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의 얼굴은 완전히 그늘 속에 잠겨 있으나, 그의 뒤로부터 저물어 가는 햇빛이 그의 움푹 팬 관자놀이와 두개고의 곡선을 감촉했다. (173쪽)

 

⇒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한 내용. '두개고'를 '두개골'로 고쳐야 한다.

 

 

스티븐은 또한, 교장의 성의(聖衣)의 스치는 소리를 듣는데, 이는 도란 신부와 그의 회초리에 대한 초기의 장면을 반영한다. (173쪽)

 

⇒ '교장의 성의가 스치는 소리를 듣는데'라고 고쳐야 한다.

 

 

 

 

 

 

졸라 작의 『결작』에서 센 강의 풍경 묘사와 비교하라 (175쪽)

 

⇒ 괄호에 들어있는 문장이라서 읽는 과정에 그냥 지나치기 쉽다. 『L'Œuvre』은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쓴 루공마카르 총서 6번째 작품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작품', '걸작'이다.

 

 

 

 

 

 

조이스의 이전 - 작가인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백지』에서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가청적 에피파니"로, 조이스의 이후 - 작가인 카뮈는 그의 『이방인』에서 목사의 설교하는 모습을 "가시적 에피파니"로 각각 매개한다. (184쪽)

 

⇒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소설 제목을 잘못 적은 것은 심각하다. '백지'가 아니라 '백치'다.

 

 

헤인즈는, 그러한 암시에 의하여 솔직히 좌절되어 있으며, "책임을 저야 할 것은 역사인 것 같아." (220쪽)

 

⇒ '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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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4-2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도 오타지만 문장도 매끄럽지 못한데요. 두개골의 곡선? 감촉했다 ?? 원어가 뭔지 모르겠지만 더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오면 좋을 것 같네요.

cyrus 2015-04-22 16:07   좋아요 0 | URL
생각의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김종건 역 <율리시스>를 읽고 있는데, 직역을 해서 그런지 읽기가 불편했습니다.

fledgling 2015-04-2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문학사 안되겠네!~ 교정검열 제대로 안하고 책내나요... 좀 많네요ㅋ

cyrus 2015-04-22 16:10   좋아요 0 | URL
오자가 생각보다 너무 많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장수도 있는데, 하루에 <제임스 조이스 문학 읽기>를 읽으면 오자가 최소 다섯 개 이상은 발견합니다. 문장도 이상하고요. ^^;;

transient-guest 2015-04-23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경우에 따라서 이유가 있을수도 있지만, 오자는 좀 심하네요.

cyrus 2015-04-23 16:23   좋아요 0 | URL
<율리시스> 한 장씩 읽을 때마다 해설서도 같이 읽는데, 오자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습니다. ^^;;


AgalmA 2015-04-23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 오자는 정말 기본도 안되어 보입니다.
저는 개정판 [안티 오이디푸스] ˝펠릭스 과타리˝ 표기를 보고 슬펐습니다ㅜ 남미 과일 이름 같고 흑흑.. 그동안 가타리라고 불렀던 건 다 뭐가 되는 건지...

cyrus 2015-04-23 16:25   좋아요 0 | URL
과타리가 국제학술대회에서 사용되는 표기법이라고 한다해도 오히려 예전 표기가 더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
 

 

 

 

 

 

 

 

 

 

 

 

 

 

 

 

 

 

 

 

1941년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58세의 나이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숨을 거두었다. 1904년 운명의 여인 노라 바너클과 함께 더블린을 떠난 이후부터 조이스는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에서 거주했다. 1909년에 더블린을 두 차례 방문한 적은 있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소설들의 무대는 더블린이다. 더블린의 아일랜드식 이름은 벨리아 클리아(Balie Atha Cliath)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울타리를 친 여울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세계 시민주의자 조이스에게 더블린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무미건조한 도시였다. 조이스는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더블린 사방에 둘러친 울타리를 넘고 싶었다. 자신의 분신이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처럼 말이다. 그래도 조이스는 더블린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았다. 중년의 조이스는 더블린에 돌아갈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조이스는 더블린을 절대로 떠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 제임스 조이스라는 이름과 함께 불리는 불멸의 장소가 될 것을 예고했다. “내가 죽으면 내 심장에 더블린이라고 새겨져 있는 걸 보게 될 겁니다.”

 

더블린 삼부작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이스의 삶을 먼저 아는 것이 좋다. 조이스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서 유년 시절의 사소한 기억까지 복원하여 소설에 삽입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디덜러스가 혀 짧은 발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으로 특이하게 시작한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아기 디덜러스에게 ‘음매 소’가 턱쿠 아기를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조이스의 아버지는 어린 조이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조이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옛이야기를 잊지 않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첫 장면으로 넣었다. 디덜러스는 《율리시스》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더블린 삼부작은 더블린을 위한 이야기인 동시에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리처드 앨먼의 《제임스 조이스》(책세상, 2002)은 조이스의 삶과 문학, 사유의 궤적을 방대한 자료를 통해 충실하게 정리한 조이스 전기다. 그러나 1권만 품절 상태라서 도서관에 대출해서 읽어보려고 했다. 놀랍게도 대구에 있는 모든 공공도서관에 단 한 권도 소장되어 있지 않았다. 어차피 두 권으로 된 조이스 전기를 끝까지 읽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기에 일단 가벼운 워밍업 차원으로 ‘하룻밤의 지식여행’ 28번째 책으로 나온 데이비드 노리스의 《조이스》(김영사, 2006)를 참고했다. 조이스의 얼굴과 코를 유난히 길게 묘사하여 남근이 연상되는 칼 플린트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책의 분량은 얇지만, 조이스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알기 쉽게 정리했다. 조이스의 더블린 삼부작과 난해하기로 유명한 작품으로 알려진 《피네간의 경야》보다 재미있다. 조이스의 소설이 어려워서 읽고 싶지 않은 독자는 조이스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조이스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더블린마저 소설로 옮기려고 시도했으니 소설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조이스의 삶 절반을 알고 있다면, 조이스의 소설 절반을 이해한 것과 같다. 소설보다 재미있는 조이스의 삶을 알게 되면 그의 매력에 푹 빠질 것이다.

 

 

 

 

1. 조이스의 학력사항

 

조이스는 학창 시절을 가톨릭 수도회의 하나인 예수회 계통 학교에서 보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모두 예수회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곳이었다. 여섯 살에 클론고우즈 우드 소학교에 입학했고, 벨비디어 중학교를 거쳐 국립 더블린 대학에서 공부했다. 조이스의 학력사항은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여러 번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외우게 된다. 왜냐하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의 학력사항도 클론고우즈 우드 소학교, 벨비디어 중학교, 더블린 대학이니까.

 

 

 

2. 총선에 떨어진 맥주 사장의 후손 

 

 

 

 

조이스의 아버지 존 스태니슬라스의 전성기는 아일랜드 정계에 뛰어들었던 시절이었다. 더블린의 통일 자유 클럽의 서기로 1880년 4월 총선에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총선에서 보수당 의원 두 명이 낙선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아서 기네스였다. 그의 선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 회사 ‘기네스’를 설립했다. 기네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하프는 아일랜드의 상징이기도 하다.

 

 

 

3. 노라~ 너를 다시 만날 거야~♬

 

젊은 조이스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에 큰 영향을 받아 ‘드라마와 인생’이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이때 당시 입센은 아일랜드 내에서 반체제 작가로 인식되어 있어서 조이스는 입센을 옹호하는 논문으로 동급생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입센의 대표작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이름은 노라다. 조이스의 반려자 이름은 노라 바너클이다.

 

 

 

4. 1904년 6월 16일

 

조이스가 노라가 운명적으로 만난 날은 1904년 6월 10일이다. 노라의 미모에 푹 빠진 조이스는 6월 16일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청했고, 단둘만의 데이트가 이루어졌다. 몇 년 후, 조이스는 특별했던 만남의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로 구성된《율리시스》 속 날짜를 1904년 6월 16일로 정했다. 조이스와 노라가 본격적으로 연애하게 된 날짜는 《율리시스》를 기념하는 블룸즈데이가 되었다. 더블린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일과 블룸즈데이를 꼭 기억한다. 매년 6월 16일이 되면 더블린에 조이스의 문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되고, 더블린 시민들과 조이스 열렬 독자들은 《율리시스》 의 블룸이 하루 동안 돌아다녔던 더블린 시가지 전역을 둘러보는 행사에 참여한다. 알고 보면 조이스는 노라만 바라볼 줄 아는 로맨틱한 남자였다. 그러나 노라는 《율리시스》의 문학성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율리시스》의 몰리 블룸(레오폴드 블룸의 아내)을 자신을 모델로 삼은 사실에 강하게 부정했다. 노라는 몰리 블룸을 ‘꼴사나운 뚱뚱한 추녀’라고 언급했다. 

 

 

 

5. 《율리시스》의 출판 뒷이야기

 

 

 

 

 

《율리시스》는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영국, 미국에서 출간 금지 처분을 받았고, 꽤 오랫동안 출판을 미뤄야만 했다. 아무도 《율리시스》의 원고를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었다. 그러다가 조이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실비아 비치라는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문학을 사랑하는 서점 운영자였고, 《율리시스》가 프랑스에 출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실비아 비처는 《율리시스》를 한정판으로 출간하여 이 책을 구입할 예약자 목록을 작성했다. 《율리시스》의 최초 예약 주문자 명단에 유명 작가들도 있었다. 앙드레 지드, 헤밍웨이 그리고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수상이 되기 전에 이미 문필가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헤밍웨이는 실비아 비치가 운영하는 서점에 자주 찾는 단골손님이었는데, 그 서점이 바로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다. 

 

 

 

6. 조2스의 생일 2월 2일

 

 

 

 

 

조이스는 1882년 2월 2일  태어났다. 《율리시스》는 그의 생일에 맞춰 1922년 2월 2일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피네간의 경야》는 조이스의 57번째 생일인 1939년 2월 2일에 정식 출간되었다. 조2스도 홍진호처럼 숫자 2와 깊은 인연이 있다.

 

 

 

7. 영화관 사업가 조이스

 

20세기 초 유럽에 영화가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더블린에는 영화관 한 곳도 들어서지 않았다. 더블린에 살다가 오빠 따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 살게 된 조이스의 여동생은 영화관이 없는 더블린에 불평을 쏟아낸다. 조이스는 더블린에 영화관을 세우는 사업에 뛰어든다. 그러나 개관은 성공했지만, 조이스의 사업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듯하다. 조이스는 더블린에 세운 영화관 운영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트리에스테에 남겨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비록 조이스의 영화관은 일찍 문을 닫았지만, 영화는 조이스에게 문학적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영화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을 만나 토론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영화 《율리시스》는 1967년이 되어서야 조셉 스트릭에 의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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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4-2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무엇인가 읽는데 계속 나와_ 이 아저씨_ 읽어봐야겠다 알아봐야겠다 하던 찰나 아주 중요한 글을 써주었는걸.

cyrus 2015-04-21 18:07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가 조이스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

fledgling 2015-04-21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는 콩진호의 등장ㅋ재밌네요ㅎ

cyrus 2015-04-21 18:07   좋아요 0 | URL
이 글의 웃음 포인트를 잘 찾으셨군요. ㅋㅋㅋ

만병통치약 2015-04-2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팔아서 수입이 좋았을지 궁금하네요. 처음에는 얼마나 팔렸을지도요 ㅎㅎ

cyrus 2015-04-24 14:01   좋아요 0 | URL
판매부수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율리시스》가 금서로 지정된 이후에 해적판이 나왔다고 합니다. 조이스는 국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연금을 받은 적이 많아서 판매 수입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

transient-guest 2015-04-23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대한 책은 재미있게 읽었어요. 주인장이 얼마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조이스의 책도 좋지만, 더블린에 있다는 조이스가 즐겨 찾던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면서 그와 그의 작품을 떠올리고 싶네요.ㅎ

cyrus 2015-04-24 14:02   좋아요 0 | URL
<율리시스>를 조금씩 읽고 있는데 지금은 조이스 박물관이 된 마텔로 탑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
 

 

 

 

 

 

 

 

 

 

 

 

 

 

알라딘과 비타북스 출판사(http://blog.naver.com/vita_books) 마케팅부서에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비타북스 500’ 북파우치 500명 구매자 한정으로 사은품을 만든다면 출판사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마케팅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처럼 보여도 한정판 북파우치가 나온다면 이걸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알라딘에서 특별 사은품을 사면 덤으로 책을 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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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4-18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사진 페북에서 보긴 했는데 북파우치는 이해가되는데 이게 왜 3000만원인지는 이해를 못했어요ㅠㅠ 패러디인가요? 정치계의?

cyrus 2015-04-18 15:27   좋아요 0 | URL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죽기 전에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비타500 박스에 3천만원을 담아서 이완구 총리에게 건넸다고 합니다. 이걸 출판사가 패러디한 겁니다. ^^

소금창고 2015-04-1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고 이런 패러디에 쓴웃음만 지어야하다니 국민들에겐 정말 정경유착의 비타오백이 쓴맛일 뿐입니다
 

 

 

 

 

 

 

 

 

 

 

 

 

 

 

 

 

4월 14일 오전 4시 7분(한국 시간) 영국 리버풀에 있는 안필드 경기장에서 리버풀과 뉴캐슬과의 프리미어리그 32라운드 경기가 치렀다. 특이한 점은 경기가 열리는 시각이다. 혹시 이 글의 첫 문장을 유심히 읽어본 독자라면 축구 경기가 정시가 아닌 7분 늦게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할 것이다. 대개 축구 경기는 정시 또는 30분에 맞춰 킥오프 휘슬이 울린다. 그렇지만, 이날만큼은 7분 뒤로 시계가 미뤄진다. 4시 7분에 킥오프 휘슬이 불기 전에 안필드에서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리버풀과 뉴캐슬의 모든 선수가 6분 동안 그라운드 안에 미리 입장했고, 1분 동안 묵념했다.

 

 

 

 

 

 

 

 

 

안필드는 4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리버풀의 전용 구장이다. 적지 않은 리버풀 팬들은 묵념하는 동안 ‘Justice’라는 단어나 ‘96’이라는 숫자가 들어간 문구가 적힌 응원 머플러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다. 4월 15일이 다가오는 날에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치러지면 안필드뿐만 아니라 영국 내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도 7분 늦게 시작한다. 1989년 4월 15일에 발생한 ‘힐스버러 참사 (Hillsboroufh Disaster)’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모든 경기장 입구가 개방되자 관중들은 계속 관중석으로 들어왔고,

펜스 앞에 있는 관중들은 압사당한 위험에 노출되었음에도 탈출하지 못했다.

(힐스버러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촬영된 사진)

 

 

 

힐스버러 참사는 세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고다. 1989년 4월 15일은 힐스버러 경기장에서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FA컵은 프리미어리그 소속팀뿐만 아니라 2부, 3부 리그 축구팀들 모두 참여할 정도로 영국 축구팬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인기 있는 축구 대회다. 준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2만 여 명이 넘는 리버풀 팬이 힐스버러 경기장을 찾았다. 이 수많은 관중이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른 좁은 경기장 안으로 한꺼번에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경기장 수용 인원이 초과되면 경찰 또는 경기장 직원이 입구를 막아 입장하지 못한 관중들을 다른 입구로 이동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날에 경찰은 많은 관중들이 입장할 수 있도록 나머지 입구도 개방했다. 관중들이 더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이미 경기장 펜스 앞 관중석에 사람들이 매우 빽빽하게 몰려 있어서 압사당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관중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기는 중단되었다. 다치지 않은 팬들은 부상당한 관중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경찰은 이들의 행동을 경기장에 침입하여 노팅엄 프레스트 관중들과 맞서려는 훌리건의 소행으로 여겼고, 그들이 이동하지 못하도록 저지선을 쳤다. 관중들의 소란을 막으려는 경찰의 대응으로 인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구급차는 고작 1대뿐이었다. 병원에 후송된 환자는 단 14명뿐이었고, 경기장 안에 죽어가는 관중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날 사고 당일에 94명의 관중들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2백 명이 넘었다. 사고가 일어난 지 며칠 후에 14살의 소년이 사망했고, 이 사고로 인해 4년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관중까지 죽게 됨으로써 공식 사망자 수는 96명이 되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리버풀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축구선수 스티븐 제라드의 사촌 형도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고 당시 영국 경찰은 사고의 원인을 허술한 안전 관리라는 이유를 들었다. 또 안전 수칙을 무시한 일부 리버풀 팬들 또한 사고의 책임이 전적으로 있다고 주장했다. 사고의 책임을 관중과 그 희생자들에게 돌렸던 영국 경찰은 이번 사고에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입장을 밝혔다. 경찰은 희생자들을 공격하는 언론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 리버풀 관중들의 책임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조작했다. 경찰의 프레임에 속아 넘어간 언론들도 리버풀 관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언론지 「더 선」은 힐스버러 참사 관련 기사에 부상을 당하지 않은 관중들은 다치거나 죽은 관중들의 지갑을 훔쳤으며, 경찰과 구조대원을 공격하는 훌리건에 가까운 광란적 행동을 보였다고 썼다. 「더 선」은 지나치게 선정적이면서도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일간지로 알려졌다. 힐스버러 경기장을 찾은 리버풀 팬들을 악의적으로 겨냥했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힐스버러 참사를 왜곡 보도를 했다. 여기에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도 공격에 가세했다. 보수당 입장에서는 노동계급이 많이 거주했던 리버풀을 중상모략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동시에 보수당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다. 이런 기사가 나간 지 15년이 지나서야 더 선은 거짓 보도에 공식 사과를 했지만, 지금도 리버풀을 주도(主都)로 둔 머지사이드 주 사람들은 더 선에 반감을 보여 불매운동을 펼치고 있다.

 

힐스버러 참사는 각 분야에서 재난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학습효과를 남겼다. 인명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신속한 대응을 강조하는 재난대응 원칙 덕분에 영국의 축구장 안전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게 된다. 이 사고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성과 진상 규명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10년에 결성된 힐스버러 참사 진상조사위는 고위 경찰이 목격자의 진술 중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사실을 밝혀냈다. 2012년에 영국 보수당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경찰의 은폐에 대하여 공식 사과를 했다.

 

 

왼쪽은 리버풀 공식 엠블럼, 오른쪽은 던킨 도너츠가 만든 리버풀 엠블럼

 

 

안필드 경기장과 힐스버러 경기장에 96명의 사망자를 기리는 추모 비석이 세워져 있다. 리버풀 엠블럼에는 힐스버러 참사를 기리기 위한 횃불(성화)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 리버풀의 공식 후원사 던킨 도너츠는 두 개의 횃불 대신 아이스커피를 대체한 새 리버풀 엠블럼 디자인을 공개했다가 리버풀 팬들의 반발을 산 적이 있었다. 2009년에 리버풀 소속 백업 골키퍼 샤를 이탕주는 경기 전 힐스버러 참사 추모 행사 도중 환한 미소로 춤을 추는 행동을 하여 물의를 빚어 다른 팀으로 옮겨야만 했다.

 

지금도 영국인들은 4월 15일이 다가오면 힐스버러 참사를 추모한다. 이 사고는 영국의 가슴을 관통하는 가슴 아픈 날로 기억한다. 단순히 9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끔찍한 사고가 아니라 정의와 진실이 오랫동안 은폐되었던 최악의 사건으로 말이다. 영국인들이 이 사고로 얻은 커다란 교훈을 얻었다. 언제까지 정의와 진실을 숨길 수 없다는 점. 실추된 명예를 되찾으려는 힐스버러 참사 유가족들의 노력이 없었고, 진상위원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힐스버러 참사는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만 남았을 것이다.

 

 

 

 

 

 

4월 15일이 영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날이라면, 4월 16일은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가슴 아픈 날이다. 힐스버러 참사는 어제 25주기를 맞았고, 세월호 사고는 1주기를 하루 앞두고 있다. 두 사고는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영국 경찰은 힐스버러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목격자의 진술을 은폐했고, 우리나라 해경은 기본적 구조 매뉴얼을 지키지 못해 구조작업 상황 일지를 조작했다. 그러나 영국은 사고의 책임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세월호 사고에 대한 진상 규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리버풀은 96명의 희생자를 잊지 않으려고 경기장 주변에 추모비를 세웠고, 경기가 열리면 묵념 행사를 한다. 창단 2년 만에 올해 V리그 챔피언에 오른 OK저축은행 배구팀은 안산 유니폼에는 'We Ansan!(우리는 안산!)'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져 있다. ‘We(위)’와 ‘An(안)’은 붉은색으로 칠했는데 비통에 빠진 안산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겠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우리 사회에 세월호 사고를 추모하는 공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늘 팽목항에 희생자 유가족들이 모여 위령제를 지냈다. 아직 세월호의 바다에 남아있는 상처는 여전한데 대통령과 장관은 해외 일정이나 국회 일정 때문에 추모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부 국민은 세월호 추모에 반감을 보인다. 희생자 유가족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대중의 시선은 이제 냉담한 시선으로 변했다. 심지어 일베 회원들은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비하하기에 이른다.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노란 리본 마크에 일베를 인증하는 마크를 넣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정치인들도 유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망언을 내뱉는다. 진실규명은 고사하고, 유가족의 항의를 ‘선동꾼’이라고 폄훼하여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아냥대는 현실이다. 여당은 세월호 사고 진상 규명 항의를 ‘종북’과 연관 지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려고 한다. 1989년 영국의 보수당처럼 대형 사고를 진영논리에 치우쳐 바라보는 여당의 태도는 희생자를 향한 애도를 무색하게 만든다. 정부는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사소한 추모마저 정의와 거리가 먼 불순한 행동으로 보는 듯하다.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는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올바른 것이다. 퇴선 명령을 하지 않은 세월호 선장에 사형을 구형했다고 해서 사고 수사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세월호 선장을 사고의 원흉으로 지목하게 하여 “자! 이것으로 세월호 사고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라고 한다면 세월호 사고는 최악의 해상 사고로만 기억하게 된다. 사고의 원인과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한다면 어쩌면 우리 사회는 힐스러버 참사 이후의 영국처럼 정의가 무용한 암흑의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정부는 세월호 사고를 방관한 해경의 책임을 명명백백 밝힐 수 있도록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가 사고 진상 규명을 소홀히 여기고 추모를 하지 않는다면 세월호는 망각의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공감과 연대가 없는 사회에 희생자만 있고, 책임자는 없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정의를 인양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과연 사망자 295명과 실종자 9명을 위한 정의가 밝혀지는 날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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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4-15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공감을 더 누를 수 있게 한다면 밤새도록 누르고 싶네요. 한마디 한마디가 반성도 되었어요 내일을 잊고 지날뻔했는데 이웃님들 덕분에 망각했던 정신을 일으켰습니다

cyrus 2015-04-16 15:06   좋아요 0 | URL
이틀 전 새벽에 축구 경기를 보면서 영국인들의 성숙한 자세가 부러웠습니다. 이제 사고 1주년 지났는데 추모 열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부 국민들의 인식이 안타깝습니다.

cocomi 2015-04-1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u cannot find peace by avoiding life! 매번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고 아니면 최소한의 예의나 공감을 보이지 않고 도망가는 것처럼 일단 피하고 보자는 태도 정말 비겁해요. 정말 ˝외교무능˝ ˝공감무능˝ 정부예요.

cyrus 2015-04-16 15:10   좋아요 0 | URL
오늘 팽목항에 대통령이 방문했다고 하던데 세월호 결정 발언을 지켜줬으면 좋겠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공감 무능 정부의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유가족들에게 또 한 번 가슴 아픈 상처를 줍니다.

transient-guest 2015-04-16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와 언론이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하니까, 더욱 힘든거죠. 도대체 아이들이 죽어서 슬픈 부모들이 왜 `종북`이라는 소릴 들어야하며 경찰이 진압할 대상이 되는건지 알 수가 없어요. 정말 나쁜 놈들인거죠.

cyrus 2015-04-16 15:12   좋아요 0 | URL
세월호 사고를 진영논리로 바라보면 갈등과 진실 왜곡만 생길 뿐입니다. 여기에 가담하는 나쁜 놈들 때문에 엄숙해야 할 1주기 추모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습니다.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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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귀소(歸巢). 동물이 자기 서식처로 되돌아오는 성질을 뜻한다. 우리는 귀소본능의 상징으로 연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멀리는 수천떨어진 바다에서 모천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면, 미물의 귀소성에 경탄할 정도다. 그런데 연어의 행동요소를 동물학적 접근으로 설명한다면, 회귀본능이라고 해야 맞다. 귀소와 마찬가지로 회귀도 서식처로 향하는 본능을 의미한다. 두 용어는 비슷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선 차이가 난다. 둥지와 같은 특별한 서식처는 없지만 태어난 곳에서 일정 시기를 보내고 이곳을 떠나 청장년 시기를 타지에서 보낸 후 다시 영유아 시기의 기억이 있는 장소로 돌아오는 행동이 회귀본능이다. 그래서 연어는 민물에서 산란 후 바다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생의 마지막 순간 산란을 위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회귀본능을 지니고 있다. 연어에게 있어 자신이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게 하는 모천은 인생 한살이 고리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회귀본능은 인생의 의미와 깊고 넓게 연관된다. 수구초심(首邱初心), 여우가 죽을 땐 자기가 살던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이 사자성어도 회귀본능의 또 다른 심미적 의미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회귀본능은 단순히 특정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의 의미를 되짚는 본능의 구현이다. 망향에 대한 인간의 마음, 아니 본능적으로 각인된 회귀적 행동이야말로 일상의 압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좋은 의미의 회귀본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2001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비디아다르 수라즈프라사드 나이폴은 귀소본능을 스스로 거부하는 중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두산백과 (수도는 포트오브스페인)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서인도제도에 있는 트리니다드 섬. 트리니다드 섬 기준으로 북동쪽에 토바고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두 섬의 이름을 합친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정식 국가 명칭이다. 트리니다드 섬은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62년에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나이폴은 1932년에 인도계 브라만 계급 출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16살에 해외 유학 장학금을 받게 되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나이폴은 영국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트리니다드 섬을 떠난 지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나이폴이 트리니다드에서 보낸 시간은 영국과 그 밖의 지역에 머물렀던 시간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다. 나이폴은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트리니다드 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현재 여든을 넘은 나이에 이른 네이폴은 영국 서부의 작은 마을에 아내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고령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나이폴도 귄터 그라스가 향했던 천국으로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과연 나이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트리니다드 땅을 밟을 것인가. 그는 언론에 나서는 것을 피하는 성격이라서 트리니다드를 자주 방문하지 않는 이유를 공식 석상에서 분명하게 밝힌 적이 없다.

 

 

 

 Scene #2  실패자들이 사는 섬  

 

나이폴을 서인도제도 출신의 작가로 분류하지만, 혈통을 따져보면 트리니다드 섬에 태어나고 자란 인도인이다. 2001년에 나이폴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발표를 들은 후,내 나라 영국과 내 선조의 조국 인도에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폴은 인도와 트리니다드 섬을 지배했던 종주국인 영국도 자신의 조국이라고 밝혔다. 사실 노벨상을 받기 전에도 나이폴은 영국에서 승승장구하던 작가였다. 부커상을 비롯한 영국 내 중요한 문학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1990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아마도 나이폴은 성공의 길이 보장되는 땅을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에 살면서 카리브 해 일대를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1962년에 대서양 중간 항로라는 여행기를 발표했다. 트리니다드 섬에 대한 나이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이 작은 섬나라를 냉소적으로 묘사한 내용이 눈에 띈다.

 

그곳에서는 성공담이라고는 들어볼 수 없고 오직 실패담만 들을 수 있었다. 재기발랄한 사람들이라든가 장학금 취급자들은 어려서 죽거나, 미쳐버리거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중략) 트리니다드에서는 개인적 재능이 한갓 쓸모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능보다도 음모를 앞세웠다. 트리니다드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음모를 꾸미고 실천하는 데 아주 숙달되어 있었다. (미겔 스트리트작품해설 중에서, 294~295)

 

나이폴의 눈에 비친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의 모습은 장자에 나오는 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이었다. 트리니다드 섬에는 인생에 실패하는 자들이 가득했고, 더 이상 성공할 기회가 보장되어 있지 못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탓에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한층 떨어졌다. 섬 주민들은 노력이 가져다주는 성공이라는 행복한 열매의 맛을 느끼지 못했고, 치졸한 방법으로 단기간에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싶었다. 이러한 패습이 굳어진 채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은 코딱지만 한 땅 위에 다투었다.

 

와우각상지쟁의 이야기는 대서양 중간 항로가 발표되었던 해 이전에 나온 그의 세번째 소설 미겔 스트리트에 확인할 수 있다. 트리니다드 섬에서 생활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자서전적 요소가 있는 소설이다. 1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 1(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을 제외하고는 어린 시절 나이폴이라고 볼 수 있는 화자 의 시점으로 영국령 트리니다드 섬의 현실을 바라본다. 얼핏 그가 소설에서 묘사한 트리니다드 섬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하면서도 소박해 보이지만,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사회적 한계에 부닥쳐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되며 현실에 썩 만족스러워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그들이 마주치게 되는 미래 또한 썩 유쾌하지 않다.

 

그가 선택한 직업의 주인공 엘리아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시행하는 고교 과정 자격시험 3급에 합격할 정도로 똑똑한 머리를 자랑하지만, 그다음 시험에서 빈번히 낙방하여 고배를 마신다. 취업이 어려워진 엘리아스는 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의사가 아닌 위생 검시관이 된다. 섬을 떠나 영국에서 시험을 치르는 엘리아스의 모습은 영국 대학 입학에 도전했던 나이폴의 학창 시절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나이폴과 정반대로 엘리아스는 영국 사회로 향하는 신분적 상승으로의 진입에 실패한다. 엘리아스에게 영국은 식민지 주민의 성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었고, 나이폴 또한 마찬가지였다. ‘실패자들의 섬을 떠나기에 앞서 영국이라는 장벽을 넘어서야 그토록 갈망하던 성공의 길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B. 워즈워스는 자신이 직접 쓴 시를 싸구려 가격으로 파는 불쌍한 시인의 이야기다. 퍼스트 네임의 'B'는 '블랙'의 약자다. 이름만 들어도 거창하다. 영국에서 이름을 날렸던 계관 시인의 이름과 비슷해서 그런지 블랙 워즈워스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현실은 너무 어둡다. 워즈워스는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지 않았고, 섬 주민들은 그의 시 쓰기에 관심이 없다. 유일하게 화자 만 괴짜 시인의 행보를 지켜본다. 하지만 워즈워스의 삶은 절망적이다. 애초에 그는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해 실패한 삶을 사는 섬 주민일 뿐이다. 워즈워스에게 시는 문학적 낭만의 소산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하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망상적 문장에 불과하다.

 

 

 

 Scene #3  나이폴이 트리니다드 섬을 떠난 경위

    

제 능력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많을수록 트리니다드 섬에서 도덕은 개나 줘야 할 무의미한 단어가 된다. 열심히 물건을 만들었던 성실한 목수 포포는 절도범이 되고(이름 없는 물건), 이밖에도 각각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기, 뇌물, 직무 유기 등 크고 작은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가 사라지고, 사회적 결속력도 떨어진다. 미겔 스트리트의 트리니다드 섬은 평화로운 작은 섬나라가 아니다. 미겔 스트리트 주변에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펼쳐지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이 생긴다. 섬 내부에는 도덕과 정신을 병들게 하는 기운이 가득하다. 희망을 향한 탈출구마저 보이지 않는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섬을 나이폴은 탈출하고 싶었고, 기어이 성공하게 된다. 나이폴과 마찬가지로 화자도 주변 사람들처럼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약학 공부를 하러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

 

미겔 스트리트는 나이폴을 세계적인 작가로 알리게 해준 소설이다. 하지만 나이폴 본인에게 이 소설은 트리니다드에 대한 안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개인적 악몽을 기록한 암울한 자서전이다. 나이폴은 대서양 중간 항로에서 영국에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악몽이 바로 트리니다드 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비록 나이폴의 몸은 고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머리만은 회소본능을 거스를 수 없었다. 나이폴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남아있는 트리니다드 섬으로 회귀하여 미겔 스트리트를 통해 전통과 도덕 그리고 사회 전체가 무너져가는 섬에 사는 군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런데 암울한 미겔 스트리트를 읽다 보면, 작가의 행보가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나이폴의 문학을 세계의 어떤 문명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 고독한 이방인의 글쓰기로 평가하는데 노벨상 수상 발표 소식 이후에 언급한 소감과 영국에 정착한 생활 등은 그의 문학적 입지와 상당히 동떨어져 보인다. 나이폴의 또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지만, 나이폴이 3세계 문학의 기수’로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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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독서가 2015-04-14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V.S 나이폴은 영어권에서 정말 유명한 작가죠. 작가에 대해 cyrus 님이 쓰신 `스스로 귀소본능을 거부하는` 이란 표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좋은 글 잘 보고 가요.

cyrus 2015-04-16 15:20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 이제야 댓글을 확인했습니다. 이제부터 나이폴의 소설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직 나이폴의 문학에 대해서 고작 10%만 알았을 뿐인데요. 긴 내용의 잡문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ocomi 2015-04-15 0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나이폴 작품읽을 때마다 비슷한 느낌을 받아요. 제3세계 작가라고 하면 작품에 제3세계의 문제의식이 담겨있어야 하지만 나이폴은 어쩐지 정말 문제점만을 부각시키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나이폴이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원래 인도에서 도제계약 노동자로 이민온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트리니다드를 얼만큼 자신의 고향으로 느끼며 살았을지 모르겠고 또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삼중적으로 문화적 지리적 이주를 한 셈이다 보니 토착민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닌 애매한 중간자적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거리감이 오히려 나이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The Mimic Men에서 보면 영국도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공간으로 등장하지 않거든요. 나이폴의 망향의식은 트리니다드를 향한/관한 게 아니라 어떤 부재하는 대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cyrus 2015-04-16 15:2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코코미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안 그래도 나이폴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을 찾지 못한 상황인데 코코미님의 말씀이 제가 느꼈던 나이폴에 관한 의문을 푸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절판된 <흉내>를 중고서점에서 운 좋게 구입했습니다. 이제 고작 나이폴의 소설 한 편 읽었을 뿐이니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