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의 빈곤', 2011년

 

 2011년도 이제 3일 밖에 안 남았다. 항상 느꼈던 것이지만 시간 한 번, 참 빠르게 지나간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나름 개인적인 시간이 많았던 휴학생 신분으로 한 해를 보냈기 때문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복학을 하게 되면서 워낙에 바쁜 대학 생활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올해는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고 느껴진다.

 2011년 한 해를 개인적으로 평가해보라고 한다면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번 대학생활은 이전에 비해 학습활동 부분에 있어서 많은 진전의 성과가 있었다. 군 입대 이후 복학한 터라 행정학이라는 전공과목을 공부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도 들기도 했지만 열심히 노력한 끝에 좋은 학업성적을 얻게 되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토론 및 발표 형식의 수업을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소심적인 성격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이번 학기만 해도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한 횟수만 해도 5번이다. 많이 해봤자 평균 세, 네 번하게 되는데 이보다 더 많이 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전달하는 것이 서재나 인터넷 카페에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학업에 있어서는 부족한 것은 없지만 과 생활을 하지 않다보니 인맥관계 형성에 있어서도 한정적이었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과 후배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었다. 과 생활은 안 해도 선배들과의 교류는 군 입대 전부터 만나기 시작했으니 별로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보다 세, 네 살 어린 후배들에게는 친해지고 싶은 정이 샘솟지 않았다. 친한 과 동기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우리 과 후배들은 나이가 점점 어린 학번일수록 소위 ‘개념이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학번이 낮을수록 여자 학생들이 많아지다 보니 학교생활 오래한 남자 선배라도 여학생들의 입김(?)에 휘둘린다고 한다. 또 생긴 것과는 다르게 잘 노는 편이란다. 그 대신에 성적은 뭐... 그저 그런 것이다.

 솔직히 올해 복학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필자처럼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마음씨 착한 여자 후배를 만나기를 내심 바랬다. 그런 후배들과 친하게 지내면 공부도 더 열심히 할 의욕도 불끈 생기게 될 것이고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긴 일지만) 잘만 하면 캠퍼스 커플로 성사되는 결과까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한낱 ‘희망고문’이었을 뿐 현실은 그런 여자 후배 한 명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그런 기회마저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누굴 탓하랴. 과 생활을 하지 않는 필자의 잘못이다. 올해도 여자친구를 만들지 못해서 아쉬움이 크지만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번 학기 수업에서 수많은 조별 활동을 하게 되면서 내가 속한 조원들 중에 단 한 명의 여자 학생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자가 캠퍼스 내에서만큼은 여학생들과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보니 이런 불운한 조 편성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수업 내 과제를 위해서 조원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자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게 결정적인 폐인이었다. 이제는 과 동기라는 녀석들이 필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올해는 필자에게 있어서는 군 생활을 제외한 여복이 없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정말로 빈곤의 해인 것 같다.

 빈곤의 해와 관련해서 인간관계도 있었지만 올해를 보내면서 또 하나 아쉬웠던 것은 작년에 비해 독서의 시간이 줄어들었고 서재 블로그 관리를 소홀히 한 점이다.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없더라도 종종 블로그에 들렸던 서재 이웃 분들에게 안부 인사를 남겼어야 하는 것이 예의인데 항상 머릿속만 염두에 두었을 뿐 막상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지금 필자가 즐겨 찾는 서재의 이웃 분들만 해도 20명 족히 넘는데 일일이 직접 들러서 방명록에 안부 인사를 하지 못한 점, 이 글에서나마 송구스러운 감정을 전하고 싶다.

 

 

 

 

 다시 읽은 책 그리고 올해의 책

 

 얼마 남지 않은 2011년에 있었던 일들 중에 나름 좋은 성과와 부족한 점을 개인적인 입장에서 읊조려 봤다. 원래는 필자가 여기서 쓰고 싶은 것은 2011년의 독서의 일상 중에서 다시 읽었던 책, 내년에도 다시 읽을 책 그리고 올해 읽었던 책들 중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올해의 책’에 대한 내용이다.

 사실은 필자가 자주 들렸던 모 출판사 온라인 카페의 매니저님이 이 주제로 글을 써 보자고 제안했기에 오랜만에 카페에 글을 남길 겸해서 써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에 올해 읽었던 책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블로그를 통해서 확인을 해봤는데 가장 기억남을 만한, 인상 깊은 책이 없어서 조금은 난감했다. 작년에 비해 소설, 에세이 분야보다는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독서를 많이 한 탓에 필자가 생각해봐도 사람들이 읽기 어려워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잘 읽지 않은 책들만을 골라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 고심해서 선정을 해봤는데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올해의 책’이라는 정의에 대해서 사람들마다 각자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올해의 책’은 사람들이 많이 읽고, 많은 공감을 얻은 유명한 책보다는 잊히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기쁨, 슬픔, 감동, 영감을 제공해준 책,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 영향을 주었던 책이라고 생각한다.

 올해에 읽었던 책들 중에서 유독 재독한 책이 많았는데 이 두 권의 책이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인상 깊은 ‘올해의 책’으로 소개하고 싶다.

 

 

 

 

 

 

 

 

 

 

 

 

 

 

 

 

 

 

 2011년은 부당한 권력 앞에서 상처를 입고 희생을 당해야만 하는 약한 자들의 슬픔이 많았던 해이다. 씻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소연하지 못한 채 눈물을 삼켜야했던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이 대중들에게 알려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해야 할 법이 아니라 대중들을 향한 문화의 파급력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일어난 실제로 일어난 비인간적인 성폭력 및 학대 사건의 진실은 영화를 통해서 대중들에게 낱낱이 공개되었다. 영화 개봉 이후에 정신지체 장애아동뿐만 아니라 아동 성폭력 사건에 대한 심각한 피해에 대해서 공론화되었고 솜방망이에 불과했던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다.

 필자는 올해 개봉한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원작은 올해 읽은 것만 해서 두 번째이다. 이 책이 필자가 군 복무 시절이었던 2009년에 출판되었는데 그 당시 군부대에 비치된 진중문고 중의 하나로 공지영의 <도가니>를 읽었다. 군부대 내에서만 생활을 하다 보니 당시 이 책의 등장이 불어 닥친 파급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책이 출간했을 때도 소설 내용의 실제 사건인 청각장애인학교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여론 내에서 진상규명해 볼 것을 제기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올해 영화 개봉 후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전에 비해서 아동 및 정신치제 장애아동의 성폭력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서 크게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다시는 ‘제2의 도가니’가 일어나지 않도록 인면수심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인 처벌을 강화하는 여론까지 조성되고 있다는 점은 크나큰 성과가 아닐 수가 없다.

 공지영의 <도가니>가 아동 성폭력 사건의 심각성을 고발한 소설이라면 조세희의 <난쏘공>은 삶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기는 철거민들의 애환과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사회 문제적 소설이다. 필자는 수업을 통해서 <난쏘공>과 관련한 철거민들에 대한 동영상을 보게 된 계기로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2년 전에 발생한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 때 <난쏘공>이 많이 읽혀진 걸로 알고 있다. <난쏘공>에서 일어나고 있는 철거민들의 비극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하루 끼니도 때우지 못하는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그런 형편 속에서도 유일한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삶의 터전마저도 돈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강제로 빼앗겨야만 하는 고통의 장면은 비단 30여 년 전에 쓰인 소설 속의 내용이 아니다. 작가 조세희의 말대로 그의 대표작이 해가 갈수록 판매 부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아직도 철거민이라는 사회적 약자들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으며 이들을 위한 어떠한 법적 보호 및 보상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아니, 30년의 세월동안 우리나라 사회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으며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볼 수 있다.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한 문제를 제기하는 <난쏘공>의 문학적 위대함을 기려야 할까, 아니면 아직도 <난쏘공>이 읽히는 시대의 남루를 애도해야 하는 입장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그런 책을 2011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것 역시...

 

 

 

 

 

 내년부터 다시 읽을 책

 

 

 

 

 

 

 

 

 

 

 

 

 

 

 

 

 

(덧붙임: 이제 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초짜라서 행정학 공부하기에 좋은 내용을 갖춘 전공도서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공도서는 내용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내용도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행정법과 같은 경우는 법의 조항이 해마다 바뀌고 정부 부처 역시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통폐합되고 기능과 성격이 달라진다. 그래서 전공도서는 해마다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행정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최신 개정판일수록 공부하기에 알맞다. 

 

참고로 이 책(현재 3판까지 나왔음)은 출간된 지 내년으로 따지면 6년이나 되었다. 그래서 행정적인 제도와 관련된 내용에 있어서 이전 노무현 정부의 내용까지 담고 있다. 공무원 공부하는 도서로 추천하기에는 조금은 한계가 있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각종 고시(구 행정고시, 입법고시 등) 관련 기출문제들이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2006년까지 수록되어 있지만 약술형 및 논문형 주관식으로 문제가 출제되는 5, 7, 9급 공채시험(구 행정고시)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읽어야 할 책을 고르게 된다면 지금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서 행정학 관련 전공도서를 읽는 것이 우선이다. 아니, 읽는다기보다는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암기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정확한 말일 것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노량진 같은 수도권 지역에 위치하는 유명 강사가 배치된 학원에서 알려주는 강의내용만 집중적으로 공부한다면 합격이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수도권 지역의 고시학원에서 수강을 한 고시생들이 고시 합격률이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행정학 과목이라는 내용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면 아무리 비싼 돈을 내서라도 학원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합격을 보장할 수 없다. 공무원 관련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공부 비결을 보게 되면 행정학 대부분 행정학 관련 전공도서 한 권 쯤은 기본으로 독파했다.

 필자 역시 이번 방학만큼은 행정학 전공도서를 다시 읽어볼 계획이다. 필자가 다닌 행정학과 전공교수님 말씀이 생각난다. 기본적으로 행정학과 학생이라면 행정학 원론과 각론을 포함한 두꺼운 분량의 전공도서 한 권쯤은 7번 정도 읽어봐야 한다고 하셨다. 두 달 간의 겨울방학동안 많은 분량의 책을 7번 정도 완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지만 여러 번 읽고 복습하면서 광범위한 행정학의 내용에 대한 학습 감각을 잃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다시 읽어야 할 책을 전공도서로 고른 사람이 아마도 필자가 유일할 것이다. 좀 더 현실지향적인 관점에서 골라봤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사실이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딱히 한 권을 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진지하게 다시 읽을 책을 고르게 된다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인 조르바>다.

 지금까지 나오게 된 수많은 소설 속 주인공들 중에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비범하면서도 독특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유별난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런 인물들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며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 재구성될 정도로 개성이 뚜렷하다.

 그런 개성이 강한 문학작품 속 주인공들 중에서 조르바를 제외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무척 센 조르바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실례이다. 조르바만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제약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의 자유로움을 누릴 줄 아는 인물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필자는 조르바의 자유분방한 삶을 ‘동경’할 뿐 ‘동의’할 수 없다. 조르바의 삶을 ‘동의’하기에는 필자 역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심한 시인과 같은 처지이니까.

 그러나 조르바가 내뿜는 자유와 긍정적인 생의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치인 노회찬 씨뿐만 아니라 불혹을 넘은 사회적 공인들이 가장 많이 추천하는 책이 바로 <그리스 인 조르바>다. 조르바처럼 똑같이 될 수는 없어도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서는 자유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먹고 사는 현실 속에서는 그런 자유와 행복감을 누리기는 어렵지만 이런 책을 읽음으로써 구체적인 행복의 경험을 통해서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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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2-2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여자친구, 내년에는 꼭!!!!!!^^

cyrus 2011-12-29 20:06   좋아요 0 | URL
ㅎㅎ 내년에는 꼭 만들어보록 노력해볼께요 ^^

아이리시스 2011-12-29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안녕. 늘 응원하고 있어요. 정말 똑똑하고 욕심많은 남동생처럼 느껴지거든요. 여자친구, 내년에는 꼭!!!!2^^

cyrus 2011-12-29 20:06   좋아요 0 | URL
욕심은 많은데 똑똑하지는 않아요, 아이리시스님 ^^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stella.K 2011-12-29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시루스 정말 멋지다. 재독하기 쉽지 않은데
너의 글의 내공은 다 이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내가 볼 때 넌 정말 성실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아직 포기하지 말라구.ㅋ
나도 올해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이 없는 건지, 마음이 없는 건지
영 그러네.ㅋ
암튼 내년에도 좋은 책 많이 읽고, 공부도 쑥쑥 잘하고,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이다. 홧팅!!

cyrus 2011-12-29 20:05   좋아요 0 | URL
누님이 먼저 좋은 사람 만나셔야 될 거 같은데요 ^^
고마워요, 이렇게 좋은 격려를 해주셔서요.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죠? ㅎㅎ

마녀고양이 2011-12-29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이 글은 어디 연재하는 글인가요?
`필자` 라는 단어가 신기해서요. ^^. 여하튼, 올한해 너무 고생하셨고
항상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난쏘공>은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읽었는데, 너무 인상깊어서, 함께 도서관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그려지네요.

내년,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 가득하세요.

cyrus 2011-12-29 20:08   좋아요 0 | URL
아니요, 그냥 한 번 써본 거에요. 제가 딱히 따로 연재하는 곳은 없고요^^;;
온라인상에서 글 써봤자 여기 알라딘이랑 출판사 카페 한 군데 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연재문 올리는 것도 아니고요ㅎㅎ

오히려 마고님이 올해 고생 많이 하신거 같아요. 공부할 때는 공부하고,
놀 땐 놀고, 코알라와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요 ^^
마고님도 내년에도 늘 건강하시고 좋은 일 있기를 바랍니다.

blanca 2011-12-29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친구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꼭 학교에서 만들어 사회에 나가기를 권유합니다.^^그래서 공유가 군대에서 <도가니>를 읽은 거군요. 저는 행정학은 교양으로만 들었었는데 정말 저 책만 제대로 이해해도 전공자가 아니어도 사는 데에 있어 직간접으로 도움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여러가지로 올해 많은 결실이 있었군요. 내년에는 더욱더 많은 결실과 꿈을 꿀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cyrus 2011-12-29 20:11   좋아요 0 | URL
그래야겠죠ㅎㅎ 예전에느 안 그랬는데,, 요즘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가데 뭔가 초조감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저도 얼른 여자친구
사귀어봐야 결혼도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좋은 조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랑카님도 행복하고 좋은 일들만 가득하는 2012년의 해를
보내기를 바랍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2-3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친구에게 "나는 조르바처럼 살겠다"고 선언하면 그 즉시 여자는 결별을 선언할 겁니다.

cyrus 2011-12-30 22:02   좋아요 0 | URL
하하~ 노자님 댓글 보고 한참 웃었네요ㅎㅎ
솔직히 남자라면 거리낄없이 아무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자유분방한
조르바의 삶을 동경해봤을거 같아요. 그리고 그런 남자는 여자 입장에서는
싫어할 수 있겠고요. 그런데 어떤 여자는 조르바라는 인물을 모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요ㅎㅎ
 
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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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스마의 유래

 

 우리 사회에서 대중들을 매료시키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 카리스마가 있다’라고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짐승남’이라고 불리고 있는 남성미를 지닌 남자 연예인에서부터 국민들 앞에서 설득력 있으면서도 강력한 권위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정치인들까지, 카리스마는 다양한 범위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는 연예인, 정치인 등 특정인들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서에 등장하며 모든 사람들도 ‘계발해서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취급받고 있다.

 오늘날에는 ‘카리스마’를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대중을 심복시켜 따르게 하는 능력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카리스마의 어원적 유래는 종교, 즉 기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적 의미의 ‘카리스마’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바울이 사용한 ‘카리스마’에서 ‘카리스’는 그리스 어로 ‘신의 은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의 은총이 만들어 낸 결과물, 즉 신의 특별한 은총, 은혜를 뜻하고 있는 것이다.

 

 

 

 

 

마사초 <그림자로 병든 이를 치료하는 성 베드로> 1427~1428년

 (<역사의 미술관> pp 278)

 

일행 중 근엄한 표정을 지낸 채 앞장서서 걷고 있는, 붉은 천을 걸친 사도가 성 베드로이다. 고대 성경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성 베드로의 그림자만 스쳐도 불치병이 말끔히 나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베드로가 행하는 이 신비스러운 능력이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카리스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받게 되는 소명 또한 여기에 기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이 베푸는 은사를 통해 공동체에 봉사하고 결속하라고 주문했다. 특히 교회의 사도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카리스마를 받아 단일하고 다양한 `하느님의 은총의 관리자`로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는 만큼 그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치의 병도 나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카리스마’가 형성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권력의 의미를 지닌 ‘카리스마’가 사용되어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베버는 <경제와 사회>라는 저서에서 카리스마를 ‘권력’ 혹은 지배의 형태 중 하나라고 밝혔다. 여기서 뛰어난 지도자에 대한 추종자들의 개인적 신뢰에 바탕을 둔 ‘카리스마적 지배’라는 개념이 생겼으며 권력의 정당화가 행해지는 지배적 형태 중의 하나로 정립되었다. 이후 카리스마는 히틀러나 무솔리니, 존 F. 케네디 등 강력한 권위를 발휘했던 독재자나 뛰어난 매력을 지닌 정치인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화폭을 통해서 권력의 판타지를 실현시키다

 

 그러나 카리스마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던 고대 문명 그리고 막스 베버가 처음으로 의미를 재정립한 근대 문명에서만 탄생되고 사용되어진 것은 아니다.

 ‘카리스마’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강력한 지도자가 군림했던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카리스마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군주들은 이미 벌써부터 ‘카리스마’를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홍보적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왕의 모습을 그렸던 궁정화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절대군주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만드는 보조역할을 했다.

 

 

 

 

 

 

 

이아생트 리고 <태양왕 루이 14세> 1701년

(pp 53)

 

 

 

 프랑스의 황제 루이 14세가 오늘날까지도 ‘태양왕’이라는 수식이 따라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절대군주로써의 정치적 역량과 업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모습을 묘사한 궁정화가들의 능력도 한 몫 했다.

 루이 14세라고 하면 항상 베르사유 궁전이 떠오르듯이 그는 자신의 거대한 궁전에서 1년 내내 화려한 향연과도 같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려왔다. 하지만 화려한 모습 뒤에는 보이지 않는 그늘이 존재하는 법.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의 실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의 생활고는 엉망이었으며 종전 이후에는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정부 부채를 떠안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군주에 대한 민심은 떨어지게 되고 절대군주의 위엄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강력한 군주로서의 이미지만큼은 끝까지 유지하고자 했다. 그의 정치적 업적과 프랑스 사정이 형편없더라도 ‘황제’로서의 이미지는 루이 14세가 인정하고 싶은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초상화에서 대개 루이 14세의 포즈는 위세가 넘치고 거만한 군주의 모습이다. 이아생트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황제가 63세였을 때 그려진 것이다. 60세 넘은 군주의 모습치고는 리고의 초상화 속의 루이 14세는 인생의 흐름을 거슬린 듯하다. 얼굴에는 팔자 주름이 남아 있지만 지휘봉을 잡고 꼿꼿이 설 수 있는 정도로 아직 정정하다.

 

 

 

 

 

 

샤를 푀르송 <제우스로 그려진 루이 14세의 초상> 1653년경

(pp 58)

 

 

 

 절대군주로서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었던 루이 14세는 궁정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로나마 권력에 대한 기대를 보상받고자 했다. 권력에 대한 황제의 판타지는 이제는 자신을 무소불위의 신적 존재로써 그려지기에 이른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루이 14세를 그린 초상화는 수십 점이 넘는데 군주로서의 권위와 영광의 모습으로 그려진 이미지 덕분에 그는 ‘태양왕’이라는 강력한 군주의 카리스마가 만들어 낸 호칭이 붙여질 수 있었다.

 루이 14세 이외에도 세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강력한 군주의 카리스마를 발휘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부단히 관심을 쏟았으며 궁정화가들의 능력을 이용하고자 했다. 특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궁정화가로 활동했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의 식민지 섬에 살았던 ‘코르시카의 촌놈’을 한순간에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0~1801년

(pp 73)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는 격언과 함께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군주의 카리스마‘를 크게 각인시켜주었던 알프스 산을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리고 황제의 대관식을 그린 장면에서도 다비드는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의 적임자로써 권력적 정당성을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일부, 1805~1807년

(pp 86, 원 안에 대머리의 남자가 '카이사르의 유령' 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다비드는 황제 스스로 자신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고 난 뒤에 황후 조세핀에게도 자신이 직접 왕관을 씌워주는 극적인 장면을 그려 넣음으로써 교황마저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실세를 지닌 프랑스 황제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교황이 황제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주는 관례를 깨뜨린 나폴레옹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의 대리인’인 교황보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군주의 카리스마를 볼 수 있다. 더욱이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옆에는 로마의 시저 카이사르마저도 그의 대관식에 참석했기에 프랑스의 황제의 정당성을 더욱 입증해주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주고 있다.

 

 

 

 

 

 

 

앙투안 장 그로 <자파의 페스트 병원을 방문한 나폴레옹> 1804년

(pp 86)

 

 

 

 다비드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던 앵그르, 장 그로 등의 화가들도 나폴레옹의 카리스마를 부각시킨 그림들을 남겼다. 장 그로는 이집트 원정 당시 자파라는 지역에 임시로 설치된 페스트 병원 안에서 환자들을 만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 나폴레옹의 모습은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 치유를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 또한 사도 바울이 생각했던 카리스마의 의미와 부합되기도 한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은 단순히 프랑스를 다스리는 권력자로써의 카리스마를 지닌 황제의 모습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환자들에게도 국민을 향한 관대함과 애정을 보여주는 인간적인 마음을 지닌 온화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다.

 

 

 

 

 

 `정치적 지배력`이라는 이미지의 산물, 카리스마

 

 베버가 카리스마를 ‘지도자의 정치적 지배력’이라는 의미로 정립하기 시작하면서 근대에 이르게 되면서 특정 정치인의 정치적 지배력에 입각해 카리스마의 의미가 좀 더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치인으로서의 리더십에서 발현되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때로는 독재자, 사이비 종교 지도자와 관련되어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어지기도 했다.

 

 

 

 

 

 

하인리히 크니르 <히틀러의 초상> 1937년

(pp 202)

 

 

 

 그런 대표적인 카리스마의 예가 아돌프 히틀러 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올해 학교 수업을 통해서 베버의 권력 형태를 자세하게 배운 적이 있었는데 교수님께서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카리스마적 지배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활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긍할 수 있다. 그래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등장에 베버의 이론이 결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카리스마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인식이다. 이러한 입장은 베버의 카리스마 이론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다. 히틀러가 베버의 카리스마 이론을 이용해서 나치 정권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입증할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

 하지만 히틀러 역시 특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표출할 줄 아는 리더십을 지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인리히 크니르가 그린 히틀러의 초상화 역시 앞에서 소개된 루이 14세의 초상화와 비슷하게 나치 정권의 수장은 위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 팔에 채워진 나치 문양의 완장은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한 눈에 독일의 지배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표정에는 게르만 족의 우수성을 통해 유럽을 정복하려는 야심찬 의지가 담겨져 있다.

 

 

 

 

 

 

알렉산드르 게라시모프 <18차 당 대회의 스탈린> 1939년

(pp 114)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발휘한 정치인은 히틀러뿐만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강철’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소련을 미국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으로 발전시킨 업적을 이룬 위대한 정치인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정치적인 동지와 숙적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숙청을 단행하였고 강압적인 농업 및 이주 정책으로 인해서 수많은 인민들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나게 만든 독재자라는 오명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스탈린 치하 당시 그를 묘사한 그림들은 대개 온화로우면서 인자한 성품을 지닌 인민의 벗이자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특히 이 시기 때부터 지도자 주체화를 위한 미술작품들이 하나의 핵심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탈린을 우상화하는 그림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대중들에게 인민들을 위한 위대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구축할 수 있었다.

 특히 스탈린을 위한 우상화하는 그림들 중에는 배경에 레닌의 조각상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스탈린을 ‘레닌의 후계자’이며 ‘레닌에 버금가는 소련의 지도자’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스탈린은 레닌의 아우라를 이용해 소련을 이끌 소비에트의 지도자라는 카리스마를 인민들 앞에서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죽기 전에 레닌은 스탈린의 존재에 대해서 경계할 정도로 스탈린이 권력집착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권력을 잡는 것에 대해서 우려의 입장을 지니기도 했다. 하지만 레닌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버렸고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레닌은 스탈린을 자신과 버금가는 소련의 지배자로 만드는 데 기여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본인이 원하지도 않게 자신 역시 커다란 동상으로 부활하여 우상화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카리스마,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양날의 검

 

 지금까지 사도 바울에서부터 히틀러, 스탈린까지 ‘카리스마’의 역사를 정리해봤다. 카리스마는 막스 베버가 이론적으로 정립하기 전에 이미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종교적인인 의미를 벗어나 정치인들의 리더십에서 발현되는 능력 또는 자질로 변모해왔다.

 막스 베버에 대해 비평을 쓴 사회학자 앨버트 샐러먼은 카리스마를 정치적 지배력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사회학적 범주로서의 카리스마는 가치판단이 아니라 특별한 업적 때문에 지도자로 보이는 자질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의 추종자들 앞에서 증거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지식의 미술관> pp 280)

 

 군주와 정치인들은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정치적 추종자들과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스스로 창조하고 관리할 줄 알았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지도자의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루이 14세와 히틀러의 지도자적 카리스마에서 알 수 있듯이 상징의 세계에서만큼은 절대권력을 가진 카리스마를 보이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무능과 독재로 점칠 된 권력이었다. ‘특별한 업적’을 통해 지도자로써의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을 통해서 카리스마를 창조했다.

 오늘날에도 정치와 카리스마의 불가분의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버락 오마바가 흑인 최초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쉽’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존 F. 케네디를 언급하고, 열정적인 연설과 ‘희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이다. 모두 오바마의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스탈린식 카리스마 형성 전략은 3대 세습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북한에서도 볼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 최고 권력자로 급부상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 정권 내 체제가 불안정한데다 정권에 대한 민심도 예전과 같지 않아서 김정은 1인 단독 체제로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전망하고 있다. 그래서 김정은의 권력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당분간은 유훈통치를 통해 권력체제를 안정화하는 데 꾀할 공산이 크다. 죽은 레닌이 스탈린의 카리스마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듯이 죽은 김정일도 김정은의 카리스마를 형성하게끔 만드는 중요한 정치적 전략으로 작용할 것이다.

 카리스마의 왜곡된 전략은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횡행하는 사이비 종교가 대표적인 예이다. 일부 종교적 단체의 지도자들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메시아로 자처하여 신도들에게 금품, 성상납을 요구하거나 감금, 폭행, 살인청부 등으로 종교적 교리를 강화하는 데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이들은 종교라는 가면을 쓴 채 혹세무민하는 미신 집단일 뿐이다. 사이비 종교집단의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이 말했던 카리스마를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일부 이론가들은 불안정적인 감성에 치우친 추종자들의 존재로 인한 권력의 위험성 때문에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을 거부하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참신한 사고와 정치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데 있어서 베버가 주장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 또한 분명한 현실이다. 카리스마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대중들의 감성을 사로잡을 수 있는 훌륭한 능력과 자질이 바탕이 된 위대한 카리스마가 될 수 있고, 반대로 대중들의 감성을 위협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칼이 되어 권력자 본인의 이미지 상승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커다란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카리스마가 읽는 소리 그대로 ‘칼(刀) 있으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카리스마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단순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카리스마를 이용할 줄 아는 정치인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의지와 목표가 뚜렷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줄 아는 훌륭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대중들의 지지와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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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28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카리스마가 종교적 의미로 처음 사용된 말이군요. 또 하나 배우고 갑니다. 최근에는 정치적인 의미의 카리스마라는 것도 많이 퇴색된 것 같기도 하구요.
연말 잘 지내고 계세요? 그래도 간만에 cyrus님 글을 보니 반갑네요. 내년에 바쁘시더라도 종종 서재에서 뵈요. 해피 뉴이어~!!

cyrus 2011-12-28 21:28   좋아요 0 | URL
요즘 정치인들 중에는 케네디만한 대중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 보기가 어려워진거 같아요. 그나마 이번에 구치소에
수감된 정봉주 씨가 그런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생각해보는데요, 개인적으로
구치소 생활 때문에 카리스마를 어필하지 못한 게 아쉽게 느껴집니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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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나라에게 있어서 5월 18일은...?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는 말이 하나 있다. '북한의 소행이다'라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는 일이 생긴다거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흔히 등장하는 어휘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기르던 강아지가 죽어도 ‘북한의 소행’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심지어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울 때에도 이들에게 ‘북한에나 가라’고 비판 같지 않은 비판을 하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할 때에도 그렇고, 무상복지를 운운할 때에도 모든 의견들을 ‘좌익’의 입장으로 바라본다.

일부 보수단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반대를 위해 ‘반대 청원서’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개입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때마침 정부는 새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삭제하려고 했다. 광주시는 새 역사 교과서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삭제키로 한 정부여 결정에 광주지역 80여개 기관 및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의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5.18 민주화운동이 삭제된 것을 규탄하고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교과부의 의견이 수렴, 반영되었다면 2013년부터 중학교에서 사용될 교과서를 펴낼 때 ‘지침’ 구실을 하게 될 ‘2009 개정 교육과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중심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전두환 신군부 정권’ 등 독재와 민주화 관련 주요 내용들이 모두 삭제되는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에 반발하여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광주 정신은 오늘날에도 계승되어 민주주의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채택되기 이전에는 ‘광주 사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광주항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 하지만 반대하던 보수단체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적으로 선정되었다. 민주, 인권, 평화로 상장되는 5월의 광주정신이 온 세계가 인정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데 교과부는 한국 민주화 발전 과정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한국인이라면 기억해야 될 역사를 삭제하려는 역사적 퇴행을 결정하려는 것인가?  정부가 왜 역사 교과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와 자국 문화유산의 중요성과 찬란함을 안다면 절대로 역사 앞에 티끌만한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역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면 국민들이 설령 반대한다 해도 먼저 나서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올바른 역사를 삭제하자고 나서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현대사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특히 현대사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수준이 뒤떨어짐을 느낀다. 필자가 고등학생 3학년 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때에도 제5공화국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1980년대 시절의 내용을 제대로 배웠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사 교과서라는게 연대기순으로 서술, 편집되어 있다 보니 정작 교과서에는 ‘현대사’라는 명칭을 붙여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현대사’를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학교 현장에서 현대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설령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단조로운 교과서와 주입식 설명들로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것도 역사교육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1980년 광주가 지금 나와 과연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5.18이 우리나라 역사에 어떠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느냐를 깊이 생각해보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몇 몇 학생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8.15 광복절과 착각하고 있다는 씁쓸한 기사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는 것만 천만다행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5.18광주 민주화 운동은 생소한 그 무엇에 그치고 만다. 사건 자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학생들도 많다. 필자는 지금 듣고 있는 대학 강의 중에 ‘한국정부론’이라는 이름의 전공과목이 있다. 이 과목을 통해서 한국정부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는데 때마침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동영상을 시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5.18 관련 영상을 시청하는 데 졸고 있다거나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광주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의 독재정권에서 시작한다.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한 박정희는 마침내 한계에 도달해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1979년 10월 26일 사망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세상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들떴다. 비상계엄 상태였지만 정치·사회, 문화 전반은 유신체제 하에서 억눌려 왔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후 시민들은 민주화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독재정권 시절부터 군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가동해 12. 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인 전라도 광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막강한 권력을 움켜쥔 전두환은 실세로 부상했고, 집권을 위해 숨 가쁘게 움직였다. 신군부는 쿠데타로 행정부와 국회 등을 무력화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면서 권력 찬탈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군부의 학살만행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시민 전체가 일심동체로 저항했던 광주는 결국 피의 진압으로 5.18 민중항쟁의 끝을 본다. 하지만 이를 촬영하고 보도한 외신 기자에 의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낙후된 민주주의를 알리게 됐고 이후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돼 결국 전두환은 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직선제로 개헌하기에 이르렀다.


저는 광주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현실을 가장 많이 규정지은 사건이 바로 5.18 광주라고 봅니다. 5.18은 수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든 사건이었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 ‘광주의 자식들, 그리고 노무현’ pp 20)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기록물들은 인권, 민주, 법치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세계인들의 가슴에 새기고 정의를 지향하는 인권교육의 중요한 지침서가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척박한 영토에 민주주의적 사회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촉진제가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이처럼 6.25 전쟁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오늘날 한국 민주화의 초석이 된 5.18의 가치와 그 유산을 세계가 인정해 준 것임에도 극우 보수단체들의 입장과 역사 교과서에서 삭제하려는 정부의 입장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 5.18 진상규명과 학살책임자 규명, 그 배후세력 규명 등이 여전히 미완인 상태다.   

  

 

 지금 이 순간, 역사를 기억해야 될 시점

‘역사를 인식하는 사람’은 지나온 과거와 오늘, 다가올 미래의 흐름 속에서 ‘오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따라서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행적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역사를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역사를 인식하지 않기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오늘의 이익과 눈앞의 권력에 현혹되고, 진실을 조작하고, 미화시키고, 합리화하려고 든다. 진실을 호도하면서 역사가 그들의 뜻대로 기록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의 최면이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강'이 흘러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역사의 강'은 진실을 향해서만 흘러가기 때문이고, 진실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역사의 진실 앞에서 어떤 이들은 왜곡하거나 아예 외면하려고 한다. 과거와 현재의 단절의 역사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심지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전 세대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만든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은 점점 퇴색되어져만 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프다. 우리가 정녕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돌이켜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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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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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범주 오류 (category mistake)   

 

70 평생 단 한 번도 우리나라 밖을 여행해보지 못한 A 노인은 드디어 세계여행으로 프랑스 파리의 땅을 밟아보게 되었다. 노인에게는 프랑스 파리의 명물 에펠 탑을 한 번 보고 죽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 그는 관광 안내원과 함께 넓은 파리의 시내는 구경하기 시작했다. 에펠 탑을 보고 싶은 노인은 관광 안내원에게 부탁을 하였다.  

 " 어디를 가든지 꼭 에펠 탑이 보이는 장소로만 안내해 주시오. " 

그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출발하여 개선문을 돌아 다시 노트르담 사원을 거쳐 뤽상부르 공원까지 갔다. 파리에 들리면 꼭 한 번쯤 거쳐야 하는 명소를 볼 수 있었던 매우 즐거운 관광이었다. 여러 곳을 돌아보느라 피곤해진 노인은 차 안에서 깜빡 졸고 말았다. 졸다가 깨 보니 다음 관광지에 도착해 있었다.  

 " 아니, 에펠 탑이 안 보이잖아.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이상한 곳으로 데려왔군.  안내원, 왜 내 말대로 하지 않는 거요?  " 

노인은 안내원에게 막 화를 냈다. 그러자 안내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 저는 손님의 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곳이 바로 에펠 탑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거든요. "   

하지만 노인은 안내원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듯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 젋은 양반이 지금 이 노인네를 놀리려고 하는거요?  도대체 에펠 탑이 어디 있다는 거요? " 
 

 

A 노인은 왜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에펠 탑이 눈 앞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일까? 노안이라서 에펠 탑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시력이 저하되더라도 희미하게나마 에펠 탑의 형체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안내원이 파리를 처음 와 본 노인을 속이는 것도 절대로 아니다. 분명히 노인은 에펠 탑이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파리의 속담에 '에펠 탑을 보기 싫으면 에펠 탑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파리는 시내 어디에서든 에펠 탑이 잘 보인다. 3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인공건축물이다. 이 말은 파리 시내 어디에서든 에펠 탑이 잘 보이니 만약 보기가 싫다면 오히려 그 밑으로 가라는 뜻이다. 즉 에펠 탑 바로 아래에 가거나 그 곳에 있게 되면 우리가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에펠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절대로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노인이 에펠 탑을 볼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에펠 탑 바로 아래에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에펠 탑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인은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것이 얼마나 거대한지 예상하지 못했다. 노인에게는 그저 파리의 유명한 탑으로만 생각했었으리라.  

 

 

(좌) 실제의 에펠 탑 모습  

(우) 로베르 들로네  <에펠 탑>(붉은 탑)  1911년 

 

  

로베르 들로네  <에펠 탑>  1922년

 

하지만 노인의 일화를 논리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명백한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라고 말할 수 있다. 범주 오류란, 논리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말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뜻한다.  

에펠 탑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인이나 오랫동안 에펠 탑의 전체적 모습을 사진 속으로만 봤던 사람이나 탑은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높이로 이루어진 건물'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에펠 탑'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평면적이면서도 일차원적인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에펠 탑이 꼭 높은 건물에서 바라보면 볼 수 있는 거대한 형태의 모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에펠 탑 밑에서도 볼 수 있고, 에펠 탑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도 우리가 보지 못했던 탑의 꼭대기도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입체파 화가로 활동했던 로베르 들로네(1885~1941)는 당시 물질문명과 근대화의 상징으로써 에펠 탑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에펠 탑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거대하면서도 온전한 형태의 철탑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탑 아래로부터 거대한 조형물을 우러러 보는듯한 시점에서 그린 에펠 탑도 있고, 심지어 하늘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에펠 탑을 그린 것도 있다. 입체파에 심취한 적이 있었던 화가답게 대상을 여러가지 시점의 각도에서 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서 들로네는 다양한 형태의 에펠 탑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이런 실험적 창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거대한 높이의 세모꼴 형태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모습의 철탑으로만 보려는 시각적 범주 오류를 극복했기 때문이었다.  

범주 오류는 A  노인과 같은 일반인부터 시작해서 완벽한 논리적인 사고를 갖춘 철학자들마저도 흔히 빠지는 사고적 오류의 형태이다. 요즘 이와 같이 범주를 구분하지 못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데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일어난 바로 소설가 공지영의 트위터 사건이다.  

공지영이 자신 트위터에서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한 가수 인순이와 김연아 선수에게 쓴소리를 잇따라 쓰자 네티즌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인순이 씨는 종편 개국 공동 축하쇼에 출연해 축하무대를 꾸몄고 김연아 선수는 'TV 조선', '채널A' 등에 출연해 개국 축하 인터뷰를 진행한 점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읜 소견을 공 작가가 트위터에 남긴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소신을 가지고 종편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개념'에 찬 행동일 수 있으나 그런 소신이 없거나 또는 그와는 다른 소신을 갖고 있다 해서 '개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개념'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다."라고 남김으로써 조용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종편 개국 축하를 위해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단지 '방송채널 축하'를 위해서 의례적인 출연을 했을 뿐이며 자신들의 직업인 방송 활동의 영역을 좀 더 넓히기 위해서, 그리고 대중들에 대한 자신의 인지도를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번에 새로 개국한 방송 채널의 진출에 욕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  '방송 출연'이 직업인 연예인들 모두 보수적인 입장의 소신을 가졌다고 볼 수 없듯이 그런 소신을 가지지 않는 연예인들이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언론이 만든 종편 개국을 축하하고 출연한 사실이 '개념 없는'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연예에 종사하는 '예능인'들이 보수 언론의 기분을 맞춰주는 개념 없는 딴따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 작가보다는 범주 착오를 심하게 범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FTA 비준안 문제 앞에서 법의 범주와 정치의 범주를 헷갈린 지금 여당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서 각종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종편과 관련하여 공 작가보다 더 심한 개념 없는 행동이 있다. 자신의 독재정권 유지 일환으로 시행한 언론 통폐합에 대한 유감을 자신의 최측근이 대신하여 종편 개국 축사로 전달하는 전(前) 대통령 그리고 언론 권력의 최정점에 서온 이들이 마치 자신들을 '희생양'이고 '약자'인 양 스스로를 포장하여 스스로를 과거 부조리를 청산하는 것처럼 홍보하는 종편채널을 만든 문제의 언론 같은 경우에는 자기정당화된 범주 오류로 인해 스스로 '개념'을 상실하고 말았다. 


 

 

 Scene #2  차이 속의 연대 (syncretism)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시대를 일컫는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은 중동 지역의 서남 아시아에서 고대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그리스인 지배자들과 함께 새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반대로 헬레니즘 왕국들은 각지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필요나 편의에 따라 지역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파올로 베로네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맞는 다리우스의 가족>  1565~1570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와의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장의 가족들을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위와 명예를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해 융화정책을 펼친 덕분에 그리스 문화가 각 지역의 문화와 융합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주헌 <역사의 미술관> 중에서, pp 31)

 
   


그리하여 탄생된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그리스 세계와 중동, 서남 아시아의 문화가 융합된 산물이었다. 그리스와 아시아 문화의 혼성이 실제로 얼마 정도였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대체로 사회 상류층의 실용적인 문화 수용으로 보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이질적인 종교나 문화, 학문이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을 '싱크레티즘(syncretism)'이라고 부른다.

최근 새 역사교과서 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집필기준 초안의 쟁점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문제, 이승만ㆍ박정희 전 대통령들의 '독재'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였다. 보수 진영은 '자유민주주의'를 그대로 쓰고 '독재'표현은 넣지 않으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를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 논쟁의 핵심에 선 ‘자유민주주의’를 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 학계 간의 대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그대로 써야 한다는 진보 진영의 학계와 이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는 보수 진영의 학계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지난 달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논란 끝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확정해 발표했지만 일부 학자와 역사관련 단체들의 반발은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이번 집필기준에서는 지난 교과서 집필기준과 달리 5.18 관련 내용이 빠지자 광주지역 범시민사회단체에서 성명을 내고 교과부 장관을 만나 항의하는 등 반발여론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처럼 역사교과서 공방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인 시각에서 교육과정을 손대려고 하는 정부와 역사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학자들 간의 씨름은 교육이 정치적 쟁점화된 데 있다. 현재 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역사교과서는 ‘2007 개정 교육과정’에 맞춰 집필되었다.  

이는 지난 2008~2009년에 집필되어 지난해 검정을 거쳐 올해부터 적용됐다. 그러나 새 교과서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올 2월부터 개정작업이 시작됐다. 8월에는 개정내용이 확정, 이후 3개월 만에 중학 교과서 집필기준이 정해졌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르면 중학교는 2013년부터, 고등학교는 2014년부터 새 역사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출판사들이 6개월 만에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현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집필기간을 4년 정도 거친 것에 비하면 이번 경우는 초고속으로 집필하게 되는 셈이다. 문제는 해당 교과서로 공부해야 하는 학생과 이를 가르치는 교사, 또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검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기준이 모호하면 정권 성향에 따라 좌. 우편향 논란을 가중화되기 쉽다는 것이다.

기나긴 고심 끝에 확정 집필기준은 이런 논란을 감안해 '자유민주주의' 용어의 경우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토대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용어로 하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병기했다. 또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화'라는 표현을 써서 진보 진영의 시각을 수용했다. 반면 보수 진영 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부분은 분명한 사실로 판단해 그대로 쓰기로 했다. 교과부가 제시한 집필기준이 가급적 양측의 주장을 수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었지만 양 쪽 진영의 학계에서는 이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집필기준 확정과는 별개로 올바른 사관 정립을 위한 학계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관이 아무리 투철해도 교과서가 오류투성이거나, 교사가 사관에 진지하지 못하면 현장의 역사교육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관이라는 게 본래 완전무결한 합의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젠 그나마 마련된 틀을 기초로 보다 훌륭한 교과서와 좋은 현장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이런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싱크레티즘' 즉, '차이 속의 연대' 라는 사고가 필요하다. 자신의 역사적 사관이 무조건 옳다고 옹호를 한다거나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사고를 지닌 상대방에게 강요를 한다는 것은 서로 간의 대립의 골만 깊어지는 상처만 남길 뿐이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싱크레티즘은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관의 입장을 인정하되 잊혀질 만 하면 불거지는 왜곡되거나 오류로 이루어진 역사적 내용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Epilogue : 철학이라는 확대경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기

개인적으로 철학의 개념에 대해서 많이 부족한 상태라서 책의 첫 장을 펴기 전부터 칼럼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몇 몇 개념을 소개한 내용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특정한 사회현상을 예로 들어 철학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없을 듯하다. 단,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1년 간 쓴 칼럼들은 철학적 개념을 사회현상을 바라보면서 인식하게 된 주관적 견해이고 단지 개념들이 사회현상에 적용할 수 있는 사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자가 선택한 범례에 불과하다. 저자가 우려한 것처럼 그가 소개한 철학적 개념과 그 범례들이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지식의 수집품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진중권은 철학의 개념을 사회현상을 정교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확대경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오랜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유리로 만들어진 렌즈라는 도구의 기능을 알게 된 사람이 많았다. 그들에게 렌즈는 먼 곳을 가까이에 볼 수 있는 그저 신기한 발명품으로만 인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렌즈는 사물을 확대해 볼 수 있는 용도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2개의 렌즈를 통에 끼워 망원경을 발명하였다. 오늘날 갈릴레이의 공적은 망원경을 만들었다는 사실보다는 처음으로 망원경을 천체관측에 사용하여 그때까지 눈으로는 관측되지 않던 천체와 우주의 세계를 망원경에 의하여 최초로 탐색하였다는 데 있다. 확대경의 렌즈를 무조건 깨끗이 닦는다고 해서 멀리 있는 곳을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렌즈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뿐만 아니라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달 표면까지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실용적인 면들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인문학을 너무 소홀히 여기지 않나 싶다. 교양을 가르쳐야 할 대학에서는 학생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정부도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취업이 잘 되는 것이라고 최고라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순수학문의 발전이 없이는 결코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지속 가능한 성장의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 철학적 개념이라는 렌즈의 기능을 이해하고 직접 자신을 둘러싼 현상을 바라본다면 여태까지 몰랐던 현상의 이면, 그리고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면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을 숙성시키는 ‘인식의 효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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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2-0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콘, 저도 빌려다놨는데 못읽고 일주일 다되서 도로 갖다 줘야된다는.. 으흐흐

cyrus 2011-12-04 21:36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시길 권해요. 이 책 속에 실린 글이 씨네21의 연재
칼럼 모음집이라는 데 칼럼이라 그런지 내용이 쉽게 읽혀지는 편이에요. 몇 몇 글은 조금은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요 ^^;;

맥거핀 2011-12-04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편에 대해 하신 말씀에 대해 동감합니다. 진중권씨가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튼 뭐 그래도 종편을 거부한 연예인들이 조금 더 이뻐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네요.^^;

cyrus 2011-12-04 21:37   좋아요 0 | URL
정말로 종편의 실체(?)를 알고 나서 종편을 거부한 연예인들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거 같아요 ^^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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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앞에서 불안에 떨어야만했던 절망적 자아, 기형도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 '식목제' 중에서 -

   

고등학생 때, 국어 수업을 통해서 처음으로 기형도라는 시인을 알게 된 시가 바로 '식목제'였다. '식목제'는 전문으로 보게 된다면 비교적 긴 내용에 속하는 편이다. 이 시를 알게 된 덕분에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시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럽고도 불행한 죽음이라는 이미지로 결부되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인식 탓인지 당시 고등학생인 나로써는 기형도의 시가 너무 어둡고 절망적인 내용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느꼈다. 비록 시인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않겠지만, 내용만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엄마 걱정' 같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년 시절 속 어머니에 대한 강렬했던 기억'을 묘사하는 시로만 생각하겠지만 실상 이 시에서도 시인 특유의 어두운 심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식목제'라는 시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과거의 삶을 회상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화자(시인)은 살아가면서 늘 마주하게 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극복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래, 즉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다.  

기형도의 시에는 미래에 대한 전망, 즉 '희망'이라는 것이 배제되어 있다. '기형도'라는 이름의 육신은 썩어 사라졌지만 우울하고 절망적인 세상 앞에서 불안에 떨며 방황하는 내면적 자아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어버린 <잎 속의 검은 입>이라는 세련되면서도, 그의 불행했던 생애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죽음' 그리고 '가난의 고통'으로 기억된 시인의 유년 시절 

기형도의 시가 어둡고, 절망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인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그의 시 중에서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 많은데 어린 기형도는 이른 나이에 '죽음'이라는 현상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가난의 고통을 체험해야만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 때부터 시인의 모친이 가장 역할을 했다.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 '위험한 家係. 1969' 1연 중에서 -

  

시인의 모친은 어린 자식들을 거두기 위해 시장통으로 돈벌이를 하러 나갔다. 장터에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인은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다가 빈방에서 혼자 엎드려 훌쩍거렸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유년 시절을 쓴 시 중에 유독 추운 겨울로 배경을 한 내용이 많다. 어린 시절부터 불안한 심성을 지니기 시작했던 어린 기형도에게는 '문풍지를 더듬던' 겨울 찬 바람은 자신의 연약한 심성을 언제 해칠지 모르는  '죽음' 못지 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마음이 약한 어린 기형도를 보호하기에는 어머니의 존재로도 부족했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 중에서 -

 

유년기를 지나서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게 되는 사춘기 시절마저도 불행하게도 죽음의 신은 시인의 생애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렸다. 중학교 3학년이던 기형도는 누이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맛보았으며,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의 내면적인 고민은 '시'로써 본격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모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중략)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20대는 기형도를 읽어야한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시인이 되고서 4년 남짓 발표한 작품이라곤 많지 않았다. 발표하는 작품들마다 주목은 받았지만 20대 중반인 시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엔 살아온 세월이 너무 짧았다. 그의 유고 시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은 시인의 작품세계가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불안과 죽음이다. 주식처럼 가지고 있는 안개로 인한 그의 불안은 개인적 불안을 넘어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상까지 가감없이 그려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승에 남기고 간 문학의 결과물보다는 죽음으로서 사랑받는 시인은 이상, 윤동주 그리고 기형도 밖에 없다. 세 명의 시인 다 요절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시인. 시를 쓰던 날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그토록 자신의 삶 주변을 배회하면서 호시탐탐 노렸던 죽음의 신과 대면했던 그 순간, 시인이 세상을 향해 '안녕'을 고하는 그 날. 그 후로 가엾은 시인의 사랑은 영원히 빈 집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기형도 시인은 참으로 아픔이 많았던 시인이었다. 스스로 지닌 아픔은 견디다 못해 단 한 권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남은 아픔들은 어찌할 것인가. 세상을 떠난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인의 지인들과 독자들은 기형도를 기억하고 있지만 강산이 변할수록 시간 앞에서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시인의 불안하고도 슬픈 생애를 공감할 수 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그가 이승을 떠나고 난 뒤에 태어난 나 같은 20대의 세대들은 기형도라는 이름의 석 자가 남기고 간 가슴 아픈 '검은' 시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시를 읽기에는 우리 세대들이 겪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너무나 어둡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은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혹은 어둡고 우울한 시인의 시구가 불편하더라도 20대는 기형도를 읽어줘야 한다. 삶에 있어 빛과 그림자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시인은 '거리의 상상력'이 주는 고통을 사랑함으로써 짧은 생애동안 수십 편의 시를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시라는 '가장 위대한 잠언은 자연 속에 있음'을 믿었다. ('詩作 메모' 중에서)  

그는 고통스러운 창작 고통 속에서도 희망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88만원 세대'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형도의 절망을 통해 희망을 향한 안간힘의 줄기를 찾아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를 부른다면 언제든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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