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 소수자들은 성폭력에 무방비 상태입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 정체성이 공개되기(아우팅, Outing)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아우팅으로 인해 성폭력을 당해도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가해자는 이 점을 악용해 똑같은 범행을 반복해서 저지릅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 형법 제297조를 살펴볼까요? 형법 제297조에 강간죄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제297조(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본래 강간죄는 ‘부녀(婦女)’를 강간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였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 법 개정을 통해 ‘사람’으로 바뀜으로써 남성, 여성 그리고 성 전환자에 대해서도 강간죄가 성립됩니다. 성 전환자도 사람이며 성희롱 및 성폭행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 성폭행당한 트랜스 여성(Trans Woman)을 피해자로 보지 않는 사회적 편견이 남아 있습니다.
* 쉴라 제프리스 《래디컬 페미니즘》 (열다북스, 2018)
트랜스 여성이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에 동참하면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페미니스트(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 TERF)들이 반발하고 나섭니다. TERF는 여성성을 수행하려는 트랜스 여성이 성별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페미니즘 운동에 트랜스 여성이 포함되어서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폭행당한 트랜스 여성은 미투 운동에 나설 수 없는 것일까요?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 고통받아왔던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여성 장애인이 성폭행 피해자라면 그녀들이 미투 운동에 나설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 비장애인은 그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장애’와 ‘여성’이라는 두 겹의 차별구조 속에 놓여있는 여성 장애인은 인권을 위한 법 · 제도화 과정에서 소외돼 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인지능력이 낮거나 저항하기 어려운 정신지체나 중증장애를 가진 여성들을 대상으로 자행되는 성범죄는 비장애인 성폭력 가해자에 의해 은폐되기 쉽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자원봉사자에 의해 성폭력을 당해도 신고조차 못 하는 여성 장애인들의 피해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 [읽을 예정인 책]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 이론 : 입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2)
* 김미덕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현실문화, 2016)
최근에 저는 퀴어 이론(Queer theory)과 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에 관심이 많습니다. 퀴어 이론과 교차성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성별 이분법이 작동되는 이성애 중심의 사회,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사회에 향해 좀 더 많은 의문을 던지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싶어서 어제 대구 녹색당과 대구경북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주최한 토크 콘서트에 참석했습니다. 토크 콘서트 제목은 ‘차별에 맞서는 퀴어의 정치’입니다.
* [품절] 《녹색당 선언》 (이매진, 2012)
저는 어느 정당에 가입되지 않은 비당원입니다. 하지만 녹색당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현재 녹색당원으로 활동하는 감은빛님을 2011년에 알게 된 계기로 이듬해에 창당된 녹색당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창당 시기에 맞춰 서른 명 이상의 녹색당원들의 글들을 모은 《녹색당 선언》(이매진, 2012)에 출간되었고요, 저는 그 책을 읽고 나서 녹색당을 지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현재 녹색당은 원외정당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환경 정치 중심의 정당이 있어야 합니다. 녹색당은 환경 운동뿐만 아니라 여성 운동, 성 소수자 운동도 이끌고 있습니다. 녹색당 평등문화 약속문은 녹색당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의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강령입니다.
녹색당 평등문화 약속문
1. 우리 모두는 녹색당의 주체이며, 나이, 성별,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장애여부,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혼인여부, 가족관계 등에 관계없이 동등하다.
2. 녹색당 당원은 서로를 존중하며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
3. 당내 평등문화를 훼손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공동으로 대처한다.
4. 당 활동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경어를 사용하고, 상호 동의 없이 반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5. 나이, 성별,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등에 관한 고정관념이 담긴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
6. 상대방이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은 하지 않는다.
7. 외모와 관련된 발언을 주의한다.
8.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은 하지 않으며, 혐오 발언에 대해서 항의한다.
9. 연애와 결혼은 필수가 아님을 유의한다.
10. 평등문화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한 상대방의 거부의사가 있었을 시에 즉각 중단한다.
11. 녹색당의 당내 행사의 주관자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경고하고 제지한다.
12. 녹색당의 당내 행사의 주관자는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를 보장하도록 노력한다.
토크 콘서트 1부는 ‘차별금지법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이었습니다. 1부 강연자는 대구 퀴어문화 축제 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이자 무지개인권연대 대표인 배진교 님이었습니다. 배진교 님은 차별금지법이 왜 제정돼야 하는지를 역설하면서, 성 소수자를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법과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성 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배진교 님은 차이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존중되어야 할 사람에게 있는 고유한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배경에는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성 소수자 혐오와 잘못된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은 성 소수자가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권리’를 지키기 위한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성 소수자를 위한 ‘특혜’가 절대로 아닙니다.
*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2015)
MTF트랜스젠더 여성운동가인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은 남성, 여성 어디에 속하지 않는 유동적인 성 정체성을 지향합니다. 그녀의 성 정체성은 넌 바이너리 트랜스젠더와 비슷합니다. 성 소수자가 존중받지 못하면 그들은 영원히 사회로부터 차별받게 되고,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합니다. 성 소수자는 ‘시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보건의료권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트랜스 여성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찾아가 호르몬 주사를 투여받습니다. 그러나 트랜스 여성은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없습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호르몬 주사를 투여받게 되면 18,000원에서 20,000원 정도의 비용을 내야 합니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지승호 《후천성 인권 결핍 사회를 아웃팅하다》 (시대의창, 2017)
토크 콘서트가 끝나고 난 뒤에 녹색당원들과 함께 식당에서 반주를 마셨습니다. 저는 배진교 님, 성 소수자 소모임을 운영하는 청년 녹색당원과 합석하게 됐습니다. 평소 퀴어와 성 소수자 운동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그분들에게 질문할 수 있었고, 책에서 볼 수 없는 퀴어와 성 소수자 실태를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은 ‘통(通)’하는 게 있습니다.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TERF의 거센 반발이 만만치 않지만, 저는 급진적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은 급진적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고전으로 평가받지만, 그 책 속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성적 계급 철폐), 교차성 페미니즘(흑인 여성 차별 문제), 퀴어 페미니즘(젠더 이분법 철폐, 성적 자유 지향)이 추구하는 내용이 다 나와 있습니다. TERF와 성 소수자 간의 극단적인 대립 구도는 여성 운동, 성 소수자 운동 발전에 하등 도움 되지 않습니다. 한동대학교처럼 시대를 역행하는 거대 단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이 끝내 버리지 못한 편협한 논리에 맞서려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공부해야 합니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같이 공부하는 것, 그것은 '모두를 위한 공부'입니다. 여성과 성 소수자들이 모여 손을 맞잡도록 하는 기초적인 연대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