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마리아, 마틸다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5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메리 셸리 지음,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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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여권의 옹호》(연암서가, 2014)는 ‘페미니즘의 원점’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태동은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인간의 권리를 주창했고 뒤이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책을 통해 계몽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인간은 남성을 의미할 뿐 여성은 여전히 배제되고 있었다.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인물인 루소조차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용기 있게 선언하면서 나섰고, 《여권의 옹호》에서 루소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여권의 옹호》는 여성들도 국민 교육의 대상이며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출 수 있도록 이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울스턴크래프트와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불멸의 작가’가 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태어난 지 11일 만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출신 모녀가 쓴 세 편의 소설이 국내 초역으로 선보인다. 『메리』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첫 소설이다. 『마리아: 여성의 고난』은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나약하고 감정적인 모습, 여성스러운 매력만을 보여주는 남성 작가의 감상 소설(Sentimental novel)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집필에 공을 들였다. 『마틸다』는 셸리의 미발표 작품이다. 『마틸다』는 아버지와 딸의 근친 관계라는 파격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이다. 고드윈은 셸리가 보낸 『마틸다』 원고를 읽은 뒤 경악을 금치 못했고 원고 발표를 요청한 딸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

 

셸리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소설의 원조로 꼽히지만,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로도 읽힌다. 《프랑켄슈타인》은 당대의 남성 신화에 도전하는 텍스트이다. 서구 문명의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의 출산 없이 탄생한 괴물은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린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불행한 결과를 상징한다. 『마틸다』의 여주인공 마틸다 역시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친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러나 ‘근친 사랑’이라는 주제는 불순하고도 비도덕적이다. 파격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춰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여주인공의 주체적 여성상을 보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건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틸다는 근친 사랑을 금기하는 정상 가족 사회 자체를 거부한다. 그녀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마틸다』를 읽은 고드윈은 아버지를 못 잊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불편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남성 독자들도 고드윈과 비슷한 정서를 느꼈으리라. 이들의 눈에는 마틸다가 ‘변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쌍년’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쌍년’의 의미는 남자들이 여자를 비하할 때 쓰는 ‘쌍년’과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쌍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회의 틀에 벗어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여성을 뜻한다[1]. 셸리가 창조한 마틸다는 남성이 부여한 ‘쌍년’의 부정성을 뒤집은 여주인공이다.

 

만약 울스턴크래프트가 문학적 역량을 더 보여줄 수 있었더라면 『메리』와 『마리아』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메리』의 여주인공 메리는 독서와 사색을 즐기고 여행을 좋아하는 능동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결혼 생활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아내로서의 의무’에 따라 남편에게 복종하는 결혼 제도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메리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성이지만, 자신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앤을 향한 우정이 깊어질수록 메리는 사랑(이성애)과 결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녀는 한 차례 결혼을 경험했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헨리라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이성애적 규범과 질서를 끝내 거부한다. 이 소설에서 메리는 앤과의 우정을 경험하면서 평소에 깨달을 수 없는 새로운 성찰과 낯선 감정들을 마주한다. 그녀는 결혼이나 가족, 연애가 이성애 중심의 관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제도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은 ‘혼자’ 또는 동성 동거를 원하는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게는 다른 친구가 없어요. 앤을 잃는다면, 제게 세상은 사막과도 같을 거예요.” “친구가 없다니.” 모두 함께 되물었다. “남편이 있잖아요?” (『메리』, 49쪽)

 

  메리는 심사숙고한 뒤 앤의 가족에게 남편과 살 수 없는 이유가 있으며 한동안 그 이유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남편과 살지 않다니! 그럼 어떻게 살 생각이니? 그 질문에 메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메리』, 89~90쪽)

 

 

이성애 결혼과 가족 중심 규범이 주류를 형성하는 사회에서는 독립적 삶의 모델을 꿈꾸기가 쉽지 않다. 이른바 ‘정상 가족’ 사회는 다양한 삶에 대한 상상력은커녕 편견과 차별을 부추긴다. 그렇지만 메리와 앤의 만남은 ‘성애 없는 헌신과 우정의 관계’라는 새로운 관계 모델을 보여준다. 가부장제는 이성애 제도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성애 규범이 전제된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여성 간의 우정은 정상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메리』가 보여준 권력이 없는 여성들끼리의 결합은 당대 문학 작품들에 볼 수 없었기에 낯설다. 그래서 더더욱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를 시도하는 것, 그 자체는 어렵고 낯설지 몰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성애 부부관계만 정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사회에 도전한 여성들의 전위적 투쟁으로 평가받는 ‘보스턴 결혼(Boston marriage, 미혼 여성 두 명이 동거하는 생활 방식)보다 한발 먼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원형을 간접적으로 제시했다.

 

『마리아』에서도 울스턴크래프트가 구상했을 법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다. 마리아는 남편이 꾸민 계략에 빠져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자신이 낳은 딸에 대한 양육권마저 박탈당한다.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힌 마리아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 정신병원 수용소 관리인으로 일하는 제미마(Jemima)다. 두 여자는 출신 배경이 다르지만(마리아는 상류층, 제미마는 빈곤층), 공통으로 ‘가부장제의 희생자’이다. 『마리아』가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면서 독자는 ‘열린 결말’을 상상할 수 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유토피아 소설의 고전적 양식을 그대로 따라 결말을 지었다면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유토피아 소설은 현실의 문제점을 부각한 다음 이를 교정한 이상향 사회를 제시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개혁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마리아의 수기를 통해 남성 중심 사회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문제들을 분석하여 낱낱이 비판한다. 이러한 그녀의 비판 의식이 반영된 결말을 상상해본다면, 울스턴크래프트는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을 ‘계급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로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냈을 것이다.

 

수백 년 전에 나온 이 소설들은 오늘날의 독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이란 실용성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문학은 매우 역동적인 장르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이 순간적인 고통이었으나 그것을 이겨낸 자신만의 역동적인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속 여주인공들의 모습은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저항의 욕망을 구체적이고 정확한 고발의 언어로 표현했던 작가들의 삶과 닮았다. 그녀들은 일상성의 문법과 원리를 따르지 않는 저만의 방식과 태도로, 세상에 대한 저항을 감행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메리 셸리의 문학은 여성에게 예속적 지위를 강요하는 세상의 규범에 반기를 든다. 또, 잊힐 뻔한 여성의 진실한 목소리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것이 페미니즘 소설의 역할이고 존재 이유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작가들의 목소리로 세상에 발표된 페미니즘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여성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미래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여성 독자는 그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싶은 현실과 미래는 이 작가들이 간절히 원했고 상상했던 현실과 미래와 어떻게 닮았고, 또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적극적인 독서는 끝없는 상상을 통해 새로운 사유의 장에서 역동적인 삶의 에너지를 얻게 해준다. 이러한 사유와 상상을 거듭하게 만드는 독서를 통해 여성 독자들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따라서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분명히 ‘오늘날의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한다. 그녀들의 페미니즘 소설은 지금도 숨을 쉬고 있다.

 

 

 

 

 

[1] 페미니즘이 전유한 ‘쌍년’의 의미는 이 글에서 참고했다. [내 ID는 강남미인, 되살린 ‘쌍년’의 기록] (일다, 2017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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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2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란 기존 관념에 대한 비판 내지 저항에 뿌리를 두는 바, 페미니즘 소설은 충분히 문학의 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cyrus 2018-05-28 11:41   좋아요 1 | URL
이제 우리나라도 페미니즘 문학, 페미니즘 비평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
 

 

 

‘미국 남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의 소설 원작으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일 것입니다. 19세기 말 미국 남북전쟁으로 인해 격동에 휘말린 여인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이죠.

 

 

 

 

 

 

 

 

 

 

 

 

 

 

 

 

 

 

 

* [안 읽었어요!]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열린책들, 2010)

 

 

 

 

이 영화에서 스칼렛의 하녀로 나왔던 해티 맥대니얼(Hattie McDaniel)은 흑인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제11회, 여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에서 그녀는 개성 넘치는 하녀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영화가 개봉된 1940년대에도 인종차별이 공공연히 존재했습니다. 그녀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Rhett Butler) 역을 맡은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은 맥대니얼이 시상식에 나오지 못한다면 자신도 시상식에 나오지 않겠다고 보이콧 선언을 했습니다. 결국, 논란 끝에 두 사람 모두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었고 사이좋게 여우조연상과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맥대니얼은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초로 참석한 흑인배우라는 기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맥대니얼은 할리우드에서 연기 활동을 펼치면서 하녀 역 위주로 캐스팅됐습니다. 일부 흑인들은 그녀가 하녀 연기만 한다면서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연기를 비판한 흑인들은 하녀 연기가 흑인에 대한 편견 낳을까 봐 염려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오스카상의 영예를 얻은 뒤에도 하녀 역할이나 단역 연기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소화했습니다.

 

 

 

 

 

 

 

 

 

 

 

 

 

 

 

 

 

 

* 강준만 《교양영어사전 2》(인물과사상사, 2013)

 

 

 

맥대니얼이 연기한 하녀의 애칭은 ‘매미(mammy)입니다. ‘mammy’는 ‘mommy(엄마)’의 남부 방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아주 좋지 않은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 단어의 의미를 기억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쓴 글[1]에 ‘mammy’의 의미를 소개했습니다. 미국 남부는 흑인차별이 극심했던 지역이고 아직도 흑백 인종차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mammy’는 미국 남부의 백인 가족 밑에서 일하는 흑인 하녀, 흑인 유모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혐오 표현입니다.

 

 

 

 

 

 

 

흑인 하녀, 유모 대부분은 뚱뚱한 흑인여성이었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장면 중 하나는 하녀(해티 맥대니얼 분)가 오하라(비비안 리 분)의 코르셋을 죄는 장면입니다. 코르셋은 허리를 가늘게 만들어 상대적으로 가슴을 더 풍만하게 보이기 위한 여성 전용 보정 속옷입니다. 흑인 하녀가 오하라의 코르셋을 죄는 장면은 날씬한 백인 여성의 몸을 우월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뚱뚱한 흑인 유모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읽고 있는 중이에요]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3장은 흑인여성의 한정적인 노동(하녀, 유모, 가모장[家母長])에 덧씌워진 백인 중심 시각과 분석을 해제하여 흑인여성의 노동을 재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장은 유모, 가모장,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통제적 이미지(controling images)의 사례들이 나옵니다. 앞서 언급했던 ‘mammy’가 바로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통제적 이미지가 만들어낸 단어라 볼 수 있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는 ‘제제벨(jezebel)‘후치(hoochie)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제제벨은 성경 열왕기 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Ahab)의 왕비입니다. 성경에서 제제벨은 성적으로 문란한 ‘악녀’로 묘사됩니다. 제제벨은 흑인 창녀,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흑인여성을 부르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제제벨이 가진 의미를 그대로 이어온 혐오 표현이 후치입니다.

 

 

 

 

 

 

 

 

 

 

 

 

 

 

 

 

 

 

* 장 메이에 《흑인노예와 노예상인》(시공사, 1998)

 

 

 

이성애 남녀의 결혼과 가족이 사회의 기반이라고 여기는 미국 백인 중심의 젠더 이데올로기는 흑인여성의 유급 가사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을 이해하는 데 불리한 분석 틀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녀와 유모는 가족을 위해 일을 하면서 임금을 받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하녀와 유모가 된 흑인여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흑인 하녀와 흑인 유모는 ‘백인 노예주’를 위해 일하는 ‘노예’였습니다. 슬프게도 흑인여성의 자식들은 부모처럼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백인 노예주, 특히 목화 농장을 경영하는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목화를 대규모로 재배해 많은 소득을 올렸습니다. 그러려면 값싼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고, 일하는 남성 노예를 사들이는 대신에 출산능력이 있는 여성 노예를 통제합니다. 미국은 1808년부터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어요. 이때부터 노예의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했고, 목화밭에서 일할 수 있는 흑인 노예를 구하기가 어려워졌어요. 흑인여성은 자신의 불행한 삶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출산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노예주들은 흑인여성의 출산을 독려하기 위한 유화책을 내세웁니다. 임신한 흑인여성에게 힘든 일을 부과하지 않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흑인여성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을 출산의 도구이자 통제,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 중심의 관점은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어왔습니다.

 

 

 

 

 

 

 

 

 

 

 

 

 

 

 

 

 

* 마커스 레디커 《노예선 : 인간의 역사》(갈무리, 2018)

 

 

 

흑인여성은 가족생활에 필요한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서 백인 가족 밑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하녀 연기를 많이 했다고 해서 흑인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을 때 해티 맥대니얼이 뭐라고 말했던가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녀 역할’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녀와 유모는 낮은 임금을 받는 직업이지만, 흑인여성들이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하는 불가피한 직업입니다. 하지만 흑인여성들도 집안일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닙니다. 백인 가족이 생물학적 결합(결혼)으로 형성된 혈연 중심의 공동체라면, 흑인 가족은 혈연을 초월한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흑인은 출신지가 다르고, 핏줄이 다른 동료도 ‘형제’이자 ‘자매’인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족의 범위를 확대한 흑인들의 유대감은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에 저항하는 집단의식입니다. ‘바다 위의 거대 감옥’이나 다름없는 노예선에 끌려 온 흑인 노예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비관했지만, 언젠가는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옆에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동료 노예가 있었습니다. 출신지와 언어는 달라도 흑인 노예들은 서로를 믿고 의지했고,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노예선의 역사를 연구한 마커스 레디커(Marcus Rediker)는 노예선에 갇힌 흑인 노예들이 ‘흑인 공동체’를 구성하여 자생력과 저항 의지를 키우는 과정을 주목했습니다. 그는 동료를 가족처럼 여기는 친밀한 관계를 ‘뱃동지(shipmat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동료애’가 강한 흑인여성들은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이웃 또는 친구의 자식들까지 함께 돌봅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육아 방식에서 흑인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그런데 백인 사회학자들은 흑인 공동체 속 흑인여성의 역할을 ‘가족 내 여성의 권력’으로 해석했고, 이를 ‘가모장’ 명제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가모장’을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가부장’과 동일하게 볼 수 없습니다. 가모장 명제는 흑인가족의 특징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한 개념입니다. ‘동료애’와 ‘가족애’가 결합된 흑인 가족에는 누군가가 가족 구성원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유모’와 ‘가모장’은 흑인여성을 이중으로 통제하는 이미지입니다. 유모는 백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착한’ 흑인여성을, 가모장은 남편의 권력을 거세하는 ‘나쁜’ 흑인여성을 상징합니다. 이 두 가지 통제적 이미지는 흑인여성의 주체성을 지워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흑인여성의 섹슈얼리티도 강력하게 통제됩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백인 가부장 및 이성애 중심 사회의 시선을 거부하고 흑인여성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힘 기르기’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다룬 흑인여성 문제들이 마치 ‘흑인여성만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 책에 나오는 흑인여성 억압의 문제는 ‘모두의 문제’입니다. ‘모두’라는 이 명사에는 우리나라 여성도 포함됩니다. 여성의 주체성을 지우는 여성 혐오는 여성을 ‘좋은 여자’와 ‘나쁜 년’의 이분법으로 구분합니다. 할 말 다 하는 여성,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 등은 어딘가 문제가 있고, 피하고 싶은 여자로 묘사됩니다. 대신 남성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수동적인 여성은 남성들로부터 사랑받는 여자로 묘사되고,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습니다. 이런 이분법적 편견에서 여성 혐오가 태동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기제들이 어떻게 여성의 삶과 권리를 실질적으로 제한하고 옥죄어 왔는가를 폭로하고 투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상이 바로 페미니즘입니다. 우리는 황인종, 즉 백인에 의해 유색인으로 분류되는 집단이면서도 흑인이나 동남아인을 백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차별합니다. 흑인과 동남아인을 무시하는 차가운 시선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유색인 여성들의 직업, 그리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복지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 이 모든 문제가 흑인여성의 억압의 양상과 얼마나 밀접히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흑인 페미니즘은 흑인여성에게만 한정되는 특정한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 [보이지 않는 사람들] 2018년 5월 17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10096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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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5-2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개념 클라크 게이블이네.
그러니 저 시대에 클라크가 적지 않은 파워를
가졌다는 말도 되겠네.
나중에 흑인을 비호했다고 구설수에 오를만도 하잖아.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난 중학교 때 책으로 읽고 영화로도 봤는데
재미는 있는데 책이나 영화나 흑인을 대변하기 위한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미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소설은 아닌가 해.
모르지.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관점이 보일런지.ㅋ

cyrus 2018-05-24 16:45   좋아요 1 | URL
클라크 게이블이 최고의 배우였다고 해요. 오스카상 보이콧 선언 이후에 KKK가 게이블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대요. 그런데 이 행적만 봐서는 그가 흑인 민권 운동에 관심 있는 배우라고 단정할 수 없어요. 확실한 건 게이블과 해티 맥대니얼은 정말 친한 사이였어요. 해티가 세상을 떠났을 때 게이블이 장례식에 참석했어요.

백인 여주인공이 나오는 백인 여성 작가의 소설과 흑인 여주인공이 나오는 흑인 여성 작가의 소설을 비교해보고 싶어요. 마거릿 미첼의 소설도 독서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데 과연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페크pek0501 2018-05-26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중2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하러 가서 처음 보았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몰랐음을 깨닫는 스칼렛에 대해 참 이상했어요. 어떻게 그걸 모를까 하고요. 그땐 제가 어렸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거죠.
지금은 모를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너무 잘 알지요.

예전에 페미니즘으로 본 소설, 이라는 제목 같은데(확실치 않네요.) 그 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뭐든 분석적으로 보면 다르게 보이는 걸 경험했거든요. 결국 역사라는 것도 승자(또는 강자)의 기록이라는 결론에 닿을 수 있는데... 우리는 패자(또는 약자)의 시각으로도 볼 필요가 있으므로 양쪽에서 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겠더라고요.

cyrus 2018-05-28 11:45   좋아요 1 | URL
요즘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제가 그동안 백인 중심의 시각으로 서양문학과 역사, 페미니즘 논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흑인여성의 목소리를 ‘피해자의 목소리’가 아닌 ‘생존자의 목소리’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됐어요. 흑인여성은 자신들을 통제하는 백인 중심 사회에 맞서서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백인 학자들은 단지 ‘흑인’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들의 주체적인 면모를 보지 못했어요.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는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의 역사이다. 즉 흑인 민권운동(African-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63년 노예해방령 이후 혹독한 시련과 투쟁의 시기를 견뎌내야만 했던 흑인 민권운동은 이제 단순히 흑인 해방을 넘어 유색인종과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미국 사회의 정치 · 경제적 모순에 대해 저항하는 시민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 마틴 루서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예찬사, 2015)

 

 

 

마틴 루서 킹은 1963년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말했다. 그는 ‘공민권을 위한 행진 시위’에서 인종 차별이 없는 사회의 도래를 꿈꾼다는 취지의 연설로 수만 명의 청중을 감동하게 했다. 킹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꿈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백인 경찰의 흑인에 대한 린치, 유명 커피숍에서의 흑인 차별 등은 인종차별이 남아 있는 미국 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윌리엄 에드워드 B. 듀보이스는 20세기 초 일찍이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거로 내다봤다.

 

 

 

 

 

 

 

 

 

 

 

 

 

 

 

 

 

 

* W. E. B. 듀보이스 《니그로》 (삼천리, 2013)

 

 

“오늘날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지역 전체에 퍼져 있는 근거 없는 가정, 즉 피부색이 열등함을 상징한다는 가설에 직면하고 있다.”

 

(듀보이스, 《니그로》 12쪽)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지금, 듀보이스의 말은 여전히 진실로 다가온다. 인종, 피부색 등에 따른 차별이 옳지 않다는 것은 보편화된 논리다. 그럼에도 편견에 시작된 차별이 지속되는 것은 그 논리가 행위로 이어질 만큼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절판] 알라 라탄시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한겨레출판, 2011)

* 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에 대한 오해》 (사회평론, 2003)

 

 

 

 

 

 

 

 

 

 

 

 

 

 

 

 

* 조지 오웰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이론과 실천, 2013)

 

 

 

미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은 인종 차별에 대해 어떤 의심을 하지 않았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 명인 토머스 제퍼슨은 ‘평등’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흑인의 열등한 면을 믿었으며 1801년에 백악관이 완공되었을 때 백악관 내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10여 명의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다. 사실 백악관은 흑인 노예들의 강제 노동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남북전쟁에 승리하여 노예해방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에이브러햄 링컨은 지독한 백인우월주의자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보수파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을 내세웠다. 이 표현은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이 쓴 시의 제목이다. 키플링은 공공연히 제국주의를 옹호했고, 미개한 유색인종을 바르게 이끌 수 있도록 지배하는 일은 백인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주장했다. 키플링처럼 인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조지 오웰『러디어드 키플링』(《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수록)이라는 글에서 키플링을 ‘배타적 제국주의자’로 규정하여 비판했다. 키플링이 만든 ‘백인의 짐’은 식민주의자, 인종주의자들이 자신의 지배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 자주 인용됐다.

 

 

 

 

 

 

 

 

 

 

 

 

 

 

 

 

 

*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 [절판] 제임스 H. 콘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갑인공방, 2005)

 

 

 

하지만 역사가 ‘신화’가 되고, 역사적 인물이 ‘위인’으로 박제되면 역사와 인물의 한계 그리고 누락되거나 잊힌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 흑인 민권운동에 뛰어든 ‘남성’ 흑인 지식인은 성차별 문제와 여성의 강간 피해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간주하지 않았고, 흑인의 노동을 착취하게 만드는 백인 중심 자본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인종 차별 철폐’와 ‘흑인 해방’ 사이에 ‘흑인 여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었다. 듀보이스는 ‘니그로 혈통’의 장점으로 ‘강한 형제애’라고 내세웠다.[1]

 

 

 

※ 흑인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단편적으로 언급된 책도 포함)

 

 

 

 

 

 

 

 

 

 

 

 

 

 

 

 

 

 

 

 

 

 

 

 

 

 

 

 

 

 

 

 

 

* 재닛 윌렌, 마조리 간 《노예제도에 반대한 여성들, 자유를 말하다》 (초록서재, 2016)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 [절판] 사빈 보지오-발리시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부키, 2007)

* [절판] 수잔 앨리스 왓킨스 《페미니즘》 (김영사, 2007)

* [절판] 소피아 포카 《포스트페미니즘》 (김영사, 2000)

 

 

 

 

흑인 페미니즘은 흑인 남성 중심의 ‘형제애’와 ‘흑인 해방’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비판사회이론이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남성과 흑인 여성 모두 억압하는 자본주의, 이성애 중심에 기반을 둔 가족, 가부장제, 백인우월주의 등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남성 중심 역사에 가려진 흑인 여성운동가, 여성 작가들의 삶과 업적을 발굴하여 주목한다.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만큼이나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흑인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해 1851년 미국 오하이오주 ‘여성권리대회’에서 말한 소저너 트루스의 연설 한 자락은 일상 속 인종 차별, 성차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 윤보라, 김홍미리, 나영, 박이은실, 손희정 외 《그럼에도 페미니즘》 (은행나무, 2017)

 

 

 저기 저 남성이 말하는군요. 여성은 탈것으로 모셔 드려야 하고, 도랑은 안아서 건너드려야 하고, 어디에서나 최고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한다고. 아무도 내게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탈 것으로 모셔진 적도, 진흙구덩이를 지나도록 도움을 받은 적도, 무슨 좋은 자리를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날 봐요! 내 팔을 보라구요! 나는 땅을 갈고, 곡식을 심고, 수확을 해 왔어요. 그리고 어떤 남성도 날 앞서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나는 남성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 게 있을 땐 남성만큼 먹을 수 있었어요. 남성만큼이나 채찍질을 견뎌내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난 13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 모두가 노예로 팔리는 걸 지켜봤어요. 내가 어미의 슬픔으로 울부짖을 때 그리스도 말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소저너 트루스의 연설, 《그럼에도 페미니즘》 『여성을 사랑하는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인용)

 

 

 

지금도 페미니즘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흑인 · 유색인 페미니즘’은 ‘서구 백인 페미니즘’에 비해 소개되지 않고 있다. 출판사들이 흑인 · 유색인 페미니즘이 ‘우리나라 페미니즘’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아니면 흑인 · 유색인 페미니즘이 ‘이해하기 쉬운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출판계가 대중(특히 여성)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페미니즘만 골라 찾는 행태는 문제가 있다.

 

 

 

 

 

 

 

 

 

 

 

 

 

 

 

 

 

 

 

*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문학동네, 2017)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사이행성, 2016)

* [절판, 읽을 거예요!] 앨리스 워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이프, 2004)

 

 

 

 

 

 

 

 

 

 

 

 

 

 

 

 

 

* [절판 / 안 읽었어요!] 안젤라 데이비스 《미국, 아직도 노예제 국가?》 (사람소리, 2013)

 

 

 

그나마 국내에 많이 알려진 흑인 페미니스트들을 꼽자면 벨 훅스, 록산 게이, 앨리스 워커가 있다. 페미니스트 작가로 확대하면 조라 닐 허스톤, 토니 모리슨 등이 있다. 이슬람 혐오, 인종주의, 여성 혐오, 자본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을 펼친 안젤라 데이비스도 국내 페미니스트들이 주목해야 할 흑인 페미니스트이다. 2013년에 그녀의 약전(略傳)과 인터뷰, 그리고 그녀가 쓴 글을 선별해서 묶은 《미국, 아직도 노예제 국가?》 (사람소리, 2013) 가 출간되었지만,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되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안젤라 데이비스를 소개한 유일한 책이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부키, 2007)이었다. 그런데 이 책도 절판되었다…‥.

 

듀보이스는 자신의 책을 “모든 새로운 것은 아프리카에서 나온다!(Semper novi quid ex Africa!)”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를 지었다.[2] 그는 아프리카의 자립적인 힘을 믿었으며 아프리카가 아픈 과거사를 딛고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길 희망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흑인이 아니면서 왜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합니까?” 이 질문에 상세한 대답이 필요한가? 당연히 ‘페미니즘’이라서 공부하는 거지. 나는 항상 서구 백인 중심 페미니즘을 ‘페미니즘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페미니즘을 연대별로 구분하는 하이픈 페미니즘 담론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 담론은 '독자적'인 흑인 페미니즘을 '제3세계 페미니즘(제3세대 페미니즘)'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급진적 페미니즘, 더 나아가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 가장 중요한 사상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새로운 페미니즘은 흑인 페미니즘에서 나온다. 흑인 페미니즘은 여성 문제를 단일화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며 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젠더, 계층, 인종, 사회적 환경 등)을 인식한다. 너무나도 어려워서 잘 모른다는 핑계를 대면서 계층, 인종 문제를 외면한다면 그것 또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방관적인 자세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다중의 문제’를 놓친다면 과거 페미니즘 운동의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1], [2] 《니그로》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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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5-19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에서 흑인들의 전쟁 파병과 임무에서도 많은 차별을 받아왔네요.
유독 흑인들의 참전과 사망자수가 많은 것도 가슴 아픕니다.

cyrus 2018-05-23 15:28   좋아요 1 | URL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흑인이 차별받은 사례들이 아주 많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은폐되거나 잊힌 사례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대부분은 승자나 지배자 위주의 기록이니까요.

2018-05-20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23 15:29   좋아요 1 | URL
흑인여성 못지않게 유색인 여성들에 대한 차별도 심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

페크pek0501 2018-05-2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 몇 세기인데 아직도 인종 차별 운운하는 뉴스를 보면 이해가 안 가요.
사람들의 두뇌에 한 번 심어 놓게 된 고정관념의 힘은 그렇게 센 것일까요?
인종 차별을 해도 된다는 고정관념은 언제 깨질까요?

cyrus 2018-05-23 15:32   좋아요 0 | URL
고정관념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정관념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다음에 태어날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저는 고정관념의 탄생을 사회화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결국, 고정관념의 유해성을 막으려면 그것이 잘못 되었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알려줘야 합니다.

psyche 2018-05-21 0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는 인종문제가 마음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피상적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많이 공감하지 못하는 거 같더라구요. 저 역시도 한국에 살고 있었을때는 백인 페미니즘에 많이 공감했었어요. 미국에 산 기간이 길어질 수록 경제적 계층보다는 유색인이라는 인종에 더 방점이 찍혀지더라구요. 페미니즘은 인종, 계층, 성적 정체성 등등에 따라 각자 다른 시각과 문제들이 있는데 암만해도 출판사에서는 팔릴 책을 내놓게 되니 서구 백인 중심의 책을 내놓는거 같아요. 아쉬운 일이죠.

cyrus 2018-05-23 15:34   좋아요 0 | URL
흑인, 유색인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영화 한 편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다 읽고 나면 책의 주제와 관련된 영화 한 편을 볼 예정입니다. 지금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흑인여성 문제를 다룬 영화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

AgalmA 2018-05-24 08:41   좋아요 2 | URL
psyche 님/
흑인인 벨 훅스나 록산 게이 책을 보면 중산층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이 주류가 된 문제점과 그것으로 페미니즘이 오도된 현상을 잘 짚어주더군요. 특히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요.

cyrus 님/
토니 모리슨 원작 영화화 된 거 있음 좋을텐데...
유명한 <칼라 퍼플>은 다들 보셨겠죠?

cyrus 2018-05-24 14:11   좋아요 0 | URL
To. AgalmA님 / 생각해 보니 토니 모리슨의 소설 중에 영화로 만들어진 게 없군요. 영화 <더 컬러 퍼플> 다시 한 번 보고 싶네요. 레드스타킹 영화 모임 때 이 영화 보자고 건의하고 싶은데, 옛날 영화라서 안 될 것 같습니다... ㅎㅎㅎ

AgalmA 2018-05-2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인 민권운동이 페미니즘에 영향을 준 걸 생각하면 ‘강한 형제애‘는 여성 페미니즘의 ‘강한 자매애‘ 이론 형성에 영향을 줬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cyrus 2018-05-24 14:1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런데 여성의 동료애나 우정이 남성의 동료애만큼이나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한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동성애를 ‘정신적 사랑’으로 봤잖아요. 그런데 여성의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사랑으로 간주되었어요.
 
니그로 - 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
W. E. B. 듀보이스 지음, 황혜성 옮김 / 삼천리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인종 차별은 역사적으로 끊이지 않는 아주 해묵은 문제다. 그만큼 뿌리가 깊다. 그래서 근절도 쉽지 않다. 인종 차별의 근원에는 서구 사회의 백인 우월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인식은 고용, 교육 등 전반에 걸친 인종 갈등으로 이어진다. 서구 사회에는 사실 인종 차별이 일상화돼 있기도 하다. 특히 미국은 가장 극단적인 인종 차별이 벌어지는 사회다. 미국이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간단치 않다. 노예해방을 선언한 남북전쟁 이후로도 미국 남부에서 흑인 차별은 여전히 극심한 양상을 보인다.

 

인종, 피부색에 대한 차별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비극이다. 그러나 오해와 광기로 인한 비극은 늘 되풀이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노예제도는 15세기 유럽인의 신대륙 발견 및 식민통치가 본격화하면서 시작됐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 제국은 19세기 초반까지 노예무역으로 떼돈을 벌었다. 목화 농장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꾸기 위해 쇠사슬에 묶여 미국 남부로 끌려온 흑인들은 백인 농장주에 의해 착취당했다. ‘백인이 지배하는 미국’을 외치는 미국인들은 KKK(Ku Klux Klan)라는 비밀 폭력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만약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본 시청자라면 흑인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일 것이다. ‘갱(gang)’, ‘폭력’, ‘마약’은 흑인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흑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다. 흑인 차별이 극심했던 20세기 초에 이미 흑인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한 백인의 무지와 편견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흑인 최초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윌리엄 에드워드 B. 듀보이스(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다. 1905년에 그는 나이아가라 운동을 통해 즉각적인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1915년에 듀보이스가 쓴 《니그로》(삼천리, 2013)는 흑인과 아프리카에 대한 상식화된 편견을 대담하게 뛰어넘는 책이다. 듀보이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흑인과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을 전복한다.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특히 만연하고 심각한 이유는 피부색 또는 외모 때문이다. 듀보이스는 ‘인류의 동일성’을 근거로 인종을 정형화하거나 인종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실과 역사적 용례에 따르면, ‘니그로’는 아프리카의 더 검은 피부색 사람들, 즉 갈색 피부, 곱슬곱슬하거나 ‘짧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두텁고 때로는 뒤집힌 입술, 얼굴에서 턱 부분이 발달된 경향, 길쭉한 두상이 특징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그렇지만 이런 유형의 니그로도 고정불변이거나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피부색도 무척 다양하여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주 새까맣거나 남빛이 아니다. 머리카락도 곱슬머리에서 풍성한 복슬 머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얼굴 각도와 두개골 모양도 무척 다양하다. (14~15쪽)

 

 

우리가 타자를 지각할 때 거의 자동으로 고려하는 요인이 성별, 나이와 함께 인종이다. 이처럼 인종에 대한 정보는 상대방을 지각하고 평가하는 데 최우선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암암리에라도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서로 다른 피부색과 문화를 지닌 타자에 대하여 동일성을 강제하는 폭력은 지금까지도 횡행하고 있다.

 

오늘날의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잦은 내전과 질병, 기아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이전의 아프리카는 그렇지 않았다. 인류 4대 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의 발원지 아프리카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대륙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광활한 대자연과 풍부한 광물 자원을 토대로 무역도 발달했었다. 《니그로》는 아프리카 문명의 찬란한 문화와 업적만을 상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식민지시대 이전부터 행해지던 서아프리카 내에서의 노예무역에 대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통념과는 달리 대다수의 흑인 노예들은 백인 사냥꾼에 잡혀 온 것이 아니었다.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베냉, 다호메이, 아샨티 왕국은 약소 아프리카 부족 마을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팔았다. 서아프리카의 아프리카 왕국들은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 노예 상인들의 높아진 수요에 맞춰 노예무역을 확대했다. 아프리카에서 구하기 힘든 총과 화약, 술 등을 얻기 위해서다. 듀보이스는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역사에서 흑인 편견과 탄압의 원인을 찾는다. 그는 오랜 내전과 노예무역 그리고 식민지국 수탈로 인해 뛰어난 문화유산과 풍부한 자원을 가진 아프리카가 ‘거대한 노예 시장’으로 전락했다고 분석한다.

 

100여 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듀보이스가 지적한 대로 흑인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별과 분리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이 책의 머리말 서두에서 “완벽한 흑인 역사를 말하기에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라고 썼다. 이제는 아프리카의 역사, 다양한 아프리카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언어 형성 배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사라진 평등을 말하기에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 100년 전 듀보이스가 바라본 인종차별과 오늘날 인종차별은 다르다. 오늘날 인종차별은 단순히 편견과 인식의 잔존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 종교 등이 조장하는 체계적인 ‘투명한 사회제도’로 작동된다. 흑인에 대한 차별 극복과 자유에의 여정은 아직 미완의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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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8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9 20:37   좋아요 0 | URL
‘백인 남성/백인 여자‘를 구분하는 젠더 이분법이 있듯이 ‘흑인 남성/흑인 여성‘을 구분하는 젠더 이분법도 있어요. 그런데 백인을 선호하고, 흑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견과 차별로 인해 흑인 남성/여성은 억압을 받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라는 책에 흑인을 통제하는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사례들이 나옵니다. 사례들이 남의 나라 일이 아니에요. 우리나라에 사는 이민자 중에 유색인들이 있어요. 중동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들을 통제하는 편견과 차별이 형성될 것입니다.

AgalmA 2018-05-2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부터 진출해 지금의 인류 기원의 씨가 된 걸 생각하면 인종주의는 진짜 웃긴 구분 아닙니까. 뿌리와 근원 그렇게나 좋아하는 서양이 이건 왜 간과한단 말입니까~ 하여간 인간은 참 자기 믿고 싶은대로 주장 개진하면서 객관 운운하는 거 맘에 안 들어요!
이런 논의에는 항상 울분이 터져서(아, 필립 로스...노벨상 못 타고 가셨네요ㅜㅜ)...좀 격노 어투인데 cyrus님께 불쾌감을 드리지 않았으면 싶네요^^;;

cyrus 2018-05-24 14:28   좋아요 1 | URL
요즘 중세철학, 중세 역사를 다룬 책을 보고 있어요. 시대를 불문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수도사들이 논쟁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 장면에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옵니다... ㅎㅎㅎ 제가 저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답답해서 못 살았을 거예요.

필립 로스. 제가 유일하게 읽은 그의 작품이 <울분>입니다.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자 중 최고령 작가가 밀란 쿤데라 아닌가요? 쿤데라 올해 나이가 아흔일걸요? ^^;;
 

 

 

 

 

 

 

지금 30대 이상 연령층은 <톰과 제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추억의 만화죠. <톰과 제리>는 잘 알려진 대로 쥐 제리를 잡아 먹어치우려는 고양이 톰의 실패담으로 구성됩니다. 제리는 먹이사슬 관계상 언제나 약자였고 그에 따라 꼬꼬마 시청자들은 늘 쫓기는 신세인 제리를 응원했죠. 어린 시절 저도 제리를 좋아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톰과 제리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리에게 당하기만 하는 톰이 불쌍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톰, 고길동, 로켓단 3인방은 ‘지금 보면 가장 불쌍한 3대 만화영화 빌런(나쁜 역할을 맡은 캐릭터)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과거에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접하면 부작용이 있었을 만화영화들이 많이 방영되곤 했습니다. <톰과 제리>도 어린이에게 권장할 만한 만화영화가 아니에요. <톰과 제리>는 1940년 미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 사회는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흑인을 대놓고 멸시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톰과 제리>에 흑인을 비하하는 묘사의 장면들은 그대로 텔레비전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혹시 <톰과 제리>에 팔과 다리만 나오던 흑인 하녀를 기억하시나요?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흑인 하녀는 톰에게 제리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톰이 제리를 못 잡거나 톰이 제리를 잡는 과정에서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으면 하녀는 톰을 집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런데 하녀의 얼굴을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만화를 보는 시청자는 까만 피부의 팔과 다리, 그리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몸만 볼 수 있습니다.

 

 

 

 

 

 

 

 

 

 

 

 

 

 

 

 

 

*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 《보이지 않는 고릴라》 (김영사, 2011)

 

 

 

어렸을 때 <톰과 제리>를 많이 봤는데, 흑인 하녀가 나온 장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요? 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흑인 하녀는 출연 분량이 적은 ‘단역’입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해요.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착각’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실험이 ‘보이지 않는 고릴라(Invisible Gorilla)’ 실험입니다. 흰 셔츠 입은 학생들이 공을 패스한 횟수를 세어보는 이 실험에서 참가자 절반은 고릴라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학생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봤던 것이죠. <톰과 제리> 시청자들은 톰과 제리가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보느라 흑인 하녀가 잠깐 나오는 장면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흑인 하녀의 얼굴이 잠깐 나오는 <톰과 제리> 에피소드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에피소드를 봤는데 기억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결과가 보여준 ‘주의력 착각’이죠. 아주 잠깐이지만 하녀의 얼굴이 나오는 <톰과 제리>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톰과 제리>의 흑인 하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씁쓸하게도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 사회에 살았던 흑인들은 백인의 차별과 멸시 속에 삭제되어 ‘투명한 존재’로 남았습니다.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정체성을 부여받는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톰과 제리>의 흑인 하녀의 이름이 뭔지 궁금하지 않나요? ‘매미 투슈(Mammy Two-shoes)’라고 하네요. 그런데 ‘매미 투슈’는 하녀가 태어났을 때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흑인 하녀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는 별칭입니다. ‘mammy’는 유모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흑인 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 지역에 가면 ‘mammy’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흑인 하녀를 비하하는 속어가 됩니다. 하녀의 성(姓)인 ‘shoes(구두)’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구두를 신은 다리만 나오는 하녀의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매미 투슈’는 함부로 호명해선 안 되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이름이 아니라 흑인 여성을 경멸하는 백인이 만든 ‘혐오 단어’입니다.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첫 장에 보면 ‘무쇠솥과 주전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흑인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마리아 스튜어트는 백인 가정의 하녀로 일한 흑인 노예였습니다. 그녀는 어느 연설에서 ‘무쇠솥과 주전자’에 억눌린 채 살아야 하는 흑인 여성의 실태를 알렸습니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우리 흑인 딸들의 마음과 재능이 무쇠솥과 주전자 아래에 억눌려야 합니까?” (마사 스튜어트, 《흑인 페미니즘 사상》 21쪽)

 

 

‘무쇠솥과 주전자’는 ‘매미 투슈’만큼 비하적인 의미의 단어는 아니지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흑인 여성의 노동 착취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지난 월요일(5월 14일)에 《흑인 페미니즘 사상》 첫 번째 독서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날, ‘소울트리’라는 분이 ‘무쇠솥과 주전자’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했습니다. 무쇠솥과 주전자를 화로에 오랫동안 올려놓으면 밑 부분이 새까맣게 그을립니다. 하녀는 부엌에 가면 무쇠솥과 주전자를 화로에 올려놓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소울트리 님은 ‘(검게 그을린) 무쇠솥과 주전자’가 흑인 하녀의 모습을 비유한 단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흑인 여성은 다중(多重)으로 억압받는 존재입니다. 흑인 여성을 억압하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본다면 ‘백인 남성’, ‘흑인 남성’ 그리고 ‘백인 여성’입니다. 그리고 이 성별 및 인종적 구분은 이성애라는 섹슈얼리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가 재생산과 생산의 기초 단위로 이성애에 기반을 둔 가족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성애 이외의 섹슈얼리티는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젠더, 인종, 계급뿐만 아니라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해체하는 사상입니다.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상세하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불과 오십 년 전만 해도 흑인은 백인 화장실을 쓸 수 없고, 버스에서 흑인은 맨 뒷좌석에만 앉아야 했고, 백인식당은 흑인에게 음식 서빙을 거부했고, 흑인은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흑인해방운동이 전개되자 진보를 ‘남성성’과 동일하게 인식하는 일부 흑인 남성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 지식인 중심의 미국 흑인 사상은 흑인 여성해방 문제를 소홀히 다뤘습니다. 서구 중산층 출신의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여성을 여성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동료로 보지 않았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문제를 구성하는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백인 여성(페미니스트)의 흑인 여성 차별 문제는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과 ‘흑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 문제만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집안의 노동자》 (갈무리, 2017)

* 하워드 진 《역사의 정치학》 (마인드큐브, 2018)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집안의 노동자》 (갈무리, 2017)여성을 ‘가사 노동자’로 기획한 미국 뉴딜 정책의 한계를 되짚은 책입니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의 긴 터널 속에 헤매는 ‘잊힌 사람들(The Forgotten Man)’을 위한 뉴딜 정책을 내세웁니다. 뉴딜 정책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긴 기존의 자유방임주의에서 벗어나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통제하여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는 복지 정책입니다. 그러나 뉴딜 정책은 경제 피라미드 구조에서 밑바닥에 위치했던 흑인들을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대다수 여성은 국가가 주도한 일자리 정책의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흑인은 더 심각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특히 남부에 사는 흑인들은 제대로 된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했으며 남부 백인들이 복지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분배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루스벨트 정부는 흑인차별 문제에서도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자신의 글에서 폭력과 살인을 부르는 흑인차별 문제를 방관한 루스벨트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뉴딜 시대는 백인들이 살만한 시절이었을 뿐입니다. ‘백인들에 의해 잊힌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20세기 초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식했지만, 그들은 가사노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여성을 ‘집안의 노동자’로 정의하기 시작한 시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뉴딜 정책이 도입되기 이전의 시기입니다. 미국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위한 ‘가정학 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정학’은 집안에서만 할 수 있는 기술, 즉 재봉과 바느질을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가정학을 배운 미국 주부들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여 가족의 기능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국가는 중산층 여성들에게 ‘무급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선전합니다. 그 시절에 주부가 가사노동을 하지 않으면 ‘나쁜 엄마’, ‘나쁜 아내’라는 부정적인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 [개정판]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갈라파고스, 2018)

* [구판 절판]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이매진, 2005)

 

 

 

국가는 여성을 가정(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로 ‘기획’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베티 프리단은 가사노동에 지친 백인 중산층 주부를 괴롭혔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 ‘문제’는 여성에게 주부로 살아가길 강요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입니다. 하지만 프리단도 ‘가정학 운동’을 주도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한계를 답습했습니다. 그녀 역시 여성의 삶에 주입된 가사노동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또 흑인 여성 문제를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보고 싶은 문제(백인 중산층 여성의 차별과 불평등)’만 봤고, 흑인 여성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받아 (중산층 백인 중심의) 여성 정책으로부터 소외받습니다. 이처럼 흑인 여성 문제에 소극적으로 반응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은 흑인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억압에 저항하는 것뿐만 아니라 억압을 정당화하는 관념에 도전하는 ‘비판 사회이론’입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포괄적인 목적억압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실천과 관념에 저항하는 것이다. 비판사회이론인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서로 교차하는 억압에 의해 지속되는 사회 부정의 상황에서 흑인여성의 힘 기르기를 그 목적으로 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55~56쪽)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교차하는 여성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은 복잡한 차별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도 고려해야 합니다. 여성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마치 여러 개의 실이 복잡하게 꼬인 상태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여성의 삶을 속박하는―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계급 등이 얽힌―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어나가기 위해선 ‘교차성’에 주목한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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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7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8 11:50   좋아요 0 | URL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라는 책에 보면 흑인 여성의 강간 피해 사례들이 나옵니다. 차마 눈으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콩고 민주 공화국은 정말 강간이 많이 일어나고, 강간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은 국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5-1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허투루 읽다가 나중에는 정색을 하고 읽게 하는 힘이 있는 글입니다. 이달의 추천작으로 추천합니다아..

cyrus 2018-05-18 11:51   좋아요 0 | URL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하라 2018-05-1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유없이 그런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랬던거라는 이유가 생겨버렸네요^^;

cyrus 2018-05-18 11:52   좋아요 0 | URL
사실 <톰과 제리>에 아이들이 해선 안 될 잔인한 행동들이 나오죠. 그리고 가학적인 묘사도 많이 나와요.. ^^;;

transient-guest 2018-05-18 04: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인종증오와 차별의 망령을 끄집어 낸 것이 지금의 미국입니다. 과거 법적으로 차별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 흑인여성이었죠. 영화, The Shape of Water에서 보면 잠깐 이런 모습이 나오죠. 저도 톰과 제리에서 가끔 등장하던 흑인여성의 얼굴이 나온 에피소드는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사실 톰과 제리의 톰보다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씨가 더 짠하게 기억됩니다. 장남으로 없는 집에 태어나 온 가족을 부양했다던 당시 아버지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모두 거둬먹이는 걸 보면 박애주의자 같습니다.ㅎㅎ 그 둘리가 좀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고나서입니다....

cyrus 2018-05-18 11:54   좋아요 1 | URL
어떤 유머게시판에 오른 글에서 본건데, 둘리보다 고길동이 더 불쌍하게 느껴지면 어른이 된 거래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8-05-18 12:43   좋아요 0 | URL
이미 늙갱이랍니다 ㅎㅎ

stella.K 2018-05-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롭고 진지한 시간이었겠구나.
톰과 제리는 나도 초등학교 때 봤는데
그때는 뭐 워낙 어리기도 하고, 흑인 여성 문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근데 문제가 참 많아.
그래도 요즘 흑인 영화들엔 흑인 여성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시도들이 있어보이는데.
<히든 피겨스>도 그렇고, <헬프>도 그렇고.
그런데 그건 또 제3자가 봤을 때 불온한 구석이 있더라고.

cyrus 2018-05-19 20:53   좋아요 0 | URL
이제 서구 백인 작가가 쓴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흑인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유심히 보려고 해요. ^^

페크pek0501 2018-05-20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두 권짜리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두껍진 않았어요.

독자를 어느 위치에 놓고 쓰느냐의 문제, 무엇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쓰느냐의 문제.
필자는 의식하지 못했으되 독자가 느껴지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글쓰기가 결코 쉽지 않은 작업 같습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걸 느껴질 때가 많아요. 특히 자기가 베푼 것만 생각하고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건 모르기 일쑤이고요.

cyrus 2018-05-23 15:39   좋아요 1 | URL
문제를 다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글 한 편으로 정리하는 일이 쉬운 작업이 아니죠. 그래서 저도 페크님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쉬운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글로 표현해야 합니다. 전문 작가이든 글 쓰는 사람이든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쓰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글 잘 쓰는 사람도 완벽할 수 없어요. 자신의 무지와 실수를 인정하고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쓴 글이야말로 훌륭하고 진실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