재의 교육제도나 교과과정에서는 이런 것들을 외면하고 지엽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에 아까운 에너지를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태는 아쉬움, 안타까움과 같은 ‘추상적 문제’가 아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린 시절부터 ‘벽’을 실감하고, 무력과 좌절을 품게 돼 분열에 이어 혼란에 빠지는 등의 실체적 문제를 겪는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두 문화’는 나눔이 아니라 융화에서 오히려 더 각자의 진정한 본원성을 찾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닦는 데에 교육이 앞서야 한다.

 

 

 

이제는 소통과 공유를 통해 분야 간의 벽을 허물고 대화해야 한다. 과학계와 인문학계가 대화하고 과학과 사회가 대화해야 하며 정치와 예술이 함께 하고 문화와 기술이 함께 가야 한다. 문화의 힘은 공유에 있다. 함께 하지 않는 문화는 오히려 사회발전의 걸림돌일 뿐이다. 스노우의 두 문화론이 진정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는 바로 그 점이다.

 

다른 분야와 소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묵할 필요는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른 분야와의 대화를 준비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외국을 여행할 때 여권과 비행기표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행자들은 목적지를 소개한 책자를 보고, 간단한 외국말을 공부하는 등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많이 준비할수록 더욱 유익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외국을 여행하게 되면 다양한 외국 음식을 접하게 된다. 그 중에는 입맛에 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외국의 음식을 나름대로 평가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거부하지는 않는다. 다른 분야와의 만남도 이와 흡사하다. 나의 지식을 고집하고 상대에게 그것을 가르치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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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2-20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의 힘은 공유다 라는 말 참 좋네요. 최근에 <두 문화>를 읽고 알라딘 리뷰와 페이퍼를 보고 있는데 좋은 글들이 많네요ㅎ

cyrus 2016-02-20 09:48   좋아요 1 | URL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보니까 반가우면서도 부끄럽네요.. 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16-02-20 10:25   좋아요 0 | URL
윽.. 저도 부끄러운 글들이 많은데 걱정이네요ㅎㅎ

cyrus 2016-02-20 10:30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글을 많이 남기려면 이런 상황을 각오하셔야 됩니다. ^^
 

 

우리 사회는 면목이 없다 못해 참담하다. 즐거워해야 할 어린이날이 다가오는 것을 잊은 채 어른들의 폭행으로 하루하루 힘들게 보내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다. 다름이 아닌 보육과 교육이 함께 하는 어린이집에서 학대받는 아이들이다. 부모와 보내는 시간보다 선생님과 보내야하는 시간이 더 많았을 아이들에게 하루하루가 얼마나 공포였을까.

몇 년 전에도 전국 곳곳의 어린이집에서 폭행과 폭언 등으로 아동을 학대하는 사례가 잇따라 발생해 사회 문제로 등장한 적이 있었다. 특히 한 어린이집 원장이 오줌을 쌌다고 아이에게 매서운 손찌검을 하고, 점심 후 바로 낮잠을 자지 않으면 독방에 감금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큰 충격을 줬다.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도 없지는 않다. 친자식이든 아니든, 어른이라는 힘과 권위를 이용해 어리고 약한 아이들을 폭행하는 것은 폭력배보다 무섭고 잔인하다. 교사의 직위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아이들의 약점을 잡고 어린이집 운영을 비교육적으로 하는 것도 물리적 폭력 못지않은 학대다.

잔인한 학대의 실상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거의 알려졌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의 절망적인 울음은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 폭력에 의한 피해 어린이들과 그 가족들은 주변의 편견과 무관심 때문에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대표적인 스피치리스(speechless) 그룹으로 자신들의 불편함을 제대로 호소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다. 우리 사회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향상되고 여러 분야의 인권문제가 개선됐는데도 어린이 인권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과거 아동 폭력 문제는 일과성 보도로 그쳤다. 사건이 발생할 때만 언론은 관심을 둘 뿐 오래가지 않았다.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한 언론의 기획 보도가 필요하다. 인면수심의 원장이 아이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한 사실, 아이들의 몸에 남겨진 피멍 자국의 모습은 경찰의 수사발표에 따른 보도물에 불과하다. 경찰의 수사결과물을 일제히 보도하는 정도에 그칠 일만은 아니다. 잊힐 때마다 나오는 어린이집 아동인권유린 문제는 언론이 좀 더 나서줘야 할 취재의 사각지대다.

요즘 언론은 온통 개성 공단 철수 문제, 일본 우익화 문제 등 사회·정치적 사안으로 소란스럽다. 물론 국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뉴스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해 언론이 먼저 따스한 시선,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줘야 할 때다. 언론이 적극적으로 보도 역할을 해준다면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계속 확산할 수 있다. 이제 언론도 폭력에 방치되고 있는 어린이 인권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고민해야 한다. 사회복지를 내세우며 연약한 어린이를 폭행하는 일부 무자격 원장과 그 보육시설 등에 대해서 언론이 감시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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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5-0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 집을 보니 정말 어린이 집에는 어린이들을 못 보내겠더군요ㅡ.ㅡ

cyrus 2013-05-08 21:29   좋아요 0 | URL
어제 신문에 봤는데요. 국가가 어린이집에 지원하는 국고보조금까지 횡령하는 어린이집 교장이 적발되었더군요. 이제부터 폭행 사건이 있는 어린이집을 명단 공개한다던데 확실한 재범 방지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 우리는 실의 속에 빠진 친구가 있으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위로 한 마디를 전한다. “힘내. 시간이 지나면 좋은 일이 오게 될 거야.” 그런데 프랑스 출신의 아르튀르 드레퓌스라는 사람은 별나다. 스무 살 친구가 삶이 지루해서 은퇴가 빨리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르튀르가 하는 말. “너 자살은 생각해봤니?”

 

평소 대화에서는 ‘자살’이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는다.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아르튀르는 고민이 가득한 친구에게 위로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생뚱맞게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질문한다. 여기까지만 읽은 채 아르튀르가 친구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자살 방조자로 오해하지 마시길. 살아가면서 행복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한 친구에게 충격요법 방식으로 살벌한(?) 위로를 한 것이다. 이어서 아르튀르는 말한다. 인생의 향후 45년을 ‘은퇴’를 향한 지겨운 과도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당장 오늘 인생을 끝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아르튀르를 상대한 친구의 반응이 흥미롭다. 지루한 삶의 연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으로 조기 은퇴를 원하면서도 자살 행위를 끔찍하게 보는 이 반응. 웃기지 않은가. 은퇴를 원하기 위해서는 지긋지긋한 인생을 현재 나이의 2배를 더 살아야 한다. 논리적인 의미로 따져 본다면 인생 살아가기 귀찮을 때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자살이다. 굳이 은퇴를 기다리기 위해 괴로움 가득한 1년 365일 감당하면서 살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자살 행위를 정당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자살을 권유한 아르튀르의 살벌한(농담에 가까운) 질문을 듣는 순간 조기 은퇴를 원하는 친구처럼 삶의 진정한 가치와 진짜 행복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드러나게 된다. 친구의 모습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늙은 노인과 비슷하다. 만사가 귀찮고 힘들다고 해서 ‘죽음의 신’이 얼른 자신의 명(命)을 데려가기를 원했다가 막상 신이 자신의 곁에 다가오자 겁에 질려버리는 이중적인 태도 말이다. 우리가 자신의 무지함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조기 은퇴를 원한다는 궤변의 푸념을 늘어놓지 않게 것이다.

 

아르튀로는 우리의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직업’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가 쓴 <삶이라는 직업>에서 착안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베세는 42살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직업을 갖기를 원하며 한 번 갖게 된 직업으로 기운 팔팔할 때까지 일하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막 성인이 된 20대부터 정년을 앞두는 60세까지 남녀노소 직업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연봉에 따라 자신이 취직하기를 원하는 직업은 천차만별이지만 스스로 무직자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한 가지 직업을 가지게 된다. 직업의 노동을 통해 노동의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 일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번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인생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직업’인 것이다. 하지만 직업 환경 및 조건이 불만스러우면 간혹 파업에 돌입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에 불만투성이에다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좌절감을 표출하는 ‘행복의 파업자들’이 있다. 파업한다는 것은 곧 일을 중지한다는 의미다. 우울감에 빠져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고 모든 일에 손 놓고 싶은 심정과 같다. 장기간으로 인생의 ‘파업’이 지속한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진전이 없다.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다.

 

 

 

♣ 아르튀르는 자신의 짓궂은 질문에 실망한 친구를 위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을 썼다. 단순하게 짝이 없는 제목답게 그가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행복의 의미도 단순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한 삶’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불행의 원인은 섣부른 해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물이 반쯤 담겨 있는 컵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아실 것이다. 그걸 보고 한쪽은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군.’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했다. 친숙한 이야기를 좀 더 심화, 확장해서 생각해보자. 오아시스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걷고 있다.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은 반 정도 물이 담긴 물통이 있다. 물통 속에 든 물을 보고 두 사람은 방금과 같은 대조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막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한 사람이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높다. 부정적인 사고는 사기를 저하한다. 긍정적 사고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정도로 올바른 마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부정적인 사고만 가득한 회의주의자는 모든 것을 부정적, 회의적으로 해석한다. ‘내가 못생겨서’, ‘내가 별 볼 일 없어서’, ‘내가 최악의 운세를 타고 나서’ 등이라는 이유로 불행한 삶을 정당화한다. 어떤 현상의 반대편 입장을 생각하지 않은 채 회의적인 사고의 틀에 갇힌다면 고독만 남을 뿐이다. 폐쇄와 단절이 빚은 고독이 자살을 선택하게 한다.

 

 

 

현실 도피적으로 과거의 행복에 아쉬워하고 집착하는 것 또한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현재 자기가 소유하고 느끼고 있는 행복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느껴야 한다. 사소한 행동, 물건 그리고 익숙하게만 느껴진 장소 등이 또 다른 느낌의 행복을 선사해줄 수 있다. 아르튀르는 공항을 좋아한단다. 왜냐하면, 식기세척기 내부보다 깨끗해서. 행복의 원인이라고 느꼈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새롭게 보이면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실행해보는 것도 좋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좋은 것은 신중하게 아껴 쓴다거나 후일을 위해 참는 습성이 있다. 여러 가지 반찬 중에 맛있는 소시지가 있다면 소시지를 맨 나중에 먹는다거나 물건을 구입하려는데 단위가 큰 지폐를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와타나베의 여자친구 미도리가 하는 대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비스킷통이다.’ 비스킷통 안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비스킷과 그렇지 않은 비스킷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좋아하는 비스킷을 먹게 되면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된다. 그래서 괴로운 일이 생기면 먼저 겪어 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르튀르였다면 일본 처녀의 인생철학을 반대할 것이다. 아마도 비스킷 상자 안에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었을 것이다. 아르튀르는 마카롱의 교훈을 들려주면서 행복할 기회를 손쉽게 놓쳐버리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유명한 파티시에로부터 받은 맛있는 마카롱을 특별한 기회에 먹으려고 바로 먹지 않고 따로 보관했다. 일주일 후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마카롱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봉지는 개봉한 순간 마카롱이 곰팡이가 필 정도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르튀르는 단 한 개의 마카롱을 맛을 보지 못했다.

 

비스킷이나 마카롱이나 어차피 입에 들어가는 것들이다. 마카롱을 받자마자 개봉해서 몇 개라도 먹었더라면 먹지 못해서 느낀 아쉬운 감정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맛있는 비스킷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단위가 큰 지폐를 지불하고 싶지 않아서 비스킷 먹는 것을 포기한다면 나중에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는가. 소소한 일상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누리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괴로운 일을 먼저 선택하고 참는다면 괴로움이 우리 삶에 전달하는 고통이 더 가중될 수 있다.

 

 

 

이 책은 아르튀르가 자신의 친구를 위해 쓴 것이다. 제목에 혹해서 이 책을 손에 집었다면 읽지 않기를 권한다. 특히 지금 당신의 삶이 행복하다면 읽지 않는 것이 좋다. 행복한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겉멋 든 ‘개똥철학’으로 보일 수 있다. 아르튀르도 행복한 사람이 자신의 책을 읽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심오한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친구가 이 책을 읽기를 바랄 뿐이다. 아르튀르의 책은 자신 주변을 둘러싼 사소한 일상을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단상의 연속체다. 거대한 삶 속에서 지극히 사소한 삶의 과정까지 되돌아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증명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마음속 상태를 있는 그대로 나열한 그의 글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결론은 단 하나다. “삶이 의미 없다 해도, 행복이 삶의 방향이다.”(46쪽)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복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것을 목표의 지향점으로 삼아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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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진중권 / 휴머니스트

 

 

철학의 한 분야인 미학이 대중 사이에 유행어가 된 것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덕이다. 이 책에 이어 미학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게 2008년에 펴낸 <서양 미술사> 시리즈다. 1권 고전예술편을 시작으로 2011년에는 모더니즘 편 그리고 이번에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편을 출간해서 미술사 시리즈가 완간되었다.

 

이번 책에서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 세계와 비평의 역사를 넘나든다. 전후 예술계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비평가들의 평론을 중심으로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플럭서스, 팝아트 등 후기 모던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을 탐구한다. 변기, 깡통 수프 등이 현대 미술사에서는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었는지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의 바탕에 깔린 사유와 논리를 명료하게 보여줌으로써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철학 개념들을 풀이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신간평가도서로 이 책이 꼭 선정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학기 회화과 수업으로 ‘현대미술론’을 수강하고 있는데 강의에서 배우고 있는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당연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이다. 그리고 이번 기수 신간평가단 추천도서로 예술 분야 도서가 단 한 권도 선정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인문, 사회과학, 과학, 역사 분야 도서 한 권씩 선정되었는데 마지막에 예술 분야가 선정됨으로써 12기 신간평가단 추천도서의 ‘화룡정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정하웅 외 / 사이언스북스

 

 

‘구글 신(神)’이란 말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구글을 이용하면서 생기는 구글의 영향력을 표현한다. 구글을 통해 독감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심지어 구글 검색 분석을 통해 향후 주식 시장의 움직임을 예측해 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구글이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데이터(빅데이터)를 이용한 ‘데이터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KAIST 교수들의 강의를 담은 시리즈 첫 권이다. 책의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자 컴퓨터까지 미래 정보학을 소개하고 있다. 과학의 담장을 넘어 경제와 사회, 정치 영역에까지 파급을 미치고 있는 최신 이슈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리퀴드 러브>  지그문트 바우만 / 새물결

 

 

리퀴드(Liquid)는 우리말로 ‘액체’, ‘유동하는’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을 가지고 현대인의 불안정한 삶의 양식을 설명하는 연작으로 널리 알려진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다. 근대성을 리퀴드라 정의하는 저자답게 이번 신작에 논의하는 주된 대상은 ‘유대 없는 인간’이다. ‘유대 없는 인간’은 관계가 사라진 유동하는 현대에 살고 있다. 관계보다는 네트워크에 그치려는, 그럼에도 네크워크보다 관계를 갈망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이중성을 그려내고 있다. 작년에 출간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동녘, 2012)의 연장선상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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