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여기저기서 ‘융합의 시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놓곤 한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학문 분야들이 뭉치면서 내는 시너지 효과가 창의적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 보니, 융합에 어울리는 인재를 키우기 위한 노력들도 다양하다.

 

하지만 통섭형 인재가 인문학과 과학의 지식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는 인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Consilience(통섭)'를 처음으로 제시한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을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른 학문 분과를 넘나들며 인과 설명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물리학과 화학, 화학과 생물학, 그리고 보다 어렵겠지만 생물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통섭형 인재란 인문학, 과학을 넘어서 다양한 학문의 지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상 통섭형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은 아니다 .이과와 문과로 나눠 가르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서로 저쪽은 몰라도 된다고 판단하는 이런 교육 체계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이과-문과’, ‘과학-인문학’으로 만들어 낸 불신과 단절의 골은 너무나 깊어졌다. 이 골짜기를 매꾸지 않는 이상 통섭형, 융합형 인재는 단시간 내에 나오기가 힘들다.

 

 

 

 

 

 

 

 

 

 

 

 

 

 

 

 

 

 

과학자와 인문학자 간의 불신과 몰이해에 대한 이 같은 우려는 이미 반세기 전에 영국에서 제기되었다. 195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유명한 리드 강연에서 C.P. 스노우은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인 문화 간의 단절은 문화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발전에도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고 강조했다. 50여 년 전의 문제 제기는 그러나 21세기 첨단과학기술혁명을 맞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사회의 특징이 분업과 전문화라고는 하지만, 지나친 전문화는 오히려 영역 간의 단절과 고립을 가져올 수 있다. 원래, 학문이란 진리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 뿌리가 하나였다. 과학이라는 용어는 보통은 자연과학을 가리키지만, 보편적 법칙이나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체계적 지식이라는 광의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나 프랑스어의 ‘science’는 모두 어떤 사물을 안다는 라틴어 ‘scire'에서 연유된 말로 넓은 의미의 학(學)이나 학문(學問)을 가리킨다. 그래서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이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에 들면서 학문의 분화현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특히 인문학과 과학간의 간극은 엄청나게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이런 단절의 상황에서 스노우가 두 문화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단수로 사용되는 문화를 복수로 표현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같은 지식인이라고는 하지만, 인문학적 지식인과 과학자간의 문화적 이질감은 극심했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영국에서 반세기전에 제기했던 두 문화의 괴리 문제를 심각하게 겪고 있다. 고등학교에서의 문과와 이과 문화는 이런 극단적인 ‘두 문화’의 전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학문 간의 단절현상이 더욱 심각하고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유사 인접학문들이 모여 있는 사회과학계만 보더라도 정치학자들은 경제를 모르고, 경제학자들은 기본적인 사회학이론조차 모른다. 이웃학문일지라도 학문과 학문 간에 서로 높은 담을 쌓고 지낸다. 교수채용에서 학부·석사·박사의 동일성이 절대적인 요건이 된다는 점만 보더라도 학문적인 폐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절감할 수 있다.

 

전공의 벽과 상관없이 널리 공유해야 할 고귀한 지적 유산이 많다. 그런데 현재의 교육제도나 교과과정에서는 이런 것들을 외면하고 지엽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에 아까운 에너지를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태는 아쉬움, 안타까움과 같은 ‘추상적 문제’가 아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린 시절부터 ‘벽’을 실감하고, 무력과 좌절을 품게 돼 분열에 이어 혼란에 빠지는 등의 실체적 문제를 겪는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두 문화’는 나눔이 아니라 융화에서 오히려 더 각자의 진정한 본원성을 찾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닦는 데에 교육이 앞서야 한다.

 

 

 

이제는 소통과 공유를 통해 분야 간의 벽을 허물고 대화해야 한다. 과학계와 인문학계가 대화하고 과학과 사회가 대화해야 하며 정치와 예술이 함께 하고 문화와 기술이 함께 가야 한다. 문화의 힘은 공유에 있다. 함께 하지 않는 문화는 오히려 사회발전의 걸림돌일 뿐이다. 스노우의 두 문화론이 진정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는 바로 그 점이다.

 

다른 분야와 소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묵할 필요는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른 분야와의 대화를 준비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외국을 여행할 때 여권과 비행기표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행자들은 목적지를 소개한 책자를 보고, 간단한 외국말을 공부하는 등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많이 준비할수록 더욱 유익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외국을 여행하게 되면 다양한 외국 음식을 접하게 된다. 그 중에는 입맛에 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외국의 음식을 나름대로 평가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거부하지는 않는다. 다른 분야와의 만남도 이와 흡사하다. 나의 지식을 고집하고 상대에게 그것을 가르치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라디오 2016-02-20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의 힘은 공유다 라는 말 참 좋네요. 최근에 <두 문화>를 읽고 알라딘 리뷰와 페이퍼를 보고 있는데 좋은 글들이 많네요ㅎ

cyrus 2016-02-20 09:48   좋아요 1 | URL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보니까 반가우면서도 부끄럽네요.. 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16-02-20 10:25   좋아요 0 | URL
윽.. 저도 부끄러운 글들이 많은데 걱정이네요ㅎㅎ

cyrus 2016-02-20 10:30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글을 많이 남기려면 이런 상황을 각오하셔야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