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30대 이상 연령층은 <톰과 제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추억의 만화죠. <톰과 제리>는 잘 알려진 대로 쥐 제리를 잡아 먹어치우려는 고양이 톰의 실패담으로 구성됩니다. 제리는 먹이사슬 관계상 언제나 약자였고 그에 따라 꼬꼬마 시청자들은 늘 쫓기는 신세인 제리를 응원했죠. 어린 시절 저도 제리를 좋아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톰과 제리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리에게 당하기만 하는 톰이 불쌍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톰, 고길동, 로켓단 3인방은 ‘지금 보면 가장 불쌍한 3대 만화영화 빌런(나쁜 역할을 맡은 캐릭터)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과거에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접하면 부작용이 있었을 만화영화들이 많이 방영되곤 했습니다. <톰과 제리>도 어린이에게 권장할 만한 만화영화가 아니에요. <톰과 제리>는 1940년 미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 사회는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흑인을 대놓고 멸시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톰과 제리>에 흑인을 비하하는 묘사의 장면들은 그대로 텔레비전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혹시 <톰과 제리>에 팔과 다리만 나오던 흑인 하녀를 기억하시나요?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흑인 하녀는 톰에게 제리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톰이 제리를 못 잡거나 톰이 제리를 잡는 과정에서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으면 하녀는 톰을 집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런데 하녀의 얼굴을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만화를 보는 시청자는 까만 피부의 팔과 다리, 그리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몸만 볼 수 있습니다.

 

 

 

 

 

 

 

 

 

 

 

 

 

 

 

 

 

*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 《보이지 않는 고릴라》 (김영사, 2011)

 

 

 

어렸을 때 <톰과 제리>를 많이 봤는데, 흑인 하녀가 나온 장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요? 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흑인 하녀는 출연 분량이 적은 ‘단역’입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해요.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착각’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실험이 ‘보이지 않는 고릴라(Invisible Gorilla)’ 실험입니다. 흰 셔츠 입은 학생들이 공을 패스한 횟수를 세어보는 이 실험에서 참가자 절반은 고릴라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학생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봤던 것이죠. <톰과 제리> 시청자들은 톰과 제리가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보느라 흑인 하녀가 잠깐 나오는 장면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흑인 하녀의 얼굴이 잠깐 나오는 <톰과 제리> 에피소드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에피소드를 봤는데 기억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결과가 보여준 ‘주의력 착각’이죠. 아주 잠깐이지만 하녀의 얼굴이 나오는 <톰과 제리>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톰과 제리>의 흑인 하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씁쓸하게도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 사회에 살았던 흑인들은 백인의 차별과 멸시 속에 삭제되어 ‘투명한 존재’로 남았습니다.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정체성을 부여받는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톰과 제리>의 흑인 하녀의 이름이 뭔지 궁금하지 않나요? ‘매미 투슈(Mammy Two-shoes)’라고 하네요. 그런데 ‘매미 투슈’는 하녀가 태어났을 때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흑인 하녀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는 별칭입니다. ‘mammy’는 유모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흑인 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 지역에 가면 ‘mammy’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흑인 하녀를 비하하는 속어가 됩니다. 하녀의 성(姓)인 ‘shoes(구두)’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구두를 신은 다리만 나오는 하녀의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매미 투슈’는 함부로 호명해선 안 되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이름이 아니라 흑인 여성을 경멸하는 백인이 만든 ‘혐오 단어’입니다.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첫 장에 보면 ‘무쇠솥과 주전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흑인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마리아 스튜어트는 백인 가정의 하녀로 일한 흑인 노예였습니다. 그녀는 어느 연설에서 ‘무쇠솥과 주전자’에 억눌린 채 살아야 하는 흑인 여성의 실태를 알렸습니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우리 흑인 딸들의 마음과 재능이 무쇠솥과 주전자 아래에 억눌려야 합니까?” (마사 스튜어트, 《흑인 페미니즘 사상》 21쪽)

 

 

‘무쇠솥과 주전자’는 ‘매미 투슈’만큼 비하적인 의미의 단어는 아니지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흑인 여성의 노동 착취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지난 월요일(5월 14일)에 《흑인 페미니즘 사상》 첫 번째 독서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날, ‘소울트리’라는 분이 ‘무쇠솥과 주전자’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했습니다. 무쇠솥과 주전자를 화로에 오랫동안 올려놓으면 밑 부분이 새까맣게 그을립니다. 하녀는 부엌에 가면 무쇠솥과 주전자를 화로에 올려놓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소울트리 님은 ‘(검게 그을린) 무쇠솥과 주전자’가 흑인 하녀의 모습을 비유한 단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흑인 여성은 다중(多重)으로 억압받는 존재입니다. 흑인 여성을 억압하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본다면 ‘백인 남성’, ‘흑인 남성’ 그리고 ‘백인 여성’입니다. 그리고 이 성별 및 인종적 구분은 이성애라는 섹슈얼리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가 재생산과 생산의 기초 단위로 이성애에 기반을 둔 가족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성애 이외의 섹슈얼리티는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젠더, 인종, 계급뿐만 아니라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해체하는 사상입니다.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상세하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불과 오십 년 전만 해도 흑인은 백인 화장실을 쓸 수 없고, 버스에서 흑인은 맨 뒷좌석에만 앉아야 했고, 백인식당은 흑인에게 음식 서빙을 거부했고, 흑인은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흑인해방운동이 전개되자 진보를 ‘남성성’과 동일하게 인식하는 일부 흑인 남성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 지식인 중심의 미국 흑인 사상은 흑인 여성해방 문제를 소홀히 다뤘습니다. 서구 중산층 출신의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여성을 여성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동료로 보지 않았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문제를 구성하는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백인 여성(페미니스트)의 흑인 여성 차별 문제는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과 ‘흑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 문제만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집안의 노동자》 (갈무리, 2017)

* 하워드 진 《역사의 정치학》 (마인드큐브, 2018)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집안의 노동자》 (갈무리, 2017)여성을 ‘가사 노동자’로 기획한 미국 뉴딜 정책의 한계를 되짚은 책입니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의 긴 터널 속에 헤매는 ‘잊힌 사람들(The Forgotten Man)’을 위한 뉴딜 정책을 내세웁니다. 뉴딜 정책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긴 기존의 자유방임주의에서 벗어나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통제하여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는 복지 정책입니다. 그러나 뉴딜 정책은 경제 피라미드 구조에서 밑바닥에 위치했던 흑인들을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대다수 여성은 국가가 주도한 일자리 정책의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흑인은 더 심각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특히 남부에 사는 흑인들은 제대로 된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했으며 남부 백인들이 복지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분배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루스벨트 정부는 흑인차별 문제에서도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자신의 글에서 폭력과 살인을 부르는 흑인차별 문제를 방관한 루스벨트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뉴딜 시대는 백인들이 살만한 시절이었을 뿐입니다. ‘백인들에 의해 잊힌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20세기 초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식했지만, 그들은 가사노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여성을 ‘집안의 노동자’로 정의하기 시작한 시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뉴딜 정책이 도입되기 이전의 시기입니다. 미국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위한 ‘가정학 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정학’은 집안에서만 할 수 있는 기술, 즉 재봉과 바느질을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가정학을 배운 미국 주부들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여 가족의 기능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국가는 중산층 여성들에게 ‘무급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선전합니다. 그 시절에 주부가 가사노동을 하지 않으면 ‘나쁜 엄마’, ‘나쁜 아내’라는 부정적인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 [개정판]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갈라파고스, 2018)

* [구판 절판]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이매진, 2005)

 

 

 

국가는 여성을 가정(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로 ‘기획’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베티 프리단은 가사노동에 지친 백인 중산층 주부를 괴롭혔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 ‘문제’는 여성에게 주부로 살아가길 강요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입니다. 하지만 프리단도 ‘가정학 운동’을 주도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한계를 답습했습니다. 그녀 역시 여성의 삶에 주입된 가사노동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또 흑인 여성 문제를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보고 싶은 문제(백인 중산층 여성의 차별과 불평등)’만 봤고, 흑인 여성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받아 (중산층 백인 중심의) 여성 정책으로부터 소외받습니다. 이처럼 흑인 여성 문제에 소극적으로 반응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은 흑인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억압에 저항하는 것뿐만 아니라 억압을 정당화하는 관념에 도전하는 ‘비판 사회이론’입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포괄적인 목적억압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실천과 관념에 저항하는 것이다. 비판사회이론인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서로 교차하는 억압에 의해 지속되는 사회 부정의 상황에서 흑인여성의 힘 기르기를 그 목적으로 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55~56쪽)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교차하는 여성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은 복잡한 차별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도 고려해야 합니다. 여성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마치 여러 개의 실이 복잡하게 꼬인 상태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여성의 삶을 속박하는―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계급 등이 얽힌―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어나가기 위해선 ‘교차성’에 주목한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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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7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8 11:50   좋아요 0 | URL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라는 책에 보면 흑인 여성의 강간 피해 사례들이 나옵니다. 차마 눈으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콩고 민주 공화국은 정말 강간이 많이 일어나고, 강간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은 국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5-1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허투루 읽다가 나중에는 정색을 하고 읽게 하는 힘이 있는 글입니다. 이달의 추천작으로 추천합니다아..

cyrus 2018-05-18 11:51   좋아요 0 | URL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하라 2018-05-1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유없이 그런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랬던거라는 이유가 생겨버렸네요^^;

cyrus 2018-05-18 11:52   좋아요 0 | URL
사실 <톰과 제리>에 아이들이 해선 안 될 잔인한 행동들이 나오죠. 그리고 가학적인 묘사도 많이 나와요.. ^^;;

transient-guest 2018-05-18 04: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인종증오와 차별의 망령을 끄집어 낸 것이 지금의 미국입니다. 과거 법적으로 차별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 흑인여성이었죠. 영화, The Shape of Water에서 보면 잠깐 이런 모습이 나오죠. 저도 톰과 제리에서 가끔 등장하던 흑인여성의 얼굴이 나온 에피소드는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사실 톰과 제리의 톰보다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씨가 더 짠하게 기억됩니다. 장남으로 없는 집에 태어나 온 가족을 부양했다던 당시 아버지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모두 거둬먹이는 걸 보면 박애주의자 같습니다.ㅎㅎ 그 둘리가 좀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고나서입니다....

cyrus 2018-05-18 11:54   좋아요 1 | URL
어떤 유머게시판에 오른 글에서 본건데, 둘리보다 고길동이 더 불쌍하게 느껴지면 어른이 된 거래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8-05-18 12:43   좋아요 0 | URL
이미 늙갱이랍니다 ㅎㅎ

stella.K 2018-05-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롭고 진지한 시간이었겠구나.
톰과 제리는 나도 초등학교 때 봤는데
그때는 뭐 워낙 어리기도 하고, 흑인 여성 문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근데 문제가 참 많아.
그래도 요즘 흑인 영화들엔 흑인 여성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시도들이 있어보이는데.
<히든 피겨스>도 그렇고, <헬프>도 그렇고.
그런데 그건 또 제3자가 봤을 때 불온한 구석이 있더라고.

cyrus 2018-05-19 20:53   좋아요 0 | URL
이제 서구 백인 작가가 쓴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흑인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유심히 보려고 해요. ^^

페크(pek0501) 2018-05-20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두 권짜리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두껍진 않았어요.

독자를 어느 위치에 놓고 쓰느냐의 문제, 무엇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쓰느냐의 문제.
필자는 의식하지 못했으되 독자가 느껴지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글쓰기가 결코 쉽지 않은 작업 같습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걸 느껴질 때가 많아요. 특히 자기가 베푼 것만 생각하고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건 모르기 일쑤이고요.

cyrus 2018-05-23 15:39   좋아요 1 | URL
문제를 다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글 한 편으로 정리하는 일이 쉬운 작업이 아니죠. 그래서 저도 페크님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쉬운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글로 표현해야 합니다. 전문 작가이든 글 쓰는 사람이든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쓰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글 잘 쓰는 사람도 완벽할 수 없어요. 자신의 무지와 실수를 인정하고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쓴 글이야말로 훌륭하고 진실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