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의 나라 - 갑을관계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배해왔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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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잣집 딸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는 것은 192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풍속화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돈과 섹스, 그리고 파티와 사치에 빠진 상류층, 서슬파란 금주법에도 불구하고 지겹게 반복하는 일상성을 알코올 소비로 상쇄하려는 대중들, 주류밀매로 한몫 챙겨 상류층으로 상승을 도모하는 약삭빠른 부류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표 없이 방황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술과 파티에 절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로스트 제너레이션’ 젊은 미국인들의 모습이다.

 

돈과 사랑, 신의와 배반 사이의 갈등 속에서 자기 파멸로 치닫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관심이 아마도 작가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집필하게 한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미 20대 초반에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피츠제럴드가 28세 되던 해에 집필하기 시작한 개츠비의 이야기는 가난한 청년은 부유한 여자와 결혼할 수 없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개츠비는 군 복무 중 미모의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 그는 유럽 전선으로 떠나고 기다린다던 데이지는 곧 시카고 출신의 부자 톰 뷰캐넌과 결혼한다. 종전 후 귀국한 개츠비는 데이지의 결혼 사실을 알고 그녀를 되찾고자 롱아일랜드에 대저택을 산다. 개츠비는 3년 동안 번 돈으로 큰 저택을 사고 호사 주말파티를 열어 손님들을 모은다. 첫사랑을 만나보려는 일편단심에서다. 이제 개츠비는 재산을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사용한다. 다시 그녀를 차지하고자 한다.

 

자신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단지 첫사랑 때문에 젊은 졸부가 된 개츠비의 모습은 어이없이 찾아온 불행한 최후를 생각해본다면 너무나도 허무하기만 하다. 소설과 영화를 본 사람은 그가 어리석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가난했던 그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부자가 되게 만든 열등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전쟁과 가난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전운의 소용돌이, 언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갈지 모르는 총탄에 두려움은 감당할 수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도 이어지는 가난한 삶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전장에 간 그를 기다릴 줄만 알았던 연인은 부유한 남자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그 열등감과 분노감은 말 못할 정도로 자존심을 짓밟았을 것이다.

 

개츠비와 데이지 두 사람이 8년 만에 만난 장면은 아주 극적이다. 데이지를 자신의 호화스러운 집에 초대한다. 그동안 쌓여왔던 열등감의 서러움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게다가 오랜만에 데이지와 함께하는 단 둘만의 시간. 개츠비의 집을 본 데이지는 그 규모에 놀란다. 의기양양한 개츠비는 영국 주재원이 자신에게 선물한 호화 셔츠를 방안에 던지며 과시한다. 데이지는 그 중 하나를 잡고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는 처음 본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왜 자기를 기다리지 않았느냐는 개츠비의 물음에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말하며 덧붙인다. “부잣집 딸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요.”

 

 

 

 

 ♣ 억울해? 억울하면 출세해라!

 

피츠제럴드의 유명한 대표작이 영화로 리메이크되어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내용 속 당시 시대적 배경의 이면을 살펴보면 개츠비가 처한 현실의 구조는 갑과 을로 관계를 구분 짓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하다.

 

기업들의 지나친 '갑'의 노릇으로 우리 사회는 심한 홍역을 치루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불합리한 차별의 제도가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놓여 있다. 개천에서도 용이 탄생할 수 있는 사다리는 있어야 평등한 사회라 할 수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근검절약으로 을에서 갑으로 진입하려는 힘없는 세력의 노력이 경쟁의 초석이 되고 갑으로 진입하는 길을 열게 하는 경쟁력이 된다. 갑들이 많은 세상은 을들이 살아가는 데는 너무 힘들고 도처에 갑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가 높은 장벽이 되어 을들의 반란을 부르기도 한다. 성공한 갑의 집단은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 을은 언제나 피해자인양 억울해 하다보면 양극화 현상으로 사회문제를 야기해 사회가 혼란스럽게 된다. 우리 사회는 갑의 과부화에 노출되어 있다. 갑을 관계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노예관계’라는 말이 나올 만큼 더 심각하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오늘날 갑을 관계의 뿌리를 조선 시대 관존민비로부터 찾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관은 민을,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지배하는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공직’이라는 성격을 더욱 강화했다. 반공을 앞세운 과대성장국가는 시민사회를 억압하면서 형성됐기에 기존 관존민비를 더욱 강고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존민비에서 출발한 갑을 관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뜯어먹기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결국 갑을 관계는 한국 사회의 삶의 방식과 연결되는 문제다. 갑을관계를 일상적인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출세할 수 있고 배가 아파 병원을 갈 때도 인맥이 있어야 빨리 진찰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이 ‘갑을 관계’다. 갑질이라는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돈을 벌어서 크게 출세를 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면 우선 인맥이라도 갖춰야 한다.

 

 

한 대기업 임원이 항공기 여승무원 폭행 사건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중략) 네티즌들의 댓글 한두 개를 보자. (중략) “돈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듯하군요. (비즈니스 석에 탑승해서) 발 닦아달라는 요구도 한다지요. 돈은 일단 많이 벌고 봐야 할 듯!!” (7쪽)

 

 

 

이런 물질적 불균형이 인격적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게 한국적 갑을관계의 가장 큰 비극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인격적으로 평등한 사회이고 사회적 위치가 다르더라도 개개인 모두 동등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물질적으로 열세인 상대방을 동등한 계약 상대자가 아니라 ‘나보다 부족하거나 못한 사람’으로 보는 전근대적·봉건적 인식이 남아 있다. 약탈과 착취를 위해 도입된,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는 을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현실을 인식하도록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을이 강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억울하지만 출세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은 일단 많이 벌고 봐야 한다"라는 열등 의식이 내포된 사고가 내면화된다. 빈농이었던 개츠비가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애인을 다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부가 되는 과정은 을의 전형적인 심리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갑을 미워하면서도 자신 또한 갑처럼 닮아 가는 것이다.

 

 

 

 ♣ 증오에 호소하는 시위만으로 갑을 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

 

갑에 대한 을의 분노는 시위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촛불 시위가 등장해 평화적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고 있지만 과거에 흔히 보던 폭력적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의 하나로 이는 집단적 형태로 행하여지는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의 일종이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민주정치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이자 소수자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불법시위에 대해 대체적으로 관대한 편이다. 과격한 행동을 하더라도 인내하였고 영업방해를 받더라도 감내하였다. 수십 년간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투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생긴 면역력 때문일 것이다.

 

강 교수는 심정에 호소하는 감성 민주주의의 ‘뗑깡 시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의사 표시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시위 집단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식의 감성적 분쟁해결 습성이 법 절차에 의한 해결에 앞서 작용하기 때문에 건전한 시위문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피해 의식에 대한 분노가 조종하는 폭력적 시위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하고 그 폭력에 짓밟히는 제2, 3의 을이 나올 수 있다. 갑이라는 이름의 가해자가 된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 때 간도에서 생활하는 조선인의 비참한 삶을 그린 최서해의 <홍염>의 결말을 기억하는가. 주인공 문 서방은 소작인으로 살아가지만, 소작료를 제때 내지 못해 그의 외동딸 용례를 중국인 지주인 인가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에 문 서방은 자신의 딸을 빼앗아 사위가 된 중국인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온 그를 도끼로 쳐 살해하고, 딸을 구하게 된다. 조선의 ‘을’로서 억압받는 조선인 빈농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울분의 심정을 장중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빈곤과 계급 차별을 폭로하고 이에 저항하는 인물을 설정하는 신경향파 소설에 한계가 있다. 문 서방이 선택한 문제 해결의 방식인 살인과 방화라는 장치가 한 충동적 개인의 보복 수단에 그쳤다. 주인공의 극단적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고찰함으로써 을이 갑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 방식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파편화된 개인적 체험으로 끝나버린다.

 

강 교수는 갑을관계의 종언을 고하기 위해서는 을의 반란이 ‘증오의 이용’을 넘어 ‘증오의 종언’을 향하는 정신의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원한과 복수심이라는 증오만으로 갑을 관계의 뿌리를 완전하게 뽑을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적과 동지’, 일명 편 가르기 식으로 모든 문제를 갑을 관계로 해석해서 자신의 행위가 폭력적, 불법적인데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일상 속에 깊게 침투한 갑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공감,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성찰이 필요하다. '갑을'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널리 퍼져 굳어진 계급의식이나 상하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갑을관계는 윽박지르면 따르는 사이가 아니라 상생하는 관계여야 한다. ‘슈퍼 갑’으로 통하는 대기업, 공무원과 그 아래로 통하는 중견기업, 하청업체, 대리점 등 대부분의 사례를 찾아보면 갑은 을을, 을은 병을, 병은 정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갑도 을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고 을도 갑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잘못된 주종, 상하 관계를 개선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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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적 체질

 

                                       류근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상처를 잘 받는 체질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아보는 오독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이 상처 받을까봐 배려하는 오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세상은 상처투성이로 비춰진다. 관조자가 오히려 더 다치고 상처 입는 경우도 많다. 시인에게 상처는 악기가 된다. 낭만은 없고 고통만 남은 강물, 바다, 하늘, 바람, 별이 악보가 된다. 겹겹이 누적된 상처로 스스로가 폐허가 되어감에도 그는 사랑을 열망한다. 어떤 달콤한 절망도 쓰러뜨리지 못한다. 너무 아픈 상처는 그에게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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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5-28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시보다(라고 말하면 아무래도 쫌 그럴까? ㅋ) 아니 시만큼이나 니 평 좋다, 멋진 녀석!!!! (근데 서울 안 와? 이번에는 얼굴 좀 보고 가!!!!)

cyrus 2013-05-28 23:41   좋아요 0 | URL
시집 즐겨 읽는 누님! 누님은 류근 시집 읽어보셨겠죠? 제목의 표제시처럼 사랑의 상처 받는 내용의 시가 왜이리 많던지.. 오늘 같은 날 시집 읽으면서 괜히 우울해지더군요 ^^;; 방학 때 서울에 갈꺼 같은데 누님 만나는 스케줄 잡도록 노력할께요. ^^

hnine 2013-05-2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독'이고 '오만'일까요?
상처가 악기가 될 수 있는 시인이라면 그건 행운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 반대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라는 말도 있지만,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겠지요.

cyrus 2013-05-28 23:4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하이네님. 말씀 듣고보니 제가 시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많은 크고 작은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았는가 봐요.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가고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은근히 그게 참 쉽지 않은거 같아요.
 
알라딘 중고매장 대구점 내부소개

 

 

 ♣ 왜 이제야 왔니?

 

 

 

 

 

서울 매장에 많이 가본 탓일까?

처음으로 대구점 입구에 들어서는데도 낯설지가 않다.

오랫동안 멀리서 지내고 있던 친구가 처음으로 우리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달에는 중간고사 시험공부에 매진하느라 블로그에 들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 달 받은 알라딘 신간평가 도서 두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서평도 정해진 기간 안에 쓰지도 못할 정도였다. 시험 끝나고 부랴부랴 번갯불 콩 구워 먹듯이 읽고 서평을 작성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라딘 서재를 기웃거리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 할 정도로 놀라운 소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드디어 대구에도 알라딘 중고매장이 생긴 것이다!

 

 

4월 1일, 거짓말 같이 대구에 알라딘 중고매장이 처음 문 열게 되었다. 4월 초부터 중간고사 시험 공부하기 시작했고 블로그 방문이 뜸하기 시작할 때였다. 하필 그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알라딘 중고매장이 열린 것이다. 시험 끝나고 난 뒤에 접한 소식이라 믿기지 않으면서 얼마나 반갑던지...

 

대구점이 개장하지 않았던 몇 달 전에 알라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부천, 전주에서도 매장이 열리는 소식을 접할 때 한 번 이런 농담 반 진심 반 댓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아... 언제 대구에도 알라딘 중고매장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ㅠ_ㅠ”

 

 

올해 서울에 갈 일이 잦았는데 꼭 알라딘 중고매장을 방문하고 책을 구입했다. 강남점을 제외하고는 서울에 위치한 전 지역 매장은 두 번 이상은 다 가봤다. 한 번 매장이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세 시간 정도는 잡는 편이다. 왜냐하면 책 한 권 구입하는데 꽤 꼼꼼하게 고르기 때문이다. 알라딘 중고서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수중에 있는 돈으로 구입한 뒤에 후회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신중하게 고르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알라딘 중고매장에 책을 구입할 때 책을 구입하는 나만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여윳돈이 다 쓸 때까지 책을 구입한다. 여분의 돈이 남으면 그 가격에 맞는

시집 한 권 구입할 것.

2. 도서관에 읽었던 책들 중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구입한다.

3. 시중에는 구할 수 없는 절판, 품절된 책을 구입한다.

 

 

이러한 기준을 삼아 책을 고르고 구입하고 나면 보통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책을 구입하고 매장을 나오면 알라딘 비닐에 담은 책 한 보따리 정도 손에 들려 있다. 매장 한 번 가면 5권 이상 구입한다. 적게 구입한 때가 5권이고 가장 많이 구입한 권수는 7권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대구로 돌아가는 길은 좀 피곤하다. 한 손에 책 보따리를 들고 있어야하니까. 그래도 매장을 떠난 뒤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돈이 조금 만 더 있었으면 그 책을 살 수 있었을텐데...’, ‘아.. 그 책 절판본일텐데.. 다른 사람이 구입하면 어쩌나..’ 마음 같으면 10권 정도 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아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대구에도 알라딘 매장이 생겼으니까. 그것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집에서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학교 가기 전이나 학교 갔다 오고 집에 가는 길에 종종 들리게 될 것이다. 이러다가 매장에 몇 시간 동안 책 읽고 고르는 ‘매장 죽돌이’가 되는 건 아닐지 벌써부터 앞날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서와.. 알라딘 대구점은 처음이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 한가?)

 

- <논어> ‘학이편’ 중에서 -

 

 

 

 

대구점 매장이 처음인데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서울 매장을 많이 가본 탓일까? 멀리서 살고 있던 친구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친구야, 왜 이제야 왔니?’

 

 

분야별로 배치된 책장을 둘러보면서 책 한 권을 신중히 고르는 손님, 고른 책을 책상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진 손님, 독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손님들의 귀에 속삭이는 음악. 지역만 다를 뿐 매장 풍경은 서울이나 대구나 비슷했다.

 

 

 

 

 

 

 

 

 

대구점이 다른 지역 매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외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와 지하철에서 들어오는 입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건물에 입구가 두 개 있는 셈이다. 그래서 건물 전체 분위기가 산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개의 입구가 있는 서울 매장들이 폐쇄적인 건물 구조 때문에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대구 매장은 두 개의 입구가 있어서 개방적인 건물 구조로 만들어졌다. 지하철로 향하는 입구 쪽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상이 있어서 독서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하철 입구 쪽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매장 건물에까지 들리기 때문이다. 스피커에 울려 나오는 음악 소리로도 지하철의 소음을 덮지 못한다.

 

 

 

 

 

 

"이번에는 어떤 책을 고를까?"

가장 집중력이 가장 최고조로 높아지는 순간이

아마 바로 알라딘 매장에 책을 고르는 시간이지 싶다. 

이런 집중력으로 열심히 공부했다면

시험 치고 난 뒤에 후회감에 땅을 치지 않았을텐데... 

 

 

 

나는 책을 고르기 위해서 읽을 때 꼭 책장 주변에 서서 읽는 편이다. 앉아서 읽기 보다는 서서 읽으면서 책 고르는 걸 선호한다. 오히려 독서에 더 집중이 잘 된다. 그래서 세 시간동안 매장에 있어서 다리가 아픈 걸 느끼지 못한다. 구입할 책이 다 고르고 나서야 다리가 저려오는 것을 느낀다. 역시 집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매장에 있어서 그런지 책을 고르는 데 여유가 생겼다. 아마도 네 시간 정도 책을 골랐을 것이다. 의외로 대구 매장에도 절판본 몇 권이 발견된다. 그것도 서울 매장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책들이 눈에 띄었다.

 

 

 

 ♣ 절판본 득템하기

 

 

 

 

 

 

보통 5권 이상 책을 구입하면 매장 직원은 알라딘 비닐 두 장 정도 혹은 대형 비닐에 담는다. 마침 공돈이 있어서 12권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총 구입 가격은 5만 원 밖에 안 들었다. 책 5권 구입 가격으로 산 것이다. 그런데 대구 매장에 이 정도 책을 구입하는 손님이 내가 처음인가 보다. 대형 철제 바구니에 담은 책을 한 권씩 계산하는 여성 매장 직원(내 나이 또래거나 나보다 어린 대학생일 것이다)이 놀라움이 섞인 미소로 웃었다. 하긴 젊은 대학생이 책 10권 한꺼번에 구입하는 경우는 흔지 않지...

 

 

 

 

 

 

 

 

 

 

 

 

 

 

 

이번에도 절판본 위주로 책을 샀다. 특히 몇 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 목록에 포함된 책 세 권을 구입했는데 모두 다 현재 절판, 품절 상태다.

 

 

 

 

 

 

 

 

 

 

 

 

 

 

 

 

 

 

 

 

 

 

 

체코의 작가라면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 카렐 차페크 정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체코 출신 작가 중에 이반 클리마(1931~   )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1995년에 솔출판사에서 <하룻밤의 연인, 하룻낮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장편소설이 번역된 적이 있었다. 이 책에 소개된 작가의 이력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을 강제 수용소에서 보냈으며 이 때의 불안과 죽음의 체험은 그의 작품의 핵심적 분위기로서 반영된다. (중략) 70년 이후부터 89년까지 '체제 비판적 경향'을 이유로 창작 발표를 금지당했다."

 

 

 

책 뒷표지 소개에 의하면 '카프카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반 클리마의 소설을 접할 수 있는 책은 단 세 권 뿐인데 솔출판사에서 번역한 장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두 권은 체코 출신 작가들의 단편 모음집이므로 클리마의 단편을 만날 수 있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1617년에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집필하고 난 뒤에 사망한다. 그 작품은 <사랑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2000년 바다출판사에 번역 출간되었다. 현재 품절이며 다행히 E-Book 버전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래도 이왕이면 종이책도 다시 출간해주면 좋겠다)

 

 

 

 

존 클레랜드의 <내 사랑 패니 힐>은 <소돔 120일> 프랑스의 사드 후작, <채털리 부인의 사랑> 영국의 D.H. 로렌스 그리고 <북회귀선> 미국의 헨리 밀러와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에로티즘 문학 작품이다. 존 클레랜드는 18세기 영국에 살았던 문필가다. 번역본에 작가의 생애가 상세하게 소개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작가가 빚을 갚지 못해 투옥되었는데 감옥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변태적인 성추문 사건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된 사드는 그 곳에서 <소돔 120일>을 완성했다. 사드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클레렌드의 <내 사랑 패니 힐>도 노골적인 성적 묘사로 인해 금서로 지정되었고 초판이 나온 지 무려 250년에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 소설은 에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알라딘에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이라고 검색하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처음 국내에 소개된 <도깨비불>이 나온다. 그러면 이번에 검색창에 '삐에르 드리외 라 로셸'이라고 검색해보시라. 그러면 표지가 없는 두 권의 절판본이 나올 것이다. 그 책이 인화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두 권짜리로 된 장편소설 <몽롱한 중산층>이다. 초판은 1995년에 출간되었다. <도깨비불>은 1931년에 처음 출간했고 <몽롱한 중산층>은 1937년에 완성되었다. 이 소설은 프랑스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묘사하고 있다.

 

읽을 책이 너무 많다보니 정작 구입한 책을 펼치지 못한 채 책장에 모셔 두고 있다. 이제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느끼기에 왠만하면 구입한 책은 바로바로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을 듯하다. 심심하면 중고매장에 들려서 6권 이상 구입한다면 서점에 꽂히는 책이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방문 횟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만 들려야겠다. 한 달에 두 번 방문하는 것도 많은 것일까?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매장에 찾고 돈 있으면 읽고 싶고 마음에 드는 책이나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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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 불평등한 사회의 '비참한 사람들'

 

지난해 개봉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장기 흥행하며 6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한국사람 열 명 중 한 명이 영화를 본 셈이다. 이 ‘감동의 물결’에 대해 저마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많은 매체들이 대선 패배로 인해 ‘멘붕’에 빠진 야권 후보 지지자들이 그들의 좌절과 분노를 영화를 보며 ‘힐링’한다고 진단했다.

 

레미제라블의 ‘비참한 사람들’은 분명 이전에 혁명도 이룩했고 심지어 왕도 갈아치웠다. 그랬음에도 이들이 다시 실패할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전히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역시 거리의 기억과 정권교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개개인은 먹고살기가 나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태백’ ‘88만원 세대’는 여전한 장기침체와 승자독식 경쟁체제로 인해 30대가 되어서도 취업과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해도 아니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워킹푸어’, 겉보기에는 번듯하지만 빚에 허덕이는 중산층 ‘하우스푸어’가 ‘서민’ 대다수를 지칭하는 용어로 대두되었을 정도다.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한국사회는 학력이나 자산, 소득이나 지위의 극단적인 격차와 함께 행복과 불행의 차가 역력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사회 안에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 깊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말했다. 이렇듯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향한 일종의 패배주의적 분노는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분노에 가까운 아우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 비협동적 자아의 등장

 

불평등이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없다. 사회 대부분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지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협력보다는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 원인 중 하나다. 선점하지 않으면 상대가 가진다. 지고 나면 재기가 어렵다. 이 같은 사회 시스템은 경쟁만 더욱 강화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회에 협력의 미덕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협력을 통해 문제점을 해결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협력에 참여하지 않은 사회 구성원의 등장이 문제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오늘날 사회에 ‘비협동적인 자아’를 가진 유형이 출현했다고 분석한다.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게 많은 복잡한 사회를 감당하지 못해 움츠러든다. 경쟁에서 자발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차이를 느낀다. 여기서 오는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해진다.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그것은 타인의 일일 뿐이다. 이런 상황인데 과연 서로 협력할 수 있을까?

 

‘협력’은 공동체 최고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삶의 현장에서는 자연스럽게 경쟁의 논리가 개입된다. 거기에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문제는 승자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독식하는 현상이다. 패자가 다시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면 패자는 영원히 절망의 공간에서 시간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결국 패자는 패자끼리, 승자는 승자끼리 연대하는 갈등관계가 조성된다. 세넷은 그러한 ‘연대’가 오히려 협력을 방해했다고 단언한다. 일반적으로 ‘연대’와 ‘협력’은 동등한 의미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연대’라는 말은 묘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일상적으로 쉽게 접하는 광고로 ‘연대’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상품을 홍보하는 광고에 유명한 연예인이 모델로 등장한다. 광고 속 연예인은 상품을 사용한다. 이 상품이 좋으니까 구입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지만 광고가 나간 이후 상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광고에서 사용한 방법이 바로 '연대'다. 광고의 진실은 ‘이 상품을 사용해야 유명 연예인의 팬이다’를 넘어서 ‘상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연예인의 팬은 아니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팬클럽이 지니고 있는 연대는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그 스타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다른 스타에 대한 적대감을 동시에 내포한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존재하는 연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공동체가 연대를 한다는 것은 다른 공동체와의 경쟁이라는 전제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오히려 연대는 경쟁의 조건이 되면서 협력은 밀려난다. 더욱이 다른 공동체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 특히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쓴 부족주의가 만연된 사회일수록 자신과 다른 성향의 사회 구성원과 어울리지 않고 갈등을 야기한다. 그리고 승자 독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남을 짓밟아서라도 더 앞서 나가려는 경쟁을 유도한다.

 

 

“협력은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지만 판에 박힌 행위에 붙들려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개발되고 심화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 자신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과 협력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세넷은 인간에게 협력 유전자가 ‘본성’으로 각인돼 있지만 이를 함께 행동하기 위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응답하는 기술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협력을 단순한 윤리적 가치로 간주하기보다 실생활에서 쓰는 실기(實技, craft)로 보는 것이다.

 

 

 

 ♣ '비협동적 자아'가 많은 아마추어 사회

 

그렇다면 우리는 협력을 기술을 어떻게 배워야하는가? 세넷은 물건을 만들거나 수리를 하는 장인들이 몸을 통해 기술을 ‘체화’하듯 사회적 관계의 기술 역시 그 리듬을 몸으로 익힐 수 있다고 말한다. 세넷이 기획중인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Homo faber project) 1부작인 <장인>에 보면 장인은 그 어떤 보상과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자기 일에서 스스로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에게 도구는 작품을 창작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과 이미 한 몸이다. 한 몸이 된 도구는 자신의 정신이요 신체다. 니체는 철학을 하기 위해서 망치를 들었는데 협력의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손에는 무엇을 쥐어야 하는가? 특별히 협력을 위해 도구를 들 필요는 없다. 장인 정신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을 위해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지속적인 헌신을 경험하면 된다.

 

세넷의 생각은 실질적인 협력의 본질을 잃은 채 ‘공감’, '연대‘만 강조했던 우리 사회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기술을 제대로 체득하기 위해서는 장기간동안 반복되어야 한다. 이미 <장인>에서도 밝혔지만 세넷은 장인적 지속성을 강조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정의한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액체 근대’ 사회 속에서 협력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생각은 실행하지 않으면 무용적인 담론으로만 남을 뿐이다. 헌신의 원리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반세기동안 좌우 이념 대립의 갈등 골이 깊어진 우리 사회에 장인적 협력의 토양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을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의구심이 생긴다. 특히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주종 관계로 따지는 갑과 을(甲乙)의 갈등은 지속적인 헌신의 체득을 어렵게 만드는 환경이 될 수 있다. 김홍중 <문학동네> 편집위원은 「함께 읽기: 연대를 넘어 협력으로 - ‘사회학적인 것’의 재구성」에서 세넷의 협력 정신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샹향식 변화 모델이라고 평가한다. 갑을 관계의 갈등이 지속되고 고착화된다면 상향식 변화의 협력은 기대할 수 없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고, 장인은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비협동적 자아’를 가진 아마추어가 너무 많다. 아직 협력의 정신을 지닌 장인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연대’, ‘공감’이라는 본질 없는 공허한 단어만 있는 쓸모없는 연장을 손에 쥔 채 협력 부재의 원인을 그 연장 탓만 하고 있을지 모른다. ‘헌신’의 연장이 우리 손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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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헐리우드 영화

 

대중문화는 말 그대로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로서 주로 TV와 영화, 인터넷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유포되고 생성되는 문화를 가리킨다. 현대생활에서 대중문화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대중들의 삶을 지배한다. 종래 문화의 향수는 지극히 한정된 일부 계급, 계층 사이에서 고급문화라 하였으나, 생활수준의 향상 및 교육보급의 확대에 따른 문화향수 능력의 향상과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문화의 자연스러운 향수범위를 확대하여 대중문화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대중사회는 교육의 보급이나 매스 미디어의 발달에 의해 방대한 인구가 문화의 향수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대중문화의 발원지는 미국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다른 국가들에 대해 우위를 확립한 국가적 지위를 가졌고 그를 통해 확립된 패권주의를 바탕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풍요는 영화나 TV 같은 대중매체를 통한 문화산업에서 극대화 되면서 대중문화를 양산한다. 특히 미국의 영화산업은 전 세계로 확장되면서 세계 대전 종전 무렵에는 미국영화가 세계영화 생산의 85%를 차지했으며 미국 내에서 상영된 영화의 98%가 자국영화였다.

 

헐리우드 스타일로 불리는 미국영화는 일반 대중들까지 부르주아적 개성의 심리수준에 맞추기 위하여 리얼리즘, 심리주의, 낙관주의 등을 강화하면서 구조화된다. 이와 같은 영화적 상상력의 부르주아는 동일시로서의 투사로 특정 지을 수 있으며 이 심적인 과정에 의해 상상과 현실이 결합된다. 스크린의 흡인력은 바로 관객의 정신적 과정을 동원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제도란 영화산업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친숙해진 관객이 역사적으로 내면화해 왔고 영화의 소비에 자신을 적용시키는 ‘정신적 기계’가 되는 것이다.

 

영화가 대중성을 누린다는 것은 영화와 관객 수용자 간의 호환적 관계를 의미한다. 영화는 관객을 자신의 세계 속으로 흡수하는 한편 관객 역시 관람상황 자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에 의해 영화를 자신의 심리세계 내부로 흡수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의미작용을 통해 관객을 주체로 위치하게 만들고 그의 욕망이 끝나는 이미지들의 사슬을 환유적으로 미끄러지게 만들면서 특정한 쾌락을 생산한다. 바로 이러한 과정의 핵심적 구조가 ‘동일시’ 개념이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광고 등의 대중문화의 미세한 부분까지 장악하고 환영적 이미지를 생산한다.

 

 

 

 ♣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대중문화

 

 

 

 

 

 

 

 

 

 

 

 

 

 

 

 

대중문화는 대중을 기반으로 하여 생산되고 소비되는 속성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중매체를 매개로 한 문화산업의 형태로 수렴된다. 따라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의 분석은 대중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화 산업의 구조와 방식에 집중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늘날과 같은 독점자본주의 시장체제에서 우리가 무지하게도 ‘대중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심오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파시즘과도 같은 현대의 독점 자본주의 하에 ‘문화’는 실제로는 전혀 대중적이지 않으며 정교하게 합리화시킨 대중조작 현상으로서 이것이 하나의 체계로 작용하는 방식에 관하여 비판한다. 문화산업과 이로 인해 양산되는 ‘긍정적 확신에 찬 문화’는 자본주의가 광고를 통해서 소비자의 욕구를 인위적으로 자극하고 생산성과 순종적 합의의 윤리를 주입시킨다. 개인이 무언가 다르거나 더 나은 것을 상상하는 능력을 가차 없이 약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상품의 다양성이 독점이라는 현실을 은폐하는 것처럼 외견상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은 표현을 양상하고 전달하는 체계의 획일성을 은폐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입장을 따르면 독점 하에서 모든 대중문화는 동일하며 유행하는 노래나 스타, 드라마들은 주기적으로 순환하고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유형일 뿐이고 오락 자체의 특정한 내용도 이러한 유형으로부터 비롯되며 변화하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문화의 중요한 개별 지점들은 분리하여 상호교환 할 수 있게 되고 심지어는 모든 연관된 실제적 의미로부터 소원화됨으로써 작업 외부에 존재하는 목적에 이바지하게 된다. 이러한 목적의 확장과 관련한 광고에는 자본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독점의 배타적 동력을 강화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 전체를 강화시켜주는 고유의 특별한 정당화 양식을 지닌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체제 하에서 생산되는 대중문화란 ‘검인되지 않은 것은 모두 수상한 것’이 된다.

 

 

 

 구경거리의 사회 속 대중문화

 

광고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광고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게끔 하는 치밀한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광고에 노출된 사람은 자신을 모델과 동일시하며 광고가 꼬드기는 대로 소비에 동원된다. 광고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소비를 촉진시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만 소비자는 사실이 아닌 광고의 환영적 이미지를 소비하며 자신을 이상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대중문화의 한 속성으로서 기 드보르는 자본주의로 인해 ‘직접 체험하던 모든 것이 재현의 형태로 변모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생성된 이미지는 상품의 최종적 형태가 되며’ 그 결과 대중을 상대로 양산된 환영이 질서 유지에 점점 더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구경거리’의 사회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문화산업은 ‘폐물’과 같은 타락한 성격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 희생자들이 잠재의식 속에서 현상 유지 상태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사악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검인되지 않은 것 = 모두 수상한 것’으로 연결되는 일반화된 인식은 대중문화의 속성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매체의 배후에서 소비를 꼬드기는 자본권력의 체계적 작동방식은 소비에의 유혹을 안달이 난 우리 안의 욕망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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