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챔피언. 이 별명을 가진 자는 누구일까? 에드거 앨런 포, 러브크래프트, 아니면 스티븐 킹? 무시무시한 별명의 주인공은 바로 로버트 블록(Robert Bloch, 로버트 블로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영화 <사이코>의 원작자’로만 알고 있다. 어쩌면 영화 <사이코> 속 전설적인 샤워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블록의 작품 세계를 상세하게 소개한 책이 많지 않다. 《환상문학의 거장들》(자음과모음, 2001)‘This Crowded Earth(1958)’을 번역한 《지구는 대만원》(위즈덤커넥트, 2017, e-Book)이다. 지금부터 나올 블록에 대한 설명은 이 책들에 있는 내용을 토대로 작성했음을 밝힌다.

 

‘공포의 챔피언’은 내가 붙여준 별명이 아니다. 《환상문학의 거장들》 ‘로버트 블로흐 편’을 작성한 책의 저자들(프랑수아 레이몽, 다니엘 콩페르)이 붙인 것이다. 저자들은 블록을 ‘포와 러브크래프트의 계승자’, ‘현대 미국 환상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극찬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블록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올해가 블록 탄생 100주년이다. 1917년 블록은 미국으로 건너온 독일 출신 유태인 부모에서 태어났다. ‘블로흐(Bloch)’는 독일 성씨이다. 블록은 어렸을 때부터 환상소설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많이 애독했던 잡지가 바로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였다. 이 잡지에 환상, 미스터리, 공포, SF 등 폭넓은 장르의 단편소설이 연재되었다.

 

 

 

 

 

 

 

 

 

 

 

 

 

 

 

 

 

 

17세의 블록은 ‘전업 작가’로 인정받게 된 첫 번째 작품을 <위어드 테일즈>에 발표한다. 그 작품이 바로 『수도원에서의 만찬』(The Feast in the Abbey, 1934)이다. 이 단편소설은 ‘수도원의 향연’이라는 제목으로 정태원 씨가 편역한 《공포특급 5 : 세계편》(한뜻, 1996)에 소개되었다. 이 소설에 ‘신부(神父)로 분장한 식인귀(구울, Ghoul)’가 나온다. 식인귀가 등장하는 러브크래프트의 『픽맨의 모델』에 영향을 받은 블록의 초기작이다.

 

블록과 러브크래프트. 이 두 사람은 평생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편지를 자주 주고받을 정도로 돈독한 친분 관계를 형성했다. 러브크래프트가 블록의 『사탄의 하인들』(Satan’s Servants, 1949)을 검토한 적도 있다. 블록은 러브크래프트와 닮은 주인공이 괴물의 손에 끔찍한 최후를 맞는 『별들의 배회자』(The Shambler from the Stars, 1935)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러브크래프트는 이에 대한 화답으로 『어둠에 사로잡힌 자』(The haunter of the dark, 1936, 국내 번역명은 ‘누가 블레이크를 죽였는가?’)라는 소설을 써서 공개했다. 이 소설은 ‘로버트 블레이크’라는 작가의 기이한 죽음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이름만 봐도 ‘블레이크’가 누굴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대선배 작가를 모델로 한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쓴 블록의 패기가 대단하다. 그리고 젊은 후배의 과감한 창작 활동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러브크래프트의 대인배적 모습도 훌륭하다.

 

 

 

 

 

 

 

 

 

 

 

 

 

 

 

 

 

 

 

‘The haunter of the dark’를 번역한 『누가 블레이크를 죽였는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주한 그 해 겨울, 블레이크는 유명한 다섯 편의 단편을 창작한다. 「지하의 토굴」, 「지하실의 계단」, 「샤가이」, 「프나스의 골짜기」, 「행성에서 온 방문객」이 그 당시 완성한 대표작이었다. [1]

 

During that first winter he produced five of his best-known short stories—The Burrower Beneath”, “The Stairs in the Crypt”, “Shaggai”, “In the Vale of Pnath”, and “The Feaster from the Stars”

 

 

블레이크가 쓴 다섯 편의 소설은 가공 작품이다. 그렇지만 ‘행성에서 온 방문자(The Feaster from the Stars)’는 러브크래프트가 『별들의 배회자』(The Shambler from the Stars)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 분명하다. 블록을 위한 러브크래프트의 ‘이스터 에그(Easter Egg, 재미로 숨겨놓은 메시지)’로 볼 수 있다.

 

1940년대부터 블록은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에서 벗어난 작품들을 발표했다. 블록의 초기 작품이 사악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이야기라면, 원숙기에 접어든 작품들은 ‘현실적인 인간 내면의 근원적 공포’를 소재를 내세운다. 그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공포는 어둠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두뇌 속 뒤틀린 작은 공간에서 발생한다”[2]라고 밝혔다. 블록은 악몽과 같은 환각 증세, 자아가 분열된 심리 상태, 강박 관념 등 인간의 내면을 뒤틀리게 하는 공포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1943년에 전설적인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를 소재로 한 『살인마 잭으로부터』(Yours Truly, Jack the Ripper)를 썼다. 이때부터 블록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1950년대는 블록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블록은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특히 『포를 수집한 남자』(The Man Who Collected Poe, 1951)는 포를 완벽하게 모방한 블록의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포의 소설에 열광하는 팬이 포를 부활시켜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한다는 이야기다. 포 전문가들은 블록에게 포의 미완성 소설 『등대』(The lighthouse)의 결말을 완성해달라는 제안을 한다. 1953년에 블록이 결말을 쓴 포의 『등대』가 공개됐다.

 

 

 

 

 

 

 

 

 

 

 

 

 

 

 

 

 

 

 

1959년에 그 유명한 《사이코》가 발표되었고, 이 해에 블록은 『지옥으로 가는 열차』(That Hell-Bound Train, 1958)휴고상 최우수 단편소설 상(Hugo Award for Best Short Story)을 받았다. 1960년대 이후부터 블록은 TV 드라마, 영화 각본 집필을 하기 시작했다. 블록은 로드 설링(Rod Serling)<나이트 갤러리> 시즌 2 20화 『Logoda’s Heads』 편(1971년 12월 29일 방영)의 각본을 맡았는데, 이 각본의 원작자는 <위어드 테일즈> 전성기에 활동한 작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Clark Ashton Smith)다. 1975년 최초로 열린 ‘세계 판타지 컨벤션’에 참석하여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재미있게도 평생 공로상 트로피가 블록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러브크래프트의 흉상 모양이었다. 블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로버트 블록 상’이 제정되었다.

 

스티븐 킹은 블록의 등장으로 ‘서스펜스’라는 장르가 재발견되었다고 평가했다.[3] 블록은 공포소설뿐만 아니라 추리소설, SF, 스릴러 소설 등 다방면으로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재능 있는 작가이다. 블록을 스티븐 킹 등장 이전에 시대를 군림한 ‘장르소설의 제왕’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블록 탄생 100주년에 이른 지금까지도 국내에 ‘로버트 블록 작품 선집’ 출간 소식이 나오지 않고 있다. 2017년이 거의 두 달 남았는데 이렇게 그냥 지나가기 아쉽다.

 

 

 

 

 

[1] 《러브크래프트 전집 1》 420쪽, 정진영 역

[2] 《지구는 대만원》 작가 소개

[3] 《지구는 대만원》 작가 소개

 

 

 

 

 

 

 

 

 

※ 국내에 번역된 로버트 블록의 소설들

 

 

 

* The Feast in the Abbey (Weird Tales 1935. 1)

수도원의 향연

《공포특급 5 : 세계편》

정태원 역 / 한뜻 (1996년)

 

 

 

 

* The Suicide in the Study (Weird Tales 1935. 6)

서재에서의 자살

 

http://blog.naver.com/jinboradory/220819441314

(번역 : 신비동물학자)

 

 

 

 

* The Shambler From the Stars (Weird Tales 1935. 9)

별들에서 기어드는 자

 

http://blog.naver.com/jinboradory/220814541210

(번역 : 신비동물학자)

 

 

 

 

* Change of Heart (1948)

변심

 

 

 

 

 

 

 

 

 

 

 

 

 

 

 

 

《나의 꿈꾸는 여자 : 환상 미스테리 걸작선》

정태원 역 / 동숭동 (1993년)

 

 

 

 

* String of Pearls (1956. 8)

진주목걸이

 

 

《세계의 걸작 미스테리 1》

정태원 엮음, 송노미 역 / 한길사 (1992년)

 

 

 

 

* That Hell-Bound Train (1958. 9)

지옥으로 가는 열차

 

 

 

 

 

 

 

 

 

 

 

 

 

 

 

 

《토탈호러》

박상준 엮음 / 서울창작 (1993년)

 

 

 

 

 

* This Crowded Earth (1958. 10)

《지구는 대만원》 (전 2권)

 

 

 

 

 

 

 

 

 

 

 

 

 

 

 

 

TR클럽 역 / 위즈덤커넥트 (2017년, e-Book)

 

 

 

 

 

* Psycho (1959)

《사이코》

 

 

 

 

 

 

 

 

 

 

 

 

 

 

 

정태원 역 / 도서출판 다시 (2004년)

※ 2004년에 나온 종이책은 절판되었고, 올해 e-Book으로 재출간되었다.

 

 

 

 

 

* Life in Our Time (Ellery Queen's Mystery Magazine 1966. 10)

우리 시대의 삶

타임캡슐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2》

《세계 문학 베스트 미스터리 컬렉션 2 : 1950~1960년대》

홍현숙 역 / 황금가지 (2005년)

정태원 역 / 새로운사람들 (2007년)

 

 

 

 

 

* The Model (1975. 11)

모델

 

 

 

 

 

 

 

 

 

 

 

 

 

 

《호러 사일런스》

미첼 슬렁 엮음, 김성화 역 / 고려문화사 (1994년)

 

 

 

 

* Nina (1977. 6)

니나

 

 

《공포특급 5 : 세계편》

정태원 역 / 한뜻 (1996년)

 

 

 

 

 

* The Closer of The Way (1977. 8)

그 길의 끝

 

 

 

 

 

 

 

 

 

《토탈호러 2》

서울창작 (1996년)

 

 

 

 

 

* 미인과 초콜릿 (원제 확인 불가)

 

 

《악성인자 : 세계 미스터리 명작여행》

정태원, 최진섭 편역 / 우담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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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7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27 17:50   좋아요 1 | URL
책을 많이 읽어서 안다기보다는 책을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 같아요. 90년대에 나온 단편소설 앤솔러지를 모으다 보니 로버트 블록의 작품을 알게 됐고, 그의 작품 세계에 호기심을 가지게 됐어요. ^^

sprenown 2017-10-2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 공포하면 공동묘지와 전설의 고향을 떠올리고, 위의 리뷰중에 아는 것이라곤 영화로 봤던 ‘싸이코‘뿐인 문외한이지만... 이런 훌륭한 작가의 탄생 100주년인데도 돈 때문에 출판사가 나서지 않는다면, 매니아들 만이라도 블록 탄생 100주년 기념모임이라도 가져보시는게 어떠실지?

cyrus 2017-10-27 17:51   좋아요 0 | URL
블록을 좋아하는 마니아가 많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도 러브크래프트처럼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7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 님을 알라딘 장르 문학 MD 직원으로 추천합니다.

cyrus 2017-10-27 18:34   좋아요 0 | URL
아직 못 읽은 장르소설이 많습니다. 곰발님처럼 스티븐 킹을 분석할 수준의 경지에 오르려면 한참 멀었어요. 알라딘 장르 문학 MD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은 물만두님입니다. ^^

임모르텔 2017-10-2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사이러스님네오면 굶주린 후, 잔치집에 온 것처럼 뭐부터 먹어야할지 휘둥그레 설레입니다.^^

cyrus 2017-10-28 10:06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음식의 맛에 비유하면 싱거운 음식입니다. 저는 ‘맛이(재미가)‘ 없어서 사람들이 잘 안 ‘먹는(읽는)‘ 책을 좋아해요. 제 글을 계속 보면 부작용이 생겨요. 처음에는 흥미있다가 계속 보면 질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임모르텔 2017-10-28 11:52   좋아요 0 | URL
제가 좀 ADHD라 ..뭐든 작심삼일이고..권태가 빨라서,3번이상 못보거나 못하는데.. 이 곳을 들락인지가 3번이상 되네요.ㅎ~
밑줄안내 해주셔서 - 신비동물학자님네 글도 읽는 중입니다.^^

zombie 2017-10-31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어드 테일즈 출신 작가들을 많이 언급하시는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해외에서도 이쪽 장르가 인정받은 역사가 최근이다보니 우리나라는 이런 작가들 작품 번역서를 보는게 힘드네요. 흔히 러브크래프트 사후 덜레스가 발굴한 3군작가들의 작품도 보고싶더라구요. 콜린윌슨의 정신기생체를 제외하면 램지 캠벨이나 린 카터의 작품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크툴루 신화에서 이 작가들이 창작한 창작물(글라키,이호트 등등)들도 꽤나 신화내에서 유명한 반면에 정작 이작가들의 소설은 국내에서 보기 힘드네요... 빨리 번역서들이 양질의 퀄리티로 나올정도로 위어드 테일즈소설들이 유명해졌음 합니다. 러브크래프트의 팬으로서요....

cyrus 2017-11-01 12:05   좋아요 0 | URL
왠지 좀비님은 저보다 크툴루 신화에 대해서 많이 아실 것 같습니다. 저는 국내에 나온 책들을 많이 의존하는 편입니다. 그렇다 보니 러프크래프트와 크툴루 신화를 소개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러브크래프트와 위어드 테일즈 소속 작가들을 비평한 S. T. 고시의 책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zombie 2017-11-01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안다기보다는 대략적인 크툴루신화의 개요를 이해하고있는 정도입니다. 저는 크툴루 신화에서 분류를할때 1군 소설들은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순수 작품들로 보고있습니다. 2군 소설들은 러브크래프트 생전 영향을 받거나 창작활동을 공유했던 작가들로 보고있구요. 애슈턴 스미스, 로버트 e 하워드, 로버트 체임버스, 로버트 블록, 특히 어거스트 덜레스 등이 2군 신화작가들에 해당되구요. 특히 덜레스는 신화의 확장에 큰 기여를 함과 동시에 신화 분위기를 망치는 설정들을 집어넣어 러브크래프티안들 사이에서 만년 논쟁의 대상이 되었죠. 3군은 러브크래프트사후에 덜레스가 계승한 신화를 바탕으로 위어드 테일즈에서 발굴된 작가들입니다. 콜린윌슨, 램지캠벨, 린카터 등의 작가들인데 현재 살아있는 작가들도 있죠. 재밌는건 현재 국내에 나온 크툴루신화 사전같은 해설서들은 대부분 카오시움 회사의 콜오브 크툴루 TRPG에서 만들어진 설정을 반영하고있다는겁니다. 카오시움은 콜오브크툴루 시리즈를 만들기위해 덜레스가만든 출판사 아컴하우스와 직접 연계해서 위어드 테일즈 크툴루 신화 작품군의 모든 라이센스를 얻어놓은 상태입니다. 때문에 이들이 게임을위해 자신들의 입맛대로 신화 설정을 만든 부분들도 꽤 됩니다. 물론 카오시움의 초창기엔 러브크래프트의 신화체계를 잘 정립하고 반영했지만 게임으로서 판매가 먼저였던지라 갈수록 이상한 설정들도 붙어가는게 보이더군요. 특히 TRPG로 크툴루 신화를 먼저 접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크툴루 신화가 전파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플레이어들이 만든 잡다한 설정들도 섞여서 혼란스럽게 되었더군요. 어쨋든 우리나라는 현재 러브크래프트전집 출간으로 1군 중심의 신화체계는 사람들이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덜레스를 중심으로한 2,3군의 신화들은 실제 작품보다 카오시움 게임을 통한 해설서의 영향이 먼저 받아들여졌다는 겁니다. 물론 크툴루 신화가 애초 확장되는 세계관인데다가 러브크래프트 본인이 이걸 장려하기도 했지만 좀더 깊게 신화를 정립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2,3군 소설들의 정발이 안되는게 안타까울 뿐이죠. 러브크래프트는 죽기전 자신의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들이 없는것을 한탄했다고 하네요. 자신이 포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처럼 본인도 그런 영향력을 호러계에 남기고싶었나봅니다. 이제보면 러브크래프트는 그 꿈을 사후에 충분히 이루고도 남은것 같네요.
 
[전자책] 지구는 대만원 1 - SciFan 제43권 SciFan 43
로버트 블로흐 / 위즈덤커넥트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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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신인류’라는 말이 유행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일 것이다. 1993년에 나온 015B 4집의 타이틀곡 <신인류의 사랑>이 없었으면 평소에 ‘신인류’라는 말을 사용하는 상황이 없을 것이다. 노래 제목은 거창하게 ‘신인류의 사랑’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인류’는 ‘신세대’를 의미한다. 시간이 흘러 신세대는 나이 많은 ‘쉰 세대’, 즉 구세대가 된다. 그러나 신인류가 단순히 구습을 벗어나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할 줄 아는 젊은 세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일탈과 파격으로 구세대에게 충격과 공포를 준 신세대는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 그 어느 시대에도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인류가 등장하려면 인간의 생물학적 측면에서 ‘진화적 변화’가 진행되어야 한다.

 

진화를 거쳐서 등장하는 신인류라는 소재는 그 성격상 SF 작가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좋은 영양분이다. 신인류가 사는 SF소설의 미래 세계는 유토피아(utopia)보다는 디스토피아(dystopia)가 많은 편이다. 미래 세계의 모습을 비관적이거나 암울하게 묘사한 작품이 많다. ‘엘로이’‘몰록’이라는 미래의 신인류가 나오는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타임머신》(The Time Machine, 1895)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꼽힌다. 그런가 하면 유토피아의 신인류를 그린 것인지 아니면 디스토피아의 신인류를 그린 건지 분류하기 어려운 로버트 블록(Robert Bloch, ‘로버트 블로흐’로 표기하는 사람도 있다)《지구는 대만원》(This Crowded Earth, 1958)이 있다. 로버트 블록은 영화가 더 유명한 《사이코》(Psycho, 1959)의 원작자이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살기가 어려운 미래의 지구. 푸른 별에 거주하는 인구의 수가 1,000억 명에 이른다. 좁아 터지는 지구의 모습이 상상이 안 된다면 우리나라 전 지역의 모든 지하철의 통근 길을 ‘지옥철’로 상상해보시라. 해리 콜린스는 인구 초과 밀집 도시에 생활하는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레핑웰 박사의 주도로 설립된 심리 치료 센터에 입원한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이 정부의 실험 대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심리 치료 센터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지구는 대만원》은 여타 SF소설들과는 다르게 기묘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많은 SF 작가들은 과학기술에 맹신하는 인류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고 전망하지만, 《지구는 대만원》은 그 클리셰(Cliché)를 살짝 거부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신인류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 덕분에 수명을 멈추게 하는 장애물이 없는 장밋빛 삶을 살고 있다. 그야말로 질병이 없고, 전쟁도 일어나지 않은 완전 평화의 시대이다. 하지만 전 인류의 무한한 번식과 수명 연장은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이어지고, 완벽해 보이는 평화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내부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는 일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구 조절 정책을 내놓는다. 여성은 임신할 때마다 호르몬제 주사를 맞아야 한다. 호르몬제 주사를 맞은 아이는 다 성장해도 난쟁이로 살아야 한다. 난쟁이들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인구가 번식해도 인구 증가 문제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정책이 실현되면서 난쟁이의 수가 정상인의 수를 넘어선다. 호르몬 주사를 거부한 키가 큰 정상인은 정부가 강요하는 진화를 거스르는 불순 세력으로 낙인찍힌다.

 

《지구는 대만원》은 단순히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그리지 않는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신인류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섬뜩할 만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 소설은 해리 콜린스가 자살을 시도하는 시점인 ‘현재’를 시작으로 65년 후의 미래까지 보여준다. 65년이라는 짧으면서도 긴 세월 동안 해리 콜린스를 비롯한 신인류는 정부의 통제에 의해 진행되는 진화의 흐름 앞에서 전전긍긍한다. 이 소설에 실려 있는 12개의 이야기는 저마다 사연이 있는 인물들(윈드롭 대통령, 미니 슐츠, 마크 카벤디시, 에릭 도노반, 제시 프링글, 리틀존 등)의 등장과 가볍지 않은 문제의식(정부와 과학의 은밀한 결탁,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의 통제, 생명 윤리, 인종 차별 등)을 통해 인류의 미래를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의 중간 경계에 서 있다. 전염병, 기아, 전쟁에 대한 근심이 사라진 지구는 유토피아에 더 가깝지만, 인구 증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윤리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인류가 사는 지구는 디스토피아다. 이상적인 세계이건, 아니면 암울한 세계이건 간에 과학기술 자체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크게 영향을 주즌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려왔던 우리가 인류 문제를 과학 기술에 책임 전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잘 살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망을 한결같다. 삶의 욕망을 멈추지 못한 인류는 장밋빛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그런 만큼 《지구는 대만원》에 묘사된 인류의 미래는 구체성과 현실성을 지닌다. 사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 환경이 아니라 어느 틈엔가 달라져버린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욕망이 숨 가쁘게 우리의 세상을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변화에 잘 적응하는 누구는 미래가 유토피아로 보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누군가의 미래는 디스토피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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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6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27 13:47   좋아요 2 | URL
인구 절벽 현상을 소재로 한 SF작품이 나오면 어떻게 묘사될 지 궁금해요. 거시적인 예상 시나리오를 신문에 본 적이 있어도 미시적인 예상 시나리오를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

sprenown 2017-10-26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섬뜩한데요..차라리 지금 우리나라 저출산상황이 다행이다 싶을 만큼.^^

cyrus 2017-10-27 13:48   좋아요 2 | URL
늙은이들만 있는 나라도 끔찍해요. 늙어서도 일을 해야될껄요.. ㅎㅎㅎ

겨울호랑이 2017-10-26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015B 노래 나왔을 때 신세대였다가 지금은 구세대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ㅋㅋ

cyrus 2017-10-27 13:49   좋아요 2 | URL
저도 구세대입니다. 015B 노래가 빼빼로 CM송으로 사용했던 것도 기억해요.. ^^

이하라 2017-10-26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f소설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도 걱정도 만들어내니 요물 아닌 요물이네요^^;;

cyrus 2017-10-27 13:50   좋아요 1 | URL
좋은 표현입니다. 그게 바로 SF의 매력이죠. ^^

transient-guest 2017-10-27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인류‘라는 표현이 일본에서 온 것 같습니다. 일단 앞서 ‘새로울 신‘자를 붙이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80년대 중후반에 번역해서 들여온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집이나 일본사회현상을 진단하는 책들이 당시 젊은이들을 ‘신인류‘라고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SF는 다양한 모습의 미래를 보여주면서 현실을 투영한다는 얘길 본 것 같습니다. ‘지구는 대만원‘에서 그려지는 세계도 혹시 지금 우리의 모습이 우화적으로 그려진 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cyrus 2017-10-27 13:51   좋아요 0 | URL
《지구는 대만원》 1부에 인구가 넘치는 도시 풍경 묘사가 나옵니다. 요즘 도시의 풍경과 분위기가 조금 비슷해요.

Jeff 2018-05-20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즈덤커넥트쪽 번역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소개해주신 작품 말고 몇개를 봤는데 집단 번역이라 작품별 퀄리티가 보장안되고 글이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cyrus 2018-05-23 15:40   좋아요 0 | URL
위즈덤커넥트에 나온 전자책을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번역의 질에 대해서 의견을 내기 어렵네요. 그런데 제가 읽었던 위즈덤커넥트 전자책 중에는 비문과 오자 몇 군데 보였습니다.
 
[전자책] 지구는 대만원 2 - SciFan 제44권 SciFan 44
로버트 블로흐 / 위즈덤커넥트 / 201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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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대만원》 리뷰 : http://blog.aladin.co.kr/haesung/9673824



※ 오식

* ˝만약 그게 마음에 안 든다면, 자연주의자들에게로 가명 돼.˝ (1권 138쪽)

* 레핑웰읭 방법 (1권 147쪽)

* 헬리콥터을 타고 (2권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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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재 클래식스 24차 시리즈출간 소식을 공지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지금도 이 문자 메시지는 내 휴대폰에 남아 있다. 문자 내용에 따르면 책이 내일(1027일 금요일)부터 출간된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사단법인 올재 공식 홈페이지, 페이스북 페이지에 공지된 출간일은 문자에 적힌 출간일과 다르다. ‘1031일 화요일로 나와 있다. 정확한 날짜를 알고 싶어서 홈페이지 게시판에 문의 글을 남겼다. 올재 측의 답변이 나오는 대로 정확한 출간 날짜를 다시 알리겠다.

    

 

※ 출간일이 ‘10월 31일 화요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수정일: 2017년 10월 26일 14시 54분)

 

 

 

 

 

 

올재 클래식스 24차 시리즈금강경, 동의수세보원,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2)이다. 딱히 공통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조합이다…‥ 네 권의 책이 나옴으로써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가 100을 넘어섰다. 100권의 시리즈 전부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는 한정판이라서 중고 책 판매 웹사이트에 비싸게 팔기 쉬운 책이다.

 

금강경. 이름만 들어본 불교 경전이다. 잘 모르는 책인데 굳이 아는 척할 필요가 있을까. 인터넷 검색창에 금강경을 입력하면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전 해설은 동봉 스님이라는 분이 했다. 스님은 킬리만자로산이 있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 이 분의 활동이 방송(‘MBC 스페셜’ 2006년 방영)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사상의학(四象醫學)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에 소음인, 소양인, 태음인, 태양인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올재가 펴낸 동의수세보원판본은 홍순용(1909~1992) 선생과 동양철학자 이을호 선생(1910~1998) 등 총 6명의 학자가 번역한 것으로[1], 1973년에 출간되었다. 이 오래된 책을 주종천 한의대 사상의학과 교수가 보완했다.

 

조르조 바사리의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출간 소식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조르조 바사리는 화가로 활동했으나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이 책 하나로 최초의 미술사가로 알려지게 됐다.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은 르네상스 미술을 아주 가까이서 눈으로 보고 느낀 화가가 기록한 특별한 문헌이다.

 

 

 

 

 

 

 

 

 

 

 

 

 

 

 

 

바사리의 책은 1986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탐구당)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적이 있고, 총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주 귀한 절판본이라서 중고가 액수가 십만 원을 넘는다. 그 후로 2000년대에 이태리 르네상스의 미술가 평전(한명출판사, 2000)르네상스 미술의 명장들(계명대학교출판부, 2008)가 출간되었으나 이 두 권의 책도 절판되었다. 탐구당 판본과 한명출판사 판본의 역자는 동일 인물(이근배)이다.[2] 알라딘 중고책 서점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명장들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7명의 화가만 요약본이다. 올재에서 나온 바사리의 책이 완역본인지 잘 모르겠다. 직접 책을 사서 확인해 봐야 알 수 있다.

 

 

   

 

 

[1] 동의수세보원을 간략히 소개한 출판사의 설명에는 공동 번역자가 홍순용, 이을호 단 두 명만 나와 있다. 1971년 홍순용의 사회로 진행된 사상의학회 정기총회에서 동의수세보원 번역 위원이 선정되었는데 홍순용, 이을호, 허연, 송병기, 송병일, 김동명이다. 따라서 동의수세보원 공동 번역자를 정확히 소개할 때 이 여섯 명의 번역 위원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 (참고: 네이버 건강백과 '근현대 한의학 인물실록 편)

 

[2] aimerits님의 의견이 반영되어 수정되었습니다. (수정 날짜: 2017년 10월 27일 15시 23분)

 

[추신]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판본은 이근배 씨가 번역한 판본과 동일합니다. (추가 입력 날짜: 2017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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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6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26 14:42   좋아요 0 | URL
네. 그러죠. 이번 주 토요일을 제외한 주말은 시간 있습니다. ^^

레삭매냐 2017-10-26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친절한 정보라니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cyrus 2017-10-26 14:43   좋아요 0 | URL
예습을 한다는 생각에서 책에 대한 조사를 해봤어요. ^^;;

sprenown 2017-10-26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애서가‘ 시네요

cyrus 2017-10-26 14:44   좋아요 0 | URL
책을 좋아하는 spremown님도 애서가입니다. ^^

sprenown 2017-10-2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좋아하는 척만 하는 ‘가짜‘입니다. ㅎㅎ

cyrus 2017-10-26 14:56   좋아요 1 | URL
좋아하는 척하는 ‘가짜’를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정말로 나쁜 ‘가짜’는 자신의 무지함과 오류를 인정하지 않아요. ^^

syo 2017-10-2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일을 잘못 고치셨습니다. 세상에는 없는 날이네요 ㅎㅎㅎ

cyrus 2017-10-26 14:58   좋아요 1 | URL
헐.. ㅎㅎㅎㅎ 수정 입력하자마자 바로 고쳤는데 그걸 보다니.. ㅎㅎㅎ 그러고 보니 2017년 11월 31일은 정말로 달력에 없는 날이군요. ^^

transient-guest 2017-10-27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재의 책이 또 나왔군요. 저에겐 너무도 먼, 그림의 떡... 그 이상..-_-:

cyrus 2017-10-27 13:55   좋아요 0 | URL
국외 거주자가 올재 시리즈를 주문하려면 시차를 고려해야겠군요. ^^;;

aimerits 2017-10-27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태리 미술가 평전의 탐구당과 한명판은 같은 번역자인데.. 절판된걸 살린거라면 유일 번역본이 맞긴맞겠네요.

cyrus 2017-10-27 15:22   좋아요 1 | URL
탐구당 판본과 한명출판사 판본의 역자가 동일 인물이군요. 제가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aimerits님의 의견을 반영해서 수정하겠습니다. 올재 클래식스 판본은 번역자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책 사진은 있는데 글씨가 작아서 안 보여요. 오래된 판본을 재출간하는 출판사 특성상 이근배 씨가 번역한 판본을 사용할 수도 있겠어요.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인물이라도 알려지지 않은 내밀한 흠은 있다. ‘완전무결한 위인’이 어디 있으랴. 어렸을 적 아동용 위인전 읽으며 감동했던 위인들의 또 다른 면을 좀 더 커서 알게 됐을 때 실망하게 된다. 그 개운치 않은 감정은 ‘지적 성장’을 위해서 한 번쯤, 아니 배움이 다할 때까지 여러 번 겪어야 할 성장통(growing pain)이다.

 

 

 

 

 

 

 

 

 

 

 

 

 

 

 

 

 

 

*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근대 지식인의 시조로 추앙받는 사상가이다. 루소가 생각한 아동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도시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미개인’[1]을 만드는 것이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불평등의 기원을 자연 상태에서의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데서 찾았다. 원초적 자연 상태의 인간, 즉 미개인은 자신이 선한지 악한 것인지 구분할 줄 모르는 자유롭고 순수한 존재였다. 하지만 미개인은 공동체 경험 속에서 파괴되고 만다. 비교의식과 소유욕이 결합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인간을 소외시켰고 불평등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새물결, 2003)

* 장 자크 루소 《에밀》 (한길사, 2003)

* 장 자크 루소 《에밀》 (책세상, 2003, 요약본)

* 이기범 《루소의 에밀 읽기》 (세창출판사, 2016)

* 고봉만, 황성원 《루소, 교육을 말하다 : 에밀 깊이 읽기》 (살림, 2016)

 

 

 

 

인간 중심의 사회는 결국 사람을 가꾸는 것으로 귀결된다. 계몽사상이 대두하기 전 어린이들은 ‘덜 자란 어른’으로 취급받았다. 어린이는 ‘이성적인 어른’이 되기 위해 학칙과 규율로 통제하는 기숙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하류층은 아동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고 아동의 노동을 당연시했다. 18세기부터 유럽은 중세의 케케묵은 미몽을 훌훌 털어내면서 이성의 여명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계몽사상이 싹트면서 루소는 아동교육에 대한 생각을 진전시켰다. 그 생각이 집약된 것이 《에밀》이다. 이 책에서 에밀은 틀에 짜인 기숙학교식 교육이 아닌 순수한 자연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아동 성장 시기별에 적합한 전인교육을 중시한다. 교사는 아이 스스로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욕구를 느낄 수 있도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맡는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유명한 말은 이와 부합된다. 따라서 루소가 지향하는 아동교육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 폴 존슨 《지식인의 두 얼굴》 (을유문화사, 2005)

* 리오 담로시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교양인, 2011)

 

 

 

그러나 루소 정작 자신은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루소가 자신의 다섯 명 자식들을 보육원에 보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는 루소가 비정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동에 대한 의식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과거 인식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그 시대에 자식을 보육원에 맡기는 일은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른’과 구별되는 ‘아동’의 개념이 확립되기 시작한 18세기에 어린이는 ‘보호와 교육을 받아야 할 인격체’로 여전히 대우받지 못했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의 권리 옹호》 (책세상, 2011, 요약본)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연암서가, 2014)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는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이다. 이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녀를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어머니’, 또는 ‘아나키즘을 체계화한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의 아내’로만 알려졌다. 두 번의 자살 기도와 사생아를 출산한 사생활 때문에 그녀는 보수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철저히 묻혔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여권의 옹호》는 남녀평등과 교육 기회의 균등한 부여를 강조한 책이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남녀 모두 이성의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 카리 우트리오 《이브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 2000)

 

 

 

 

그러나 그녀는 니콜라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제외한 여성의 교육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 계몽 사상가들’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특히 계몽사상의 거두로 많이 언급되는 루소에 실망한다. 콩도르세는 여성의 평등을 옹호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의 옹호》를 쓰기 위해 콩도르세의《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책세상, 2002)을 참고했다고 한다.[2]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의 옹호》를 통해서 루소의 《에밀》에서 드러나는 아동교육의 한계를 지적한다. 《에밀》에 등장하는 소피는 에밀의 배우자다. 에밀은 소피에게 타인, 즉 남자에게 정성과 배려를 베푸는 삶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소피를 가르치는 에밀의 태도에서 여성을 ‘남성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확인한다. 남성 계몽 사상가들은 여성을 ‘감성’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그래서 여성에게 ‘이성’의 눈을 뜨게 해주는 교육을 받을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성을 위한 여성’으로 맞춰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사회를 ‘운명의 철 침대’로 비유한다.

 

 

 

 

여성이 단순히 남성을 기쁘게 하고 남성에게 복종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결론은 오로지, 그녀가 자신을 남성에게 적합하게 만들고자 다른 모든 고려 사항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여성의 특성을 억지로 부풀리거나 혹은 축소해서라도 거기에 끼워 맞추어야만 하는 ‘운명의 철 침대’이다. [3]

 

 

《여권의 옹호》 집필 이후 울스턴크래프트는 1796년에 <여성의 학대 혹은 마리아>를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마리아는 남성의 활동을 위해 희생당하는 여성을 상징한다. 모이라 퍼거슨은 마리아를 ‘여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소설 인물의 중요한 선조’로 평가한다.[4] 계몽주의 열풍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인간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 ‘인간’에 ‘여성’은 제외되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소녀들도 국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이 복종해야 될 대상은 남성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이효재 엮음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천》 (창비, 1979)

*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1995, 2000)

* 캐럴 페이트만, 메어린 린든 쉐인리 엮음 《페미니즘 정치 사상사》 (이후, 2004)

* 스테퍼니 스탈 《빨래하는 페미니즘》 (민음사, 2014)

 

 

 

 

그러나 그녀의 급진적 주장에는 시대적 한계가 드러나 있다. 그녀가 생각한 《여권의 옹호》의 예상 독자는 귀족적 허영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비교적 생활 여건이 우수한 부르주아 계급 여성들이다. 철학, 역사, 정치학 등 이성의 눈을 뜨게 해주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부르주아 집안에 태어나고 자란 소녀’들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하층계급 여성을 남녀공학 교육 대상에서 제외했고, 하급계급 여성에게 막일과 바느질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울스턴크래프트는 하급계급 여성을 ‘이성을 가진 평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여권의 옹호》에서 하녀는 남녀평등을 실현한 부르주아 부부의 행복을 위한 희생자로 전락한다.

 

 

나는 허드렛일만 하녀에게 맡기고 자녀들을 스스로 돌보며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한 여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았다. 이 소박한 그림을 보며 마음이 흡족해졌을 때, 나는 각자가 각자의 지위에 따르는 의무들을 이행하기 때문에 대등하게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또 서로 독립적인 이 부부는 인생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5]

 

 

영국의 사회주의 여성학자 실라 로보섬(Sheila Rowbotham)은 울스턴크래프트의 혁명적 사상이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녀는 울스턴크래프트가 강조한 교육이 ‘산업 자본주의에 적합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라고 지적한다.[6] 울스턴크래프트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서구 백인 페미니즘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서구 백인 페미니즘에 반기를 드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제3세계 페미니스트들은 계급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인 여성 억압만을 강조해온 울스턴크래프트의 페미니즘을 문제 삼는다. 하층계급 소녀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식들을 보육원에 맡긴 루소처럼 ‘구시대적 관행’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의 사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접근법은 다양하다. 사상을 이해하는 수많은 관점 중 하나가 절대적인 혜안이 될 수 없다. 단일한 관점은 사상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만을 도울 뿐이며 사상의 한계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언급한 루소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두 사람의 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뚜렷한 한계는 그들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흠이 되지 못한다. 단 하나의 결점을 기준으로 그의 사상 전체를 쓰레기통에 넣을 수 없다. 위대한 사상을 머리로 흡수하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장단점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지식의 특징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불편한 지식의 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엄중히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두렵고 괴로운 ‘지적 성장통’이 와도 조금이나마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1] 《루소, 교육을 말하다》 55쪽

[2] 《이브의 역사》 175쪽 

[3] 《여성의 권리 옹호》 73쪽 

[4] 《영미 여성 소설론》(정우사, 1995) ‘『여성의 학대 혹은 마리아』- 소설적 옹호’ 편, 20쪽 

[5] 《여성의 권리 옹호》 123쪽

[6]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천》 『여성해방 이론의 선구자들(1)』 21쪽 (실라 로보섬의 <Women, Resistance and Revolution>(1972년 출간)의 제2장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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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2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넓고도 깊이있는 지식! 리뷰 잘 읽었습니다.루소 와 울스턴크래프트..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해도 ‘시대적 한계‘는 있을수 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cyrus 2017-10-26 11:16   좋아요 1 | URL
철학 사상을 공부하기 전에 철학가의 생애를 먼저 조사하거나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철학을 공부할 때 철학 속에 스며든 철학자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철학자의 생애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 철학자의 사상을 공부하면 사상의 장점만 보여요. 나중에 사상의 문제점을 알게 되면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철학을 보는 시야의 범위가 결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