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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 500년 미술사와 미술 시장의 은밀한 뒷이야기
피에르 코르네트 드 생 시르 외 지음, 김주경 옮김 / 시공아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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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 얼마에요?"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1887년

 

 

두 달 전에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하는 반 고흐의 그림 전시회를 둘러보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도슨트가 반 고흐의 초상화 <탕기 영감>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신을 빙 둘러싼 채 그림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들을 향해 이런 질문을 했다. "여러분, 현재 이 그림의 가격이 얼마인지 아세요?" 그러자, 관람객 중 한 사람이 질문에 대한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대답을 했다. "1억이요!" 도슨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1억 조금 넘습니다. 정확한 가격을 아시는 분 없나요?" 전시회는 갑자기 경매장처럼 변했다. 관람객 한 명 한 명씩 아무 가격을 불러댄다. 2억, 3억 심지어 가장 큰 액수인 5억도 나온다. 고흐의 그림 가격을 정확하게 맞춘 관람객은 없었다. 도슨트는 "고흐의 <탕기 영감>은 아직 경매에 나오지 않아서 정확한 가격을 책정할 수는 없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략 10억 정도를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림 좋다. 이 그림 돈 좀 되겠지?"

 

 

그림 전시회에 가면 그림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관람객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이 돈 되는지 보는 유형이다. 가끔 그림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도슨트에게 질문을 한다. "이 그림, 얼마에요?" 엉뚱하거나 잘못된 질의는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 미술 시장이 확대되고, 미술품 경매 회사들이 늘어나면서 일반인들도 전시회 속에서만 보던 미술품을 쉽게 접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미술품은 곧 돈'이라는 공식이 성립해 버렸다. 신문지상에서도 ‘OOO 작가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XX그룹 또는 사업가 XXX가 몇억 원을 지원했다.’라는 기사보다는 ‘45억 원의 박수근 작품이 비자금으로 세탁되어…. 유명 작가 작품을 이중 담보로 수십억 원 불법 대출’ 등의 기사들이 눈에 띈다. 예술이 속물로 전락하고 있다.

 

 

 

 값비싼 그림, 돈만 있으면 만사 OK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장 멋진 그림일수록 그림의 가격은 비싸다고. 여기서 말하는 '가장 멋진 그림'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뛰어난 묘사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품을 말한다. 쉽게 예를 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불가사의한 미소로 수많은 세계의 관람객을 얼어붙게 만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의 가격은 어마어마한 액수라고 한번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술 시장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잘 그렸고,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유명한 화가의 그림만 값비싼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오랜 무관심과 창고의 먼지 속에 파묻힌 무명 화가의 그림 한 점이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경우가 있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지 간에 말이다. 그림 한 점을 런던 소더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값비싼 가격의 옷을 입히는 건 간단하다. 그림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 그림의 예술적 가치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부호들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도 가능하다. 돈으로 돈 되는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찰스 윌슨 필  『프린스턴 전쟁 직후의 조지 워싱턴』 1779년

 

 

미국 화가 찰스 윌슨 필(1741~1827)이 그린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전신 초상화는 미국인 초상화로는 세계 최고가를 기록했다. 2129만 6천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는 무려 241억 원이 넘는 액수다.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 이 초상화가 애초 예상가 1000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 비싼 값에 낙찰되었다. 필은 이와 비슷한 작품을 7점이나 더 그렸으며 이외에도 여러 점의 복사본도 제작되었는데 신생 독립국으로서의 미국과 나라를 이끌어가게 될 신흥 정치가로서의 조지 워싱턴을 유럽에 알리는 데 큰 일조를 했다. 이 그림은 총 8점의 워싱턴 초상화 중에서 유일하게 익명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미국인은 나라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미국 독립의 핵심이자 미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지 워싱턴이 승리의 기쁨에 만취한 채 여유롭게 서 있는 포즈를 보라. 영국을 완파하고 미국 독립의 선포를 상징하고 있는 이 그림을 미국인, 특히 돈 있는 미국의 부호들이 눈독 안 들일 리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의사 가셰의 초상』 1890년

 

 

반 고흐의 그림은 화가 생전에 달랑 한 점만 팔렸을 뿐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가 화가 사후에 가장 값비싼 가격으로 책정된 유형이다. 고흐의 작품성이 후대에 와서야 빛을 보게 되어 가장 비싼 그림으로 된 것도 있지만, 소유와 경매의 과정에서 '돈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고흐의 또 다른 초상화인 <의사 가셰>가 그랬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출신의 평범한 의사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은 백 년 동안 12명의 주인을 만나야 했다. 돈으로 사고파는 과정을 통해서 <의사 가셰의 초상>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자살하기 수주일 전 그렸다. 가셰 박사는 고흐의 정신 치료를 맡았던 신경과 전문의였다. 환자였던 고흐는 의사인 가셰에게 자신과 닮은 병적인 징후를 보았고 가셰의 얼굴을 자화상 그리듯 그려냈다. 그림은 고흐의 누이동생 요한나가 소유하고 있다가 300프랑의 가격으로 그림 수집가에게 판매하면서부터 거래의 여정(?)은 시작된다.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독일, 영국 그리고 다시 독일. 이때 그림은 '퇴폐 그림'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겪게 된다. 히틀러의 수하였던 헤르만 괴링은 박물관으로부터 초상화를 압류, 외국에 판매함으로써 전쟁비용을 충당하고자 했다. 다행히도 그림은 독일 출신 은행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유대인 금융업자에게 또 다시 팔게 되면서 주인의 얼굴이 자주 바뀌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금융업자는 그림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팔게 됨으로써 가셰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술관에 전시된 지 30년이 지난 1990년에 가셰의 얼굴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주인은 일본 제지회사의 회장인 료헤이 사이토. 가격은 8250만 달러(한화 93억 2만 9천백만 원). 15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이토는 뇌물 공여 혐의로 재판을 받고 3년 후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유언으로 자신이 수집한 그림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수집한 그림들' 중에 가셰의 얼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이토의 유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유자가 고인이 된 상태에 지금 가셰의 얼굴은 누가 소유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이 그림의 소유자가 누군지 모른 상태이다. 과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못지않게 고흐의 그림 또한 부호의 지갑을 열게 할 정도로 투기가 심했다.

 

 

 

 

파블로 피카소  『파이프를 든 소년』 1905년

 

 

고흐와 더불어 가장 비싼 그림의 화가는 바로 파블로 피카소(1881~1973)다. 단순히 파이프를 들고 있는 파란 옷의 소년을 그린 이 그림 한 점은 피카소의 작품 활동 초창기 시절인 청색 시대 때 제작되었다. 이 그림 역시 억만장자가 구입해서 소유하고 있다가 2004년에 경매에 내놓았는데 앞에 소개한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화>의 가격을 경신하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동시에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넘은 기록 또한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어마어마한 고가의 액수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세계적인 재벌 화상인 래리 가고시언을 이긴 익명의 구매자가 현재 이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래리 가고시언이라면 지금도 세계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화상이다. 그의 재력을 제치고 이 그림을 구입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루시안 프로이트  『잠자고 있는 사회복지 감독관』 1995년

 

 

 

 

프랜시스 베이컨  『삼면화』 1976년

 

 

소파에 누워 잠을 자는 뚱뚱한 사회 감독관의 누드를 적나라하게 그린 그림,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세 가지 형체가 그려진 그림.이 두 가지 그림을 처음 본 사람 대다수는 그림의 가격과 두 점의 그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면 놀랄 것이다. 2005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 현재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축구 리그인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첼시 FC 구단주인 러시아의 '큰 손' 로만 아브라모비치다.

 

외국 축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첼시 구단주 로만의 명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로만은 유독 축구를 가장 좋아하는 부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첼시 FC가 프리미어 리그 우승은 물론이고 세계 클럽 대항전에서도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1년 안에 감독을 여러 번 교체할 정도로 구단주로서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인내심 없는 그의 칼 같은 감독 해고 러쉬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팬이 있을 정도이다. 로만은 루치아 프로이트의 <잠자고 있는 사회복지 감독관>을 우리나라 돈으로 약 38억 원의 가격으로 구입했고 바로 이튿날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삼면화>를 무려 약 980억 원에 구입했다.

 

사족으로 로만의 현대미술 관심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의 모델 출신 애인 또한 현대미술 컬렉터다. 최근에는 로만이 '러시아 현대미술의 기수' 일리아 키바코프의 회화 39점과 설치미술 19점, 드로잉 100여점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림의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사지 않는 미술 거래  

 

사실 세상에 돈 되는 화가와 그림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아니 지금은 유명하고 비싼 가격으로 그림이 거래되어도 몇 년 지나면 유명세나 작품 값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화가에 대한 꾸준한 지원과 투자는 하지 않고 화가가 유명해 지고 작품 값이 올라가기만 바라는 마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품 한 점 사면서 몇 년간 그 작가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방식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선호하는 화풍의 취향이 하나의 유행처럼 많은 변화가 있듯이 미술 시장 거래의 추세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미술품을 자주 보다 보면 귀가 열리고, 많이 듣다 보면 눈이 트인다. 작품에 대해서 많이 알려고 하면 미술품 혹은 작가의 과거 이력과 미래 전망이 고스란히 나만의 생각, 나만의 그림 보는 법으로 정리된다. 이런 자세야말로 진정한 '미술 애호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요즘 '미술 애호가'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다. 미술 애호가라고 자처하는 모든 컬렉터들이 미술 지식에 무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그림을 남들에게 '보여 주기'식 명품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자신이 큰 돈 들여 구입한 그림을 자신의 자택 한쪽 벽에 걸어둔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림의 가치를 알려주기보다는 자신의 재력을 마음껏 자랑할 것이다. '나, 이 그림 1억 원으로 사들인 거야. 어때? 1억 원 그림 한 점 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잘먹고 잘살고 있어'

 

19세기 말,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했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1867~1939)는 타고난 심미안을 가지고 시대를 앞서 간 화가들의 재능과 가치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안목 덕분에 르누아르, 폴 세잔, 앙리 마티스 그리고 피카소 등의 화가들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유럽미술을 키워냈다는 후대의 평가는 과언이 아니다. 요즘처럼 돈만 중요시하게 여기는 세상에 볼라르와 같은 '미술 애호가'는 다시 나올 수 없을까? 요즘 미술 시장을 보면 씁쓸한 속물근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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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3-1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미술 작품도 재테크의 시장이 되기 때문이겠죠.많은 분들이 그림을 그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것 같더군요.

cyrus 2013-03-16 23:26   좋아요 0 | URL
그림에 어느 정도 지식과 식견이 있는 상태에 미술 작품을 구입하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주식투자차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돈 벌기 위해서 그림을 구입하는 건 좀 씁쓸하네요.
 
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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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 의지'(Free Will)의 차이?

 

작년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 중에 ‘의지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작년에 모 아이돌 여성 그룹 가수의 왕따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한 멤버가 다리 부상 때문에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때로는 의지만으로 무리일 때가 있다.”는 글을 남겼다. 그 당시 스무 살도 안 된 멤버는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쁜 각종 연예 활동 스케줄에 몸과 정신은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트위터에 정신이 육체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적 한계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글로 남겼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트위터는 부상으로 쉬고 있는 멤버를 향해서 어떠한 위로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각자의 트위터에 “의지의 차이^^ 우리 모두 의지를 갖고 파이팅!” 또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의지가 사람을 만들 수도 있는 건데... 에휴 안타깝다” 등의 글을 남겼다. 부상으로 잠시 쉬고 있는 멤버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의지 부족으로 보는 듯한 뉘앙스가 있었다. 네티즌들은 특정 멤버 한 사람을 겨냥한 왕따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한순간에 ‘왕따설’ 논란이 일어나게 되자 트위터에 남긴 문제의 해당 글은 삭제되었다.

 

왕따 가해자로 의혹을 받은 가수는 살인적인 활동 스케줄에 지쳐서 힘든 상태를 트위터에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멤버들의 시선은 다르게 봤다. 나머지 멤버들은 첫 데뷔를 하면서 지금까지 쭉 아파도 참으면서까지 연예 활동에 매진했다. 그렇기에 막내 멤버의 심경은 ‘의지 부족에서 비롯된 태만’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의 모습만 가지고 나머지 멤버들의 태도가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문제의 멤버가 나쁜 마음을 가진다고 상상해보자. 다리 부상을 핑계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의지’를 느낄 수도 있다. 다른 멤버는 특정 멤버의 태도 문제를 근거로 들어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자유 의지(Free Will)의 차이'가 있을까? 자유 의지란, 어떠한 행동이 자기 자신의 의지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기 때문에 비도덕적이거나 비이성적 행동에 관해서 도덕적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원한으로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사람들은 나의 살인 행위를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의식적 의도를 이유로 비난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는 행위 그리고 그 행위 근저에 흐르는 사고 속에는 의식적 원천, 즉 '나는 그 사람을 싫으니까 죽이고 싶다'라는 자유 의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자유 의지가 아니다

 

자유 의지는 인간의 내면에서 비롯된 형태이기 때문에 행위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자유 의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끊임없이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신경 과학자인 샘 해리스는 자유 의지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학자. 그는 자유 의지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두 가지 가정을 반박한다. 자유 의지가 있는 이상 우리는 과거에 이미 했던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그것 대신에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러한 행동을 이끌어 내는 의식적 원천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두 가지 가정만 따져 본다면 자유 의지를 비판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입증해주는 흥미로운 실험 하나를 소개하겠다.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은 피실험자들이 손을 움직이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피실험자들에게 자신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갑자기 손이나 손가락을 움직이고 동시에 언제 그 결정을 내리는지 시계를 보고 측정하도록 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손을 움직이겠다는 의지가 발동한 후에 운동피질이 작동하리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의외의 실혐 결과가 나왔다. 피실험자들의 운동피질이 먼저 활성화된 후에 운동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진다는 것이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이 실험을 통해서 0.3초의 시간 간격을 두고 뇌는 이미 운동을 결정하고, 그 과정이 시작된 후에야 인간은 그것을 깨닫는 과정의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명령하는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주관적인 사실에 의식한 착각일 뿐이다. 1분 뒤에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할 것이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모든 행위는 뇌에서 미리 결정된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우발적인 행위는 자유 의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유 의지'라는 환상의 역설

 

샘 해리스는 자유 의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 의지'라는 환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경험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자유 의지의 힘으로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과정을 '외재적 요인에 구속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의미와 함께 놓고 본다면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샘 해리스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입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의 잣대로 보는 인식의 관점 또한 의문을 제기한다. 자유 의지라는 믿음이 있기에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은 가해자의 의식적 결정에서 비롯된다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샘 해리스는 우리가 타인의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는 이유를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 가치관, 목표, 편견 등이 반영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다면 잘못된 행동에 관해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 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가 급부상함으로써 자유 의지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뇌가 행동을 결정하는 기관이라면 인간은 더 이상 도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범죄 행위를 막거나 처벌하는 법적 규범을 다시 써야 하는 일이 생긴다. 자유 의지의 존립 여부에 대한 문제는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로 적합하나 '도덕적 책임'을 동반한 자유 의지 문제는 한쪽 입장의 손만 들어주기가 어렵다. 우리 스스로 행동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에 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보는 논리는 위험천만한 주장이다. 내가 타인에게 해를 입힌 죄에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과 동등하다. 그래서 도덕적 책임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자유 의지 존재 논쟁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사실은 딱 하나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고 제어할 수 있는 완벽하고도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행위의 의사결정이 반드시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자신의 책『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이렇게 썼다.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과신한다.”  이 말을 빗대어 보자면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자유 의지’가 만들어 낸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 속에서 사고와 행동을 위한 미래의 결정을 예측할 수 있다고 과신하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자유 의지만으로 완벽한 사람을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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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내레이션 속 내용입니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고흐(1853~1890)의 이름은 은 불행한 삶을 살다간 화가의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고흐의 그림은 수억 원대 가격으로 매길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습니다. 고흐는 훗날 자신의 그림이 값비싼 가격으로 거래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있을 때는 단 한 점의 그림만 팔았기 때문이죠. 고흐는 자존심 세고 격정적인 성격 탓에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같은 아틀리에에서 함게 작업했던 폴 고갱과의 다툼 이후 면도칼로 왼쪽 귀를 자르는 자해 소동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가 믿고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의 피붙이 같은 동생 테오였습니다. 친구가 많지 않은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피해 고독의 그늘 구석으로 도피했습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발작은 고흐의 정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가 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최후의 방법은 잔인하면서도 불행했습니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격정으로 뭉친 왼쪽 심장을 향해 권총을 겨눈 것이죠.

 

고흐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우리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고흐의 불행한 삶이 대중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알려졌고 많이 회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흐의 삶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대중의 시선은 다분히 주관적인 해석의 관점이 강합니다. 그래서 고흐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가 많습니다.

고흐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성격이 괴팍하고 암울한 인생을 산 그의 그림은 어두운 분위기의 색채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고흐는 어둡고 칙칙한 색깔만 고집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초창기에 어두운 검정과 갈색 위주로 그림을 그린 적은 있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렬하고도 밝은 색채의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실제로 고흐의 그림을 직접 보게 된다면 그 오해가 틀렸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1890년

 

 

고흐는 밀밭을 배경으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중에서 많이 알려진 것은 자살하기 직전에 그렸다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입니다. 후자의 그림에는 밀밭의 강렬한 노란색이 전경을 차지하고 있지만, 우울함이 감도는 하늘의 파란색과 그 한가운데 날아다니고 있는 까마귀는 불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길이 고흐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까마귀가 날아다니고 있는 길의 끝자락은 고흐 자신이 곧 가게 될 ‘망자(亡者)의 길’로 보기도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 「자고새가 있는 밀밭」1887년

 

반면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그리기 13년 전에 프랑스 파리에서 그려진 <자고새가 있는 밀밭>은 오히려 평안하게 느껴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과 붉은 색의 양귀비 그리고 수확하는 밀밭의 농부에 의해 놀라 달아나는 듯한 자고새의 모습에서 활력 넘치는 생명의 약동이 느껴집니다. 이제 막 날갯짓을 하는 자고새는 이제 막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열정을 가슴 속에 한가득 지닌 채 파리에 정착한 ‘영 더치 페인터’(Young dutch painter) 고흐를 연상시킵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단면만 보게 되면 전체 또한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고흐가 지금까지도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사나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심리에서 비롯된 오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흐가 우리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것은 맞을지 몰라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암울할 정도로 어두운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닙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 고흐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노래한 돈 맥클린의 명곡 ‘Vincent'를 백 번 듣는 것은 반 고흐의 그림을 미술관에서 한 번 보는 것만 못합니다. 살랑살랑 봄의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한 주말에 예술의 전당 ‘반 고흐 전’에 가보길 권합니다.



* <자고새가 있는 밑밭>은 현재 예술의 전당 ‘불멸의 화가 반 고흐 in 파리’(~2013년 3월 24일)에 전시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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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3-12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고새가 있는 밀밭> 그림 참 좋네요. 너무 평화로워 보여요. 반고흐와 테오의 우애를 생각하면 참 감동적이에요. 열 살이 넘게 차이나는 형제가 세상에서 가장 친한 벗으로 죽을 때에도 옆에서 죽음을 지키고 테오가 없었다면 고흐고 없었을 것 같아요. 예술의 전당 전시회에 꼭 가보고 싶은데 거리가 꽤 있어서 엄두가 안 나지만 시도해 봐야겠습니다.cyrus님의 좋은 페이퍼 덕분이네요.

cyrus 2013-03-12 19:18   좋아요 1 | URL
저는 지난 달에 고흐전을 봤는데요, 책에서 봤던 그림을 실제로 보니 기분이 새로웠고 고흐의 진가를 직적 보게 되었습니다. 전시회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전시회에 가볼려고요. 화창한 날 주말 나들이에 반고흐전 강추합니다. ^^

수이 2013-03-13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나 보러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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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플라톤 저 / 천병희 역 / 숲

 

 

며칠 전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가 원전 번역한 <국가>의 출간 소식을 접했을 때 딱 오래 사귄 여자친구를 만나면 느끼는 그 기분이었다. 노학자의 그리스어 고전 원전 번역본이 신간으로 나올 때면 기분이 설레고 읽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들었는데 이번 번역본의 출판은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게다가 너무나도 유명한 고전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여론 소개 분위기는 뜨듯미지근하다. 내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국가> 완역본은 <국가.정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박종현 교수의 번역본(서광사)와 사단법인 올재 클래식스에서 나온 판본이 있다. <국가.정체>는 교수신문 최고의 고전 번역서로 선정될 정도로 플라톤 <국가> 번역본 중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편이며 올재 클래식스의 <국가>는 시리즈가 한정판매라서 지금은 구할 수 없다. (온라인 서점 또는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는 정가인 2900원보다 무려 20배 넘는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천 교수가 1972년에 이미 <국가>를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완역이 아니다. 예전에 <국가. 정체>를 읽어본 적이 있었으나 완독은 하지 못했다. 700페이지나 넘는 분량의 독서를 감당하지 못했다. 참고로 천 교수의 번역본 분량은 600페이지 정도에 가깝다. 신간평가단 도서로 이 책이 선정된다면 정해진 기간 내에 서평 써야한다는 압박감에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받는 순간 독서하기 전의 각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가오는 마감기간에 허둥지둥 서평을 작성하는 나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나는 왜 감동하는가> 조윤범 저 / 문학동네

 

 

주제는 클래식, 예술 분야에 포함되는데 글의 형식은 에세이라서 신간평가 도서로 소개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직까지 예술 분야 도서가 선정되지 않은 상황이라 이왕이면 대중적이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예술 분야 도서가 선정되었으면 좋겠다. 평소에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어렵다’라는 인식의 틀에 갇힌 클래식 음악의 이미지를 완전하게 깨뜨리지 못했다. 그리고 클래식 음악이라는 분야도 워낙에 다양해서 선호하는 취향도 한정적이다.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으로 유명한 그의 이번 신간을 통해서 클래식 음악 속에서 재미를 발견하고 일상 속에서 감동을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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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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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과학자는 되고 싶지 않다?

 

 

 

 

 

 

아들: 아빠, 꿈이 뭐였어?

아빠: 천문학자

아들: 그런데 왜 안 했어?

아빠: 어...? 수학이 안 돼서...

아들: 아...

아빠(내레이션): 수학이 너의 꿈을 방해하지 않도록

 

 

모 어린이 학습지 CF 속 대사이다. 아빠는 아들에게 자신의 꿈인 천문학자가 되지 못한 이유에 관해서 얘기를 해준다. 그러자 아들은 뇌리를 스치는 질문을 한다. “그런데 왜 안 했어?” 꿈을 왜 이루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그 이유가 나온다. 바로 이유는 수학을 못해서. 그리고는 아들은 짧은 탄식과 함께 아버지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수학이 너의 꿈을 방해하지 않도록”

 

굳이 수학 때문에 천문학자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 광고를 보는 부모 자녀들에게는 일리가 있을 수 있겠다. 그래서 수학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계기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단지 수학을 못한다고 해서 천문학자가 될 수 없는가. 질문의 요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학습의 기초가 제대로 되지 못한다면 과학자가 될 수 없느냐는 것이다. 학습의 밑바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과학자를 꿈꾼다는 것은 질퍽한 진흙 위에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수학 지식의 습득 또한 필수조건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학생의 과학, 수학 학구열은 외국의 학생과 비교하면 실로 엄청나다. 잠을 줄일 정도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많은 분량의 학습을 소화한다. 그래서 전 세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 수학 국제올림피아드에서 우리나라 학생의 입상 순위가 꽤 높은 편이다. 현재 국제올림피아드 종목은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정보, 천문 등으로 총 7개다. 매회 각 종목의 올림피아드에서 한국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의 선전에 비하면 이공계열 관련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의 수가 적은 점은 아이러니하다. 작년에 작성된 '공학기술계 우수인력 양성을 위한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공대생들이 갖고 싶은 직업 1위는 의사, 한의사였고, 그다음이 공무원과 금융인이다. 정작 전공을 살려 공학자나 과학자, 기술자가 되겠다는 응답은 3.1%에 불과할 뿐이다. 공대생 10명 가운데 공학과 관련된 직업을 희망하는 학생이 채 1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과학을 하는가

 

우리나라 과학자들을 많이 배출하기 위해서는 학습의 노력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과학을 공부할 수 있게 만드는 ‘문화’가 중요하다. 그러한 문화가 제대로 발달한다면 학생들은 과학적 경험을 통해 ‘과학적 사고’를 배양할 수 있게 된다. 이공계 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진출을 돕기 위한 인센티브 도입 또는 연구 환경 개선 등과 같은 정부의 정책만으로 이공계의 척박한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면서 다방면으로 대중과학을 위해 지금까지도 활발히 활동 중인 로런스 크라우스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과학에 참여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자신들을 과학자처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을 과학자처럼 생각하게 만들면 이 사람들은 다른 상황에서도 문제에 더 잘 대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 연구에 참여하는 것은 과학 연구의 발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p 262)

 

크라우스는 자신의 직업인 과학자를 지원하는 현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과학자는 고도의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한정된 직업이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과학, 수학 기초 지식이 어느 정도 습득했다고 해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자처럼 생각할 수 있는 사고가 선결 조건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그 선결 조건을 이루는 중요한 핵심의 근원은 바로 과학적 경험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경험’이란 강제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참여의 연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 접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을 통해 과학자처럼 생각해보는 과정을 의미한다. 과학 교사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인공 화산을 만들어 실험하거나 눈의 결정체를 사진으로 촬영해서 과제로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교육 활동’ 역시 과학적 경험을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좋은 방식이라고 볼 수 없다. 에디슨, 뉴턴과 같은 호기심이 왕성하면서도 벌써 과학적 사고를 하는 습관이 있는 학생이라면 이러한 교육 활동도 특별한 과학적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 학생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연구 실습과 과제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편이다.

 

크라우스의 대담자로 나선 디자이너 나탈리 제레미젠코는 적극적 참여로서의 과학적 경험이 축소되어가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옳든 틀리든 간에 자신만의 연구와 관찰을 토대로 과학적 사고를 표현하고 형성할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은 정부 및 교육기관은 누가 과학을 하며 또는 어떻게 과학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전문가라는 과학자들을 앞세워 대중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일을 할 뿐이지 대중이 과학에 쉽게 접근, 참여하는 유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자와 대중들 간에 세워져 있는 벽이 견고하게 세워져 있는 이상 누구나 과학자가 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은 에디슨의 어머니를 본받아야 한다

 

산업혁명으로 과학과 기술이 끝없이 발전하고 있을 무렵인 1860년대 당대의 물리학자였던 영국의 캘빈 경은 물리학의 발전은 이미 끝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캘빈 경의 낙관적인 믿음은 섣부른 판단이 되어버렸다. 세기가 넘어간 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뉴턴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밀렸으며 양자역학의 등장은 기존의 상식과 자연을 대하는 시각 자체를 완전히 바꿔버린 시발점이 되었다. 지금도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과학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복잡성, 네트워크가 강조되는 지금까지도 과학에 관한 관심과 추세가 달라지고 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다루고 있는 과학은 캘빈 경의 시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모습이다. 컴퓨터과학, 복잡성 과학 그리고 빅데이터(Big date) 과학 등 학문 분야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과학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과연 과학자를 꿈꾸는 아이들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네트워크 과학 연구에 이바지한 바라바시가 소개한 일화는 과학에 관한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대중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 아들은 이제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여러 차례 물었습니다. “달에 가고 싶지 않니?” 아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뇨, 관심 없어요.” 그러나 페이스북과 인터넷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입니다. 웹에도 관심이 많죠. (p 389)

 

만약에 나로호 발사 장면을 실제로 또는 TV 생중계로 본 아이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나로호와 같은 로켓을 만들어 보고 싶지 않니?” 이 질문에 분명 일부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뇨, 관심 없어요.” 이 아이들은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에 관해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이들이 더 관심을 두는 것은 페이스북과 인터넷이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어린 시절 닭이 알을 품는 과정에 병아리가 부화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궁금한 나머지 자신이 직접 알을 가슴 품에 안아보는 실험을 했다. 에디슨의 실험은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들의 실험을 반대하거나 크게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왕성한 호기심을 마음껏 풀 수 있도록 칭찬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 폭이 점점 좁아지는 상황 속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르네상스의 도래를 예언한다는 것은 수백 년 전 캘빈 경의 오류를 범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인간성의 해방과 창조성의 발견에 길을 열어 준 새로운 사회의 형성이었다. 과학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과학 참여와 과학적 사고를 철저히 무시하는 사회적 풍토를 버려야 한다. 오늘날 과학자는 에디슨의 어머니를 본받아야 한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과학을 가르치기만 한다면 주입식 교육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교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과학을 가르치기만 한다면 주입식 교육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교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지금 과학자들은 자신들 때문에 아이들, 아니 과학자를 희망하는 이공계 학생들의 꿈을 방해하지 않는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 대중의 시선으로 과학이 처한 현실을 파악할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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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2-2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번에는 패스하렵니다. 꾹 참고 절반을 읽었는데 책을 읽는 것이 즐겁지 않네요. 그래도 읽던 것이 아쉬워서라도 조만간에 서평을 써야겟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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