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거대한 허구다 국가란 무엇인가 3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1801~1850)는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를 강조한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다. 그는 『법』이라는 팸플릿에서 ‘법의 정의’라는 전제하에 권리와 자유와 안정과 책임의 원칙이 지켜질 때만이 인류는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좋은 경제학자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효과를 동시에 고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정책입안자들은 보이는 것만 본다. 엄청나게 돈을 뿌린다. 개인 또는 국가의 번영은 단기이익과 장기이익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추를 잡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정책입안자들은 단기이익에 몰두하고 있다.

 

정부의 기본 목적은 개인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회를 비롯한 입법기관들은 그 반대의 일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입법기관들은 세금을 부과하여 시민들의 재산을 가져간다. 생산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시민 집단으로부터 세금을 걷어다 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애호하는 시민 집단에 나누어 준다. 의원들은 또한 끊임없이 규제 법안을 만들어낸다. 그런 규제가 시민의 자유를 점점 위축시킨다. 바스티아는 『법』에서 법의 통치가 역전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160여 년 전에 발표된 『법』의 첫 문장을 빌리자면, 오늘날의 법은 ‘타락’했다. 정의와 자유를 실현해야 할 법이 ‘합법적인 약탈’을 조장하는 데 이용되었다. 법은 강탈을 권리로 변모시켰고, 합법적인 방어를 범죄로 변모시켰다. 바스티아는 법이 타락한 원인 중 하나를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보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에 기초한 자유경쟁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늘린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타인의 희생을 발판삼아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누리고 싶어 한다. 도덕보다 부를 우선으로 치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곤 했던 스미스는 이기심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스미스가 구상한 시장은 이러한 인간들의 올바른 덕성과 이익, 부가 조화롭게 구성된 곳이다. 이러한 시장 질서를 유지하려면 정의와 자유를 보호하는 법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야 하는 시장과 법은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 어리석은 이기심에 눈먼 자들은 기득권을 강화해 탐욕의 먹이사슬 구조를 형성하고, 국가는 이를 내버려 둔 채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

 

바스티아는 사회주의자들이 법을 타락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로 규정했지만, 오늘날 그의 논리는 가짜 자유주의자들을 가려내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가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라는 이름을 오용하고 다닌다. 전경련은 박근혜와 최순실을 연결하는 정경유착의 고리로 전락했고, 정경유착의 고리에 얽힌 대기업들은 침묵하는 중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경련이 설립한 자유경제원 역시 모르쇠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경련이 최순실을 위해서 자행한 ‘합법적인 약탈’을 비판하지 못하는 자유경제원 내부에 정말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그 정체성이 의심스럽다.

 

자유경제원은 편향된 역사 교과서를 뿌리 뽑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노골적으로 정치 현안에 간섭했다. 국정교과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바스티아의 또 다른 글 『정의와 박애』를 읽어보도록 권해 드리고 싶다. 바스티아는 통일성을 강제하는 법은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박애를 핑계로 국가가 간섭해 통일성을 세우려고 한다면, 이 국가의 간섭은 억압 즉 불의가 될 것이다. (『정의와 박애』 54쪽)

 

바스티아는 사회주의자들의 잘못된 박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모든 인류가 서로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집단적 이타심이 강박적으로 작용하면 개인의 자유가 규제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결과가 일어난다. 자유경제원은 기업을 옹호하기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외면하는 모습은 잘못된 박애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기업경제원의 박애주의는 아주 특별하다. ‘박정희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박정희 사랑’을 두 글자로 줄여보시라. ‘박애(朴愛)’다.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박정희를 사랑하게 하려면 박정희가 주인공인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 자유경제원은 강제적으로 역사를 하나로 통일된 국정교과서를 고집한다. 국정교과서 반대하는 입장을 ‘종북 좌파’의 선동으로 매도한다. 자유경제원은 ‘박통령 사랑’에 자극받아 법으로 역사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박애 감정에 자극받아 법이 교육을 이끌어가거나 교육을 강요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법이 오류만 이끌어가거나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묻는다. 오류를 강요하기 위해서, 아니 적어도 오류를 강요할 위험이 있는데도 힘에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박애인가? 사람들은 다양성을 두려워한다. 다양성을 무정부 상태라는 이름으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토론, 연구, 실험을 통해 신장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무슨 자격으로 한 제도를 법으로 또는 강제로 다른 제도들보다 우선시하는가? (『정의와 박애』 55~56쪽)

 

자율성 및 다양성을 입각한 역사교과서 발행을 막으려는 정부와 자유경제원은 자유의 기초를 외면하고 있다. 감히 누가 누굴 보고 ‘종북 좌파’라고 말하는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들이야말로 바스티아가 지적한 ‘어리석은 이기심에 좌파’에 가깝다. 역사교과서의 통일성을 세우려고 교육에 간섭하는 정부의 행보를 옹호한 자유경제원은 바스티아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왜 인간은 부를 창출하는가. 같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부의 창출 그 자체에 모든 것이 집중되고 있다. 사회를 존속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원리가 점점 잊히고, 아니 오히려 그 원칙에 거꾸로 가고 있다. 바스티아의 글은 우리가 잊고 있는 그 근본원리를 일깨워줌으로써, 경제학과 경제가 그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심각하게 고민해볼 수 있게 한다. 다만, 160여 년 전에 나온 그의 생각들이 오늘의 현실에 적용되는 건 아니다. 현실 감각이 무디지 않은 자유무역 옹호론자들도 자유무역이 평화 유지에 기여한다고 믿는 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표출해왔다. 바스티아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보면서도 대중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국가의 정책을 찬성했다. 하이에크와 그들을 추종하는 자유경제원이 애덤 스미스보다 덜 알려진 바스티아를 찬양한 이유가 있다. 바스티아가 한반도 안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신자유주의자들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한국에는 진짜 자유주의자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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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당선되었더군요..ㄷㄷㄷㄷ그의 막말에 깔린 심리가 어떨지,,,,,

cyrus 2016-11-09 18:20   좋아요 1 | URL
당선 소감을 봤는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포용하고, 다른 나라와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어요. 당선 소감만 듣고, 트럼프를 지지하긴 그렇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