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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날들
필립 톨레다노 지음, 최세희 옮김 / 저공비행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바쁜 사람들도 / 굳센 사람들도 /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 어린 것들을 위하여 / 난로에 불을 피우고 /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중략)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중에서)
2006년 9월 4일. 사진작가 필립 톨레다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상태였다. ‘네 엄마는 어딨냐’고 끝도 없이 묻는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힘든 시간이었다. 1년여가 지난 후 저자는 아버지의 사진을 찍고 아버지와의 일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웹사이트를 만들어 아버지와의 일상을 사진 에세이 형식으로 올렸다.
과거 영화에 출연할 정도로 멋진 외모의 소유자에다 건장한 체격의 아버지는 엄마를 애타게 찾는 아이가 되었다. 아이가 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파리에 갔다는 식으로 둘러대지만 아버지는 잊을 때만 되면 계속 묻는다. 아들 입장에서는 짜증날 법한데 똑같은 말로 대답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집요하게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묵묵히 답변해주는 아버지처럼.
《집안 곳곳에서 이런 글귀들이 적힌 메모를 볼 수 있다. / 당신의 마음속을 설핏 보여주는 증거이자, 내게 숨기려 하는 불안의 흔적들. / 다들 어디 간 걸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 얼마나 혼돈스러우셨으면...》
하지만 아버지는 치매에 의한 망각 때문에 물어보는 건 아닐 것이다. 아버지도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상실 뒤에 밀려오는 불안과 외로움의 파도는 연역하고 늙은 아버지가 감당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강인한 모습을 남기고 싶어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족 앞에서 표현하지 않으려는 아버지 특유의 고집은 여전하다. 아버지는 눈물도 말라 가슴으로 혼자 속으로 울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위태위태한 아버지가 얼마 남지 않은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의욕과 유머 넘치는 기질 그리고 항상 자신 곁에 있는 아들이다. 한창 젊었을 때 아버지는 오페라를 듣고 그림과 조각에 능한 예술가였다. 늙은 아버지는 여전히 예술을 한다. 스케치를 하지 못하지만 풍경 감상 뒤에 그림을 구상하는 시간은 아버지에게는 안락한 시간이다. 구상하기 전에 아버지는 멋진 노을 풍경을 감상한다. 아버지는 노을 풍경으로 연작을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정정한 시절이었다면 풍경화 그리는 것쯤은 아버지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세월의 노화가 야속하기만 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아버지상이 존재한다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늘 자식들을 마음속에 품고,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계신다. 돈이 많든 적든, 몸이 건강하든 역하든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수고를 기꺼이 견뎌내는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래서 누구나 존경받기에 충분하다. 아내, 아이들 위해 척추처럼 서야 하는 삶, 때론 강인한 나무처럼 때론 들풀처럼 사셨던 서럽고 강하고 두려운 이름이 아버지다.
아버지는 강하다. 다 큰 자식 앞에서도 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아침마다 맨손체조를 하고 속옷 바람으로 윗몸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만의 건강 보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날계란 넣은 오렌지주스를 마신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다. / 저 작은 쿠키들을 아버지 가슴에 올려놓았더니 이러시는 거다. / “내 찌찌 봐라!” / 누군들 웃지 않고 배길까?》
아버지는 젊었을 때보다 더 웃음이 많아졌다. 어쩌면 당신 얼굴에 비쳤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보여주기 싫어서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난기 발동하면서 활짝 웃는 아버지가 좋다. 웃음은 건강의 보약이라던데 아버지에게는 정력제다. 많이 웃으면 웃을수록 생명의 힘이 다시 샘솟는다.
죽음을 가슴에 새긴 여생을 산다는 건 너무나 우울하고 힘들다. 그러나 오히려 카메라 렌즈로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안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깊이 감사한 마음이 느껴진다. 가족과의 일상적인 시간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작가는 사진에 담았다.
아버지란 단어를 들으면 미안함이 생긴다. 어릴 적, 부족함이 없이 자란 것은 아버지의 피와 땀이 있는 노력이고, 그 노력은 자식을 위한 마음이고,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연들이 모여 있었다. 세상을 살다보니 느껴지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모성애는 그리움이 있지만, 아버지의 부성애는 미안함이 있다. 어린 나이에 보이지 못한 아버지의 삶이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된다.
저자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훔칠 때도 있었지만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삶의 소소한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고 그 순간들마다 가슴 깊이 감사했다. 마지막을 생각하니 비로소 그 삶의 소중한 빛나는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삶의 순간과 가치를 재정렬하고 바로 서게 했다. 가장 큰 가르침은 말과 행동을 넘어 삶과 죽음으로 가르친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삶과 죽음으로 전하신 가르침은 작가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나 역시 남은 삶의 가장 큰 지표가 됐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내일 세상을 떠난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아버지를 꼭 안아주었던 그때 그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