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메리, 마리아, 마틸다 ㅣ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5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메리 셸리 지음,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3월
평점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의 《여권의 옹호》(연암서가, 2014)는 ‘페미니즘의 원점’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태동은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인간의 권리를 주창했고 뒤이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책을 통해 계몽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인간은 남성을 의미할 뿐 여성은 여전히 배제되고 있었다.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인물인 루소조차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용기 있게 선언하면서 나섰고, 《여권의 옹호》에서 루소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여권의 옹호》는 여성들도 국민 교육의 대상이며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출 수 있도록 이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울스턴크래프트와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불멸의 작가’가 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태어난 지 11일 만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출신 모녀가 쓴 세 편의 소설이 국내 초역으로 선보인다. 『메리』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첫 소설이다. 『마리아: 여성의 고난』은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나약하고 감정적인 모습, 여성스러운 매력만을 보여주는 남성 작가의 감상 소설(Sentimental novel)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집필에 공을 들였다. 『마틸다』는 셸리의 미발표 작품이다. 『마틸다』는 아버지와 딸의 근친 관계라는 파격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이다. 고드윈은 셸리가 보낸 『마틸다』 원고를 읽은 뒤 경악을 금치 못했고 원고 발표를 요청한 딸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
셸리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소설의 원조로 꼽히지만,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로도 읽힌다. 《프랑켄슈타인》은 당대의 남성 신화에 도전하는 텍스트이다. 서구 문명의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의 출산 없이 탄생한 괴물은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린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불행한 결과를 상징한다. 『마틸다』의 여주인공 마틸다 역시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친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러나 ‘근친 사랑’이라는 주제는 불순하고도 비도덕적이다. 파격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춰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여주인공의 주체적 여성상을 보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건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틸다는 근친 사랑을 금기하는 정상 가족 사회 자체를 거부한다. 그녀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마틸다』를 읽은 고드윈은 아버지를 못 잊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불편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남성 독자들도 고드윈과 비슷한 정서를 느꼈으리라. 이들의 눈에는 마틸다가 ‘변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쌍년’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쌍년’의 의미는 남자들이 여자를 비하할 때 쓰는 ‘쌍년’과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쌍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회의 틀에 벗어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여성을 뜻한다[1]. 셸리가 창조한 마틸다는 남성이 부여한 ‘쌍년’의 부정성을 뒤집은 여주인공이다.
만약 울스턴크래프트가 문학적 역량을 더 보여줄 수 있었더라면 『메리』와 『마리아』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메리』의 여주인공 메리는 독서와 사색을 즐기고 여행을 좋아하는 능동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결혼 생활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아내로서의 의무’에 따라 남편에게 복종하는 결혼 제도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메리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성이지만, 자신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앤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앤을 향한 우정이 깊어질수록 메리는 사랑(이성애)과 결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녀는 한 차례 결혼을 경험했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헨리라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이성애적 규범과 질서를 끝내 거부한다. 이 소설에서 메리는 앤과의 우정을 경험하면서 평소에 깨달을 수 없는 새로운 성찰과 낯선 감정들을 마주한다. 그녀는 결혼이나 가족, 연애가 이성애 중심의 관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제도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은 ‘혼자’ 또는 동성 동거를 원하는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게는 다른 친구가 없어요. 앤을 잃는다면, 제게 세상은 사막과도 같을 거예요.” “친구가 없다니.” 모두 함께 되물었다. “남편이 있잖아요?” (『메리』, 49쪽)
메리는 심사숙고한 뒤 앤의 가족에게 남편과 살 수 없는 이유가 있으며 한동안 그 이유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남편과 살지 않다니! 그럼 어떻게 살 생각이니? 그 질문에 메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메리』, 89~90쪽)
이성애 결혼과 가족 중심 규범이 주류를 형성하는 사회에서는 독립적 삶의 모델을 꿈꾸기가 쉽지 않다. 이른바 ‘정상 가족’ 사회는 다양한 삶에 대한 상상력은커녕 편견과 차별을 부추긴다. 그렇지만 메리와 앤의 만남은 ‘성애 없는 헌신과 우정의 관계’라는 새로운 관계 모델을 보여준다. 가부장제는 이성애 제도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성애 규범이 전제된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여성 간의 우정은 정상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메리』가 보여준 권력이 없는 여성들끼리의 결합은 당대 문학 작품들에 볼 수 없었기에 낯설다. 그래서 더더욱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를 시도하는 것, 그 자체는 어렵고 낯설지 몰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성애 부부관계만 정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사회에 도전한 여성들의 전위적 투쟁으로 평가받는 ‘보스턴 결혼(Boston marriage, 미혼 여성 두 명이 동거하는 생활 방식)’보다 한발 먼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원형을 간접적으로 제시했다.
『마리아』에서도 울스턴크래프트가 구상했을 법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다. 마리아는 남편이 꾸민 계략에 빠져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자신이 낳은 딸에 대한 양육권마저 박탈당한다.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힌 마리아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 정신병원 수용소 관리인으로 일하는 제미마(Jemima)다. 두 여자는 출신 배경이 다르지만(마리아는 상류층, 제미마는 빈곤층), 공통으로 ‘가부장제의 희생자’이다. 『마리아』가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면서 독자는 ‘열린 결말’을 상상할 수 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유토피아 소설의 고전적 양식을 그대로 따라 결말을 지었다면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유토피아 소설은 현실의 문제점을 부각한 다음 이를 교정한 이상향 사회를 제시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개혁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마리아의 수기를 통해 남성 중심 사회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문제들을 분석하여 낱낱이 비판한다. 이러한 그녀의 비판 의식이 반영된 결말을 상상해본다면, 울스턴크래프트는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을 ‘계급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로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냈을 것이다.
수백 년 전에 나온 이 소설들은 오늘날의 독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이란 실용성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문학은 매우 역동적인 장르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이 순간적인 고통이었으나 그것을 이겨낸 자신만의 역동적인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속 여주인공들의 모습은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저항의 욕망을 구체적이고 정확한 고발의 언어로 표현했던 작가들의 삶과 닮았다. 그녀들은 일상성의 문법과 원리를 따르지 않는 저만의 방식과 태도로, 세상에 대한 저항을 감행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메리 셸리의 문학은 여성에게 예속적 지위를 강요하는 세상의 규범에 반기를 든다. 또, 잊힐 뻔한 여성의 진실한 목소리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것이 페미니즘 소설의 역할이고 존재 이유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작가들의 목소리로 세상에 발표된 페미니즘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여성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미래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여성 독자는 그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싶은 현실과 미래는 이 작가들이 간절히 원했고 상상했던 현실과 미래와 어떻게 닮았고, 또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적극적인 독서는 끝없는 상상을 통해 새로운 사유의 장에서 역동적인 삶의 에너지를 얻게 해준다. 이러한 사유와 상상을 거듭하게 만드는 독서를 통해 여성 독자들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따라서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분명히 ‘오늘날의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한다. 그녀들의 페미니즘 소설은 지금도 숨을 쉬고 있다.
[1] 페미니즘이 전유한 ‘쌍년’의 의미는 이 글에서 참고했다. [내 ID는 강남미인, 되살린 ‘쌍년’의 기록] (일다, 2017년 1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