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58세의 나이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숨을 거두었다. 1904년 운명의 여인 노라 바너클과 함께 더블린을 떠난 이후부터 조이스는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에서 거주했다. 1909년에 더블린을 두 차례 방문한 적은 있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소설들의 무대는 더블린이다. 더블린의 아일랜드식 이름은 벨리아 클리아(Balie Atha Cliath)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울타리를 친 여울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세계 시민주의자 조이스에게 더블린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무미건조한 도시였다. 조이스는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더블린 사방에 둘러친 울타리를 넘고 싶었다. 자신의 분신이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처럼 말이다. 그래도 조이스는 더블린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았다. 중년의 조이스는 더블린에 돌아갈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조이스는 더블린을 절대로 떠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 제임스 조이스라는 이름과 함께 불리는 불멸의 장소가 될 것을 예고했다. “내가 죽으면 내 심장에 더블린이라고 새겨져 있는 걸 보게 될 겁니다.”

 

더블린 삼부작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이스의 삶을 먼저 아는 것이 좋다. 조이스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서 유년 시절의 사소한 기억까지 복원하여 소설에 삽입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디덜러스가 혀 짧은 발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으로 특이하게 시작한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아기 디덜러스에게 ‘음매 소’가 턱쿠 아기를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조이스의 아버지는 어린 조이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조이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옛이야기를 잊지 않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첫 장면으로 넣었다. 디덜러스는 《율리시스》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더블린 삼부작은 더블린을 위한 이야기인 동시에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리처드 앨먼의 《제임스 조이스》(책세상, 2002)은 조이스의 삶과 문학, 사유의 궤적을 방대한 자료를 통해 충실하게 정리한 조이스 전기다. 그러나 1권만 품절 상태라서 도서관에 대출해서 읽어보려고 했다. 놀랍게도 대구에 있는 모든 공공도서관에 단 한 권도 소장되어 있지 않았다. 어차피 두 권으로 된 조이스 전기를 끝까지 읽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기에 일단 가벼운 워밍업 차원으로 ‘하룻밤의 지식여행’ 28번째 책으로 나온 데이비드 노리스의 《조이스》(김영사, 2006)를 참고했다. 조이스의 얼굴과 코를 유난히 길게 묘사하여 남근이 연상되는 칼 플린트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책의 분량은 얇지만, 조이스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알기 쉽게 정리했다. 조이스의 더블린 삼부작과 난해하기로 유명한 작품으로 알려진 《피네간의 경야》보다 재미있다. 조이스의 소설이 어려워서 읽고 싶지 않은 독자는 조이스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조이스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더블린마저 소설로 옮기려고 시도했으니 소설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조이스의 삶 절반을 알고 있다면, 조이스의 소설 절반을 이해한 것과 같다. 소설보다 재미있는 조이스의 삶을 알게 되면 그의 매력에 푹 빠질 것이다.

 

 

 

 

1. 조이스의 학력사항

 

조이스는 학창 시절을 가톨릭 수도회의 하나인 예수회 계통 학교에서 보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모두 예수회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곳이었다. 여섯 살에 클론고우즈 우드 소학교에 입학했고, 벨비디어 중학교를 거쳐 국립 더블린 대학에서 공부했다. 조이스의 학력사항은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여러 번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외우게 된다. 왜냐하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의 학력사항도 클론고우즈 우드 소학교, 벨비디어 중학교, 더블린 대학이니까.

 

 

 

2. 총선에 떨어진 맥주 사장의 후손 

 

 

 

 

조이스의 아버지 존 스태니슬라스의 전성기는 아일랜드 정계에 뛰어들었던 시절이었다. 더블린의 통일 자유 클럽의 서기로 1880년 4월 총선에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총선에서 보수당 의원 두 명이 낙선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아서 기네스였다. 그의 선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 회사 ‘기네스’를 설립했다. 기네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하프는 아일랜드의 상징이기도 하다.

 

 

 

3. 노라~ 너를 다시 만날 거야~♬

 

젊은 조이스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에 큰 영향을 받아 ‘드라마와 인생’이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이때 당시 입센은 아일랜드 내에서 반체제 작가로 인식되어 있어서 조이스는 입센을 옹호하는 논문으로 동급생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입센의 대표작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이름은 노라다. 조이스의 반려자 이름은 노라 바너클이다.

 

 

 

4. 1904년 6월 16일

 

조이스가 노라가 운명적으로 만난 날은 1904년 6월 10일이다. 노라의 미모에 푹 빠진 조이스는 6월 16일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청했고, 단둘만의 데이트가 이루어졌다. 몇 년 후, 조이스는 특별했던 만남의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로 구성된《율리시스》 속 날짜를 1904년 6월 16일로 정했다. 조이스와 노라가 본격적으로 연애하게 된 날짜는 《율리시스》를 기념하는 블룸즈데이가 되었다. 더블린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일과 블룸즈데이를 꼭 기억한다. 매년 6월 16일이 되면 더블린에 조이스의 문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되고, 더블린 시민들과 조이스 열렬 독자들은 《율리시스》 의 블룸이 하루 동안 돌아다녔던 더블린 시가지 전역을 둘러보는 행사에 참여한다. 알고 보면 조이스는 노라만 바라볼 줄 아는 로맨틱한 남자였다. 그러나 노라는 《율리시스》의 문학성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율리시스》의 몰리 블룸(레오폴드 블룸의 아내)을 자신을 모델로 삼은 사실에 강하게 부정했다. 노라는 몰리 블룸을 ‘꼴사나운 뚱뚱한 추녀’라고 언급했다. 

 

 

 

5. 《율리시스》의 출판 뒷이야기

 

 

 

 

 

《율리시스》는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영국, 미국에서 출간 금지 처분을 받았고, 꽤 오랫동안 출판을 미뤄야만 했다. 아무도 《율리시스》의 원고를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었다. 그러다가 조이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실비아 비치라는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문학을 사랑하는 서점 운영자였고, 《율리시스》가 프랑스에 출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실비아 비처는 《율리시스》를 한정판으로 출간하여 이 책을 구입할 예약자 목록을 작성했다. 《율리시스》의 최초 예약 주문자 명단에 유명 작가들도 있었다. 앙드레 지드, 헤밍웨이 그리고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수상이 되기 전에 이미 문필가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헤밍웨이는 실비아 비치가 운영하는 서점에 자주 찾는 단골손님이었는데, 그 서점이 바로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다. 

 

 

 

6. 조2스의 생일 2월 2일

 

 

 

 

 

조이스는 1882년 2월 2일  태어났다. 《율리시스》는 그의 생일에 맞춰 1922년 2월 2일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피네간의 경야》는 조이스의 57번째 생일인 1939년 2월 2일에 정식 출간되었다. 조2스도 홍진호처럼 숫자 2와 깊은 인연이 있다.

 

 

 

7. 영화관 사업가 조이스

 

20세기 초 유럽에 영화가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더블린에는 영화관 한 곳도 들어서지 않았다. 더블린에 살다가 오빠 따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 살게 된 조이스의 여동생은 영화관이 없는 더블린에 불평을 쏟아낸다. 조이스는 더블린에 영화관을 세우는 사업에 뛰어든다. 그러나 개관은 성공했지만, 조이스의 사업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듯하다. 조이스는 더블린에 세운 영화관 운영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트리에스테에 남겨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비록 조이스의 영화관은 일찍 문을 닫았지만, 영화는 조이스에게 문학적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영화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을 만나 토론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영화 《율리시스》는 1967년이 되어서야 조셉 스트릭에 의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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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4-2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무엇인가 읽는데 계속 나와_ 이 아저씨_ 읽어봐야겠다 알아봐야겠다 하던 찰나 아주 중요한 글을 써주었는걸.

cyrus 2015-04-21 18:07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가 조이스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

fledgling 2015-04-21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는 콩진호의 등장ㅋ재밌네요ㅎ

cyrus 2015-04-21 18:07   좋아요 0 | URL
이 글의 웃음 포인트를 잘 찾으셨군요. ㅋㅋㅋ

만병통치약 2015-04-2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팔아서 수입이 좋았을지 궁금하네요. 처음에는 얼마나 팔렸을지도요 ㅎㅎ

cyrus 2015-04-24 14:01   좋아요 0 | URL
판매부수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율리시스》가 금서로 지정된 이후에 해적판이 나왔다고 합니다. 조이스는 국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연금을 받은 적이 많아서 판매 수입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

transient-guest 2015-04-23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대한 책은 재미있게 읽었어요. 주인장이 얼마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조이스의 책도 좋지만, 더블린에 있다는 조이스가 즐겨 찾던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면서 그와 그의 작품을 떠올리고 싶네요.ㅎ

cyrus 2015-04-24 14:02   좋아요 0 | URL
<율리시스>를 조금씩 읽고 있는데 지금은 조이스 박물관이 된 마텔로 탑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