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 우리는 실의 속에 빠진 친구가 있으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위로 한 마디를 전한다. “힘내. 시간이 지나면 좋은 일이 오게 될 거야.” 그런데 프랑스 출신의 아르튀르 드레퓌스라는 사람은 별나다. 스무 살 친구가 삶이 지루해서 은퇴가 빨리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르튀르가 하는 말. “너 자살은 생각해봤니?”

 

평소 대화에서는 ‘자살’이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는다.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아르튀르는 고민이 가득한 친구에게 위로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생뚱맞게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질문한다. 여기까지만 읽은 채 아르튀르가 친구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자살 방조자로 오해하지 마시길. 살아가면서 행복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한 친구에게 충격요법 방식으로 살벌한(?) 위로를 한 것이다. 이어서 아르튀르는 말한다. 인생의 향후 45년을 ‘은퇴’를 향한 지겨운 과도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당장 오늘 인생을 끝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아르튀르를 상대한 친구의 반응이 흥미롭다. 지루한 삶의 연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으로 조기 은퇴를 원하면서도 자살 행위를 끔찍하게 보는 이 반응. 웃기지 않은가. 은퇴를 원하기 위해서는 지긋지긋한 인생을 현재 나이의 2배를 더 살아야 한다. 논리적인 의미로 따져 본다면 인생 살아가기 귀찮을 때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자살이다. 굳이 은퇴를 기다리기 위해 괴로움 가득한 1년 365일 감당하면서 살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자살 행위를 정당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자살을 권유한 아르튀르의 살벌한(농담에 가까운) 질문을 듣는 순간 조기 은퇴를 원하는 친구처럼 삶의 진정한 가치와 진짜 행복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드러나게 된다. 친구의 모습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늙은 노인과 비슷하다. 만사가 귀찮고 힘들다고 해서 ‘죽음의 신’이 얼른 자신의 명(命)을 데려가기를 원했다가 막상 신이 자신의 곁에 다가오자 겁에 질려버리는 이중적인 태도 말이다. 우리가 자신의 무지함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조기 은퇴를 원한다는 궤변의 푸념을 늘어놓지 않게 것이다.

 

아르튀로는 우리의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직업’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가 쓴 <삶이라는 직업>에서 착안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베세는 42살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직업을 갖기를 원하며 한 번 갖게 된 직업으로 기운 팔팔할 때까지 일하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막 성인이 된 20대부터 정년을 앞두는 60세까지 남녀노소 직업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연봉에 따라 자신이 취직하기를 원하는 직업은 천차만별이지만 스스로 무직자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한 가지 직업을 가지게 된다. 직업의 노동을 통해 노동의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 일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번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인생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직업’인 것이다. 하지만 직업 환경 및 조건이 불만스러우면 간혹 파업에 돌입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에 불만투성이에다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좌절감을 표출하는 ‘행복의 파업자들’이 있다. 파업한다는 것은 곧 일을 중지한다는 의미다. 우울감에 빠져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고 모든 일에 손 놓고 싶은 심정과 같다. 장기간으로 인생의 ‘파업’이 지속한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진전이 없다.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다.

 

 

 

♣ 아르튀르는 자신의 짓궂은 질문에 실망한 친구를 위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을 썼다. 단순하게 짝이 없는 제목답게 그가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행복의 의미도 단순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한 삶’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불행의 원인은 섣부른 해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물이 반쯤 담겨 있는 컵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아실 것이다. 그걸 보고 한쪽은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군.’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했다. 친숙한 이야기를 좀 더 심화, 확장해서 생각해보자. 오아시스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걷고 있다.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은 반 정도 물이 담긴 물통이 있다. 물통 속에 든 물을 보고 두 사람은 방금과 같은 대조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막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한 사람이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높다. 부정적인 사고는 사기를 저하한다. 긍정적 사고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정도로 올바른 마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부정적인 사고만 가득한 회의주의자는 모든 것을 부정적, 회의적으로 해석한다. ‘내가 못생겨서’, ‘내가 별 볼 일 없어서’, ‘내가 최악의 운세를 타고 나서’ 등이라는 이유로 불행한 삶을 정당화한다. 어떤 현상의 반대편 입장을 생각하지 않은 채 회의적인 사고의 틀에 갇힌다면 고독만 남을 뿐이다. 폐쇄와 단절이 빚은 고독이 자살을 선택하게 한다.

 

 

 

현실 도피적으로 과거의 행복에 아쉬워하고 집착하는 것 또한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현재 자기가 소유하고 느끼고 있는 행복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느껴야 한다. 사소한 행동, 물건 그리고 익숙하게만 느껴진 장소 등이 또 다른 느낌의 행복을 선사해줄 수 있다. 아르튀르는 공항을 좋아한단다. 왜냐하면, 식기세척기 내부보다 깨끗해서. 행복의 원인이라고 느꼈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새롭게 보이면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실행해보는 것도 좋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좋은 것은 신중하게 아껴 쓴다거나 후일을 위해 참는 습성이 있다. 여러 가지 반찬 중에 맛있는 소시지가 있다면 소시지를 맨 나중에 먹는다거나 물건을 구입하려는데 단위가 큰 지폐를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와타나베의 여자친구 미도리가 하는 대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비스킷통이다.’ 비스킷통 안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비스킷과 그렇지 않은 비스킷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좋아하는 비스킷을 먹게 되면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된다. 그래서 괴로운 일이 생기면 먼저 겪어 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르튀르였다면 일본 처녀의 인생철학을 반대할 것이다. 아마도 비스킷 상자 안에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었을 것이다. 아르튀르는 마카롱의 교훈을 들려주면서 행복할 기회를 손쉽게 놓쳐버리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유명한 파티시에로부터 받은 맛있는 마카롱을 특별한 기회에 먹으려고 바로 먹지 않고 따로 보관했다. 일주일 후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마카롱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봉지는 개봉한 순간 마카롱이 곰팡이가 필 정도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르튀르는 단 한 개의 마카롱을 맛을 보지 못했다.

 

비스킷이나 마카롱이나 어차피 입에 들어가는 것들이다. 마카롱을 받자마자 개봉해서 몇 개라도 먹었더라면 먹지 못해서 느낀 아쉬운 감정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맛있는 비스킷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단위가 큰 지폐를 지불하고 싶지 않아서 비스킷 먹는 것을 포기한다면 나중에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는가. 소소한 일상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누리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괴로운 일을 먼저 선택하고 참는다면 괴로움이 우리 삶에 전달하는 고통이 더 가중될 수 있다.

 

 

 

이 책은 아르튀르가 자신의 친구를 위해 쓴 것이다. 제목에 혹해서 이 책을 손에 집었다면 읽지 않기를 권한다. 특히 지금 당신의 삶이 행복하다면 읽지 않는 것이 좋다. 행복한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겉멋 든 ‘개똥철학’으로 보일 수 있다. 아르튀르도 행복한 사람이 자신의 책을 읽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심오한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친구가 이 책을 읽기를 바랄 뿐이다. 아르튀르의 책은 자신 주변을 둘러싼 사소한 일상을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단상의 연속체다. 거대한 삶 속에서 지극히 사소한 삶의 과정까지 되돌아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증명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마음속 상태를 있는 그대로 나열한 그의 글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결론은 단 하나다. “삶이 의미 없다 해도, 행복이 삶의 방향이다.”(46쪽)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복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것을 목표의 지향점으로 삼아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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