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인물이라도 알려지지 않은 내밀한 흠은 있다. ‘완전무결한 위인’이 어디 있으랴. 어렸을 적 아동용 위인전 읽으며 감동했던 위인들의 또 다른 면을 좀 더 커서 알게 됐을 때 실망하게 된다. 그 개운치 않은 감정은 ‘지적 성장’을 위해서 한 번쯤, 아니 배움이 다할 때까지 여러 번 겪어야 할 성장통(growing pain)이다.
*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근대 지식인의 시조로 추앙받는 사상가이다. 루소가 생각한 아동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도시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미개인’[1]을 만드는 것이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불평등의 기원을 자연 상태에서의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데서 찾았다. 원초적 자연 상태의 인간, 즉 미개인은 자신이 선한지 악한 것인지 구분할 줄 모르는 자유롭고 순수한 존재였다. 하지만 미개인은 공동체 경험 속에서 파괴되고 만다. 비교의식과 소유욕이 결합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인간을 소외시켰고 불평등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새물결, 2003)
* 장 자크 루소 《에밀》 (한길사, 2003)
* 장 자크 루소 《에밀》 (책세상, 2003, 요약본)
* 이기범 《루소의 에밀 읽기》 (세창출판사, 2016)
* 고봉만, 황성원 《루소, 교육을 말하다 : 에밀 깊이 읽기》 (살림, 2016)
인간 중심의 사회는 결국 사람을 가꾸는 것으로 귀결된다. 계몽사상이 대두하기 전 어린이들은 ‘덜 자란 어른’으로 취급받았다. 어린이는 ‘이성적인 어른’이 되기 위해 학칙과 규율로 통제하는 기숙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하류층은 아동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고 아동의 노동을 당연시했다. 18세기부터 유럽은 중세의 케케묵은 미몽을 훌훌 털어내면서 이성의 여명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계몽사상이 싹트면서 루소는 아동교육에 대한 생각을 진전시켰다. 그 생각이 집약된 것이 《에밀》이다. 이 책에서 에밀은 틀에 짜인 기숙학교식 교육이 아닌 순수한 자연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아동 성장 시기별에 적합한 전인교육을 중시한다. 교사는 아이 스스로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욕구를 느낄 수 있도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맡는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유명한 말은 이와 부합된다. 따라서 루소가 지향하는 아동교육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 폴 존슨 《지식인의 두 얼굴》 (을유문화사, 2005)
* 리오 담로시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교양인, 2011)
그러나 루소 정작 자신은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루소가 자신의 다섯 명 자식들을 보육원에 보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는 루소가 비정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동에 대한 의식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과거 인식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그 시대에 자식을 보육원에 맡기는 일은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른’과 구별되는 ‘아동’의 개념이 확립되기 시작한 18세기에 어린이는 ‘보호와 교육을 받아야 할 인격체’로 여전히 대우받지 못했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의 권리 옹호》 (책세상, 2011, 요약본)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연암서가, 2014)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는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이다. 이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녀를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어머니’, 또는 ‘아나키즘을 체계화한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의 아내’로만 알려졌다. 두 번의 자살 기도와 사생아를 출산한 사생활 때문에 그녀는 보수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철저히 묻혔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여권의 옹호》는 남녀평등과 교육 기회의 균등한 부여를 강조한 책이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남녀 모두 이성의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 카리 우트리오 《이브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 2000)
그러나 그녀는 니콜라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를 제외한 여성의 교육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 계몽 사상가들’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특히 계몽사상의 거두로 많이 언급되는 루소에 실망한다. 콩도르세는 여성의 평등을 옹호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의 옹호》를 쓰기 위해 콩도르세의《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책세상, 2002)을 참고했다고 한다.[2]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의 옹호》를 통해서 루소의 《에밀》에서 드러나는 아동교육의 한계를 지적한다. 《에밀》에 등장하는 소피는 에밀의 배우자다. 에밀은 소피에게 타인, 즉 남자에게 정성과 배려를 베푸는 삶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소피를 가르치는 에밀의 태도에서 여성을 ‘남성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확인한다. 남성 계몽 사상가들은 여성을 ‘감성’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그래서 여성에게 ‘이성’의 눈을 뜨게 해주는 교육을 받을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성을 위한 여성’으로 맞춰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사회를 ‘운명의 철 침대’로 비유한다.
여성이 단순히 남성을 기쁘게 하고 남성에게 복종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결론은 오로지, 그녀가 자신을 남성에게 적합하게 만들고자 다른 모든 고려 사항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여성의 특성을 억지로 부풀리거나 혹은 축소해서라도 거기에 끼워 맞추어야만 하는 ‘운명의 철 침대’이다. [3]
《여권의 옹호》 집필 이후 울스턴크래프트는 1796년에 <여성의 학대 혹은 마리아>를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마리아는 남성의 활동을 위해 희생당하는 여성을 상징한다. 모이라 퍼거슨은 마리아를 ‘여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소설 인물의 중요한 선조’로 평가한다.[4] 계몽주의 열풍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인간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 ‘인간’에 ‘여성’은 제외되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소녀들도 국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이 복종해야 될 대상은 남성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이효재 엮음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천》 (창비, 1979)
*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1995, 2000)
* 캐럴 페이트만, 메어린 린든 쉐인리 엮음 《페미니즘 정치 사상사》 (이후, 2004)
* 스테퍼니 스탈 《빨래하는 페미니즘》 (민음사, 2014)
그러나 그녀의 급진적 주장에는 시대적 한계가 드러나 있다. 그녀가 생각한 《여권의 옹호》의 예상 독자는 귀족적 허영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비교적 생활 여건이 우수한 부르주아 계급 여성들이다. 철학, 역사, 정치학 등 이성의 눈을 뜨게 해주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부르주아 집안에 태어나고 자란 소녀’들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하층계급 여성을 남녀공학 교육 대상에서 제외했고, 하급계급 여성에게 막일과 바느질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울스턴크래프트는 하급계급 여성을 ‘이성을 가진 평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여권의 옹호》에서 하녀는 남녀평등을 실현한 부르주아 부부의 행복을 위한 희생자로 전락한다.
나는 허드렛일만 하녀에게 맡기고 자녀들을 스스로 돌보며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한 여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았다. 이 소박한 그림을 보며 마음이 흡족해졌을 때, 나는 각자가 각자의 지위에 따르는 의무들을 이행하기 때문에 대등하게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또 서로 독립적인 이 부부는 인생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5]
영국의 사회주의 여성학자 실라 로보섬(Sheila Rowbotham)은 울스턴크래프트의 혁명적 사상이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녀는 울스턴크래프트가 강조한 교육이 ‘산업 자본주의에 적합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라고 지적한다.[6] 울스턴크래프트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서구 백인 페미니즘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서구 백인 페미니즘에 반기를 드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제3세계 페미니스트들은 계급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인 여성 억압만을 강조해온 울스턴크래프트의 페미니즘을 문제 삼는다. 하층계급 소녀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식들을 보육원에 맡긴 루소처럼 ‘구시대적 관행’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의 사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접근법은 다양하다. 사상을 이해하는 수많은 관점 중 하나가 절대적인 혜안이 될 수 없다. 단일한 관점은 사상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만을 도울 뿐이며 사상의 한계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언급한 루소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두 사람의 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뚜렷한 한계는 그들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흠이 되지 못한다. 단 하나의 결점을 기준으로 그의 사상 전체를 쓰레기통에 넣을 수 없다. 위대한 사상을 머리로 흡수하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장단점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지식의 특징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불편한 지식의 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엄중히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두렵고 괴로운 ‘지적 성장통’이 와도 조금이나마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1] 《루소, 교육을 말하다》 55쪽
[2] 《이브의 역사》 175쪽
[3] 《여성의 권리 옹호》 73쪽
[4] 《영미 여성 소설론》(정우사, 1995) ‘『여성의 학대 혹은 마리아』- 소설적 옹호’ 편, 20쪽
[5] 《여성의 권리 옹호》 123쪽
[6]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천》 『여성해방 이론의 선구자들(1)』 21쪽 (실라 로보섬의 <Women, Resistance and Revolution>(1972년 출간)의 제2장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