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불완전성에 의해 질식당하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들』 1928년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온다. 올해 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키스하는 대회를 열었다던데 무려 50시간 25분 1초 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간동안 키스를 한다면 입술이 부르트고 호흡이 가빠질텐데 흰색 천을 얼굴에 덮어 씌운 채 키스를 실제로 한다는 건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천을 뒤집어쓴 채 입맞춤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서글프게도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도 그들에게 무의미하고,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 전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런 사랑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숨을 가로막는 것 또한 그 사랑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행복하지만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사랑을, 작품 속 연인들은 알고 있을까? 사랑하지만 전부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림 속 연인들처럼 우리는 소통의 불완전성에 의해 질식 상태에 이르렀다. 편지 등 아날로그 방식에서부터 인터넷, SNS 메신저, 휴대전화 등 디지털 방식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 수단은 점점 발달해왔지만, 타자와의 소통은 의외로 더 불가지론에 빠지는 현실을 반영한 아이러니의 ‘천’인지 모른다. 그런 현실의 사랑을 마그리트는 달달해야 할 연인들의 키스를 삐딱하게 봤던 것이다.

 

 

 

 라디오 같은 찰나의 사랑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 시인의 시적 화자 또한 누가 라디오 단추를 누르듯 자신을 눌러줘 소통하길 갈구한다. 누군가에게 ‘전파-의미’가 돼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참된 관계를 맺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연의 3행을 보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 찰나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애초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 피우는 꽃 같이 순수한 것이지만, 이 시대는 사랑도 미국식 햄버거처럼 즉흥적이고 편리한 방향으로 진화되었나 보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 같은 편리한 사랑을 마그리트의 연인들과 겹쳐서 본다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현대인은 기업체, 학교, 국가 등 거대한 조직에서 사원증, 학생증, 주민등록증 등의 문서로 소속감을 느끼라고 공식적 추궁을 받으면서 타자와의 접촉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서로를 길들이면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공리적으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면 길들여진 척하다 쓸모없어지면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처럼 상대를 사물화·수단화한다.

 

 

 

“이제 우리는 사유재산, 이윤, 힘을 지주(支柱)로 삼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취득하는 것, 소유하는 것, 이윤을 남기는 것이 산업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양식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양식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중에서)

 

프롬이 보는 산업화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고 봤다. 상품의 가치는 쓸모가 결정한다. 인간에 대한 판단도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쓸모가 있는가’다. 판단의 계량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결혼정보 회사다.

 

 

 

 

 

 

신랑, 신붓감의 학력과 직업, 연봉과 재산, 신체조건 등 이들의 기준이 대부분 숫자로 이뤄졌다. 결혼이 계량화되고 숫자화 되는 세태 속에 진정한 사랑의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까?  결혼이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정신적 공유가 없는 조건에 따른 육체적 결합이란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다. 숫자를 앞세운 혼인의 병폐는 가끔 신문 가십을 통해 접할 수 있다. 혼수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고 마는 부부를 볼 때 숫자에 얽매인 결혼의 비참한 말로를 보게 된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거나 사람이 숫자에 함몰될 때 소통에 의한 인간미는 사라지게 된다.


  

 

 타자의 윤리학

 

어떤 이는 속도숭배와 물질만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자연과 교감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생활전선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일상인의 처지에서 시적 화자의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친화적 삶은 배부른 사치이거나 사회 부적응에 대한 도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 타자와의 참된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 소통해보아야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플라톤 이래 서양은 타자를 ‘어떤 이상(서양적 가치)’으로 융합하는 자기동일시였다고 일갈했다. ‘나/너, 서양/동양, 남자/여자, 백인/유색인, 기독교/비기독교’ 등등의 이항대립 쌍을 상정하고,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경향이었다는 지적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른, 나에게로 도무지 환원할 수 없는 ‘무한자’다. 그러므로 내 식대로만 타자를 자기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 타자의 단절과 차이로 인해 공리주의는 좌초하고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배가 닻을 올린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타자성)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중에서)

 

  

구약성경은 과부, 고아, 빈자, 이방인을 대표적인 약자로 그린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그들에게 빗댄다. 타자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단지 ‘나와 다르다’는 사실, 바로 이 ‘타자성’으로 인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자를 사회 약자처럼 ‘나’가 먼저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와 연대의식의 강조다. 타자와 잘 만나는 동기는 ‘주고받기(give and take)’ 같은 공리성이 아니라, ‘나와 타자’ 사이에 교환이 불가능한 ‘어떤 도덕’이다. 예컨대 물에 빠질 위험에 놓인 아기를 구하거나 기아 난민, 이주노동자, 종군위안부 할머니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혜택이나 명예 등을 바라지 않고 그냥 윤리적 호소에 의해 타자를 배려해야 진정한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하고,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뿌리(근원)는 두 가지 관계(근원어)로 뻗어난다고 한다.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이다. ‘나-너’는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타자(너)를 만나는 인격의 세계다. 주체와 주체가 서로 평등하게 만난다. ‘나’는 ‘너’로 인해, ‘너’는 ‘나’로 인해 삶이 더 풍성해진다. 참된 만남이다.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쏟은 시간”이라는 여우와 어린 왕자의 깨달음 같은 서로를 길들이는 참된 소통의 대화다. 현대인들 또한 여우를 만나기 전의 어린 왕자와 같지 않을까.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물질적으로는 날로 풍요로워지고 있는 요즘, 과거 참된 소통의 대화가 오고가는 관계를 되돌리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 삶이 정말 살 만한 날들로 이어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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