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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평점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 사토리 세대를 아십니까?
3포 세대란 말이 유행한 지 제법 됐다. 대학 졸업해도 취업을 못하니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2030 세대를 일컫는다. 근래엔 4포, 5포 세대까지 생겨났다. 스펙 쌓기와 취업 경쟁에 내몰려 인간관계를 포기했다 해서 4포, 여기에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하니 5포다. 이 쯤 되면 포기는 배추 셀 때 쓰는 말이라면서 쉽게 포기하는 젊은이들에게 핀잔이 섞인 우스갯소리가 나올 법하다. 하지만 요즘 현실을 생각한다면 썰렁 유머에 쓴웃음만 나올 뿐이다.
재미있게도 이웃나라 젊은 세대들이 처한 현실이 우리와 비슷하다. 사토리(さとり, 득도) 세대. 깨달음을 얻은 세대라는 뜻으로, 물질적 욕심이 그다지 없다는 게 이들의 특징이다. 수도권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꿈도 일찌감치 접고, 여행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자동차나 명품 옷에도 별 관심이 없고, 술도 안 마신다.
사토리 세대는 흔히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간주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불황의 시대적 산물이다. 제대로 직업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름의 적응방식인 것이다. 저성장 혹은 제로성장 시대에 자라면서 고도성장이 뭔지조차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세대가 형성한 집단정체성이기도 하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한국의 3포 세대를 같은 맥락에서 보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경제 환경이 젊은 세대의 정신세계와 가치관을 경향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한국과 일본은 수십년 전과 비교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고 일본은 지난 15년간 매년 3만명이 자살했다. 금융파탄, 고용 불안 등 세계화로 사회 체계가 불안정해지며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이 넘고 연간 수만 명 이상이 자살하는 시대. 이렇게 불안한 사회에서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 행복의 합격 기준에 맞추면서 사는 삶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보람이나 살아가는 의미, 그리고 행복감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는 막연하게나마 행복감과 거의 같은 것으로 연결돼 있다. 특히 돈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행복에 대한 가치의 지향점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월수입이 수억 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먹고사는 데 곤란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기를 바란다. 이 정도면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행복의 합격 기준이다.
그러나 숭고함이나 위대함이라는 높은 선과 비교하면 평범하고 진부하다. 근대 사회의 가치가 개인의 생명과 안정을 중시하고 일상생활을 소중히 하는 데 있다면,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국민 대다수가 그런 가치를 공통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여전하며 80%의 국민은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절망한다.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는 행복에 합격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행복은 원래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의 차이가 없어지고 주변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워지면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지 불확실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행복이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관적인 기준을 공유하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이름만 붙여진 인생의 정형화된 틀에 맞추면서 삶을 살게 된다.
또 하나의 불행은 행복의 합격 기준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저성장이 지속되는 사회에서 부의 수준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인생을 보낸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다. 중산층의 계단에서 탈락된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 인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삶이다. 기본적일 수도 있는 행복에도 매달리지 못하고 탈락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백만 명 이상의 우울증 환자들이다. 들은 인생의 계단에서 스스로 탈락시키고 마는 자살자로 전락한다.
♣ 잃어버린 행복의 의미를 되살리는 방법
강 교수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진정한 의미가 상실된 행복이란 단어를 다시 한 번 재생시키려고 시도한다. 그의 어둡고 불행한 삶을 생각해본다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탐색하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역시 개인적으로 큰 아픔을 겪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일본 대지진의 참혹한 현장도 경험했다.
불행하게도 젊은 시절, 강 교수가 체험한 뇌의 증상은 아들에게도 되물림되었다. 아들은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다. 자신의 파멸과 세계의 파멸을 함께 바랐다. “왜 태어난 것인가? 왜 살아야만 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혔고, 아버지에게도 수차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가까스로 세계, 그리고 자신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던 아들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얼마 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해 2만명 가까운 생명이 사라졌고, 원전사고까지 이어졌다. 이토록 “납을 삼키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서도 강 교수는 왜 우리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강조하는 것일까?
삶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 강 교수는 전작 <고민하는 삶>과 같이 다시 한번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를 경유한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 1905년, 나쓰메는 “일본은 멸망한다”고 말했다.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는 자신감에 들뜬 당시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비관적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년 뒤, 일본은 실제로 한 차례 망했다. 강 교수가 나쓰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정직한 비관론’이다.
“‘자기를 찾아라’라고 외치며 우리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이 빈틈없는 시스템은 ‘상품이 되는 것’을 찾아내 이용하는 데 뛰어납니다. 특히 ‘불안’의 냄새가 나는 것을 이용하는 데 무척 뛰어납니다.” (p106)
자의식의 과잉은 고뇌를 낳기 때문에 ‘자기 찾기’가 아니라 ‘자기 잊기’를 통해 인생의 답을 구하라고 조언한다. 소세키는 “자기를 잊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것이 없고 무아지경보다 기쁜 것이 없다”면서 ‘자기 찾기’와 거리를 뒀다. 행복의 파랑새를 쫓으려는 ‘자기 찾기’를 넘어 ‘자기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강 교수는 여기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거듭나기(Twice Born)’를 강조한다. ‘건전한 마음’으로 고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보다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 ‘자기 찾기’에 몰입한 사람들은 그동안 내내 반성 없이 ‘한 번 태어나는 형’으로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삶은 배후에 있는 문제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마음의 병에 시달리게 된다.
♣ 행복의 '파랑새'는 없다
행복은 애초에 구할 수도 없고 구한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메테를링크의 동화 속에서 주인공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찾으려고 하는 행복의 ‘파랑새’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 교수의 행복론이 애초부터 노력해도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렵다는 허무주의적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행복을 위해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괜찮다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 삶이 특별해야 할 이유가 없다. 지금 이대로 숨 쉬며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다. 자세히 성찰해야 행복하다. 오래 보아야 우리의 삶이 사랑스럽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당신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