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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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귀소(歸巢). 동물이 자기 서식처로 되돌아오는 성질을 뜻한다. 우리는 귀소본능의 상징으로 연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멀리는 수천떨어진 바다에서 모천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면, 미물의 귀소성에 경탄할 정도다. 그런데 연어의 행동요소를 동물학적 접근으로 설명한다면, 회귀본능이라고 해야 맞다. 귀소와 마찬가지로 회귀도 서식처로 향하는 본능을 의미한다. 두 용어는 비슷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선 차이가 난다. 둥지와 같은 특별한 서식처는 없지만 태어난 곳에서 일정 시기를 보내고 이곳을 떠나 청장년 시기를 타지에서 보낸 후 다시 영유아 시기의 기억이 있는 장소로 돌아오는 행동이 회귀본능이다. 그래서 연어는 민물에서 산란 후 바다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생의 마지막 순간 산란을 위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회귀본능을 지니고 있다. 연어에게 있어 자신이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게 하는 모천은 인생 한살이 고리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회귀본능은 인생의 의미와 깊고 넓게 연관된다. 수구초심(首邱初心), 여우가 죽을 땐 자기가 살던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이 사자성어도 회귀본능의 또 다른 심미적 의미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회귀본능은 단순히 특정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의 의미를 되짚는 본능의 구현이다. 망향에 대한 인간의 마음, 아니 본능적으로 각인된 회귀적 행동이야말로 일상의 압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좋은 의미의 회귀본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2001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비디아다르 수라즈프라사드 나이폴은 귀소본능을 스스로 거부하는 중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두산백과 (수도는 포트오브스페인)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서인도제도에 있는 트리니다드 섬. 트리니다드 섬 기준으로 북동쪽에 토바고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두 섬의 이름을 합친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정식 국가 명칭이다. 트리니다드 섬은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62년에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나이폴은 1932년에 인도계 브라만 계급 출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16살에 해외 유학 장학금을 받게 되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나이폴은 영국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트리니다드 섬을 떠난 지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나이폴이 트리니다드에서 보낸 시간은 영국과 그 밖의 지역에 머물렀던 시간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다. 나이폴은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트리니다드 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현재 여든을 넘은 나이에 이른 네이폴은 영국 서부의 작은 마을에 아내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고령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나이폴도 귄터 그라스가 향했던 천국으로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과연 나이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트리니다드 땅을 밟을 것인가. 그는 언론에 나서는 것을 피하는 성격이라서 트리니다드를 자주 방문하지 않는 이유를 공식 석상에서 분명하게 밝힌 적이 없다.

 

 

 

 Scene #2  실패자들이 사는 섬  

 

나이폴을 서인도제도 출신의 작가로 분류하지만, 혈통을 따져보면 트리니다드 섬에 태어나고 자란 인도인이다. 2001년에 나이폴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발표를 들은 후,내 나라 영국과 내 선조의 조국 인도에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폴은 인도와 트리니다드 섬을 지배했던 종주국인 영국도 자신의 조국이라고 밝혔다. 사실 노벨상을 받기 전에도 나이폴은 영국에서 승승장구하던 작가였다. 부커상을 비롯한 영국 내 중요한 문학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1990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아마도 나이폴은 성공의 길이 보장되는 땅을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에 살면서 카리브 해 일대를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1962년에 대서양 중간 항로라는 여행기를 발표했다. 트리니다드 섬에 대한 나이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이 작은 섬나라를 냉소적으로 묘사한 내용이 눈에 띈다.

 

그곳에서는 성공담이라고는 들어볼 수 없고 오직 실패담만 들을 수 있었다. 재기발랄한 사람들이라든가 장학금 취급자들은 어려서 죽거나, 미쳐버리거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중략) 트리니다드에서는 개인적 재능이 한갓 쓸모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능보다도 음모를 앞세웠다. 트리니다드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음모를 꾸미고 실천하는 데 아주 숙달되어 있었다. (미겔 스트리트작품해설 중에서, 294~295)

 

나이폴의 눈에 비친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의 모습은 장자에 나오는 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이었다. 트리니다드 섬에는 인생에 실패하는 자들이 가득했고, 더 이상 성공할 기회가 보장되어 있지 못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탓에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한층 떨어졌다. 섬 주민들은 노력이 가져다주는 성공이라는 행복한 열매의 맛을 느끼지 못했고, 치졸한 방법으로 단기간에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싶었다. 이러한 패습이 굳어진 채 트리니다드 섬 주민들은 코딱지만 한 땅 위에 다투었다.

 

와우각상지쟁의 이야기는 대서양 중간 항로가 발표되었던 해 이전에 나온 그의 세번째 소설 미겔 스트리트에 확인할 수 있다. 트리니다드 섬에서 생활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자서전적 요소가 있는 소설이다. 1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 1(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을 제외하고는 어린 시절 나이폴이라고 볼 수 있는 화자 의 시점으로 영국령 트리니다드 섬의 현실을 바라본다. 얼핏 그가 소설에서 묘사한 트리니다드 섬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하면서도 소박해 보이지만,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사회적 한계에 부닥쳐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되며 현실에 썩 만족스러워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그들이 마주치게 되는 미래 또한 썩 유쾌하지 않다.

 

그가 선택한 직업의 주인공 엘리아스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시행하는 고교 과정 자격시험 3급에 합격할 정도로 똑똑한 머리를 자랑하지만, 그다음 시험에서 빈번히 낙방하여 고배를 마신다. 취업이 어려워진 엘리아스는 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의사가 아닌 위생 검시관이 된다. 섬을 떠나 영국에서 시험을 치르는 엘리아스의 모습은 영국 대학 입학에 도전했던 나이폴의 학창 시절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나이폴과 정반대로 엘리아스는 영국 사회로 향하는 신분적 상승으로의 진입에 실패한다. 엘리아스에게 영국은 식민지 주민의 성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었고, 나이폴 또한 마찬가지였다. ‘실패자들의 섬을 떠나기에 앞서 영국이라는 장벽을 넘어서야 그토록 갈망하던 성공의 길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B. 워즈워스는 자신이 직접 쓴 시를 싸구려 가격으로 파는 불쌍한 시인의 이야기다. 퍼스트 네임의 'B'는 '블랙'의 약자다. 이름만 들어도 거창하다. 영국에서 이름을 날렸던 계관 시인의 이름과 비슷해서 그런지 블랙 워즈워스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현실은 너무 어둡다. 워즈워스는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지 않았고, 섬 주민들은 그의 시 쓰기에 관심이 없다. 유일하게 화자 만 괴짜 시인의 행보를 지켜본다. 하지만 워즈워스의 삶은 절망적이다. 애초에 그는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해 실패한 삶을 사는 섬 주민일 뿐이다. 워즈워스에게 시는 문학적 낭만의 소산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하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망상적 문장에 불과하다.

 

 

 

 Scene #3  나이폴이 트리니다드 섬을 떠난 경위

    

제 능력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많을수록 트리니다드 섬에서 도덕은 개나 줘야 할 무의미한 단어가 된다. 열심히 물건을 만들었던 성실한 목수 포포는 절도범이 되고(이름 없는 물건), 이밖에도 각각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기, 뇌물, 직무 유기 등 크고 작은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가 사라지고, 사회적 결속력도 떨어진다. 미겔 스트리트의 트리니다드 섬은 평화로운 작은 섬나라가 아니다. 미겔 스트리트 주변에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펼쳐지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이 생긴다. 섬 내부에는 도덕과 정신을 병들게 하는 기운이 가득하다. 희망을 향한 탈출구마저 보이지 않는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섬을 나이폴은 탈출하고 싶었고, 기어이 성공하게 된다. 나이폴과 마찬가지로 화자도 주변 사람들처럼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약학 공부를 하러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

 

미겔 스트리트는 나이폴을 세계적인 작가로 알리게 해준 소설이다. 하지만 나이폴 본인에게 이 소설은 트리니다드에 대한 안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개인적 악몽을 기록한 암울한 자서전이다. 나이폴은 대서양 중간 항로에서 영국에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악몽이 바로 트리니다드 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비록 나이폴의 몸은 고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머리만은 회소본능을 거스를 수 없었다. 나이폴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남아있는 트리니다드 섬으로 회귀하여 미겔 스트리트를 통해 전통과 도덕 그리고 사회 전체가 무너져가는 섬에 사는 군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런데 암울한 미겔 스트리트를 읽다 보면, 작가의 행보가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나이폴의 문학을 세계의 어떤 문명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 고독한 이방인의 글쓰기로 평가하는데 노벨상 수상 발표 소식 이후에 언급한 소감과 영국에 정착한 생활 등은 그의 문학적 입지와 상당히 동떨어져 보인다. 나이폴의 또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지만, 나이폴이 3세계 문학의 기수’로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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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독서가 2015-04-14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V.S 나이폴은 영어권에서 정말 유명한 작가죠. 작가에 대해 cyrus 님이 쓰신 `스스로 귀소본능을 거부하는` 이란 표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좋은 글 잘 보고 가요.

cyrus 2015-04-16 15:20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 이제야 댓글을 확인했습니다. 이제부터 나이폴의 소설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직 나이폴의 문학에 대해서 고작 10%만 알았을 뿐인데요. 긴 내용의 잡문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ocomi 2015-04-15 0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나이폴 작품읽을 때마다 비슷한 느낌을 받아요. 제3세계 작가라고 하면 작품에 제3세계의 문제의식이 담겨있어야 하지만 나이폴은 어쩐지 정말 문제점만을 부각시키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나이폴이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원래 인도에서 도제계약 노동자로 이민온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트리니다드를 얼만큼 자신의 고향으로 느끼며 살았을지 모르겠고 또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삼중적으로 문화적 지리적 이주를 한 셈이다 보니 토착민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닌 애매한 중간자적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거리감이 오히려 나이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The Mimic Men에서 보면 영국도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공간으로 등장하지 않거든요. 나이폴의 망향의식은 트리니다드를 향한/관한 게 아니라 어떤 부재하는 대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cyrus 2015-04-16 15:2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코코미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안 그래도 나이폴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을 찾지 못한 상황인데 코코미님의 말씀이 제가 느꼈던 나이폴에 관한 의문을 푸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절판된 <흉내>를 중고서점에서 운 좋게 구입했습니다. 이제 고작 나이폴의 소설 한 편 읽었을 뿐이니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