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오전 4시 7분(한국 시간) 영국 리버풀에 있는 안필드 경기장에서 리버풀과 뉴캐슬과의 프리미어리그 32라운드 경기가 치렀다. 특이한 점은 경기가 열리는 시각이다. 혹시 이 글의 첫 문장을 유심히 읽어본 독자라면 축구 경기가 정시가 아닌 7분 늦게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할 것이다. 대개 축구 경기는 정시 또는 30분에 맞춰 킥오프 휘슬이 울린다. 그렇지만, 이날만큼은 7분 뒤로 시계가 미뤄진다. 4시 7분에 킥오프 휘슬이 불기 전에 안필드에서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리버풀과 뉴캐슬의 모든 선수가 6분 동안 그라운드 안에 미리 입장했고, 1분 동안 묵념했다.



안필드는 4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리버풀의 전용 구장이다. 적지 않은 리버풀 팬들은 묵념하는 동안 ‘Justice’라는 단어나 ‘96’이라는 숫자가 들어간 문구가 적힌 응원 머플러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다. 4월 15일이 다가오는 날에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치러지면 안필드뿐만 아니라 영국 내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도 7분 늦게 시작한다. 1989년 4월 15일에 발생한 ‘힐스버러 참사 (Hillsboroufh Disaster)’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모든 경기장 입구가 개방되자 관중들은 계속 관중석으로 들어왔고,
펜스 앞에 있는 관중들은 압사당한 위험에 노출되었음에도 탈출하지 못했다.
(힐스버러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촬영된 사진)
힐스버러 참사는 세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고다. 1989년 4월 15일은 힐스버러 경기장에서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FA컵은 프리미어리그 소속팀뿐만 아니라 2부, 3부 리그 축구팀들 모두 참여할 정도로 영국 축구팬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인기 있는 축구 대회다. 준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2만 여 명이 넘는 리버풀 팬이 힐스버러 경기장을 찾았다. 이 수많은 관중이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른 좁은 경기장 안으로 한꺼번에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경기장 수용 인원이 초과되면 경찰 또는 경기장 직원이 입구를 막아 입장하지 못한 관중들을 다른 입구로 이동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날에 경찰은 많은 관중들이 입장할 수 있도록 나머지 입구도 개방했다. 관중들이 더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이미 경기장 펜스 앞 관중석에 사람들이 매우 빽빽하게 몰려 있어서 압사당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관중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기는 중단되었다. 다치지 않은 팬들은 부상당한 관중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경찰은 이들의 행동을 경기장에 침입하여 노팅엄 프레스트 관중들과 맞서려는 훌리건의 소행으로 여겼고, 그들이 이동하지 못하도록 저지선을 쳤다. 관중들의 소란을 막으려는 경찰의 대응으로 인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구급차는 고작 1대뿐이었다. 병원에 후송된 환자는 단 14명뿐이었고, 경기장 안에 죽어가는 관중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날 사고 당일에 94명의 관중들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2백 명이 넘었다. 사고가 일어난 지 며칠 후에 14살의 소년이 사망했고, 이 사고로 인해 4년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관중까지 죽게 됨으로써 공식 사망자 수는 96명이 되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리버풀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축구선수 스티븐 제라드의 사촌 형도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고 당시 영국 경찰은 사고의 원인을 허술한 안전 관리라는 이유를 들었다. 또 안전 수칙을 무시한 일부 리버풀 팬들 또한 사고의 책임이 전적으로 있다고 주장했다. 사고의 책임을 관중과 그 희생자들에게 돌렸던 영국 경찰은 이번 사고에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입장을 밝혔다. 경찰은 희생자들을 공격하는 언론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 리버풀 관중들의 책임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조작했다. 경찰의 프레임에 속아 넘어간 언론들도 리버풀 관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언론지 「더 선」은 힐스버러 참사 관련 기사에 부상을 당하지 않은 관중들은 다치거나 죽은 관중들의 지갑을 훔쳤으며, 경찰과 구조대원을 공격하는 훌리건에 가까운 광란적 행동을 보였다고 썼다. 「더 선」은 지나치게 선정적이면서도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일간지로 알려졌다. 힐스버러 경기장을 찾은 리버풀 팬들을 악의적으로 겨냥했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힐스버러 참사를 왜곡 보도를 했다. 여기에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도 공격에 가세했다. 보수당 입장에서는 노동계급이 많이 거주했던 리버풀을 중상모략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동시에 보수당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다. 이런 기사가 나간 지 15년이 지나서야 더 선은 거짓 보도에 공식 사과를 했지만, 지금도 리버풀을 주도(主都)로 둔 머지사이드 주 사람들은 더 선에 반감을 보여 불매운동을 펼치고 있다.
힐스버러 참사는 각 분야에서 재난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학습효과를 남겼다. 인명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신속한 대응을 강조하는 재난대응 원칙 덕분에 영국의 축구장 안전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게 된다. 이 사고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성과 진상 규명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10년에 결성된 힐스버러 참사 진상조사위는 고위 경찰이 목격자의 진술 중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사실을 밝혀냈다. 2012년에 영국 보수당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경찰의 은폐에 대하여 공식 사과를 했다.

왼쪽은 리버풀 공식 엠블럼, 오른쪽은 던킨 도너츠가 만든 리버풀 엠블럼
안필드 경기장과 힐스버러 경기장에 96명의 사망자를 기리는 추모 비석이 세워져 있다. 리버풀 엠블럼에는 힐스버러 참사를 기리기 위한 횃불(성화)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 리버풀의 공식 후원사 던킨 도너츠는 두 개의 횃불 대신 아이스커피를 대체한 새 리버풀 엠블럼 디자인을 공개했다가 리버풀 팬들의 반발을 산 적이 있었다. 2009년에 리버풀 소속 백업 골키퍼 샤를 이탕주는 경기 전 힐스버러 참사 추모 행사 도중 환한 미소로 춤을 추는 행동을 하여 물의를 빚어 다른 팀으로 옮겨야만 했다.
지금도 영국인들은 4월 15일이 다가오면 힐스버러 참사를 추모한다. 이 사고는 영국의 가슴을 관통하는 가슴 아픈 날로 기억한다. 단순히 9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끔찍한 사고가 아니라 정의와 진실이 오랫동안 은폐되었던 최악의 사건으로 말이다. 영국인들이 이 사고로 얻은 커다란 교훈을 얻었다. 언제까지 정의와 진실을 숨길 수 없다는 점. 실추된 명예를 되찾으려는 힐스버러 참사 유가족들의 노력이 없었고, 진상위원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힐스버러 참사는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만 남았을 것이다.

4월 15일이 영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날이라면, 4월 16일은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가슴 아픈 날이다. 힐스버러 참사는 어제 25주기를 맞았고, 세월호 사고는 1주기를 하루 앞두고 있다. 두 사고는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영국 경찰은 힐스버러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목격자의 진술을 은폐했고, 우리나라 해경은 기본적 구조 매뉴얼을 지키지 못해 구조작업 상황 일지를 조작했다. 그러나 영국은 사고의 책임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세월호 사고에 대한 진상 규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리버풀은 96명의 희생자를 잊지 않으려고 경기장 주변에 추모비를 세웠고, 경기가 열리면 묵념 행사를 한다. 창단 2년 만에 올해 V리그 챔피언에 오른 OK저축은행 배구팀은 안산 유니폼에는 'We Ansan!(우리는 안산!)'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져 있다. ‘We(위)’와 ‘An(안)’은 붉은색으로 칠했는데 비통에 빠진 안산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겠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우리 사회에 세월호 사고를 추모하는 공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늘 팽목항에 희생자 유가족들이 모여 위령제를 지냈다. 아직 세월호의 바다에 남아있는 상처는 여전한데 대통령과 장관은 해외 일정이나 국회 일정 때문에 추모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부 국민은 세월호 추모에 반감을 보인다. 희생자 유가족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대중의 시선은 이제 냉담한 시선으로 변했다. 심지어 일베 회원들은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비하하기에 이른다.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노란 리본 마크에 일베를 인증하는 마크를 넣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정치인들도 유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망언을 내뱉는다. 진실규명은 고사하고, 유가족의 항의를 ‘선동꾼’이라고 폄훼하여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아냥대는 현실이다. 여당은 세월호 사고 진상 규명 항의를 ‘종북’과 연관 지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려고 한다. 1989년 영국의 보수당처럼 대형 사고를 진영논리에 치우쳐 바라보는 여당의 태도는 희생자를 향한 애도를 무색하게 만든다. 정부는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사소한 추모마저 정의와 거리가 먼 불순한 행동으로 보는 듯하다.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는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올바른 것이다. 퇴선 명령을 하지 않은 세월호 선장에 사형을 구형했다고 해서 사고 수사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세월호 선장을 사고의 원흉으로 지목하게 하여 “자! 이것으로 세월호 사고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라고 한다면 세월호 사고는 최악의 해상 사고로만 기억하게 된다. 사고의 원인과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한다면 어쩌면 우리 사회는 힐스러버 참사 이후의 영국처럼 정의가 무용한 암흑의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정부는 세월호 사고를 방관한 해경의 책임을 명명백백 밝힐 수 있도록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가 사고 진상 규명을 소홀히 여기고 추모를 하지 않는다면 세월호는 망각의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공감과 연대가 없는 사회에 희생자만 있고, 책임자는 없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정의를 인양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과연 사망자 295명과 실종자 9명을 위한 정의가 밝혀지는 날은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