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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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의 쓰나미에 휩쓸리는 현대인

 

하루 자고 나면 세상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되는 이 세상에서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며 그 변화의 방향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면 지위가 높아지는 사람보다 낮아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만큼 사회적인 불안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그것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인생의 낙오자나 실패자로 간주된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신이 혹시 세상의 왕따가 되지 않을까 또는 실패자로 규정되지 않을까 하는 만성적인 불안감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경제 불황, 실업률 증가, 구조 조정 등의 어두운 사회현실은 더욱 더 우리를 불안으로 내몰고 있다. 마치 불안은 삶의 전면에서 우리를 마구 뒤흔들어놓는 거대한 쓰나미와도 같다. 그리고 이처럼 불안이 휩쓸고 간 후에 남는 것이라고는 자괴감과 상실감 밖에 없다.

 

 

 

 '불안'이라는 성가신 불청객 달래기


알랭 드 보통은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기 때문에 불안이 야기된다고 분석한다.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 등으로 인해 불안한 것이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욱 커진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불안은 어쩌면 부와 권력에 안달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욕망의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비단 드 보통만이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이 겪고 있는 불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의 대부분은 서점의 '처세술' 코너에 쌓여 있다. 그 책들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전략'이다.

 

드 보통은 다르다. 그는 우선 불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삶이라는 전쟁터는 과연 어떠한 곳인가?', '삶은 과연 전쟁이기만 한 것인가?'  드 보통은 우리의 삶에서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불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를 통해서 이 성가신 불청객을 어떻게 달래주면서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언해준다.

 

 

 

 불안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

 

사회로부터 도태되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한 애처로운 불안의 절규와 몸부림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은 점점 더 소심해지고 작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불안을 감싸하고 다독일 줄 알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은 남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예외적인 인물들이며, 사회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갈 줄 아는 즐거운 산책자이다.

일찍이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욕이나 비난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성은 타인의 말과 시선이 실제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타인의 말보다 자신의 이성을 더 신뢰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남의 생각이나 판단을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보헤미안들은 경제적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에 대항함으로써,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키고자 한 삶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은 세상이 외면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몸소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불안에 당당했던 그들은 단순히 경제력이나 물질적 성공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가치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와 '불안'을 가둬버린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나보다 성공한 사람에 대한 불쾌감을 잘 표현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남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처럼 남들보다 잘 보이려고, 좀 더 우월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늘날 현대인을 점점 더 병들게 만든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다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차피 나는 남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한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불안감과 마주쳐야 한다. 그런데 알랭 드 보통에 의하면, 인간이 느끼는 불안감의 정도는 자신이 생각하는 준거집단, 바꿔 말하면 세상의 울타리에 한정된다고 한다. 세상에 나름의 울타리를 치고서는 적어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우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 스스로 '불안'이라는 불청객을 불러들이면서도 나가지도 못하게 만드는 폐쇄적인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불안' 불청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폐쇄적인 울타리를 만들어 자신의 마음을 가두려고 해서는 안 되거나 그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는 방법 밖에 없다.  이제까지 우리를 옭아맸던 세상 사람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야 한다. 비로소 우리는 불안을 삶의 침입자가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삶을 꾸려나갈 숙명적인 동반자로서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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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0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구나. 이번에 평가단 위시목록에 넣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나이들면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지더라구.
그런데 작가는 걱정과 불안을 같은 의미로 다룬 것도 같네.
그냥 걱정은 생각 안하고 불안만 다룬 것도 같고.
암튼 한번쯤 읽어야할 책인 것 같긴해.

cyrus 2012-02-01 21:01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구판으로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읽은지 하도 오래되어서 표지만 달라졌을뿐 내용은 똑같은거 같았어요.
가끔씩 잊혀질 때 한 번씩 읽어두면 좋을거 같아요 ^^
 

 

 

 비밀 없는 스핑크스

 

 

 

 

 

 

 

 

 

 

 

 

 

 

 

 

 

 

 

 

오스카 와일드가 쓴 단편소설 중에 '비밀 없는 스핑크스'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가 쓴 단편소설들 중에 가장 내용이 짧은데다가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단편소설이 실린 책이 유일하게 민음사에서 나온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일 것이다)

 

제럴드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산책을 하던 도중, 아름다운 알로이 부인을 마주치게 되는게 한 눈에 반하게 된다. 제럴드는 알로이 부인을 만나고 싶어서 직접 부인과 대면하여 데이트 신청을 해보거나 부인의 하인을 통해서 편지를 수차례 보내 보지만 부인으로부터 빈번히 퇴짜맞을 뿐이다. 그러나 부인의 고혹적인 미모에 빠져버린 제럴드는 그녀와 꼭 결혼하리라 다짐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라 조콘다)>

 

 

나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여자 사진이 있었다. 키가 크고 가냘폈으며, 크고 흐릿한 눈에 늘어진 머리카락이 묘하게도 그림에 나오는 여자 같은 인상을 풍겼다. 모피를 친친 감은 그 여자는 꼭 천리안을 지닌 사람처럼 보였다.  (중략) 

 

나는 주의 깊게 살폈다. 뭔가 비밀을 가진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비밀이 선한지 악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아름다움은 많은 수수께끼를 빚어 만든 것이었다. 사실 형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심리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보일 듯 말듯 입가에 감도는 희미한 미소는 달콤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엷었다. (중략)

 

 "검은 담비를 두른 조콘다로군." 내가 대답했다.

 

 - O. 와일드 '비밀 없는 스핑크스' 중에서, pp 79,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정영목 역, 민음사 - 

 

 

그는 부인에 대한 호기심을 뿌리치지 못한 채 며칠간 그녀 주위를 맴돌며 관찰한다. 아니, 관찰이라기보다는 염탐과 미행에 가까웠다. 제럴드는 자신의 행동이 부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권리라고 자기합리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럴드의 눈에는 알로이 부인의 모습은 수수께끼의 여인 그 자체였다. 수차례나 만나자고 제안을 해도 그녀는 완강하게 거부할 뿐이었다.

 

오랜 미행 끝에 제럴드는 부인이 사는 집을 알게 되었고 직접 그 곳으로 찾아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물어보게 된다. 하지만 부인에 대한 제럴드의 사랑의 집착은 자신과 그녀와의 관계에 스스로 깨뜨리고 마는 경솔솔한 행동을 범하고 말았다.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어보는 제럴드의 행동에 알로인 부인은 기겁을 하게 되고 제럴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피할 뿐이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부인의 행동에 분을 참지 못한 제럴드는 그 자리에 집에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 후로 한 달 뒤에 제럴드는 부인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부인의 죽음을 알게 된 제럴드는 집에만 틀어 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부인에 대한 의심과 호기심이 남아 있었던 제럴드는 직접 죽은 부인의 집에 찾아가게 되는데 그 집에는 이미 다른 집주인이 살고 있었다. 제럴드는 집주인으로부터 생전의 알로이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집주인에 말로는 알로이 부인은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늘 혼자 살면서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었던 보통 평범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제럴드가 자신이 겪은 슬픈 경험담을 친구에게 들려주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죽은 부인에 대한 친구의 짤막한 평으로 소설은 부인의 정체를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긴 채 애매모호하게 마무리짓는다.

 

"이보게, 제럴드, 알로이 부인은 그저 수수께끼에 푹 빠진 여자였을 뿐이네. 그냥 베일을 쓰고 그곳에 가서 자신이 수수께끼의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서 즐기기 위해 그 방들을 빌렸던 걸세. 비밀을 즐기던 사람이었던 거지. 하지만 그 여자 자신은 비밀이 없는 스핑크스에 불과했다네."

 

 - O. 와일드 '비밀 없는 스핑크스' 중에서, pp 85,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정영목 역, 민음사 -

 

 

   

 

 여자, 스핑크스, 팜므 파탈

 

오스카 와일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서 평가를 해야 하며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의 최고 가치라고 역설하였다. 그의 예술 지상주의에는 미적 가치가 발현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기준마저도 배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매혹적인 미오와 춤을 무기로 계부인 헤롯을 홀리게 만드는 팜므 파탈이면서도 피가 뚝뚝 흐르는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광기서린 감정을 지닌 살로메를 통해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앵그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오이디푸스>  1808년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년

 

 

 

 

단편소설 '비밀 없는 스핑스크'에서도 와일드는 한 남자를 매혹케 하면서도 자신의 정쳬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미지의 여인을 팜므 파탈로 창조하고 있다. 덧붙여서 그녀를 자신이 만든 수수께끼를 통해 자신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던 '스핑크스'로 비유함으로써 비밀을 간직한 채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발휘하는 팜므 파탈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전해내려 온 스핑크스는 파라오의 권위를 상징하고 왕릉과 사원을 수호하는 신성한 짐승이였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에서 만든 스핑크스의 이미지는 이집트의 스핑크스와는 상반되는 이미지다. 두 개의 젖가슴을 지녔으며 여자 머리를 닮았으며 새의 날개에, 몸통과 발은 사자를 닮은 동물로 알려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 너무나도 유명한 수수께끼를 내서 그것을 풀지 못하면 잡아먹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수수께끼를 냄으로써 인간, 그것도 자신에게 도전하는 용기 있는 남정네들을 살해하는 스핑크스의 이미지는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화가들의 예술적 소재로 자리잡게 된다. 앵그르와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스핑크스에서는 수수께끼로 오이디푸스를 유혹하는(?) 젖가슴이 달린 스핑크스로 그려져 있다. 두 화가 덕분에 스핑크스는 남성을 유혹해 죽음이나 고통 등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전형적인 요부 이미지로 변형된다.

 

 

 

 

 <마담 보바리>가 풍기문란죄를 받은 이유

 

 

 

 

 

 

 

 

 

 

 

 

 

 

 

 

 

 

모든 여성들이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책은 소수 귀족들에게만 허용된 사치품이었다. 중세에도 책은 종교의 권위를 의심하고 회의를 유발하는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 금기 대상이었다. 더구나 인류의 원죄가 여성의 호기심에서 생겼다고 믿는 남성 우월주의의 유럽 사회는 여성의 독서를 엄격히 금했다. 왕의 총애를 받았던 정부나 부유한 귀족 집안의 부인들은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최신 학문을 독서를 통해 섭렵할 수 있었지만 상위 10%가 아닌 나머지 90% 유럽의 여자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위생과 자녀 양육에 관한 지식뿐이었다. 그저 아이만 잘 낳고 가정의 양육만 잘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여성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남성 지배의 그늘에 벗어나 여성들의 독립적인 지위가 신장됨을 상징한다. 여성들은 독서를 단순히 시간 때우기식의 자투리 행위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아 존중의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진보적인 체험을 원했다. 하지만 남성들의 눈에는 여성들이 책 읽는 모습은 교양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는 부도덕한 행위로 비춰졌을 뿐이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은 자유분방한 여주인공 보바리 부인의 행동으로 인해 발표 당시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보바리 부인이 책을 읽는 장면이 묘사된 부분은 당시 여성의 독서를 금기시했던 유럽 사회의 현실과 맞지 않았으며 보수적인 독자들 사이에서는 플로베르의 소설이 거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결국 플로베로는 이 소설 한 편 때문에 풍기문란 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마담 보바리> 출간 이후로 보바리 부인처럼 여자들이 해로운 중독적 독서에 탐닉하지 않기 위해 만든 여자들에게 권장하는 도서 목록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20세기 초에 여성 권리 신장 운동이 유행하기 시작할 때까지 여성들은 오랫동안 남성들의 사회권위적 지배 아래서 교양의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지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나는 그런 책 읽는 여자가 좋더라..."

 

 

 

 

 

 

 

 

 

 

 

 

 

 

 

 

 

 

 

 

 

오늘날에는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로 생활하는 싱글녀, 알파걸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수백년 전만 해도 스스로 책을 읽는다거나 각종 문화 생활을 영위하는 독신녀는 곱지 않은 사회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지극히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려고 하는 알로이 부인의 태도는 제럴드처럼 그 당시 사회적 우월감에 도취된 남성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소설에서는 제럴드가 책 읽는 알로이 부인을 혐오하는 장면은 묘사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제럴드가 자신의 방 안에서 혼자서 책을 읽는 부인의 모습을 본다면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남성의 도움 없이도 생활의 자립을 꾀할 만한 충분한 돈과,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질 것을 여성들에게 조언하고 있다. 울프가 말한 '방'이라는 것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공간의 의미에서 벗어나 단절의 공간, 그리고 여성 예술가로서의 창조적인 삶을 위한 영역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울프는 여성들도 자유롭게 소설 창작을 할 수 있는 경제적이면서도 문화적인 독립의 공간을 주창했지만 이제는 마음껏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기만의 방' 또한 필요다하고 본다. 그리고 그 방은 자칫 폐쇄적으로 보일 수 지극히 개인적인 '방'이 아니라 남성들도 여성들의 독서 행위를 이해하고 허용할 수 있으며 그들의 태도에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적인 '방'이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여성들도 소설을 쓰며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문화생활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지위도 향상되었지만 여전히 남성들 사이에서는 책 읽는 여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남아 있다. 책 읽는 여자라고 한다면 내성적이며 결혼하고 나면 가정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여자들은 자신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지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구스타프 아돌프 헤니히  <독서하는 소녀>  1828년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슈테판 볼만, 웅진지식하우스, pp 130)

 

 

 

요즘 남자들은 다 똑같애 다들 예쁜 얼굴만 좋아해
하나같이 왜들 왜들 그래
나는 다른 곳이 더 예쁜데 근데 보이는 곳이 아닌데

 

 -  살찐 고양이 <예쁜게 다니> 노랫말 중에서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책의 내용에 몰입된 진지한 모습이 아름답다. 신세경, 박보영, 아이유가 책 읽는 모습을 본다면 남성들은 그녀들의 매력에 푹 빠지겠지만 얼굴이 예쁘지 않아도 책을 읽으려고 하고, 읽을 줄 알고,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아름답다. 살찐 고양이의 노랫말처럼 여자는 예쁜게 전부가 아니다. 책 읽는 여자들에게도 남성들의 눈으로만 볼 수 없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단지 보이는 곳이 아니라서 우리 남성들이 그런 매력을 보지 못한 것뿐이다.

 

책 읽는 여자는 절대로 위험하지 않다. 무시무시한 스핑크스처럼 남자들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헤치는 것도 아니니깐.

 

책 읽는 여자는 아름답다. 십년 전에 변진섭은 청바지가 잘 어울리고 김치볶음밥 잘 만드는 여자가 좋다고 하지만 이제는 책 읽는 여자도 남자라면 꼭 만나고 싶은 좋은 여자에 대한 희망사항 리스트에 추가해야 한다.

 

 

 "나는 그런 책 읽는 여자가 좋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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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1-30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은 그런 책 읽는 여자친구를 꼭 만나시길!! 아이유처럼 이쁘기까지하면 더 좋구요^^
옛날에 태어났다면 저처럼 책에 집착하는 사람은 일찍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cyrus 2012-01-31 20:49   좋아요 0 | URL
이쁘지만 않아도 그저 마음 착하고 마음 맞은 짝 만났으면 좋겠어요 *^^*

아이리시스 2012-01-3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세계문학전집 사셔서 엄청 알뜰살뜰하게 좋은 페이퍼 날려주시는 시루스님.
<마담 보바리>는 정말 좋아요, 문학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추천을 많이 받아서이긴 한데, 없이 읽었다면 뭐냐! 했겠지만..
책읽는 여자 말고 책읽는 남자도 한 번 써줘요^^
이거 재밌어요^^

cyrus 2012-01-31 20:51   좋아요 0 | URL
2년 전에 200권 세트 구입했는데 안 읽은게 너무 많아요.
이제 한달 남지 않은 방학 때라도 읽어볼고 해요 ^^
이번 기회에 책 읽는 남자 나오는 소설을 찾아 봐야겠네요 ㅎㅎ

마녀고양이 2012-01-3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암울한 얘기인데...

제가 22세 때 사촌 큰언니가 자살해서 죽었어요.
그런데 큰집에서는 유일하게 책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죠. 사촌오빠를 만났는데
저에게 그러더군요. "책을 너무 많이 읽는게 문제였는기라,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래.."

저도 책 읽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항상 행위란 음과 양이 있는거 같아요.. ^^

근데, 저도 현맘님이 댓글 다셨듯이, 꼭 책 좋아하는 여자 친구 만나시기를 기원합니다!
(결혼까지 하면, 그집 책 비용은... ㅋㅋㅋㅋㅋㅋ)

stella.K 2012-01-31 12:49   좋아요 0 | URL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전혜린도 비슷하지 않나요?
나 아는 사람의 형도 그래서 정신이 좀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본인도 정상적여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사회성은 있는 편이라...
아, 이거 시루스한테는 영 도움이 안 될 말이네.ㅋㅋㅋ

마녀고양이 2012-01-31 17:03   좋아요 0 | URL
에이, 스텔라 언니.. 그러면 너무 비약이 되어버리잖아요.
책 좋아하는 우리 모두 정상이 아니게요?

그냥 시루스님의 책 좋아하는 여자란 페이퍼를 읽다가,
제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흘렀어요.... 전혜린씨는 책을 좋아하는거 보다는
아마 기질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그분의 책을 읽으면
정말 몽환적으로, 그리고 덧없게, 그렇게 흐르는 느낌을 받거든요.

저두 횡설수설 중~ 헤헤.

stella.K 2012-01-31 18:15   좋아요 0 | URL
그럼 제가 말했던 그 사람의 형이 전혜린을 닮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건 또 뭔 궤변이래.ㅋㅋㅋ
뭐 요는 뭐든 과유불급은 안된다는 말씀 아니겠슴까.
아참, 수습이 안되는군요.ㅎㅎㅎㅎㅎ

cyrus 2012-01-31 20:52   좋아요 0 | URL
그렇겠죠. 음과 양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 쪽이 맞지 않거나
더 강하면 당연히 반대 쪽에서는 불리할 수 밖에 없죠.

책 비용쯤이야 ㅎㅎ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감당할 수 있어야죠 ^^

cyrus 2012-01-31 20:54   좋아요 0 | URL
윗 두 분이 말씀하시는 전혜린 씨는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 분의 글을 아직 안 읽어봤어요. 그 분이 쓴 수필집 유명하다던데..
읽어봐야겠어요 ^^

stella.K 2012-01-3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는 그냥 책만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라. 많이 읽지는 않는.ㅋ
책도 책이지만 성격 좋은 여자 만나야지. 살아가다 보면 그게 갈수록
뼈저리게 느껴지는 때가 올거야.ㅎㅎ

cyrus 2012-01-31 20:5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성격이 좋아야죠 ㅎㅎ

꽃도둑 2012-01-3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책을 많이 읽어서 위험한, 가령 정신에 문제가 오는 건지... 위에 분들 글을 읽으면서 생각해보게 되네요. 저도 어릴 적에 이웃에 살짝 돈 사람이 있었는데 너무 공부를 많이해서 그렇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비극적인 결말인거죠..
하지만 단지 책을 많이 읽어서,,,공부를 많이 하다보니...정신상태에 문제가 온다?
수긍하기 어려운 전제라고 봐요...
편향성의 문제,,,편독의 문제...책을 통해 소통해야하는데 책으로 인해 고립되어서 생긴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건강한 책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네요.

마녀고양이 2012-01-31 16:50   좋아요 0 | URL
아하, 그건 아니예요...
전 그 이야기를 하려는데 아니었답니다.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더라.. 이런 거였죠. 책 많이 읽는다고 문제면
다들 문제 투성이게요... 저희 사촌언니가 죽은건, 그것보다는 집안 분위기 탓이었고... 저 역시 어느 정도 원인을 아는지라, 책 때문이란건 말두 안 되는 탓을 하는거죠.. 너무 속상해서 저희 사촌오빠가 하는 말이였지요.. 그냥.

이런, 진짜 제가 희안한 댓글을 단게 되었네요. ^^

cyrus 2012-01-31 20:57   좋아요 0 | URL
사람들마다 책 읽는 여자들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있는가봐요.
꽃도둑님 말씀대로 건강한 책읽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죠.

감은빛 2012-01-3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이든 남성이든 책 읽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좋아보여요.
특히 독서취향이 비슷하면 더더욱 관심이 생기게 되더라구요.

cyrus 2012-01-31 20: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좋아하는 작가나 책이 같다거나 독서취향이 비슷하면
금상첨화죠 ^^

노이에자이트 2012-01-3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은 이번 글에서 오스카 와일드에 중점을 두어서 논했는데 댓글들은...하하하...

비밀없는 스핑크스도 당연히 좀 오래된 번역본이 있죠.제가 읽은 바로는 그 여인은 스스로를 신비주의로 포장한 보통여자였어요.남자가 낚였다고 봅니다...줄거리에서 더 나아가면 이쁜 여자도 알고 보면 방귀뀌고 똥누고 산다...그런 결론이 되겠죠.

cyrus 2012-01-31 21:0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

그런데 와일드의 단편 중에 독특했어요, 내용이 짧은 것도 있지만
여주인공의 정체에 대해서 미스터리하게 결론 지은 것도 인상 깊었고요.
항상 와일드의 글을 읽으면 내용에 대한 여운이 남는 편인데
이 단편 역시 저에겐 그런 글들 중의 하나에요 ^^

비로그인 2012-01-3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녀고양님과 같은 응원을 해봅니다...^^;;
마지막 노랫말이 정말 공감가요! 히히

cyrus 2012-01-31 21:02   좋아요 0 | URL
ㅎㅎ 고맙습니다. 살찐고양이 노래도 좋아요 ^^
 

 

 

 

오랜만에 K대 근처에 위치한 헌책방에 들리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 딱 한 번 방문하고 책을 구입했으니 거의 5, 6개월만의 헌책방 방문이다. 확실한 경제적 여건과 기반이 없는 학생 신분이라서 헌책방을 자주 들려서 책을 구입하는 건 아니다.

 

살다보면 가끔은 지갑이 두툼해지는 시기가 찾아온다. 예를 들어서 명절 시즌이다. 다행히 학생 신분인데다 친척들 사이에서 나름 착하고 유능한(?) 이미지 덕분에 세뱃돈을 많이 받는 편이다.

 

이번에 받은 세뱃돈으로 어디에 쓸지 고민하다가 오늘 날씨도 풀린 김에 헌책방 나들이를 했다. 비록 옆구리가 시릴 정도로 찬 바람이 옷깃을 스쳤지만 책이 가득한 곳에 간다는 것은 항상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책 네, 다섯 권 정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용을 여유롭게 챙겼던터라 지름신이 옆애서 부채질했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고 시중에 구할 수 없는 책들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책 구입만큼은 신중을 기하는 편이라 많이 구입하지 않았다.

 

 

헌책방 마니아들에게는 헌책방에서 책을 찾고 구하는 기준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읽고 싶은 책을 고르되 그 책이 지금이 절판인지 곰곰히 따져본다. 나름 헌책방에 관한 정보도 검색하면서 찾아보는 습관이 있고 알라딘 검색을 자주 이용한 덕분인지 이 책이 지금 절판 상태이며 헌책방에서도 구할 수 없는 '레어' 아이템인지 어느 정도 알아보는 편이다. 사실 바로 알아본다긴 보다는 직감과 추정으로 구분하는 정도이다. 실상 절판 도서인 줄 알고 구입했건만 알고 보니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내가 다니는 K 대학교 근처 헌책방 같은 경우에는 한가롭게 책을 고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자주 헌책방에 드나들면 헌책방 사장님도 단골 고객을 알아보고 충분히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해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곳을 일 년에 한 번 꼴로 방문하니 아직은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네 번째 방문인데도 사장님은 헌책방에 처음 오는 학생 손님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항상 나에게 "무슨 책, 찾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먼저 물어본다. 자주 들리지 않았지만 헌책방 구조가 어떤지 그리고 수많은 책더미들 사이에 나름 분야별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단 번에 구분하는 편이다. 항상 문학, 인문학, 과학, 예술 분야의 책들을 보는 편이라 건물 한 가득 쌓여 있는 헌책방 속에서도 소설 책이 어느 위치에 배치되어 있는지 알아 본다.    

 

 

 

40분 정도 고른 끝에 딱 세 권 만 구입했다. 총 비용은 11000원.

 

더 구입하고 싶은 책이 세, 네 권 정도 있었지만 다음 기회에 구입하기로 했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직접 찾아보는 재미가 있기에 헌책방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수많은 책 더미 속에서 손에 먼지를 묻혀가며 고른다는 것은 자신만의 보물을 찾는 지적 모험자이다. 읽고 싶은 책을 한꺼번에 구입하게 된다면 다음 헌책방 모험에서 재미를 만끽할 수 없다.  

 

 

 

 

 

 #1 노르베르토 보비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문학과 지성사, 1994년 (4쇄)

 

 

 

 

 

이 책은 알라딘에 판매되고 있다. 초판이 1992년에 나왔는데 지금은 정가가 11000원이다. 알라딘 온라인에서는 9000원으로 할인 판매되고 있다. 시중에 판매되어지고 있는 정가 가격만으로 헌책방에서 책 세 권을 구입한 셈이다. 10년 전에는 이 책이 5500원으로 판매되었는데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책이 사진 속 표지처럼 똑같은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알라딘 검색 정보에 표지 이미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와 내용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지만 확실한 것은 조국 교수가 이 책을 추천한 걸로 알고 있다. 알라딘 서재 오른쪽 상단에 보면 명사의 추천도서가 소개되는 코너가 있는데 조국 교수가 이 책을 추천하게 된 이유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몰락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치기 좌파가 읽어야 할 필독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와 관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한 냉정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알라딘 '명사추천도서' [조국 교수 편] 중에서)

 

 

 

우리나라 사회에는 여전히 역사의 시간 속으로 사라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좌파'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좌파'가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보비오의 책을 일독하고 싶었다. 그보다도 이 책을 더욱 읽고 싶게 만들었던 것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회에 때아닌 '자유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개념 논쟁이 있었다. 비록 역사학계 내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쟁점이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자주 거론되고 언급되는 '-주의'들 간의 이념적 관계와 차이점을 정립하지 못한다면 역사학계의 진흙탕 싸움이 사회 전체, 즉 정치판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싸움판에 대중들마저도 이념 정의 및 그 이념에서 주장하고 있는 입장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면 6.25 전쟁 이후 시작된 이념 논쟁이 야기된 좌우파 간의 갈등은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념 대립은 곧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헌책방에서 판매되는 책들에는 헌책방 한구석에서 시간의 먼지 속에 파묻히고 있지만 그들도 한때 주인들의 손길을 경험한 이력이 있으며 사연을 가지고 있다. 간혹 헌책방에 구입한 책들 중에는 이름 없는 책의 주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책의 이력이 독특하다. 책 옆면에 '경주교도소 도서' 날인이 찍혀 있다. 책 하단에 '문학 800-930' 이라는 일련 번호가 쓰여진 스티커가 붙여 있는 걸로 봐서는 교도소에 소장된 문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몇 페이지에는 볼펜으로 밑줄 친 흔적이 남아 있다. 사회권 운동을 하다가 교도소에 수감된 무명의 사람이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밑줄을 그었으리라 상상해본다.

 

 

 

 

 

 #2 물타툴리 <막스 하벨라르> 문학수첩, 1994년 초판

 

 

 

 

 

 

이 책의 제목과 저자를 보게 된다면 생소하게 느껴지는 독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사실 알라딘 검색망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헌책방에서조차도 구하기 힘든 책이니깐.

 

영어 표기법에 따라 발음의 차이가 있는데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물타툴리, <막스 하벨라르>'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물타툴리' , '막스 하벨라르'라고 통일하여 사용하겠다)

 

 

 

 

 

 

원형 사진 속 인물이 책의 저자 '물라툴리',

그리고 하단에는 그의 자녀와 아내의 사진이 있는데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이 책은 소설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물타툴리'라는 작가의 대표작인데 '물라툴리'는 필명으로 본명은 에두아르드 다우스 데케르(1820~1887)이다.

 

 

'물타툴리(Multatuli)'는 라틴 어로 '나는 수난을 겪었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필명의 뜻도 그렇겠지만 저자의 이력 역시 독특하다. 19세기 중반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20여 년간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그 곳에서 부지사로도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력만 보자면 식민지의 영토에서 근무한 관리로만 볼 수 있지만 멀타툴리는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와 그 곳 식민지 내에서의 가혹한 수탈에 극심한 경멸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고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스스로 관리직에서 사퇴하고 본국인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경험 그리고 그동안 알려지지 못했던 식민지 통치가 만들어 낸 가혹한 환경을 묘사한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막스 하벨라르>인 것이다. 단 한 권의 소설로 '멀타툴리'라는 예명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저자의 소개란에 보면 멀타툴리를 '네덜란드의 셰익스피어'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도 그의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지금까지도 문학적인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듯하다.

 

 

 

 

 

 

책 속에 실려 있는 인도네시아 식민 정부 예산안 통과와 관련된 신문 삽화

(1876년 10월 26일자)

 

왼쪽에 한 손에 '막스 하벨라르'라는 이름이 쓰여진 책을 든 사람이 물타툴리다.

삽화 속 대사를 통해서 멀라툴리의 소설이 네덜란드 식민 정책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다.

 

"16년 전에 부르짖었던 주장이 이제 드디어 의회에서 관철되었노라!"

 

 

식민지 수탈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사회고발적 형식의 소설은 오늘날에 읽기에는 재미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네덜란드의 식민정책에 변화를 일으킬 정도라면 이 책 한 권이 일으킨 대중들의 관심은 대단했던가 보다. 하긴 한창 식민지를 개척해나가면서 제국주의의 힘을 문어발처럼 확장하고 있었던 그 당시 19세기 중반 때 반식민주의적 소설이 나온다는 것은 분명 유럽 전역에 반향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으로 남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라툴리의 <막스 하벨라르>에 대해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나마 이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뿐이다. 비록 간략하게나마 소개되고 있지만. 

 

그리고 우석훈 <문화로 먹고 살기>에서도 하벨라르의 소설에 대해서 잠깐 언급되기도 한다. 어디에 인용되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정보 하나라도 기억을 잘 하는 편이라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혹시 이 책을 읽었거나 또는 소장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한 번 확인해보시길.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내가 다니는 공공도서관 세 군데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다. 내가 알기로는 단 한 곳의 도서관에 이 책을 구할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내가 다니는 D 대학교의 도서관이다.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상상동물 이야기> 까치, 1994년 초판

 

 

 

 

 

 

이번 헌책방 나들이 중에서 가장 큰 수확(?)이다.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알라딘에서도 절판 상태이고 아직까지는 중고샵에서도 판매되지 않고 있다. 이 책이 재판되지 않는 한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으로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에는 말 그래도 130여 가지의 동서양에 알려진 상상 동물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상상 동물들에 대한 정보가 수록된 '백과사전'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짧기 때문이다. 앞 표지에는 '그림으로 보는 서양판 산해경' 이라고 하는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과 견줄하기에는 내용면에서는 부족하다. (동양신화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정재서 교수의 번역본(민음사)을 포함해서 국내의 <산해경> 번역본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00가지 동물의 머리를 지닌 물고기

(보르헤스 <상상동물 이야기> 까치, pp 73)

 

 

 

비록 백과사전만큼의 내용에 따라가지 못하지만 책 속에는 간간이 상상동물을 표현한 일러스트가 실려져 있어서 읽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준다. 책 속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동물'이라기보다는 거의 재미있는 특이한 모습을 한 괴물에 가깝다. 그 중에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해본다.

 

 

고대 인도에서부터 전해내려온 전설에 의하면 브라만 계급 출신의 카필라라는 이름의 승려가 살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승려들보다도 경전에 대한 지혜가 밝았으며 명석한 승려로 알려졌다.  그래서 카필라는 동료 승려들이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에게 조롱이 담긴 욕설을 하면 놀려댔다. 

 

 '원숭이 대가리' , '여우 대가리' , '개 대가리' . '말 대가리' , 닭 대가리' , 호랑이 대가리' 등등...  그가 말한 동물 대가리만 해도 족히 100가지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놀려대던 카필라는 죽게 되자, 이러한 욕설을 인한 이승의 업으로 인해서 그는 자신이 붙여주었던 모든 동물들의 대가리를 지닌 흉칙한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고 말았다. 100개의 동물 머리를 가진 물고기로...

 

 

 

 

카필라 전설을 통해서 본 이 글의 생뚱맞은(?) 결론은...

 

 

상대방에게 함부로 욕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정신적인 상처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이 일으킨 정신적 상처의 고통은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다시 돌아온다. '자신이 뿌린 씨앗은 반드시 자신이 거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말이다.  

 

 

 

 

 

 

 

 

 

 

 

 

 

 

 

 

 

참고로 보르헤스의 책과 비슷한 것이 과학 칼럼니스트로 알려진 이인식의 <신화상상동물 백과사전>(생각의 나무)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구판을 재미나게 읽은 기억이 있다. 동물 일러스트가 올컬러라서 좋았다. 그런데 출판사가 도산되는 바람에 이 책 역시 알라딘에서 품절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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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원의 행복
    from 엄마는 독서중 2012-01-28 01:57 
    cyrus님의 만원의 행복이란 페이퍼를 보고 예전에 이 제목으로 페이퍼를 쓰려고 찍어둔 사진이 묵혀버린 빈밭처럼 방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때의 마음은 퇴색했지만, 이어달리기에서 바톤을 받아쥐 마음으로 생각을 불러올린다.^^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는데 '만원의 행복'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다.만원으로 일주일을 버텨야 하는 출연자는 온갖 궁상을 떨며 누군가에게 빈대 붙어 사는 것을 봤다.누군가는 만원을 하찮게 여기지만, 또 누군가는 만원
 
 
순오기 2012-01-27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만원의 행복, 릴레이로 페이퍼 올리고 싶은데요.^^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은 전에 알라딘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기억이 나요.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겠어요.^^

cyrus 2012-01-28 20:50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순오기님이 잊고 있었던 행복의 기억을 불러일으켜준 셈이네요^^

차트랑 2012-01-28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한한 책의 세상이여~
제가 손을 대본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요^^

아~
헌책방의 그리움이여~

cyrus 2012-01-28 20:50   좋아요 0 | URL
시간 나신다면 헌책방에 들려보는 것도 좋답니다 ^^

마녀고양이 2012-01-2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요, 이 페이퍼를 읽으면서 생뚱맞게
우리 조카들 대학 가도 세뱃돈 줘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는거 아닙니까... ㅋㅋ

하지만 헌책방에서 건진 책을 보니, 제가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어쩐지 맘이 짠해집니다.... 헌책이라는 자체의 따스함과 역사가 또 있는거 같아요.
<상상 동물> 건지신거, 축하드립니다!

cyrus 2012-01-28 20:51   좋아요 0 | URL
이거,, 애정남한테 물어봐야되는거 아닌가요? ^^
저도 그 기준에 대해서 무척 궁금하네요 ㅎㅎ

노이에자이트 2012-01-28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타툴리가 죽은 후에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았더군요.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동남아에서 물러나자 네덜란드는 다시 인도네시아에 침입해 독립운동을 무력진압해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지요.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를 식민지로 수탈한 기간은 무려 300년을 넘었습니다.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세월이죠.

cyrus 2012-01-28 20:53   좋아요 0 | URL
제가 쓰다보니 잘못 적었네요. 오타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와의 역사가 짧지만 않군요. 그래도 식민지 열풍이
불고 있던 시기에 이런 반식민주의적 소설이 나왔다는 사실만 해도
대단한거 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2-01-31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교도소ㅋㅋㅋ 정말 다양한 세월과 시간과 추억이 깃든 헌책들이에요.
보르헤스책 중에 저런 게 있는 지는 몰랐네요.
헌책 싫어하지만 이런 글 보면 관심 돋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왕이면 새 책이 좋지만 도서관에 가서 남이 보던 책 뒤적이는 느낌이 좋듯이요^^
 

 

 

 오랜만에 알라딘에 로그인하여 이웃님들의 서재를 방문하면서 글 읽고 댓글을 남기고 있던 중이었다. 한창 알라딘 서재 블로그를 기웃거리다가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올해 복학하게 되는 녀석인데 수업 시간표 편성 때문에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통화하는데 만 30여 분 족히 걸렸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네이트에 접속하여 시간표 편성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항상 매 학기 전에 수업 시간표를 짤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기간만 되면 신경이 예민하다. 어떤 과목을 들어야할지 꼼꼼히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업 시간과 공강 시간의 정도까지 따져봐야 한다. 정말 듣고 싶은 과목이 있다면 하루에 두 과목 수업을 듣는 건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운 없으면 하루에 세 과목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루에 세 과목 듣는 데 있어서 공강 시간만 적절히 남아 돈다면 별로 어려운 점은 없지만 문제는 하루에 세 과목을 한꺼번에 시험을 친다는 것은 시간적, 정신적 여건상 부담스러운 스케줄이다.  

 

 이번에도 시간표를 짜다보니 하루에 세 과목을 들어야 할 꼴이 되었다.  대부분은 그 친구와 함께 수업을 듣는 과목을 선택했지만 이번 학기에는 순전히 내가 원하는 과목을 선택하는 목적 위주로 시간표를 구성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듣고 싶은 과목이랑 그 친구가 제안한 과목 한 과목의 시간이 중복되었다. 나름 고심 끝에 공간 시간이 적절히 나올 수 있게 편성했지만 하루에 세 과목을 들으어야하는 스케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듣고 싶어했던 과목은 학과와 관련된 전공이 아니라 교양과목이다. 과목 이름이 'DU 문화지대'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 내에서 시행되는 일종의 문화체험 강의라고 보면 된다. (과목 이름에서 'DU'가 내가 다니는 대학교 이니셜이다)  일반적인 강의실 수업이 아닌 문화에 종사하는 외부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여 강연하는 교양 수업이다.

 

 내가 알기로는 DU 문화지대 강연에 참여한 명사만 해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많다.

 

 작년 학기에는 문화평론가 김갑수김용택 시인의 강연이 있었고 이 밖에도 도종환 시인, 가수 안치환, 칼럼니스트 김규항 등이 우리 학교에 강연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강연뿐만 아니라 클래식, 국악, 재즈, 무용, 연극도 공연한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문화적인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유익한 과목이면서도 공부할 필요 없이 점수 따기 쉬운 인기 있는 과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목은 딱히 교재도 없다. 그냥 강연을 듣거나 공연을 감상하고 난 뒤에 정기적으로 감상문을 작성하면 된다. 그리고 이 과목은 학점이 아닌 'T/F'식으로 평가를 한다. 강의 시간에 결석이 많다거나 감상문을 제출하지 않으면 바로 'F(False)', 즉 '불합격'으로 판정받으며 감상문을 제 시간에 제출하고 오픈 테스트로 이루어진 정기고사 때 어느 정도 준비만 잘 하게 된다면 'T(True)', '합격'을 받을 수 있다.  

 

 이 수업이 4학년 학생들은 신청할 수 없게 되어서 3학년이 시작되는 이번 학기만큼은 'DU 문화지대' 과목을 꼭 듣고 싶었다. 아직 본격적인 수강 신청하는 기간이 많이 남았지만 수강 신청하는 것도 학부생들의 총성 없는 전쟁이다. 그야말로 속도전이다. 얼른 수강 신청하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신청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학교에는 'DU 문화지대' 외에도 'DU 영화지대'라는 이름의 과목도 있다. 전자의 방식과 유사하다. '영화지대' 과목에서는 매주 영화 한 편씩 감상한다. 영화만 보는 과목이라... 영화를 좋아하는 학부생들에게는 매력적인 과목이다. 하지만 이 과목 역시 영화를 보고 난 뒤에 감상문을 작성하고 제출해야 한다. 사실 이 과목도 같이 듣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다음 학기에 수강하기로 했다.

 

 

 

 

  

 

 

 

 

 

 

 

 

 

 

 

 

 

 

 

 벌써부터 수업 시간표를 만들어야 하는 때가 온 걸로 봐서는 겨울방학도 얼마 남지 않은 거 같다. 이제 한 달 남짓 남았을 뿐이지만, 1개월이라는 시간 역시 금방 지나가는 법이다.

 

 나름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집에서 동영상 강의를 보면서 공부하고 있지만 요즘에는 개인적으로 취업 스펙을 위한 공부보다는 교양에 대한 열의가 무척 강하게 느껴지고 있다. 2주 전부터 읽고 있었던 와타나베 쇼이치의 <지적생활의 발견>을 읽으면서 저자가 소개하는 '지적생활'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겸해서 '지(知)의 거인'이라고 불리우는 다치바다 다카시의 <두뇌를 단련하다>를 읽고 있으니 젋었을 때라도 교양 공부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교양'의 정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히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책들만 읽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변화되고 있고 새로운 현상과 방식들이 등장하는 과학, 컴퓨터 기술 관련 지식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오래전부터 알려진 옛 지식을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지식들도 무시해서는 안 되며 특히 문과와 이과 간의 교양적, 문화적 격차와 그 속에서 발생하는 다른 영역 지식에 대한 배타적인 경향은 편협된 교양의 안목을 가질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사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접했다. 그 때 읽은 책이 바로 저자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만든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였다. 한창 독서를 좋아했떤 시기라 책 속에 소개된 저자의 고양이 빌딩 속 서재가 부러우면서도 그의 독서법을 마음 속에 새겨넣기도 했다.

 

 

1.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말라. 책이 많이 비싸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책값은 싼 편이다. 책 한 권에 들어있는 정보를 다른 방법을 통해 입수하려고 한다면 그 몇 십 배, 몇 백 배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2. 하나의 주제에 대해 책 한 권으로 다 알려고 하지 말고, 반드시 비슷한 관련 도서를 몇 권이든 찾아 읽어라. 관련 도서들을 읽고 나야 비로소 그 책의 장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그 주제와 관련된 탄탄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3. 책 선택에 대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실패 없이는 선택 능력을 익힐 수 없다. 선택의 실패도 선택 능력을 키우기 위한 수업료로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

 

 

4.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무리해서 읽지 말라. 수준이 너무 낮은 책이든, 너무 높은 책이든 그것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다. 시간은 금리라고 생각하고 아무리 비싸게 주고 산 책이라도 읽다가 중단하는 것이 좋다.

 

 

5. 읽다가 중단하기로 결심한 책이라도 일단 마지막 쪽가지 한 장 한 장 넘겨보라.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6. 속독법을 몸에 익혀라. 가능한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많은 자료를 섭렵하기 위해서는 속독법 밖에 없다.

 

 

7. 책을 읽는 도중에 메모하지 말라. 곡 메모를 하고 싶다면 책을 다 읽고 나서 메모를 위해 다시 한번 읽는 편이 시간상 훨신 경제적이다. 메모를 하면서 책 한 권을 읽는 사이에 다섯 권의 관련 서적을 읽을 수가 있다. 대개 후자의 방법이 시간을 보다 유용하게 쓰는 법이다.

 

 

8. 남의 의견이나 북 가이드 같은 것에 현혹되지 말라. 최근 북 가이드가 유행하고 있는데, 대부분 그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9. 주석을 빠뜨리지 말고 읽어라. 주석에는 때때로 본문 이상의 정보가 실려 있기도 하다.

 

 

10. 책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의심하라. 활자로 된 것은 모두 그럴듯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좋은 평가를 받은 책이라도 거짓이나 엉터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11. "아니, 어떻게?" 라고 생각되는 부분(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을 발견하게 되면 저자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또 저자의 판단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숙고해 보라. 이런 내용이 정확하지 않을 경우, 그 정보는 엉터리일 확율이 아주 높다.

 

 

12. 웬지 의심이 들면 언제나 원본 자료 혹은 사실로 확인될 때까지 의심을 풀지 말라.

 

 

13. 번역서는 오역이나 안 좋은 번역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번역서를 읽다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머리가 안 좋다고 자책하지 말고, 우선 오역이 아닌지 의심해 보라.

 

 

14. 대학에서 얻은 지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사회인이 되어서 축적한 지식의 양과 질, 특히 20, 30대의 지식은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중요한 것이다. 젊은 시절에 다른 것보다도 책 읽을 시간만은 꼭 만들어라.

 

 

 -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중에서, 청어람미디어 -

 

 

 

 특히 마지막 14번의 내용은 가슴 속에 지적 호기심의 열의가 들끊였던 사춘기의 심장을 더욱 뜨겁게 만들어주었다. 대학교에서 내가 원하는 전공과목을 공부하더라도 여러가지 분야에 대해서도 관심 영역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그런 책 읽는 생활은 꼭 유지하리라 다짐했었다.

 

 이제 대학생의 일부 능선을 넘은 지금,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읽으면서 교양의 안목을 키우는 독서를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취업을 위한 스펙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데다 정작 살아가는 데 유익한 교양을 위한 스펙마저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예전의 대학 생활을 반성할 수 있었다. 

 

 도쿄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내용을 토대로 구성된 <뇌를 단련하다>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학생들에게 교양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1년 정도 유급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다카시의 제안은 올바른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취업에 대한 열망이 강렬한 젋은이들로 가득한 우리나라 사회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교육 현장에서는 다카시의 1년 유급은 차라리 토익이나 자격증 공부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써야할 판이다. 요즘에는 토익, 공무원 시험 준비와 같은 스펙 준비 때문에 휴학을 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미리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서 사회 생활을 하고 싶은 게 모든 취업 준비하는 대학생들의 마음이다. 준비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취업에 대한 주위 시선들의 압박이 부담스러워지며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경제적 형편도 만들지 못하게 되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취업 준비생이 처하게 되는 현실이다.

 

 (그러할 일은 없겠다만) 취업이 강조되는 사회 구조가 조금이라도 개선된다면 다카시의 제안처럼 유급은 아니더라도 일부러 교양 실력을 쌓기 위해서 휴학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아니면 올바른 교양 스펙을 만들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러한 시간적 환경과 여건을 마련하고 스스로 준비할 수 밖에 없다. 다카시의 독서법 14번처럼 말이다. 젋었을 때라도 책 읽는 시간은 꼭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독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생활을 경험하는 것도 좋다. 단, 만날 친구들이랑 극장에서 영화만 보는 게 진정한 문화생활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자신이 감명깊게 읽은 소설이 연극이나 뮤지컬로 극화된 것을 본다거나 클래식 공연에 가서 감각을 전율케하는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드는 것도 좋다. 아니면 한적한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감상한다거나...

 

 지금까지 대학을 졸업한 선배들이나 웃어른한테 이런 말을 수십번 넘게 들은거 같다.

 

 "대학생활이 제일 좋은 시절이다, 그 시절동안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놀아라. 대학생활 제대로 못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대학생활을 학점으로 스스로 평가하자면 학업은 A+, 노는 거는 A0에서 B+ 정도 그리고 연애는 정말 최악인 F학점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학부 생활이 남아 있어서 대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못 하고 있다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정말 남은 대학생활, 후회하지 않는 좋은 기억과 경험들로 가득한 시절로 만들고 싶다.

 

    

 

 

 

 * 뱀꼬리

 

 

 

 

 

 

 우연히 번화가에서 놀다가 대구에서 '노르트담 드 파리' 내한공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광고를 보는 순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마저도 두 눈으로 못 본다면 남은 생에 과연 뮤지컬이라는 걸 볼 기회가 있을까나...

 

 이번 설 연휴에는 세뱃돈을 많이 받게 되어서 어디에 쓸까 고민중이었는데 그 돈으로 뮤지컬 공연이라도 봐야겠다.

 

 그런데 이런 건 여자친구랑 같이 보면 참 좋을텐데...   일단 뮤지컬 보자고 (친)동생을 꼬셔봐야 겠다. (참고로 동생은 여자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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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01-2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수강신청하느라 눈이 벌게졌던 생각이 나요. 저도 전공 세 과목 하루에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시험치느라 거의 울면서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힘들고 보람도 있던 시간들이었어요. 대학교 때 교양으로 심리 강의를 영화평론가 심영섭씨가 해 주셨는데 너희들 지금 행복하냐고, 아니라고들(ㅋㅋ) 하니까 그럼 앞으로 별로 행복할 일 없다고 했던 얘기가 지금도 가끔 기억납니다. 연애는 1년이나 남았잖아요. 희망을 가지세요. ^^

cyrus 2012-01-27 19:08   좋아요 0 | URL
영화평론가의 심리 강의라..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었을지 궁금하네요.
아무래도 영화 이야기가 많이 나왔었을거 같네요 ^^

이번에는 나름 시간표를 잘 짰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하루에 세 과목
시험치는 건 부담스럽네요 ㅎㅎ

stella.K 2012-01-27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오리지널팀이 5년만에 내한해서 공연한다더군.
그쪽에서도 하나? 서울은 곧 공연임박인데. 아, 서울 원정 오나?
공연비 만만찮을텐데 그렇다면 세뱃돈 역시 만만찮게 받았다는 말이네.
동생을 꼬실 정도면.ㅋ 혹시 동생 실패하면 나는 어떤가?
나이 많아 싫겠지?ㅜ 농담이야.ㅋㅋ
그건 정말 볼만할 것 같아. 한국팀 공연 봤는데 정말 잘하더군. 꼭 봐.^^


cyrus 2012-01-27 19:13   좋아요 0 | URL
3월달에 대구에서도 공연한데요. 그런데 누님도 한사람님도
잘못 알고 계시네요ㅋㅋㅋㅋ 여기서 동생은 친동생에요 ^^
그런데 서울에 직접 가서 공연을 보고 싶네요. 비용이 많이 드는 것만
아니면요ㅠㅠ 아무래도 3월달에 개학 시즌이라 공연 볼 수 있는 시간이
될지 모르겠고요.


stella.K 2012-01-28 12:24   좋아요 0 | URL
헉, 친동생이라는 거 알고 있었는뎅.
네가 동생 꼬신다고 했고.ㅋ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동의보감'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한국인치고 '동의보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무수한 건강보조식품 광고와 수많은 한의학적 처방에는 꼭 '동의보감에 의하면...'이라는 식으로 단서가 붙여져 있다. 그만큼 <동의보감>은 건강한 삶을 위한 비결이 담겨져 있는 책으로 인식되어져 있다. 
 그런데 정작 동의보감이 다루고 있는 게 무엇인지 혹은 그 책을 단 한 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답변이 궁색해진다. 가장 대중적인 의학서이면서도 우리나라가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도 자리잡은 동의보감이 한국인의 일상과 동떨어진 의학서로 전락한 셈이다. 이는 곧 귀에 쏙 들어오도록 동의보감을 쉽게 풀어 쓴 책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들 대다수는 <동의보감>에 나온 치료법이라는 말에 쉽게 믿어버린다. 
 필자의 어머니는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 식생활, 약초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편이다. 요즘은 일 하시느라 많이 덜해졌는데 작년처럼 가사 생활을 하셨을 때만 해도 건강 관련 책 두 세 권을 구입해서 읽고 그 내용을 따로 메모하곤 했다. 이렇게 독학으로 공부를 하다보니 어머니는 책에서 언급되는 '동의보감'에 대해서 지적 호기심(?)을 가지셨나 보다. 
 한 번은 필자에게 시중에 구할 수 있는 <동의보감>을 책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알라딘 서지검색으로 '동의보감'을 검색해봤다. 생각보다 '동의보감'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의학 관련 책이 꽤 많았다. 그런 책들 대부분은 실제 '동의보감' 속 내용과는 관련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동의보감' 속 내용을 국역한 책들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책을 구입하기에는 조금은 망설였다. <동의보감>의 구성은 내과에 관한 내경편, 외과에 관한 외경편, 각종 질병을 소개하는 잡병편 등으로 세부적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 국역한 내경편만 해도 페이지 수가 1000페이지를 넘기 때문이다. (가격은 6만 원 정도인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방대한 분량 속에서 과연 생활하는 데 있어서 적합한 건강을 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런지 실효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도 했다. 결국 필자의 설득 끝에 어머니는 그 책을 구입하지 않았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동의보감>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몰랐고 <동의보감>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했기에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리라이팅'한 <동의보감>에 눈길이 갔다. 우리 어머니 아니었으면 이런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동의보감>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필자의 어머니처럼 건강하기 위한 비결을 알기 위해서 이 책을 골랐다면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6만원 상당의 <동의보감> 내경편을 구입할 것을 권한다. 저자의 이력을 알고 있다면 이 책에 대해서 적잖이 실망하지 않으며 오해하지 않을테지만 단순히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건강 비결 방법의 핵심을 정리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동의보감> 텍스트를 통해서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사유의 방식을 찾고자 한다.  

 

 


 사람의 몸이 곧 '자연'이다 

 

 

 

 

 

 

<동의보감> 첫 장 '내경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형장부도] (pp 15)

 

 

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한르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중략) 하늘엑 이십사기(二十四氣)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개의 수혈이 있고, 하늘에 365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다. (중략)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차이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바탕으로 잠시 형(形)을 빚어 놓은 것이다.

('내경편' pp 10, 고미숙 pp 20 재인용)


 <동의보감>에서는 사람의 몸에 대해 설명하면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림을 넣었다. 그림의 제목은 ‘신형장부도’이다. 신형에 오장육부를 함께 그려 넣은 것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사람의 옆모습이다. 옆으로 그려야 오장육부가 잘 보이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머리에서 꼬리뼈 쪽으로 이어진 구조물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몸 안을 들여다보면 횡격막을 중심으로 오장육부가 배치되어 있다. 물론 각 장기의 모양이나 위치는 근대 서양의학에서 볼 수 있는 해부도와 다르다. 이는 실제의 장기 모습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함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각 장기가 행하는 기능과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배 부분이다. 배는 마치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그려졌다. 이는 호흡하며 움직이는 모습을 상징한 것이다. 또한 배꼽도 실제보다 과장되게 크게 그렸다. 이는 배꼽이 우리 몸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배꼽은 단전이 위치하는 곳이어서 호흡에 중요한 부위가 된다.
 허준은 사람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받은 것이고 발이 모난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팔다리와 장부 등 모든 몸의 모습도 자연의 그것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신체를 단지 질병과 치료를 위한 대상이 아니라 몸 안과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활동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과 자연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자연을 본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몸과 삶의 참주인이 되라


편작이 병에는 6가지 치료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교만하고 방자하여 이치에 따르지 않는 것이 첫번째 경우다.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재물을 중시하는 것이 두번째 경우다. 먹고 입는 것을 챙기지 않는 것이 치료할 수 없는 세번째 경우이며, 음양과 장기(藏氣)가 다 인정되지 않는 것이 네번재 경우다. 몸이 마르고 약을 먹을 수 없는 것이 다섯번째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이며,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이 여섯번째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 고 하였다.

- 동의보감 [잡병편], '변증' 중에서, 고미숙 pp 62 재인용 - 



 고대 중국의 유명한 명의(名醫)로 알려진 편작이 말한 불치의 이유는 질병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새겨들을만한 충언이다.
 지금도 의학 기술이 발달하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신약이 탄생되고 있지만 여전히 치료하기가 수쉽지 않은 질병들은 약의 내성에 견딜 수 있도록 진화하고 있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될 것이라는 미래의 전망도 있지만 지극히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치료와 약이 많다고 해도 제 몸 제 스스로 몸을 돌보지 못하고 건강을 관리하지 못하게 된다면 신체와 정신을 위협하는 질병의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질병을 마주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식습관과 생활패턴이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당연히 살아가면서 온갖 병을 앓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몸이 아프면 어느 병원 무슨 과에 가서 진찰받을 것인가만 생각한 뒤 이후의 과정은 전문가에게 맡겨 버린다. 자신의 병이 뭔지 알기 귀찮고, 무섭고, 짜증난다. 그저 후딱 처방받으면 고쳐지겠거니 생각하고 만다.
 이 책의 저자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주하는 질병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 안의 치유본능을 깨울 수 있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체에 대한 서양의 담폰을 짚어가며 동양의학 담론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을 부각시킨다. 저자에 따르면 동양의학에선 질병과 죽음을 통해 자신의 몸과 인생, 그리고 우주로 연결되는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는 데 반해 서양의학에선 삶에 필수적인 질병과 죽음을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간주해 성찰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이 의사들을 위한 어려운 의학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직결돼 있으며, 모두가 의학적 지식을 누리게 하자는 뜻이 담겨져 있는 우리나라 의서의 '종결자'라고 볼 수 있다. 선조는 허준에게 <동의보감> 편찬을 명하면서 우리나라 백성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약재들의 명칭과 분류를 널리 보급할 것을 당부했다. 이것은 모든 백성들이 의술의 힘에 기댈 수 있기를 바라는 선조의 민본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동시에 더 나아가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동의보감을 통해 자신의 몸을 보다 정확히 바라보고, 자신에게 잠재해 있는 치유본능을 일깨우며, 나아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자 연구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동양의학의 우수함만을 고집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의사'와 같은 의술 전문가들에게 의학의 영역을 넘겨주어 자기 몸과 감정을 스스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없는 것이 서양의 의학 담론이라면 동양의 의학 담론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몸과 감정을 컨트롤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무지의 늪'과 질병이 만들어내는 정신적 공포에서 벗어난다면 '앎에 대한 열정'으로 불치병을 극복하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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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1-18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경편에 있는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네요. 저도 이 책을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좋은 책 소개감사!

cyrus 2012-01-25 20:37   좋아요 0 | URL
책의 내용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답니다. ^^

굿바이 2012-01-19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씨가 공부를 하면서도 몸을 쓰는 일(요가)에 참 열심이다 싶었는데
이 책을 쓰셨군요. 정말 <동의보감>이야말로 저자의 삶의 방식(정신이든 육체든 스스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과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책 소개 잘 봤어요~!

cyrus 2012-01-25 20:42   좋아요 0 | URL
동의보감은 단순히 신체 건강을 위한 책이 아니라 정신 건강을 강조하는
책이라는 것을 고미숙 씨의 책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이 책으로
동의보감의 진면목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렸으면 좋겠어요. ^^

saint236 2012-01-1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잘못봤나요? 어제 밤에만 해도 동의고감이라고 적으셨던 것 같았는데. 그래서 심오한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 고민을...

cyrus 2012-01-25 20:43   좋아요 0 | URL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목에 오타가 있길래 바로 스마트폰으로
고쳤답니다 ㅎㅎ

잘잘라 2012-01-1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료할 수 없는 병 여섯가지, 정말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마지막에 정리해주신 <동의보감>의 의의에 대해서도,
정말이지 추천 추천 백만번 추천합니다.

cyrus 2012-01-25 20:44   좋아요 0 | URL
건강에 관심이 많으신 포핀스님에게 강추하고 싶은 책이에요.
내용도 그렇게 어렵지 않고요,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이 소개된 책이라 좋아요 ^^

차트랑 2012-01-1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님의 글발은 대책이 없을 정도로 좋더군요 ㅠ.ㅠ
동의보감에서는 또 그 어떤 언어의 마술을 보여줄런지...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몸을 따로 분리하지 않은 동양의 생각을
많이 이해하고 있을 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건강검진의 결과에는 이상이 없는데
몸은 엉망으로 아픕니다.

저 말고도 아와 같은 경험을 하시고 계신분들 계실듯 합니다.
동의보감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리뷰들을 정말 잘써주셔서 장바구니에 허리 휩니다요 ㅠ.ㅠ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cyrus 2012-01-25 20:47   좋아요 0 | URL
고미숙 씨의 글은 어려운 고전의 내용을 재미있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좋아요. 벌써부터 다음에 나올 책이 기대되네요 ^^

꽃도둑 2012-01-2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부산 인디고서원을 아시는지요?
전에 고미숙 샘께서 강의차 오셨는데 저는 그 분을 가까이게서 뵈었답니다.
유연하신 분이었어요. 정신적으로 건강하신 게 눈에 보였지요.
몸과 삶의 참주인이 되어라! 는 말은 아주 감각적으로 들리는데요?..^^
고미숙 샘께서는 아무래도...몸의 철학에 깊이 경도된 듯 하네요...ㅎㅎ(농담 반,진담 반)
서양의학은 부분부분을 면밀히 관찰하고 치료하는 반면, 동양의학은 전체를 유기적 관계로 본다는 관점에서 어떤 의도로 책을 쓰셨는지 알 것 같기도 하네요.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사람의 몸이 곧 자연이다 라는 말에 수긍이 가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cyrus 2012-01-26 21:16   좋아요 0 | URL
부산 인디고 이름은 들어봤어요. 고미숙 씨의 강연을 직접 보셨다니
아주 유익한 경험을 하셨네요. 저는 그 분의 강연을 TV로나마 봤어요.
참으로 열정적으로 강연을 하시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