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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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섹시, 멸치, 오빠, 앙!

 

 

 

 

tvN SNL 코리아 시즌 4 13회 '진중건의 토론배틀' & '위캔업뎃'

 (SNL 크루 출연: 진중권)

 

 

진중권은 8년 전에 쓴 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머리말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의 미래가 공산주의가 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틀렸지만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다. 그 자신에게는 이 말이 맞았고 예언이 그대로 적중되었다. 저술행위를 생계로 삼는 진중권에게 글쓰기는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즐거운 유희니까. 최근 방송을 통해 연기 노동의 유희를 몸소 보여줬다. 남을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전공을 마음껏 펼쳤던 백분 토론은 아니다. 19세 미만 관람 불가 등급이 붙을 정도로 성인 코미디를 지향하는 라이브 쇼 ‘SNL(Saturday Night Live) 코리아’에 크루(crew, 게스트)로 출연하여 숨겨두었던 연기 실력(?)을 펼쳤다.

 

 

 

 

 

 

진중권처럼 행사하는 '가짜 진중권' 진중건(김원해 역)은 “뽀로로와 크롱은 친구”라는 7살짜리 어린이(김슬기 분)의 말에 “악어와 펭귄은 먹이사슬에서 상하관계다. 어떻게 둘이 친구가 될 수 있느냐”며 논리적으로 따져 물었다. 그러자 여기서 진짜 진중권이 등장한다. 그는 ‘짝퉁’ 진중권에게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내 흉내를 내고 다니냐”며 정색했다. 이어 그는 “지금 아이를 데리고 뭐하는 것이냐 이건 아이에게 지적 폭력이다. 아이에게는 눈높이를 맞춰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짝퉁을 나무라면서 쫓아냈다. 그러나 진중권도 “뽀로로와 크롱은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칸트와 데카르트를 인용해 7살 어린이를 울리고 만다. 또 다른 코너에서는 한 때 자신과 SNS에서 설전을 벌였던 낸시 랭 특유의 인사말(섹시, 큐티, 키티, 앙!)을 패러디해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섹시, 멸치, 오빠, 앙!’

 

생방송이 나간 이후 진중권은 무대 오르기 전부터 화장실을 열 번 갔다 올 정도로 많이 긴장했다고 밝혔다. 이 날 같이 크루로 출연했던 홍석천은 자신의 트위터에 진중권의 연기가 좋다고 칭찬했으며 '장난기 많은 소년' 같다면서 진중권과 같이 찍은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 어린이의 마음으로 상상력 발휘하기

 

오래 전부터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끊임없이 우리 사회는 강조했다. 현대 혹은 미래 사회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발상의 전환, 새로운 아이디어 등이 모두 상상력과 연관된다. 영화, 소설, 인터넷 등을 판타지가 점령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상상력에서 비롯된 ‘생산품’들이 사회 곳곳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상상력은 우리가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는 것처럼 어떤 과정을 통해, 혹은 누구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은 “그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제시한 쉬운 방법은 ‘어린아이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잠시 어린 아이였을 때로 돌아가 보자. 어린 아이였을 때 우리는 어땠는가. 아무런 구애 없이 온갖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보는 것마다 호기심이 생겼고 호기심에서 파생된 상상력이 두뇌의 날개가 되어 전혀 구속받지 않고 훨훨 날았다. 상상력 없이는 놀이도 불가능했다. 나 자신은 지구인도 되었다가 외계인도 되면서 목소리를 바꿔가며 혼자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야말로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해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틀에 박힌 교육을 받고 사유마저 일정한 방식에 길든 성인이 된 지금은 어린 시절의 활발했던 상상력을 단지 유치한 유희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성인 입장에서 어린 시절로의 회귀는 ‘퇴행’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생각들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어린이 되기’는 퇴행이 아니라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상상력으로의 복귀나 마찬가지이다.

 

상상력의 모습을 심각한 모습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놀이와 작품에서 하나하나 찾아가면 된다. 특히 아이들의 유쾌하고 천진난만함이 녹아 있는 놀이들에서 특히 그와 같은 상상력의 뿌리를 더듬어 간다. 가령 주사위 놀이에서 혼돈과 우연의 상상력을, 숨바꼭질 놀이에서 불연속인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을 창조해 낸다. 진중권은 '코디미 연기'라는 색다른 놀이에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창조했다.

 

 

 

 '자기풍자'의 조커로 분한 논객

 

진중권은 변희재와의 '사망유희' 이후로 SNS 활동을 제외한 공개적 활동이 뜸할 정도로 그동안 '아웃사이더'로 지내왔다. 그러다가 마침 오랜만에 출연한 방송이 토론 프로그램이 아닌 코미디 버라이어티 쇼를 선택했다. 'SNL 코리아'가 자신을 개그 소재로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프로그램 출연자와 방송 관계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선포한 변희재는 진중권의 출연이 자신 덕분이라고 트위터에 밝혔다. 그러자 진중권은 트위터로 변희재의 주장을 반박했다. SNL 출연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오가던 얘기였으며 이번 SNL 출연이 유쾌했다고 소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유희를 즐길 줄 아는 경험자답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풍자는 마지막은 자기풍자죠. 그것이 풍자의 완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비웃는 여유…. 아무튼 오늘 기분 좋게 망가져 봤습니다"

 

오늘날 조커(joker)라고 하면 고담 시를 혼란에 빠뜨리는 영화 <배트맨>의 악당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조커의 유래를 되돌아보면 오늘날의 부정적 이미지와는 전혀 딴 판이다. 중세에 조커는 '광우'(狂愚), 즉 한 마디로 말하면 미친 바보였다. 지혜로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히려 똑똑한 척 하는 현자보다 한 수 위 볼 줄 알며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진짜 어리석은 자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말한다. '그대의 생각에 약간의 광기를 섞으라. 알맞게 헛소리를 함은 즐겁도다." (58쪽) 

 

 

 

 

 

앙투안 와토  「피에로 질」 1718~1719년

 

 

경외의 대상이었던 광우는 본격적으로 '이성'의 햇빛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하는 합리주의의 근대에 들어서면서 '병원'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때부터 광우는 진짜 '미친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록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전락했지만 그들은 '이성'의 눈부신 햇빛이 지배하는 현실을 떠나지 않았다. 연극 무대에 볼 수 있는 '광대', 즉 피에로가 되어 이성의 현실에 재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술가들로부터 다시 한 번 경외의 대상이 된다.

 

 

 

 

“피에로의 변신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에 피에로는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그 시대에 피에로는 아둔하고 천박하고 상스러운 존재였다. 낭만주의 시대에 상황은 돌변한다. 피에로가 예술적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성의 독재에 맞섰던 낭만주의 이후 예술은 광기와 연결되어 외려 창조성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피에로의 웃음 뒤에 감추어진 저 멜랑콜리. 우울증은 예부터 창조적 천재의 기질이 아니었던가. 고전주의가 무너지고 모더니즘이 탄생하던 시기에 발자크, 보들레르, 조르주 상드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드뷔로의 팬터마임에 열광했다. (중략)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 광대에게서 사회 속에서 사회 밖으로 추방된 현대 예술가의 존재를 보았던 것이다.” (62쪽)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전시회에 출품했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부수고 요셉 보이스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기행(奇行)을 하나의 예술 행위로 선보였다. 이처럼 ‘현대미술’이라고 지칭하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미친 바보’ 광대처럼 활동한다. 그리고 한 번씩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전달하는 예술적 조커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아이들이 광대에게서 느끼는 공감은 예술에서 느끼는 공감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어리석으면서도 문화적 충격을 선사하는 현대예술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어리석음’이 인정받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코미디 버라이어티 쇼에서 발연기를 한 진중권을 보라. 논리정연하고 날카로운 논객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다. 어리석을 정도로 연기를 썩 잘 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가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숙적 논객과 그 밖의 안티 팬들은 연기를 한 진중권을 어리석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자신이 강조했던 놀이 그리고 상상력의 미학적 가치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것도 ‘방송 연기’라는 색다른 노동을 함으로써. 심지어 자신의 논객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유발하게 만들어 자기풍자의 개그로 변용시켰다.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선보여서 관객 앞에서 자신을 망가뜨리는 광대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논객으로서의 자신의 인지도를 단지 ‘개그 소재’로 희화, 변용된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누구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현명하고 똑똑한 척하는 진짜 어리석은 자가 아닐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 전서> 3장 18절,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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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기도하는 손」

 

 

 

옛날 옛날에 가난한 젊은 화가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뒤러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프란츠 나이스타인이었습니다. 두 화가는 너무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면서 궁핍한 삶을 연명하면서 살았어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무척 돈독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한 사람은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이들은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을 돌보아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 나이스타인이 일하게 되었고 뒤러는 그림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뒤러는 유명한 화가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나이스타인은 친구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드디어 뒤러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뒤러는 친구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미술학교에 보내서 그림을 배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오랫동안 육체노동을 했기 때문에 손이 굳어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나인스타인은 화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이죠. 친구를 위해서 일하다가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뒤러는 이 사실을 알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뒤러는 자신의 친구가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도하는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였지만 친구를 위해서 희생한 그 손으로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뒤러는 그 순간을 정성스럽게 스케치를 했습니다. 훗날 ‘기도하는 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감동적인 그림입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잉크로 그린 이 스케치는 얼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손 마디마디마다 절절한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동적인 우정과 신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숨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삶이 가장 아름다운 건 이처럼 인간적 유대로 엮여 있을 때입니다. 이러한 삶의 감동을 경험한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것이 진심일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진심이 없는 곳에서는 감동의 싹이 자라지 않습니다. 고귀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평탄한 곳에 피어나는 꽃이기보다는 역경의 가시밭길을 넘어선 곳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열매이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희생과 감사와 신뢰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시 「가을의 나뭇잎」에서 “사랑하는 것은 전부를 믿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감동이 있는 삶은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할 일생의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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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장자 빌 게이츠는 욕심이 많다. 일전에 미국 대학생들과 대화하는 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한 남학생이 물었다. “만약 당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제일 먼저 어떤 걸 하고 싶으세요?”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책을 빨리 읽고 싶어요.”

어린 시절 책벌레로 통했던 빌 게이츠는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5월 11일에 시행되었던 제1회 한국독서능력검정 대상을 받은 책벌레가 미래의 빌 게이츠가 된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독서능력검정이었다.”  한국독서능력검정에 처음 응시하는 대학생과 취업준비생들은 빌 게이츠의 소원을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한국독서능력검정위원회가 선정한 도서를 다 읽어야지 오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다. 총 100권이다.

주최 측은 이번 독서능력검정을 “대학생들이 독서를 통해 오늘날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력을 함양하고 취업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돕는 목적으로 시행한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처음 시행되는 독서능력검정을 두고 기업 채용 담당자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어떤 책을 읽고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를 알면 구직자의 지적 수준과 창의력은 물론이고 인성까지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나는 이러한 반응에 동의할 수 없다. 독서능력검정에 참가하는 대학생들이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 참으로 의아스럽다.

독서는 좁은 의미에서 보면 활자로 된 책을 읽는 행위지만, 좀 더 넓게 해석해 보면 지식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독서를 통한 성장은 책을 무조건 많이 읽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활자 속에 갇힌 지식이 맞는지 틀렸는지 고르는 과정만으로 한 사람의 지적 성장을 평가할 수 없다.

어릴 적 수영을 배울 때 누구나 기억하는 주의사항이 있다. ‘몸에 물을 묻힌 뒤 들어가라.’ 준비운동이 없으면 자칫 탈이 날 수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스펙을 위해 무턱대고 책 속으로 뛰어들면 머리에 쥐가 난다. 독서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기는커녕 엄청난 부담감만 가질 뿐이다.

 

 

 

 

 

 

 

 

 

 

 

 

 

 

 

 

어린 시절 책벌레 소리 들어 본 대학생들이라면 독서능력검정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해서 진짜 책벌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일본의 책벌레 다치바나 다카시는 왜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느냐는 물음에 ‘나 자신을 알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100권의 책을 억지로 폭식하고 있는 전국의 책벌레들은 책을 제대로 먹을 줄 모른다. 자신이 ‘스펙’의 불빛에 향하다가 청춘의 시간이 타 죽어가는 나방인지 아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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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5-21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마지막 문장 명언이고!
더운데 잘 지내시죠? 사이러스님~ :)

cyrus 2013-05-21 17:03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죠. 여기 말고 다른 온라인에서도 자주 만나잖아요 :)

blanca 2013-05-2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백권이요? 게다가 문제까지. cyrus님 도전하시는 건가요? 건투를 빕니다.

cyrus 2013-05-21 17:05   좋아요 0 | URL
아니요, 책 읽고 나서 내용 물어보면 기억이 잘 안 나는 편이에요. 독서 능력으로 시험을 보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요. 그냥 지금처럼 읽고 싶은 책 있으면 읽는 자유로운 독서가 좋아요. ^^
 
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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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사토리 세대를 아십니까?

 

 

 

 

 

 

3포 세대란 말이 유행한 지 제법 됐다. 대학 졸업해도 취업을 못하니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2030 세대를 일컫는다. 근래엔 4포, 5포 세대까지 생겨났다. 스펙 쌓기와 취업 경쟁에 내몰려 인간관계를 포기했다 해서 4포, 여기에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하니 5포다. 이 쯤 되면 포기는 배추 셀 때 쓰는 말이라면서 쉽게 포기하는 젊은이들에게 핀잔이 섞인 우스갯소리가 나올 법하다. 하지만 요즘 현실을 생각한다면 썰렁 유머에 쓴웃음만 나올 뿐이다.

 

재미있게도 이웃나라 젊은 세대들이 처한 현실이 우리와 비슷하다. 사토리(さとり, 득도) 세대. 깨달음을 얻은 세대라는 뜻으로, 물질적 욕심이 그다지 없다는 게 이들의 특징이다. 수도권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꿈도 일찌감치 접고, 여행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자동차나 명품 옷에도 별 관심이 없고, 술도 안 마신다.

 

사토리 세대는 흔히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간주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불황의 시대적 산물이다. 제대로 직업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름의 적응방식인 것이다. 저성장 혹은 제로성장 시대에 자라면서 고도성장이 뭔지조차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세대가 형성한 집단정체성이기도 하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한국의 3포 세대를 같은 맥락에서 보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경제 환경이 젊은 세대의 정신세계와 가치관을 경향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한국과 일본은 수십년 전과 비교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고 일본은 지난 15년간 매년 3만명이 자살했다. 금융파탄, 고용 불안 등 세계화로 사회 체계가 불안정해지며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이 넘고 연간 수만 명 이상이 자살하는 시대. 이렇게 불안한 사회에서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행복의 합격 기준에 맞추면서 사는 삶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보람이나 살아가는 의미, 그리고 행복감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는 막연하게나마 행복감과 거의 같은 것으로 연결돼 있다. 특히 돈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행복에 대한 가치의 지향점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월수입이 수억 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먹고사는 데 곤란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기를 바란다. 이 정도면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행복의 합격 기준이다.

 

그러나 숭고함이나 위대함이라는 높은 선과 비교하면 평범하고 진부하다. 근대 사회의 가치가 개인의 생명과 안정을 중시하고 일상생활을 소중히 하는 데 있다면,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국민 대다수가 그런 가치를 공통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여전하며 80%의 국민은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절망한다.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는 행복에 합격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행복은 원래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의 차이가 없어지고 주변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워지면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지 불확실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행복이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관적인 기준을 공유하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이름만 붙여진 인생의 정형화된 틀에 맞추면서 삶을 살게 된다.

 

또 하나의 불행은 행복의 합격 기준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저성장이 지속되는 사회에서 부의 수준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인생을 보낸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다. 중산층의 계단에서 탈락된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 인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삶이다. 기본적일 수도 있는 행복에도 매달리지 못하고 탈락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백만 명 이상의 우울증 환자들이다. 들은 인생의 계단에서 스스로 탈락시키고 마는 자살자로 전락한다.

 

 

 

 잃어버린 행복의 의미를 되살리는 방법

 

강 교수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진정한 의미가 상실된 행복이란 단어를 다시 한 번 재생시키려고 시도한다. 그의 어둡고 불행한 삶을 생각해본다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탐색하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역시 개인적으로 큰 아픔을 겪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일본 대지진의 참혹한 현장도 경험했다.

 

불행하게도 젊은 시절, 강 교수가 체험한 뇌의 증상은 아들에게도 되물림되었다. 아들은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다. 자신의 파멸과 세계의 파멸을 함께 바랐다. “왜 태어난 것인가? 왜 살아야만 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혔고, 아버지에게도 수차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가까스로 세계, 그리고 자신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던 아들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얼마 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해 2만명 가까운 생명이 사라졌고, 원전사고까지 이어졌다. 이토록 “납을 삼키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서도 강 교수는 왜 우리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강조하는 것일까?

 

삶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 강 교수는 전작 <고민하는 삶>과 같이 다시 한번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를 경유한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 1905년, 나쓰메는 “일본은 멸망한다”고 말했다.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는 자신감에 들뜬 당시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비관적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년 뒤, 일본은 실제로 한 차례 망했다. 강 교수가 나쓰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정직한 비관론’이다.

 

 

“‘자기를 찾아라’라고 외치며 우리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이 빈틈없는 시스템은 ‘상품이 되는 것’을 찾아내 이용하는 데 뛰어납니다. 특히 ‘불안’의 냄새가 나는 것을 이용하는 데 무척 뛰어납니다.” (p106)

 

 

자의식의 과잉은 고뇌를 낳기 때문에 ‘자기 찾기’가 아니라 ‘자기 잊기’를 통해 인생의 답을 구하라고 조언한다. 소세키는 “자기를 잊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것이 없고 무아지경보다 기쁜 것이 없다”면서 ‘자기 찾기’와 거리를 뒀다. 행복의 파랑새를 쫓으려는 ‘자기 찾기’를 넘어 ‘자기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강 교수는 여기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거듭나기(Twice Born)’를 강조한다. ‘건전한 마음’으로 고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보다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 ‘자기 찾기’에 몰입한 사람들은 그동안 내내 반성 없이 ‘한 번 태어나는 형’으로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삶은 배후에 있는 문제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마음의 병에 시달리게 된다.

 

 

 

 ♣ 행복의 '파랑새'는 없다

 

행복은 애초에 구할 수도 없고 구한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메테를링크의 동화 속에서 주인공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찾으려고 하는 행복의 ‘파랑새’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 교수의 행복론이 애초부터 노력해도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렵다는 허무주의적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행복을 위해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괜찮다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 삶이 특별해야 할 이유가 없다. 지금 이대로 숨 쉬며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다. 자세히 성찰해야 행복하다. 오래 보아야 우리의 삶이 사랑스럽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당신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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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날들
필립 톨레다노 지음, 최세희 옮김 / 저공비행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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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사람들도 / 굳센 사람들도 /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 어린 것들을 위하여 / 난로에 불을 피우고 /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중략)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중에서)

2006년 9월 4일. 사진작가 필립 톨레다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상태였다. ‘네 엄마는 어딨냐’고 끝도 없이 묻는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힘든 시간이었다. 1년여가 지난 후 저자는 아버지의 사진을 찍고 아버지와의 일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웹사이트를 만들어 아버지와의 일상을 사진 에세이 형식으로 올렸다.


과거 영화에 출연할 정도로 멋진 외모의 소유자에다 건장한 체격의 아버지는 엄마를 애타게 찾는 아이가 되었다. 아이가 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파리에 갔다는 식으로 둘러대지만 아버지는 잊을 때만 되면 계속 묻는다. 아들 입장에서는 짜증날 법한데 똑같은 말로 대답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집요하게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묵묵히 답변해주는 아버지처럼.

《집안 곳곳에서 이런 글귀들이 적힌 메모를 볼 수 있다. / 당신의 마음속을 설핏 보여주는 증거이자, 내게 숨기려 하는 불안의 흔적들. / 다들 어디 간 걸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 얼마나 혼돈스러우셨으면...》

하지만 아버지는 치매에 의한 망각 때문에 물어보는 건 아닐 것이다. 아버지도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상실 뒤에 밀려오는 불안과 외로움의 파도는 연역하고 늙은 아버지가 감당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강인한 모습을 남기고 싶어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족 앞에서 표현하지 않으려는 아버지 특유의 고집은 여전하다. 아버지는 눈물도 말라 가슴으로 혼자 속으로 울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위태위태한 아버지가 얼마 남지 않은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의욕과 유머 넘치는 기질 그리고 항상 자신 곁에 있는 아들이다. 한창 젊었을 때 아버지는 오페라를 듣고 그림과 조각에 능한 예술가였다. 늙은 아버지는 여전히 예술을 한다. 스케치를 하지 못하지만 풍경 감상 뒤에 그림을 구상하는 시간은 아버지에게는 안락한 시간이다. 구상하기 전에 아버지는 멋진 노을 풍경을 감상한다. 아버지는 노을 풍경으로 연작을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정정한 시절이었다면 풍경화 그리는 것쯤은 아버지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세월의 노화가 야속하기만 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아버지상이 존재한다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늘 자식들을 마음속에 품고,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계신다. 돈이 많든 적든, 몸이 건강하든 역하든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수고를 기꺼이 견뎌내는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래서 누구나 존경받기에 충분하다. 아내, 아이들 위해 척추처럼 서야 하는 삶, 때론 강인한 나무처럼 때론 들풀처럼 사셨던 서럽고 강하고 두려운 이름이 아버지다.

아버지는 강하다. 다 큰 자식 앞에서도 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아침마다 맨손체조를 하고 속옷 바람으로 윗몸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만의 건강 보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날계란 넣은 오렌지주스를 마신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다. / 저 작은 쿠키들을 아버지 가슴에 올려놓았더니 이러시는 거다. / “내 찌찌 봐라!” / 누군들 웃지 않고 배길까?》

아버지는 젊었을 때보다 더 웃음이 많아졌다. 어쩌면 당신 얼굴에 비쳤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보여주기 싫어서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난기 발동하면서 활짝 웃는 아버지가 좋다. 웃음은 건강의 보약이라던데 아버지에게는 정력제다. 많이 웃으면 웃을수록 생명의 힘이 다시 샘솟는다.

죽음을 가슴에 새긴 여생을 산다는 건 너무나 우울하고 힘들다. 그러나 오히려 카메라 렌즈로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안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깊이 감사한 마음이 느껴진다. 가족과의 일상적인 시간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작가는 사진에 담았다.


아버지란 단어를 들으면 미안함이 생긴다. 어릴 적, 부족함이 없이 자란 것은 아버지의 피와 땀이 있는 노력이고, 그 노력은 자식을 위한 마음이고,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연들이 모여 있었다. 세상을 살다보니 느껴지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모성애는 그리움이 있지만, 아버지의 부성애는 미안함이 있다. 어린 나이에 보이지 못한 아버지의 삶이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된다.

저자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훔칠 때도 있었지만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삶의 소소한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고 그 순간들마다 가슴 깊이 감사했다. 마지막을 생각하니 비로소 그 삶의 소중한 빛나는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삶의 순간과 가치를 재정렬하고 바로 서게 했다. 가장 큰 가르침은 말과 행동을 넘어 삶과 죽음으로 가르친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삶과 죽음으로 전하신 가르침은 작가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나 역시 남은 삶의 가장 큰 지표가 됐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내일 세상을 떠난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아버지를 꼭 안아주었던 그때 그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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