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 공감 - 우리가 나누지 못한 빨간 날 이야기
김보람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남성에게 생리는 아주 낯설다. 남성들은 생리를 그 날’, ‘마술 등으로 부르며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한다. 어느 남성 종교인은 기저귀 찬 여자는 교회 강단에 설 수가 없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의 삶에서 생리는 천덕꾸러기다. 어떤 사람은 짜증을 내는 여성에게 너 오늘 그 날이지?’라며 놀리듯 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생리 중인 여성이 앉았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말한다. 생리를 바라보는 시각은 시대나 문화권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신성하지 못하거나, 불결하고, 더러운 것으로 인식한다. 심지어 여성 자신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몸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경우가 있다. 건강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생리를 한다. 그런데 생리는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것, 추한 것으로 치부된다. 소녀들은 생리대를 사러 간 가게에서 남들이 볼세라 조심스레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나오기도 한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은 생리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해봤을 것이다.

 

 

 

 

 

 

여성의 몸과 생리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피의 연대기>(2018)를 연출한 김보람 감독생리는 불결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신체 현상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생리할 때 일어나는 몸의 변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생리하는 내 몸을 자랑스러워하자는 게 <피의 연대기> 제작의 취지이다. 김보람 감독은 자신의 책 생리 공감에 자신을 여성으로 받아들이게 된 생리 경험아무렇지도 않게얘기를 한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몸에 집중하게 되며 스스로 몸과의 관계 맺기를 배워 가는 소중한 기회를 얻는다. 생리 공감은 고대부터 숨겨져 온 비밀스러운 빨간 날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저자는 피 흘리는 존재로 살아간 피 자매를 음지에서 해방해주려고 한다.

 

생리 공감을 읽지 않았더라면 1년에 여성이 흘리는 피의 양이 500밀리리터 콜라 한 병정도이며, 평생 흘리는 피의 양이 우리 몸 전체 혈액의 3배 정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피임약은 여성 해방을 촉진한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여성해방을 이룩한 것은 피임약이 아니라 생리대와 탐폰이다. 일회용 생리대와 탐폰의 등장은 피임약만큼이나 여성에게는 해방그 자체였다. 생리대는 여성의 활동성을 높여주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남성들은 생리대를 여자들만 차는 기저귀정도로 생각한다. 그깟 생리대나 탐폰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성의 생리를 생각해보면 생리대의 위력을 깨닫게 된다.

 

여성들은 일회용 생리대를 사용하지만, 그것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의외로 적다. 정확한 원료와 제조법 등은 대기업들의 제조 비밀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모두 일회용 생리대를 사용했다. 그러나 일회용 생리대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시중에 판매된 생리대에서 발암 물질과 피부 자극을 유발하는 성분들이 검출되었다. 생리대 기업의 광고는 표백된 하얀색을 여성의 순결, 즉 깨끗함과 연결하면서 위험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대량생산되는 생리대를 통해 큰 이윤을 얻는 남성 중심의 경제 체제가 여성의 몸을 관리하고 있고, 여성의 건강을 위협한다.

 

이제 피 자매들은 일회용 생리대의 편리함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신의 몸에 맞는 생리대를 착용하고 싶어 한다. 몸이 원하는 생리대를 착용하는 것은 여성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생리 공감은 가르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여성 독자 스스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난 지금까지 어떻게 생리를 하면서 살아왔지?’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남성 독자는 생리 공감을 읽으면서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생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러면 생리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무지에서 벗어나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여성들이 생리의 소중함과 생리대의 위험성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던 것은 월경은 더럽고 창피하며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압력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해왔기 때문이다.

 

생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즐길 수 있는 첫걸음이다. 여전히 생리를 폄하하는 몇몇 남성들이 있다. 그들은 무상 생리대 보급과 생리 휴가를 여성을 위한 특혜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논리대로 생리가 여성의 특혜라면 왜 생리를 불결한 것으로 취급하고 생리하는 여성을 무시하는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담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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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3-13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페미니스트 되는 소리가 서울까지 들립니다. 멋쟁이.

cyrus 2018-03-13 17:24   좋아요 0 | URL
레드스타킹을 회사라고 하면, 전 신입 사원이에요.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멤버들이 저보고 ‘인턴’이라고 하더군요. 아직 모르는 게 많고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대구에 오시면 저한테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매주 월요일에 독서모임이 있어요. 그 날에 맞춰 syo님을 특별손님 자격으로 모임에 초대하겠습니다. ^^

syo 2018-03-13 17:31   좋아요 0 | URL
ㅎㄷㄷ.... 무섭다...

2018-03-13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13 17:27   좋아요 0 | URL
어떤 사람은 생리를 남성의 몽정과 동등하게 보더군요. 남성의 몽정은 성적 쾌감이 느껴야 나오는 신체 현상이죠. 몽정을 생리와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건 무식한 소리입니다. 이렇듯 생리를 잘 모르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stella.K 2018-03-13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여기에 더 자세히 썼구나.ㅋ
블로그에라도 여성의 생리와 미투에 대해서 시끄러울 정도로
얘기를 더 많이 해야하는데...
여긴 너무 점잖은 것 같아.ㅠ

cyrus 2018-03-14 12:17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면서 페미니즘과 여성 문제를 이해하는 것, 직접 사람들을 만나면서 페미니즘과 여성 문제를 이해하는 것. 두 가지 상황을 비교하면 차이점이 많아요. 독서모임에 참석하거나 페미니즘 관련 강연을 들어보면 책에 나오는 페미니즘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요. 페미니즘과 여성 운동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진행되려면 결국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봐야 해요. 알라딘 같은 온라인 공간은 논의가 진행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아니에요. 한 번 토의가 시작되면 ‘진흙탕’으로 변하지요.. ㅎㅎㅎ

2018-03-14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14 12:19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을 인용하셔도 됩니다. ^^
 

 

 

 

 

 

 

어제 대구에 8년 만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적설량은 1907년 기상 관측 이래 대구에서 3월에 내린 눈으로는 세 번째로 많았다고 합니다. 어제 대구를 포함한 전국에 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대회가 펼쳐졌습니다.

 

 

 

 

 

 

행사 전날에 들려온 비 예보 소식의 영향으로 행사 진행 방식이 축소 · 변경되었지만, ‘3.8 여성 선언문’ 낭독 기념식과 거리 행진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대구 여성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멤버들은 ‘Me Too’ 문구 스티커를 붙인 보라색 비옷을 입었습니다. 보라색은 여성의 날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본 행사가 오후 3시 반부터 진행되었기 때문에 저는 늦게 참석했습니다. 너무 늦게 행사 장소에 도착하는 바람에 거리 행진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여기 공개된 행사 관련 사진들은 행사에 참석한 멤버들이 찍은 것들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공개한 것입니다.

 

사실, 어제 행사 후기를 쓸까 말까 고민했어요. 여성 운동의 주체가 여성이듯이 여성 운동을 기록하는 주체 역시 여성이어야 합니다. ‘남성’인 제가 여성 운동의 현장을 구경하듯이 글을 쓰는 게 페미니즘의 원칙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저는 여성대회의 시작과 끝을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대회 후기를 쓸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어요. 이미 멤버들은 인스타그램, 트위터에 행사 현장을 실시간으로 찍은 사진들을 공개했습니다. 여성대회에 참석한 멤버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생생한 후기’를 쓴다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대구와 같은 지방에서도 여성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남성 중심 사회를 바꾸기 위해 광장에 서서 힘껏 목소리를 외치는 여성들이 대구에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저는 어제 집에서 페미니즘 책을 읽고 있었을 것입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할 줄 아는’[1] 페미니스트입니다. 이분들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할 줄만 아는’ 남자였습니다. 페미니즘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사회 변화를 촉구하려면 말과 생각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3 · 8 여성선언문’ 전문과 민중가요 ‘딸들아 일어나라’ 노랫말로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3 · 8 여성선언

『변화는 시작되었고, 달라진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 말하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촛불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여성들의 외침은 지금 ‘말하기’를 통해 성 평등한 민주주의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여성들에게 촛불 혁명은 부패한 정권을 교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를 바꿔내야 한다. 성 평등이 빠진 민주주의는 여성들에게 의미가 없다. 이 사회 절반의 구성원인 여성들이 시민으로서, 주권자로서 선언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뿌리에서부터 바꿔내자.

 

혁명은 진행 중이며 이 혁명의 주체는 여성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했던 차별과 동조, 침묵의 구조가 문제이다. ‘남성’이 모든 것의 기준인 성차별적 사회에서 ‘여성’이라서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과 폭력, 차별은 어떤 여성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성차별적 사회는 일터와 학교, 가정에서 일상의 성폭력을 가능케 하며, 국가는 여성의 몸을 인구조절의 도구로 취급해 여성에게만 ‘낙태의 죄’를 묻고 있다. 여성의 노동은 평가절하 되어 여성들은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 빈곤에 내몰리고 있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 · 경제 · 사회 전반에서 여성 대표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근절하라고 계속 말해왔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에 일침을 가했고,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여성혐오를 고발했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시작으로 각 영역별 성폭력을 고발하는 ‘○○.내.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했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 시위’로 여성의 몸에 대한 주체성을 선포했다.

 

지금 각계에서 터져 나오는 #MeToo 운동은 극심한 성차별적 사회구조의 결과이자 더 이상의 억압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분노의 폭발이다. 우리는 말하는 모든 이들과 하나이며, 침묵을 넘어 변화를 위한 연대의 손을 맞잡을 것이다. 변화에 대한 열망은 거세다. 여성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세상은 끝났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가능케 했던 남성 중심 사회 구조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은 주권자 여성을 2등 시민 취급하여 여성의 경험을 삭제하고 사소화시키는 모든 것들과 싸워 이길 것이다. 2018년, 지금이 그 때다. 내 삶을 바꾸는 성 평등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를 이뤄내자. 국가는 주권자 여성의 명령에 응답해야 한다. 나라의 기본 틀을 다시 짜는 성 평등 개헌을 실현하라! 여성의 일상을 위협하는 젠더 폭력을 근절하라!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는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라!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여성 대표성을 확대하라!

낙태죄를 폐지하라! 생리대를 무상제공하라!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 여성들은 연결되어 있으며, 연대할 것이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여성의 경험은 사회의 기준이 될 것이다. 성 평등 민주주의가 우리의 삶을 바꾸고 민주주의를 완성할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달라진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2018년 3월 8일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25회 대구여성대회 참가자 일동

 

 

 

 

 

딸들아 일어나라

 

 

어두웠던 밤 지나 새벽이 얼어붙은 땅 녹아

새싹이 케케묵은 낡은 틀 싹둑 잘라 버리고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사랑도 행복도 다 빼앗겨 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 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해방 노동해방

 

우리는 이 땅의 노동자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더 이상 벼랑 끝에 흔들릴 수는 없다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고귀한 모성본능 다 빼앗겨 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 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해방 노동해방

 

 

 

 

[1]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우리학교, 2017)의 제목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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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1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에는 눈이 내렸군요.

여긴 봄이 제대로 와서, 날이 벌써 더워졌습니다.

책읽기에 아주 좋은 계절입니다만, 막상 책만
읽기에는 아쉬운 그런 계절이 되었네요.

미투 빠이팅!@

cyrus 2018-03-13 15:00   좋아요 0 | URL
눈 내린지 사흘이 지난 오늘 대구 날씨는 덥습니다.. ㅎㅎㅎ
 

 

 

 

 

우리나라 성 소수자들은 성폭력에 무방비 상태입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 정체성이 공개되기(아우팅, Outing)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아우팅으로 인해 성폭력을 당해도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가해자는 이 점을 악용해 똑같은 범행을 반복해서 저지릅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 형법 제297를 살펴볼까요? 형법 제297조에 강간죄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297(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본래 강간죄는 부녀(婦女)’를 강간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였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 법 개정을 통해 사람으로 바뀜으로써 남성, 여성 그리고 성 전환자에 대해서도 강간죄가 성립됩니다. 성 전환자도 사람이며 성희롱 및 성폭행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 성폭행당한 트랜스 여성(Trans Woman)을 피해자로 보지 않는 사회적 편견이 남아 있습니다.

 

 

 

 

 

 

 

 

 

 

 

 

 

 

 

 

 

* 쉴라 제프리스 래디컬 페미니즘(열다북스, 2018)

    

 

 

트랜스 여성이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에 동참하면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페미니스트(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 TERF)들이 반발하고 나섭니다. TERF는 여성성을 수행하려는 트랜스 여성이 성별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페미니즘 운동에 트랜스 여성이 포함되어서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폭행당한 트랜스 여성은 미투 운동에 나설 수 없는 것일까요?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 고통받아왔던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여성 장애인이 성폭행 피해자라면 그녀들이 미투 운동에 나설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 비장애인은 그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장애여성이라는 두 겹의 차별구조 속에 놓여있는 여성 장애인은 인권을 위한 법 · 제도화 과정에서 소외돼 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인지능력이 낮거나 저항하기 어려운 정신지체나 중증장애를 가진 여성들을 대상으로 자행되는 성범죄는 비장애인 성폭력 가해자에 의해 은폐되기 쉽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자원봉사자에 의해 성폭력을 당해도 신고조차 못 하는 여성 장애인들의 피해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 [읽을 예정인 책]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 이론 : 입문(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2)

* 김미덕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현실문화, 2016)

 

 

 

최근에 저는 퀴어 이론(Queer theory)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에 관심이 많습니다. 퀴어 이론과 교차성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성별 이분법이 작동되는 이성애 중심의 사회,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사회에 향해 좀 더 많은 의문을 던지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싶어서 어제 대구 녹색당대구경북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주최한 토크 콘서트에 참석했습니다. 토크 콘서트 제목은 차별에 맞서는 퀴어의 정치입니다.

 

 

 

 

 

 

 

 

 

 

 

 

 

 

 

 

 

* [품절] 녹색당 선언(이매진, 2012)

 

 

 

저는 어느 정당에 가입되지 않은 비당원입니다. 하지만 녹색당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현재 녹색당원으로 활동하는 감은빛님2011년에 알게 된 계기로 이듬해에 창당된 녹색당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창당 시기에 맞춰 서른 명 이상의 녹색당원들의 글들을 모은 녹색당 선언(이매진, 2012)에 출간되었고요, 저는 그 책을 읽고 나서 녹색당을 지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현재 녹색당은 원외정당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환경 정치 중심의 정당이 있어야 합니다. 녹색당은 환경 운동뿐만 아니라 여성 운동, 성 소수자 운동도 이끌고 있습니다. 녹색당 평등문화 약속문은 녹색당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의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강령입니다.

 

 

 

 

 

 

녹색당 평등문화 약속문

 

1. 우리 모두는 녹색당의 주체이며, 나이, 성별,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장애여부,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혼인여부, 가족관계 등에 관계없이 동등하다.

 

2. 녹색당 당원은 서로를 존중하며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

 

3. 당내 평등문화를 훼손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공동으로 대처한다.

 

4. 당 활동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경어를 사용하고, 상호 동의 없이 반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5. 나이, 성별,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등에 관한 고정관념이 담긴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

 

6. 상대방이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은 하지 않는다.

 

7. 외모와 관련된 발언을 주의한다.

 

8.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은 하지 않으며, 혐오 발언에 대해서 항의한다.

 

9. 연애와 결혼은 필수가 아님을 유의한다.

 

10. 평등문화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한 상대방의 거부의사가 있었을 시에 즉각 중단한다.

 

11. 녹색당의 당내 행사의 주관자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경고하고 제지한다.

 

12. 녹색당의 당내 행사의 주관자는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를 보장하도록 노력한다.

    

 

 

 

토크 콘서트 1부는 차별금지법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이었습니다. 1부 강연자는 대구 퀴어문화 축제 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이자 무지개인권연대 대표배진교 님이었습니다. 배진교 님은 차별금지법이 왜 제정돼야 하는지를 역설하면서, 성 소수자를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법과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성 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배진교 님은 차이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존중되어야 할 사람에게 있는 고유한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배경에는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성 소수자 혐오와 잘못된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은 성 소수자가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권리를 지키기 위한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성 소수자를 위한 특혜가 절대로 아닙니다.

 

 

 

 

 

 

 

 

 

 

 

 

 

 

 

 

 

 

 

 

*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바다출판사, 2015)

 

 

 

MTF트랜스젠더 여성운동가인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남성, 여성 어디에 속하지 않는 유동적인 성 정체성을 지향합니다. 그녀의 성 정체성은 넌 바이너리 트랜스젠더와 비슷합니다. 성 소수자가 존중받지 못하면 그들은 영원히 사회로부터 차별받게 되고,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합니다. 성 소수자는 시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보건의료권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트랜스 여성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찾아가 호르몬 주사를 투여받습니다. 그러나 트랜스 여성은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없습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호르몬 주사를 투여받게 되면 18,000원에서 20,000원 정도의 비용을 내야 합니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

*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지승호 후천성 인권 결핍 사회를 아웃팅하다(시대의창, 2017)

 

 

 

토크 콘서트가 끝나고 난 뒤에 녹색당원들과 함께 식당에서 반주를 마셨습니다. 저는 배진교 님성 소수자 소모임을 운영하는 청년 녹색당원과 합석하게 됐습니다. 평소 퀴어와 성 소수자 운동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그분들에게 질문할 수 있었고, 책에서 볼 수 없는 퀴어와 성 소수자 실태를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은 ()’하는 게 있습니다.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TERF의 거센 반발이 만만치 않지만, 저는 급진적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은 급진적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고전으로 평가받지만, 그 책 속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성적 계급 철폐), 교차성 페미니즘(흑인 여성 차별 문제), 퀴어 페미니즘(젠더 이분법 철폐, 성적 자유 지향)이 추구하는 내용이 다 나와 있습니다. TERF와 성 소수자 간의 극단적인 대립 구도는 여성 운동, 성 소수자 운동 발전에 하등 도움 되지 않습니다. 한동대학교처럼 시대를 역행하는 거대 단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이 끝내 버리지 못한 편협한 논리에 맞서려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공부해야 합니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같이 공부하는 것, 그것은 '모두를 위한 공부'입니다. 여성과 성 소수자들이 모여 손을 맞잡도록 하는 기초적인 연대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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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3-07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페니미즘을 꼭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8-03-07 21:32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인습, 편견,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생긴 언어와 사소한 행동들이 불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sprenown 2018-03-07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가봐요.언어습관이나 인습적사고..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을 이제 읽기 시작했는데 ‘내면화된 성차별의식‘을 자각하는게 공부의 시작인가 봅니다. 반성할 일이 많네요!

cyrus 2018-03-07 22:06   좋아요 1 | URL
내면에 남아있는 성차별, 편견을 완전히 떨쳐내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페미니즘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

sprenown 2018-03-07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 단순한게 아니네요. 가부장제,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

cyrus 2018-03-07 22:15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이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진 학문이었다면 절대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sprenown 2018-03-07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관련책뿐만아니라 관련강의도 들으면서 공부해봐야겠어요.
 

 

 

 

 

 

 

일요일 밤부터 내리기 시작했던 비는 어제 오후에 그쳤습니다. 퇴근길에 빵집에 들렀습니다. 스몰토크에 일찍 도착해서 <빵과 장미> 영화 상영회를 준비한 분들을 위해 요깃거리를 챙기고 싶었습니다. 스몰토크에 도착해 보니 영상기와 의자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음료를 마실 수가 없어서 미리 음료를 주문했어요. 제가 사들고 온 빵과 다른 레드스타킹 멤버가 사 온 도넛과 같이 먹기 위해 바닐라라떼를 주문했습니다. 빵 몇 조각과 도넛 두세 개 정도 먹고 나니까 금방 배가 불렀습니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스몰토크에 많은 분이 찾아왔습니다. 다행히 의자가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막 시작할 때 친구한테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영화 초반부를 보지 못했어요.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져서 영화의 중요 장면을 놓쳤을까 봐 마음속으론 초조했습니다. 영화 중반부터 보기 시작했지만, 영화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 각자 영화 감상평을 자유롭게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연히, 어제의 화제 인물 '안희정'과 미투 운동'에 대한 얘기도 나왔습니다.

 

어제 영화 상영회 후기를 작성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필기를 했는데, 후기를 쓸 필요가 없어졌어요. 오늘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영화 상영회 공식 후기가 공개되었거든요. 공식 후기를 작성한 분이 핵심 내용만 쏙쏙 골라 잘 정리했습니다. 후기에 영화에 대한 주요 줄거리에 대한 언급은 없고요, 이미 <빵과 장미>를 보신 분은 다른 분들의 느낀 점을 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3.8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레드스타킹에서는 <빵과 장미>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인 찬스와 트위터, 인스타그램에서 보시고 손님 8명이 와주셨어요.

 

여성의 날의 유래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빵과 장미’를 줄 것을 외치는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빵은 생존권, 그리고 장미는 참정권을 의미했고 이 사건을 통해서 빵과 장미는 여성의 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모티브 삼아 제작한 영화입니다.

 

 

 

 

 

이런 모임에서는 재미없는 영화를 본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오셨다면,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게 보셨을 것 같습니다. 참석하신 몇몇 분들은 눈물을 보이기도 하셨는데요. 여성이 노동뿐만 아니라 성상납, 몸까지 착취당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주인공 언니의 상황과 그런 여성들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좀 아쉬웠던 점은 국내 포스터의 내용은 영화 본연의 내용을 나타내기 부적절했고요(빻았다고 하죠?ㅎ) 로맨스도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찐한 키스신 밖에(?) 없고 스토리 연관성도 떨어져요) 2002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현재 우리 사회와도 비슷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 노동조합 활동가, 새터민, 여성이주노동자들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투쟁하는 모습, 여성으로써 겪는 문제들을 표현했기 때문에 대구분들이 보기엔 빨갛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 주변에 존재할 수 있는 평범한 여성들의 일이 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개인들의 연대와 작은 승리의 경험들이 쌓이면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어제 저는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와 독일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에 대해서 소개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불필요한 설명이 많았습니다. 1911년에 체트킨이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하자는 제안이 나온 이후로 프랑스에서도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 여성의 날을 지정했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면 될 것을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콩도르세(Condorcet)의 사망일에 맞춰서 세계 여성의 날이 정해졌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바람에 저 다음 분이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할 뻔했어요. 제가 표현력이 부족한 탓에 언급해도 되지 않을 부연 설명을 걸러내지 못했습니다. 미리 조사한 내용을 모임에서 말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뭔지 따져가면서 검토해야겠습니다.

 

 

 

 

 

 

 

※ 커피 사진, 영화 포스터를 제외한 나머지 사진들은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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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8-03-0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행사 넘 부럽네요. 많은 분들에게 귀중한 시간이었겠어요

cyrus 2018-03-07 18:51   좋아요 0 | URL
혼자서 페미니즘을 공부했던 시절이 부끄러웠습니다. 소중한 경험 덕분에 페미니즘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전보다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네이버후드 프로젝트 - 유전자와 문화의 이중 나선 사이에서
데이비드 슬론 윌슨 지음, 황연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무한한 자연의 진리를 알아내려는 과학자들의 지적 분야인가? 아니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학문인가? 우리는 과학이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바꾸는 실용 학문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해도 과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대부분 사람, 특히 문과 출신들은 과학이 수학 다음으로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과학적인 사고 없이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과생으로 수능시험을 준비하기 전까지 고등학생 1학년의 나는 과학을 암기 과목처럼 공부했다. 이런 잘못된 학습법은 대학생이 될 때까지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늦바람이 들어 독서로 과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이런 학습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학의 묘미를 점점 이해할수록 과학을 재미없게 공부한 것을 후회했다. 과학은 정말로 우리의 생활과는 관계가 없고, 어렵기만 한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과거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의식과 함께 비로소 과학은 존재 의미가 있게 된다. 과학이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 학문이라면 우리는 과학을 수행 도구로 삼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슬론 윌슨(David Sloan Wilson)《네이버후드 프로젝트》(사이언스북스, 2017)는 진화론이 인간의 삶의 질을 궁극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진화론의 유용성에 천착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5년간에 걸친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미국 뉴욕주 도시 빙엄턴(Binghamton)의 변천 과정, 인구 구조, 빈부 격차 등을 진화론적 관점으로 분석한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빙엄턴 네이버후드 프로젝트(BNP)’이라고 명명한다. 《네이버후드 프로젝트》는 도시에 대한 과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다. 600쪽이 넘는 이 책을 보는 독자는 누구나 이 한 권의 책을 낳기 위해서 저자와 BNP에 참여한 사람들이 흘린 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과학이 종교와 문학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어떤 의미에서 과학이 좋은 학문인지를 역설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종교와 같은 문화도 진화한다고 주장한 진화론자답게 ‘진화적 패러다임(Evolutionary Paradigm)이 인간 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통찰을 제공’[1]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과학은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상을 이해(경청: listening)하며 현존하는 세상의 문제들을 개선하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하기(고찰: reflecting) 위한 학문이다.

 

진화론의 대가로서의 면모만이 이 책을 채우고 있지 않다.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하는 인식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그리고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켜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류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 테아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저자의 색다른 진화론적 관점을 확인하게 된다. ‘신 무신론자’로 분류되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샘 해리스(Sam Harris),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를 비판하는 대목도 눈여겨 볼만 하다. 재미있게도 윌슨 역시 무신론자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인류에게 해로운 것으로 규정하는 신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 종교를 없앤다고 해서 인간의 비합리적인 믿음 및 행동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유전자와 문화의 이중 나선 사이에서’라는 부제가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저자는 이 부제를 통해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얽힌 복잡한 상호 작용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즉, 인류는 유전적 진화에 덧붙여 문화적 진화를 진행해왔으며, 두 진화는 상호작용으로 연결되었다.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류가 어떻게, 왜 출현하고 살아남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 이 실마리를 놓치면 인류, 우리의 미래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상할 수 없게 된다. 진화는 양면의 동전이다. 인류는 이 땅에 처음 등장하자마자 가장 오래된 ‘운명의 동전’, 즉 ‘진화’라는 이름의 동전을 던졌다. 매번 결정적 고비를 맞이할 때면 삶과 직결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전을 던졌다. 다행히 인류는 몇 차례 ‘행운’이라는 결과를 얻어내 순탄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기세등등한 인류가 동전의 영향력을 잊어버린다면 인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리게 된다. 윌슨은 인류가 ‘진화 과정의 현명한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은 실생활과 분리될 수 없으며, 진화론은 역동적인 우리의 유전자, 문화를 이해하게 해주는 유용한 이론이다.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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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0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작용을 보니 저자가 비판한 「이기적 유전자」의 밈(meme)이 떠오르네요.

cyrus 2018-03-06 15:20   좋아요 1 | URL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테아르 드 샤르댕을 옹호하는 저자의 주장이 흥미로웠습니다. <네이버후드 프로젝트>를 읽기 전에 역시 저자가 쓴 <종교는 진화한다>를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