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은 여성만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 형식의 문헌이다. 《데카메론》의 작가 보카치오가 썼다. 보카치오의 여성관은 아직 중세의 때를 벗지 못했지만, 이전보다 근대적인 관점을 지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여성논쟁’을 주도한 크리스틴 드 피장은 이 책을 원본으로 삼아 《여성들의 도시》를 집필했다.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효녀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이 책을 참고해서 만들어진 《여성들의 도시》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여성들의 도시》 211~212쪽 참조)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이 있었다. 이 젊은 여성의 어머니는 부모로부터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았지만, 팔자가 사나웠다. 하여튼 알려지지 않은 어떤 죄목으로 그녀는 집정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행정관은 그녀를 세 집정관 중 한 사람에게 이미 내려진 판결대로 형을 집행하도록 넘겼다. 집정관은 그럴 목적으로 간수에게 그녀를 넘겼다. 그녀는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밤에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간수는 인정에 이끌려서인지 아니면 귀족 여성에 대한 동정심에서였는지 모르지만, 그녀를 즉시 죽이기보다는 굶어서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딸이 면회 왔을 때 간수는 혹시 음식을 들여가지 않나 샅샅이 몸을 조사한 뒤 감방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에 출산했기 때문에 굶주린 어머니에게 줄 수 있는 젖이 충분했다. 이 일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 간수는 형을 언도받은 여성이 그처럼 오랫동안 굶어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래서 몰래 이 모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지켜보았다. 그는 딸이 가슴을 드러내고 자기 어머니에게 젖꼭지를 물리는 모습을 보았다. 간수는 딸의 효심과 딸이 어머니에게 젖을 먹이는 희한한 광경에 놀라서는 집정관에게 이 사실을 곧바로 보고했다. 집정관은 행정관에게 보고했고, 그는 시의회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 결과 딸의 효심을 높이 사 어머니의 처벌을 무효로 하자는 데 전부 동의하게 되었다.

 

(조반니 보카치오,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 310~311쪽)

 

 

 

이 이야기를 읽으며 루벤스의 그림 「시몬과 페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손발이 묶인 늙은 죄수가 젊은 여성의 가슴을 빨고 있고, 철창 바깥에선 간수들이 희한한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처음 보면 춘화로 오해를 하게 되는 그림이다.

 

 

 

 

 

 

 

 

 

 

남자가 시몬이고, 여자는 그의 딸 페로이다. 시몬은 처형되는 날까지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딸이 몰래 감방에 들어와 아버지에게 젖을 먹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그녀의 숭고한 사랑에 감동해 시몬을 석방했다고 한다. 시몬과 페로 이야기는 고대 로마 시대 때부터 전해져왔다. 자식이 부모를 젖으로 공양한 이 사례를 그린 그림은 이후 카리타스 로마나(Caritas Romana), ‘로마인의 자비’라고 불렸다. 여러 화가가 이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시몬과 페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화가는 루벤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은 루벤스가 묘사한 부녀의 행각을 퇴폐적인 성행위로 해석했다. 루벤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은 루벤스가 이 그림에 성적 욕망을 투영했다고 봤다. 실제로 그림 속 노인과 여인의 모습은 루벤스와 루벤스의 아내와 비슷했다.

 

 

 

 

 

 

 

 

53세의 루벤스는 첫 부인과 사별한 뒤 4년을 홀로 지내다 자신보다 16세의 아내 엘렌 푸르망과 재혼했다. 루벤스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였다. 그는 벨기에 외교관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사 작위까지 받은 엘리트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의 새 아내와 다섯 명의 자녀를 둘 만큼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루벤스의 가정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시몬과 페로」를 불편하게 여겼다. 루벤스는 「시몬과 페로」 그림에 딸의 헌신적인 사랑, 거기에 아내를 향한 숭고한 사랑의 감정까지 더해져 여성의 아름다움을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천상의 것으로 끌어올리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벤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몬과 페로」는 ‘음란한 그림’으로 오해받았다. 당대에 문제작 혹은 저속한 예술로 평가를 받았던 그림이 현대에 와서 극찬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다. 「시몬과 페로」처럼 한 작품에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루벤스의 그림이 오해받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의 영향이다. 여성의 가슴이 성욕을 불러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누드화에 대해선 사회적으로 찬반이 있었다. 인간의 고상하고 세련된 취미 속에 에로티시즘의 욕망은 숨어 있고, 그것이 곧 대중의 취향임을 옹호하는 측과 엉터리 미술이니 하는 혹평이 바로 그것이다. 남성 화가들은 비현실적이고 비인격화한 알몸에 신화나 성경의 옷을 걸쳐 여체를 탐하는 남성의 욕망을 미화했다. 그래서 누드는 교화의 의미가 담긴 종교화에서조차 교묘히 구사됐다. 남성 화가들은 그림 자체에 성적 뉘앙스를 풍겨야 좋은 반응을 얻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 남성 화가들이 그린 여성의 누드를 보면 필요 이상 풍만하게 강조된 몸을 느낄 수 있다. 여성의 몸은 전적으로 남성 화가의 눈을 통해 걸러진 채 강조와 생략을 통해 재탄생된다. 일부는 젖가슴이나 엉덩이를 극단으로 강조해 관능미를 부각하기도 한다.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참다운 여성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루벤스가 묘사한 페로 역시 남성의 시선에 잡힌 여성상에 가깝다.

 

 

 

 

 

 

 

 

 

 

 

 

 

 

 

 

 

 

독일의 문화사 연구가인 한스 페터 뒤르는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어머니의 가슴 또한 남성들의 에로틱한 시선에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루벤스가 보카치오나 크리스틴 드 피장이 소개한 효녀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어도 남성 관객들의 눈에는 야릇한 이미지만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루벤스의 그림에서 숭고한 효심을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성적 뉘앙스를 찾을 것인지 결국 보는 이들의 몫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술 혹은 외설에 대한 논쟁에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치기보다 정답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태도이다. 이 논란은 끝이 없을 것이고, 정답도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림을 보기 전에 확실히 알아야 할 점이 있다. 남성 화가들의 단골 소재는 단연 여성, 그중에서도 벌거벗은 여성이다. 우리는 남성의 그림에 의존해 여성을 읽고 이해하고 있다. 결국, 완벽한 여성의 아름다움은 허상이며 환상이다.

 

 

 

그림 이미지는 위키아트(wikiart)’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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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1-10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저께 서양미술사 바로크편 동영상 강의를 들었는데 마침 루벤스를 소개해줘서 반가움에 댓글 남겨요ㅎㅎ
로마인의 자비 .. 가슴 아픈 그림입니다ㅠ.ㅠ

cyrus 2016-11-10 21:24   좋아요 2 | URL
여자가 남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정절녀‘, ‘효녀‘가 돼서 이름을 알리는 것입니다. 유교 사회의 조선 시대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yureka01 2016-11-1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싫어 하는 스타일의 남자...마누라 하나 건사 못시키고 술처먹고 쥐 패는 찌질남....경멸하는데..심심찮게 봤으니..아흐...

cyrus 2016-11-10 21:28   좋아요 0 | URL
특이하게 그런 남자를 옹호해주는 친구도 있습니다. ‘안녕하세요‘에 출연하는 문제 많은 남자들 주변에 그런 친구가 있더군요. 남들은 그 사람의 문제점을 압니다. 그가 함께 사는 가족들도요. 그런데 의리 때문인지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

종이달 2022-05-09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국가는 거대한 허구다 국가란 무엇인가 3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1801~1850)는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를 강조한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다. 그는 『법』이라는 팸플릿에서 ‘법의 정의’라는 전제하에 권리와 자유와 안정과 책임의 원칙이 지켜질 때만이 인류는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좋은 경제학자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효과를 동시에 고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정책입안자들은 보이는 것만 본다. 엄청나게 돈을 뿌린다. 개인 또는 국가의 번영은 단기이익과 장기이익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추를 잡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정책입안자들은 단기이익에 몰두하고 있다.

 

정부의 기본 목적은 개인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회를 비롯한 입법기관들은 그 반대의 일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입법기관들은 세금을 부과하여 시민들의 재산을 가져간다. 생산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시민 집단으로부터 세금을 걷어다 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애호하는 시민 집단에 나누어 준다. 의원들은 또한 끊임없이 규제 법안을 만들어낸다. 그런 규제가 시민의 자유를 점점 위축시킨다. 바스티아는 『법』에서 법의 통치가 역전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160여 년 전에 발표된 『법』의 첫 문장을 빌리자면, 오늘날의 법은 ‘타락’했다. 정의와 자유를 실현해야 할 법이 ‘합법적인 약탈’을 조장하는 데 이용되었다. 법은 강탈을 권리로 변모시켰고, 합법적인 방어를 범죄로 변모시켰다. 바스티아는 법이 타락한 원인 중 하나를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보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에 기초한 자유경쟁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늘린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타인의 희생을 발판삼아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누리고 싶어 한다. 도덕보다 부를 우선으로 치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곤 했던 스미스는 이기심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스미스가 구상한 시장은 이러한 인간들의 올바른 덕성과 이익, 부가 조화롭게 구성된 곳이다. 이러한 시장 질서를 유지하려면 정의와 자유를 보호하는 법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야 하는 시장과 법은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 어리석은 이기심에 눈먼 자들은 기득권을 강화해 탐욕의 먹이사슬 구조를 형성하고, 국가는 이를 내버려 둔 채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

 

바스티아는 사회주의자들이 법을 타락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로 규정했지만, 오늘날 그의 논리는 가짜 자유주의자들을 가려내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가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라는 이름을 오용하고 다닌다. 전경련은 박근혜와 최순실을 연결하는 정경유착의 고리로 전락했고, 정경유착의 고리에 얽힌 대기업들은 침묵하는 중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경련이 설립한 자유경제원 역시 모르쇠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경련이 최순실을 위해서 자행한 ‘합법적인 약탈’을 비판하지 못하는 자유경제원 내부에 정말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그 정체성이 의심스럽다.

 

자유경제원은 편향된 역사 교과서를 뿌리 뽑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노골적으로 정치 현안에 간섭했다. 국정교과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바스티아의 또 다른 글 『정의와 박애』를 읽어보도록 권해 드리고 싶다. 바스티아는 통일성을 강제하는 법은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박애를 핑계로 국가가 간섭해 통일성을 세우려고 한다면, 이 국가의 간섭은 억압 즉 불의가 될 것이다. (『정의와 박애』 54쪽)

 

바스티아는 사회주의자들의 잘못된 박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모든 인류가 서로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집단적 이타심이 강박적으로 작용하면 개인의 자유가 규제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결과가 일어난다. 자유경제원은 기업을 옹호하기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외면하는 모습은 잘못된 박애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기업경제원의 박애주의는 아주 특별하다. ‘박정희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박정희 사랑’을 두 글자로 줄여보시라. ‘박애(朴愛)’다.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박정희를 사랑하게 하려면 박정희가 주인공인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 자유경제원은 강제적으로 역사를 하나로 통일된 국정교과서를 고집한다. 국정교과서 반대하는 입장을 ‘종북 좌파’의 선동으로 매도한다. 자유경제원은 ‘박통령 사랑’에 자극받아 법으로 역사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박애 감정에 자극받아 법이 교육을 이끌어가거나 교육을 강요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법이 오류만 이끌어가거나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묻는다. 오류를 강요하기 위해서, 아니 적어도 오류를 강요할 위험이 있는데도 힘에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박애인가? 사람들은 다양성을 두려워한다. 다양성을 무정부 상태라는 이름으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토론, 연구, 실험을 통해 신장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무슨 자격으로 한 제도를 법으로 또는 강제로 다른 제도들보다 우선시하는가? (『정의와 박애』 55~56쪽)

 

자율성 및 다양성을 입각한 역사교과서 발행을 막으려는 정부와 자유경제원은 자유의 기초를 외면하고 있다. 감히 누가 누굴 보고 ‘종북 좌파’라고 말하는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들이야말로 바스티아가 지적한 ‘어리석은 이기심에 좌파’에 가깝다. 역사교과서의 통일성을 세우려고 교육에 간섭하는 정부의 행보를 옹호한 자유경제원은 바스티아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왜 인간은 부를 창출하는가. 같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부의 창출 그 자체에 모든 것이 집중되고 있다. 사회를 존속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원리가 점점 잊히고, 아니 오히려 그 원칙에 거꾸로 가고 있다. 바스티아의 글은 우리가 잊고 있는 그 근본원리를 일깨워줌으로써, 경제학과 경제가 그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심각하게 고민해볼 수 있게 한다. 다만, 160여 년 전에 나온 그의 생각들이 오늘의 현실에 적용되는 건 아니다. 현실 감각이 무디지 않은 자유무역 옹호론자들도 자유무역이 평화 유지에 기여한다고 믿는 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표출해왔다. 바스티아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보면서도 대중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국가의 정책을 찬성했다. 하이에크와 그들을 추종하는 자유경제원이 애덤 스미스보다 덜 알려진 바스티아를 찬양한 이유가 있다. 바스티아가 한반도 안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신자유주의자들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한국에는 진짜 자유주의자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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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당선되었더군요..ㄷㄷㄷㄷ그의 막말에 깔린 심리가 어떨지,,,,,

cyrus 2016-11-09 18:20   좋아요 1 | URL
당선 소감을 봤는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포용하고, 다른 나라와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어요. 당선 소감만 듣고, 트럼프를 지지하긴 그렇네요... ㅎㅎㅎ
 
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또 만났군요.” 올해 들어 기형도의 시집을 자주 꺼내 든다. 김현의 해설을 잠깐 펼친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개인적인 것-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김현, 《입 속의 검은 잎》 해설 152~153쪽)

 

이어 검은색 표지의 《이연주 시전집》을 꺼내 든다. 김현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1990년대적 변용을 이 시집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연주의 세계는 한층 극단적으로 조정된 이미지의 대비, ‘구역질’이라고 일컬을만한 비틀림과 부조화의 잔인성을 드러낸다. 이연주는 어둠을 '어둠'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바람난 에미가 도망치고 애비가 땅을 치고 울고

 

애비가 섰다판에서 날을 세고
그 애비의 아이가
애비를 찾아 섰다판 방문을 두드리고

 

본드 마신 누이가 찢어진 속옷을 뒤집어 입고
지하상가 쓰레기장 옆에서
면도날로 팔목을 긋고

 

세 살 난 막내가 절룩, 절룩 자라가고
에미 애비와 누이의 일들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오늘,
밤마다 도시가 하나씩 함몰되고, 나는
등불에서
등심지를 싹둑, 싹둑 잘라내고

 

 

(이연주 「가족사진」, 26쪽)

 

 

그녀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한 마디의 주제라 할 수 있을 '죽음'은 이렇게 자신도 잘 기억하지 못했던 유년시절부터 공기처럼 주위에 있었던 셈이다. 왜 죽음일까. 그것은 수수께끼 같은 삶의 의미를 해독하려는 시인의 몸짓일 것이다. 죽음을 통해 거꾸로 삶을 보는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90년대를 지금보다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었다. 절망의 구석도 많았고 그것을 헤집고 나서지 못한 젊은이들도 많았다. 자꾸만 물질로 기우는 의식들. 그래서일까.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은 그 자체가 일종의 테러리즘이었다. 이연주는 이를 박차고 나가기가 힘들었을까. 그의 시는 내내 이런 구석들을 철저하게 파헤쳐 있다.

 

 

이제, 용기 있는 이별 앞에
석유는 준비되었느냐?
성냥이 찬이슬에 젖어버리진 않았겠지?
노숙하는 이의 쓰라린 밤잠을 불러오너라
우리 함께,
다 같이 나도 말이지
 
살아 남아 슬프지 않은 나라,
옳거니, 기쁜 일이다, 가자.

 

 

(이연주 「방화범」 중에서, 50쪽)

 

 

마치 자기 죽음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구절들이 엄숙하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완숙함. 읽을수록 시인의 단호한 어조가 사납게 느껴진다. 시인은 어둠의 저편에서 내뿜는 죽음의 습기를 지켜보는 자이다. 「매음녀 6」은 어머니를 매개로 두터운 망각의 지층 속으로 사라질 뻔한 자아와 죽음을 응시한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젖이 없어 울으셨다.
어머니 숨 거두시며
마음 착한 남자, 등짝 맞대 살으라 이르셨다.
나는 부둣가에서
선술집 문짝에 내걸린 초라한 등불 곁에서
매발톱 손톱을 키워 도회지로 흘러왔다.
눈 붙이면 꿈속에서 어머니
이 버러지 같은 년아,
아침까지 흑흑 느껴 우신다.
내 심장 차가운 핏톨, 썩은 물 흐르는 소리.
나는 살 속 깊은 데서 손톱을 꺼내
무덤을 더 깊이 판다.
하나의 몫을 치르기 위해 삶이 있다면
맨몸으로 던지는 돌 앞에 서서 사는
이 몫의 삶은......
희미한 전등불 꺼질 듯 끄물거린다.

 

 

(이연주 「매음녀 6」, 46쪽)

 

 

시인은 죽음으로 끝난 어머니의 삶을 대신 이어가려는 어느 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불확실하지만, ‘희미한 전등불 꺼질 듯 끄물거린다’에서 볼 수 있듯이 벼랑 끝에서 시인의 몸을 던져버리는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이연주 시인이 말하는 죽음은 이런 개인적 죽음의 응시만은 아니다. 90년대는 도시의 빌딩이나 인간, 어느 쪽도 순수함을 간직하지 못하고, 더럽혀진 욕망에 노출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새로운 세상을 앞둔 세기말이 다가오는 이 시대에 적어도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죽음이라는 주제에 자유로울 수 없다. 시인은 상실감에 주저앉거나 탈속과 초월의 세계로 숨어들기보다 혼곤한 정신을 깨우는 절규를 노래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다. 그녀는 가슴에 끓어오르는 격정을 머뭇거리지 않고 단숨에 토해내고 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상처받고 찢기면서 마음의 쓸쓸함을 견디려는 시인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시인은 쓸쓸한 삶의 풍경 속에서 희망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란 가정일 뿐이며 이 세상 바깥은 온통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세상에 없는 그녀를 사람들이 더욱 잊지 못하는 것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뒤흔드는 허무와 절망에서 솟음치는 진실한 회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시를 쓰는 행위는 불가능에 이르는 도정(道程)이고 따라서 그 자체가 지긋지긋한 죽음의 과정이다. 이연주의 시는 그 죽음의 도정의 기록이다. 지상에서의 삶의 헛됨과 추악함을 우의적으로 보여주는 그녀의 시가 밝은 면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불편한 구석이 분명 있다. 그렇지만 이미 시커먼 욕망으로 지배되어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이 세상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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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08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전에 < 속죄양, 유다 > 에 대해서 평점 별 4를 부과했는데..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연주의 고통과 남성 시인이 자기 연민에 빠져서 징징거리는 것을 혼동한 까닭입니다.
비교가 안 되죠.. 사실은. 이 시집 저도 곧 조만간 살 계획입니다만.... 좋은 시집을 농간 측에서 출간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cyrus 2016-11-09 14:00   좋아요 0 | URL
시인의 남동생 분과 생전에 시인이 활동했던 문학 동인지 소속 회원들이 아니었으면 시전집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시인의 재능이 제대로 활짝 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yureka01 2016-11-08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장바구니 넣도록 하겠습니다...아픔의 언어가 곳곳에 베어져 있어요..면도날처럼...

cyrus 2016-11-09 14:00   좋아요 0 | URL
기형도 시집만 계속 팠던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이연주 시인이 재평가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난주 금요일에 올린 게시물과 관련해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 날 서재지기님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과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제가 감정에 치우친 상태에서 검열 운운하는 글을 쓰는 바람에 몇몇 이웃님들에게 혼란을 주고 말았습니다. 제 글을 보고, 알라딘을 오해한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근거 없는 오해가 확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서재지기님의 답변을 공개합니다.

 

내용이 길더라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바쁘신 분들을 위해 서재지기님의 답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14[북플 하이퍼링크 기능 설정 오류]라는 글이 원래 서재지기 게시판에 작성되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등록하기 전에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을 체크했습니다.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은 서재지기 게시판에서만 볼 수 있는 기능입니다.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하면 서재지기 게시판의 글이 원본이고, 제 서재에 등록된 글은 복사본이 됩니다.

 

비슷한 내용의 글이 화제의 서재글에 동시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복사본화제의 서재글에 노출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된 글 위에 전 출처표시가 뜹니다. 북플에서 다른 회원의 글을 공유한 게시물도 마찬가집니다. 북플에 공유한 글을 알라딘 서재에 확인해보면 전 출처표시를 볼 수 있습니다. 북플에 공유한 글 역시 좋아요수를 받아도 화제의 서재글에 노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된 글과 북플에 공유한 글은 마이페이퍼개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안녕하세요.

cyrus, 알라딘마을 지기입니다.

 

금요일 오후에 문의주셨는데, 저희도 개발팀에 로직을 점검하고 답변드리느라 늦게 답변드리게 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말씀하신 글(http://blog.aladin.co.kr/haesung/8880233)

원글(http://blog.aladin.co.kr/zigi/8880232)의 복사본 글로 보고 서재메인에 노출이 되지 않습니다. 알라딘 마을지기의 서재처럼 쓰기 권한을 타인에게도 허용한 서재에서 글을 쓰면서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옵션을 체크한 경우한 경우 그렇습니다. 또는 북플에서 글을 보다가 공유 > 북플로 한 경우도 서재메인에 노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정책은 알라딘서재 초창기부터 적용되어오고 있습니다. 서재 초창기에는 자신 서재의 일부 카테고리를 타인에게 쓰기 권한을 주어 게시판처럼 활용하는 게 많았는데, 이 때 원본글과 사본글이 서재메인에 떠서 혼동을 주는 문제가 있어서 원본글만 서재메인에 노출이 되도록 제한을 했던 것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의 적용은 운영자가 모니터링해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버에서 자동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저희 알라딘 서재 운영자는 정보통신법에 따라 게시판을 운영하는 업체로서 관리의 의무가 있는 성인/스팸/광고글, 저작권 및 출판사/저자에 대한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는 글을 위주로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법적인 제약사항의 적용을 최소화하고 글쓰기의 자유를 더 우선에 놓고 운영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조치를 취하는 경우 일일이 메일로 통지를 해드리며, 반론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출판사나 저자가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알라딘 이용약관 및 정보통신법에 근거하여 문제가 없는 글의 경우에는 처리하지 않고 있습니다.(이런 경우는 끝까지 출판사/저자가 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 출판사/저자에게 정식공문을 받고, 글 작성자에게 공문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알라딘에 대한 비판적인 글, 알라딘 서재/북플의 버그 등에 신고글에 대해서는 일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반성해야할 일, 부끄러운 일로 보고, 서비스를 개선하고, 버그 잡는 중요한 제보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기술개발적인 버그 때문에 서재 메인에 노출되지 않아 검열로 오해를 받는 것 자체도 있어서는 안 될 일임에 분명합니다. 저희도 좀 더 경각심을 가지고 좀 더 많은 사전 테스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아울러 서재 메인에 노출되는 글은 짐작하시는 대로 추천수(좋아요 받은 수)와 댓글수를 기본으로 하여, 스팸/광고성 글들이 올라오지 않도록 하는 것과 한 서재에서 너무 많은 글이 한번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처리를 적용하여 5분마다 자동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최근에 서재에서 발생한 버그 중 중괄호({})가 있는 경우 본문 펼침이 안 되는 버그, URL 맨 뒤가 ˝/˝로 끝나는 경우 안드로이드 앱에서 링크처리가 안되는 버그 등은 저희가 사전에 미리 잡아내기가 어려운 발생 빈도가 매우 낮았던 버그였습니다. 이런 버그는 신고를 해주시면 개발팀에서 가장 빨리 처리할 수 있도록 최우선 순위를 선정하여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앱에서 URL 맨 뒤에 ˝/˝가 있는 경우의 문제는 저희가 사용하는 안드로이드 앱 라이브러리 자체가 갖고 있는 기본 사항이기 때문에 따로 예외처리를 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마이페이퍼/마이리뷰 개수 통계에는 비공개 글과 퍼온 글(위에서 말씀드린, 글쓰기 권한이 개방되어있는 서재에서 쓴 글)은 작성 글 통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서재에 공개 글이 1, 비공개 글이 1, 퍼온 글이 1편인 경우, 3편으로 통계 표기가 되지 않고 1편으로 표기가 됩니다.

 

다시 한 번 기술적인 문제, 정책적인 문제로 인해 알라딘이 서재에서 알라딘에 비판적인 글을 서재메인에 노출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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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글이라도 유저가 쓴 글은 유저의 책임이니까요. 사전 검열로 글 삭제는 없다고 믿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cyrus 2016-11-08 17:32   좋아요 1 | URL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면, 다른 유저들에게 알리는 일 또한 중요한 역할인 것 같습니다. ^^

오거서 2016-11-0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의 노력 덕분에 상황이 보다 명백해졌습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니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cyrus 2016-11-09 15:17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마음이 편합니다. 알라딘에 문제 제기하는 글을 올리면 감정이 예민해집니다. 따지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당분간은 조용히 서재 활동을 해야겠습니다. ^^;;
 
글로벌시대에 읽는 한국여성사
정현백 외 지음 / 사람의무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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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불과 30여 년 전만 돌아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미흡한 구석이 남아 있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직도 상당 부분 개선해야 한다. 남성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회 구성원이 육아와 가사는 여성이 담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가장 쉽게 떠오르는 문제다. 잘못된 사회 구조와 의식이 성 불평등을 일으킨다. 여성은 생명의 뿌리이자 역사의 대지였다. 이름 없는 꽃이자 면면히 흐르는 생명의 물결이었다. 아쉽게도 역사 속에서 그 목소리, 그 모습을 쉽게 보고 듣지 못했다. 역사의 언어 바깥에서 흘러왔기 때문에 제대로 기록되고 평가되지 못한 채 여성들의 삶은 잊혀졌다.

 

이 책은 그러한 여성의 삶과 정신을 역사의 수면 위로 올려놓는 작업이다. 한국사를 관통하며 강인하고 폭넓은 정신으로 자기 세계를 일구어낸 여성의 역사를 정리해 공식적 역사로서 정당한 자리매김을 시도한다. 한국 여성사를 쓰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 쓰기와 구별된다. 역사를 여성주의 관점으로 보는 작업이다. 유명한 여성인물 중심도, 사건 중심도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보지 못했던 여성들의 삶을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까지 총체적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고대 모계사회에서 다산(多産)은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었다. 여자가 많은 아이를 생산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렵보다 채집이 안정된 생산을 보장했던 선사시대에서 생리적으로 채집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여성이 중심이 되는 모계사회는 당연했다. 하지만 노동력이 요구되는 농경사회에 진입하면서부터 남성들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그 결과 가부장 사회로 진입했다. 고구려, 고려 시대에는 시집살이가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흔히 쓰는 ‘장가간다’는 표현은 ‘사위가 장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고려 시대에는 형제, 자매들이 유산을 골고루 상속받아 해마다 돌아가며 제사를 지냈다. 아들이 없으면 딸과 사위 혹은 외손이 모계 쪽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처가살이와 모계사회의 흔적은 조선 시대 중기 이후 유교식 가부장제가 뿌리내리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존여비와 남아선호 사상이 굳어지면서 딸의 상속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집안을 벗어난 사회 활동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가부장제라는 남성 중심의 규율에 따라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희생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아간 여성들도 있었다. 특히 여성들이 배운 한글은 자신의 존재를 부각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봉건적 모순이 결집한 결혼제도에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여성평등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된 것은 동학 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과부의 재가허용을 요구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재가허용, 조혼, 이혼의 자유 요구는 남녀평등문제의 핵심으로 제기됐다. 이와 함께 전통사회에서 교육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여성들에 대한 제도교육의 필요성도 지적됐다. 이후 여학교 교육을 받은 이른바 신여성들이 1920년대 들어 늘어났다. 신여성들은 여성의 직업 활동과 함께 자유분방한 연애, 이혼의 자유를 주장하고 몸소 실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근대 여성사를 논할 때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여성운동을 빠져선 안 된다. 최근 의병장으로 활동한 윤희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반가운 일이다. 윤희순은 항일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의병가를 직접 지어 부르고, 군사훈련에 참여했다.

 

여성이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견되는 지금까지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여성의 삶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 역사의 갈피마다 배어 있을 여성의 활동을 조명하기에는 기록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남자의 글과 책 속에 묻혀버린 여성의 목소리와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여성의 활동을 보존한 기록을 발굴하는 과정 중에 과거의 못된 남자들의 생각도 함께 발견하게 된다. 놀라운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들을 가볍게 보는 남자들의 시선이다. 1920년 처음으로 여성 전화 교환수가 등장했다. 이들의 고충은 성희롱이었다. 조선의 남성 고객, 일본 남성들은 여성 전화 교환수들에게 성희롱을 일삼았다. 꼭 기억되어야 할 역사 속에는 이처럼 남자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이야기가 있다. 뭐 부끄러워도 좋다. 역사 속에서 더 많은 여성의 삶을 불러내야 한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삶의 현장에 도전하고 승리했던 여성들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국정교과서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건 불쏘시개로 쓰고, 역사 속의 여성을 발굴하고 보존한 국사 교과서를 보고 싶다. 미래의 아이들이 이순신, 세종대왕 같은 남자 위인보다 여자 위인을 많이 찾는 날이 올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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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6-11-0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의병장 이야기는 정말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습니다. 역시 책 세계 이야기는 그 깊이를 가늠 할 수 없네요.

cyrus 2016-11-08 15:47   좋아요 0 | URL
특정 분야를 깊이 파고든 사람이 아닌 이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식이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