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구에 8년 만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적설량은 1907년 기상 관측 이래 대구에서 3월에 내린 눈으로는 세 번째로 많았다고 합니다. 어제 대구를 포함한 전국에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대회가 펼쳐졌습니다.
행사 전날에 들려온 비 예보 소식의 영향으로 행사 진행 방식이 축소 · 변경되었지만, ‘3.8 여성 선언문’ 낭독 기념식과 거리 행진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대구 여성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멤버들은 ‘Me Too’ 문구 스티커를 붙인 보라색 비옷을 입었습니다. 보라색은 여성의 날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본 행사가 오후 3시 반부터 진행되었기 때문에 저는 늦게 참석했습니다. 너무 늦게 행사 장소에 도착하는 바람에 거리 행진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여기 공개된 행사 관련 사진들은 행사에 참석한 멤버들이 찍은 것들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공개한 것입니다.
사실, 어제 행사 후기를 쓸까 말까 고민했어요. 여성 운동의 주체가 여성이듯이 여성 운동을 기록하는 주체 역시 여성이어야 합니다. ‘남성’인 제가 여성 운동의 현장을 구경하듯이 글을 쓰는 게 페미니즘의 원칙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저는 여성대회의 시작과 끝을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대회 후기를 쓸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어요. 이미 멤버들은 인스타그램, 트위터에 행사 현장을 실시간으로 찍은 사진들을 공개했습니다. 여성대회에 참석한 멤버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생생한 후기’를 쓴다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대구와 같은 지방에서도 여성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남성 중심 사회를 바꾸기 위해 광장에 서서 힘껏 목소리를 외치는 여성들이 대구에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저는 어제 집에서 페미니즘 책을 읽고 있었을 것입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할 줄 아는’[1] 페미니스트입니다. 이분들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할 줄만 아는’ 남자였습니다. 페미니즘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사회 변화를 촉구하려면 말과 생각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3 · 8 여성선언문’ 전문과 민중가요 ‘딸들아 일어나라’ 노랫말로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3 · 8 여성선언
『변화는 시작되었고, 달라진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 말하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촛불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여성들의 외침은 지금 ‘말하기’를 통해 성 평등한 민주주의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여성들에게 촛불 혁명은 부패한 정권을 교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를 바꿔내야 한다. 성 평등이 빠진 민주주의는 여성들에게 의미가 없다. 이 사회 절반의 구성원인 여성들이 시민으로서, 주권자로서 선언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뿌리에서부터 바꿔내자.
혁명은 진행 중이며 이 혁명의 주체는 여성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했던 차별과 동조, 침묵의 구조가 문제이다. ‘남성’이 모든 것의 기준인 성차별적 사회에서 ‘여성’이라서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과 폭력, 차별은 어떤 여성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성차별적 사회는 일터와 학교, 가정에서 일상의 성폭력을 가능케 하며, 국가는 여성의 몸을 인구조절의 도구로 취급해 여성에게만 ‘낙태의 죄’를 묻고 있다. 여성의 노동은 평가절하 되어 여성들은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 빈곤에 내몰리고 있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 · 경제 · 사회 전반에서 여성 대표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근절하라고 계속 말해왔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에 일침을 가했고,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여성혐오를 고발했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시작으로 각 영역별 성폭력을 고발하는 ‘○○.내.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했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 시위’로 여성의 몸에 대한 주체성을 선포했다.
지금 각계에서 터져 나오는 #MeToo 운동은 극심한 성차별적 사회구조의 결과이자 더 이상의 억압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분노의 폭발이다. 우리는 말하는 모든 이들과 하나이며, 침묵을 넘어 변화를 위한 연대의 손을 맞잡을 것이다. 변화에 대한 열망은 거세다. 여성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세상은 끝났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가능케 했던 남성 중심 사회 구조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은 주권자 여성을 2등 시민 취급하여 여성의 경험을 삭제하고 사소화시키는 모든 것들과 싸워 이길 것이다. 2018년, 지금이 그 때다. 내 삶을 바꾸는 성 평등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를 이뤄내자. 국가는 주권자 여성의 명령에 응답해야 한다. 나라의 기본 틀을 다시 짜는 성 평등 개헌을 실현하라! 여성의 일상을 위협하는 젠더 폭력을 근절하라!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는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라!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여성 대표성을 확대하라!
낙태죄를 폐지하라! 생리대를 무상제공하라!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 여성들은 연결되어 있으며, 연대할 것이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여성의 경험은 사회의 기준이 될 것이다. 성 평등 민주주의가 우리의 삶을 바꾸고 민주주의를 완성할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달라진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2018년 3월 8일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25회 대구여성대회 참가자 일동
딸들아 일어나라
어두웠던 밤 지나 새벽이 얼어붙은 땅 녹아
새싹이 케케묵은 낡은 틀 싹둑 잘라 버리고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사랑도 행복도 다 빼앗겨 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 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해방 노동해방
우리는 이 땅의 노동자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더 이상 벼랑 끝에 흔들릴 수는 없다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고귀한 모성본능 다 빼앗겨 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 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해방 노동해방
[1]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우리학교, 2017)의 제목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