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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평점 :
Scene #1 범주 오류 (category mistake)
70 평생 단 한 번도 우리나라 밖을 여행해보지 못한 A 노인은 드디어 세계여행으로 프랑스 파리의 땅을 밟아보게 되었다. 노인에게는 프랑스 파리의 명물 에펠 탑을 한 번 보고 죽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 그는 관광 안내원과 함께 넓은 파리의 시내는 구경하기 시작했다. 에펠 탑을 보고 싶은 노인은 관광 안내원에게 부탁을 하였다.
" 어디를 가든지 꼭 에펠 탑이 보이는 장소로만 안내해 주시오. "
그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출발하여 개선문을 돌아 다시 노트르담 사원을 거쳐 뤽상부르 공원까지 갔다. 파리에 들리면 꼭 한 번쯤 거쳐야 하는 명소를 볼 수 있었던 매우 즐거운 관광이었다. 여러 곳을 돌아보느라 피곤해진 노인은 차 안에서 깜빡 졸고 말았다. 졸다가 깨 보니 다음 관광지에 도착해 있었다.
" 아니, 에펠 탑이 안 보이잖아.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이상한 곳으로 데려왔군. 안내원, 왜 내 말대로 하지 않는 거요? "
노인은 안내원에게 막 화를 냈다. 그러자 안내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 저는 손님의 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곳이 바로 에펠 탑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거든요. "
하지만 노인은 안내원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듯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 젋은 양반이 지금 이 노인네를 놀리려고 하는거요? 도대체 에펠 탑이 어디 있다는 거요? "
A 노인은 왜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에펠 탑이 눈 앞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일까? 노안이라서 에펠 탑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시력이 저하되더라도 희미하게나마 에펠 탑의 형체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안내원이 파리를 처음 와 본 노인을 속이는 것도 절대로 아니다. 분명히 노인은 에펠 탑이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파리의 속담에 '에펠 탑을 보기 싫으면 에펠 탑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파리는 시내 어디에서든 에펠 탑이 잘 보인다. 3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인공건축물이다. 이 말은 파리 시내 어디에서든 에펠 탑이 잘 보이니 만약 보기가 싫다면 오히려 그 밑으로 가라는 뜻이다. 즉 에펠 탑 바로 아래에 가거나 그 곳에 있게 되면 우리가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에펠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절대로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노인이 에펠 탑을 볼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에펠 탑 바로 아래에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에펠 탑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인은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것이 얼마나 거대한지 예상하지 못했다. 노인에게는 그저 파리의 유명한 탑으로만 생각했었으리라.
(좌) 실제의 에펠 탑 모습
(우) 로베르 들로네 <에펠 탑>(붉은 탑) 1911년
로베르 들로네 <에펠 탑> 1922년
하지만 노인의 일화를 논리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명백한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라고 말할 수 있다. 범주 오류란, 논리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말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뜻한다.
에펠 탑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인이나 오랫동안 에펠 탑의 전체적 모습을 사진 속으로만 봤던 사람이나 탑은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높이로 이루어진 건물'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에펠 탑'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평면적이면서도 일차원적인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에펠 탑이 꼭 높은 건물에서 바라보면 볼 수 있는 거대한 형태의 모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에펠 탑 밑에서도 볼 수 있고, 에펠 탑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도 우리가 보지 못했던 탑의 꼭대기도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입체파 화가로 활동했던 로베르 들로네(1885~1941)는 당시 물질문명과 근대화의 상징으로써 에펠 탑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에펠 탑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거대하면서도 온전한 형태의 철탑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탑 아래로부터 거대한 조형물을 우러러 보는듯한 시점에서 그린 에펠 탑도 있고, 심지어 하늘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에펠 탑을 그린 것도 있다. 입체파에 심취한 적이 있었던 화가답게 대상을 여러가지 시점의 각도에서 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서 들로네는 다양한 형태의 에펠 탑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이런 실험적 창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거대한 높이의 세모꼴 형태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모습의 철탑으로만 보려는 시각적 범주 오류를 극복했기 때문이었다.
범주 오류는 A 노인과 같은 일반인부터 시작해서 완벽한 논리적인 사고를 갖춘 철학자들마저도 흔히 빠지는 사고적 오류의 형태이다. 요즘 이와 같이 범주를 구분하지 못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데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일어난 바로 소설가 공지영의 트위터 사건이다.
공지영이 자신 트위터에서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한 가수 인순이와 김연아 선수에게 쓴소리를 잇따라 쓰자 네티즌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인순이 씨는 종편 개국 공동 축하쇼에 출연해 축하무대를 꾸몄고 김연아 선수는 'TV 조선', '채널A' 등에 출연해 개국 축하 인터뷰를 진행한 점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읜 소견을 공 작가가 트위터에 남긴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소신을 가지고 종편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개념'에 찬 행동일 수 있으나 그런 소신이 없거나 또는 그와는 다른 소신을 갖고 있다 해서 '개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개념'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다."라고 남김으로써 조용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종편 개국 축하를 위해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단지 '방송채널 축하'를 위해서 의례적인 출연을 했을 뿐이며 자신들의 직업인 방송 활동의 영역을 좀 더 넓히기 위해서, 그리고 대중들에 대한 자신의 인지도를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번에 새로 개국한 방송 채널의 진출에 욕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 '방송 출연'이 직업인 연예인들 모두 보수적인 입장의 소신을 가졌다고 볼 수 없듯이 그런 소신을 가지지 않는 연예인들이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언론이 만든 종편 개국을 축하하고 출연한 사실이 '개념 없는'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연예에 종사하는 '예능인'들이 보수 언론의 기분을 맞춰주는 개념 없는 딴따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 작가보다는 범주 착오를 심하게 범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FTA 비준안 문제 앞에서 법의 범주와 정치의 범주를 헷갈린 지금 여당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서 각종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종편과 관련하여 공 작가보다 더 심한 개념 없는 행동이 있다. 자신의 독재정권 유지 일환으로 시행한 언론 통폐합에 대한 유감을 자신의 최측근이 대신하여 종편 개국 축사로 전달하는 전(前) 대통령 그리고 언론 권력의 최정점에 서온 이들이 마치 자신들을 '희생양'이고 '약자'인 양 스스로를 포장하여 스스로를 과거 부조리를 청산하는 것처럼 홍보하는 종편채널을 만든 문제의 언론 같은 경우에는 자기정당화된 범주 오류로 인해 스스로 '개념'을 상실하고 말았다.
Scene #2 차이 속의 연대 (syncretism)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시대를 일컫는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은 중동 지역의 서남 아시아에서 고대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그리스인 지배자들과 함께 새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반대로 헬레니즘 왕국들은 각지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필요나 편의에 따라 지역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파올로 베로네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맞는 다리우스의 가족> 1565~15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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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와의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장의 가족들을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위와 명예를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해 융화정책을 펼친 덕분에 그리스 문화가 각 지역의 문화와 융합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주헌 <역사의 미술관> 중에서, p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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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탄생된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그리스 세계와 중동, 서남 아시아의 문화가 융합된 산물이었다. 그리스와 아시아 문화의 혼성이 실제로 얼마 정도였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대체로 사회 상류층의 실용적인 문화 수용으로 보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이질적인 종교나 문화, 학문이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을 '싱크레티즘(syncretism)'이라고 부른다.
최근 새 역사교과서 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집필기준 초안의 쟁점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문제, 이승만ㆍ박정희 전 대통령들의 '독재'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였다. 보수 진영은 '자유민주주의'를 그대로 쓰고 '독재'표현은 넣지 않으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를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 논쟁의 핵심에 선 ‘자유민주주의’를 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 학계 간의 대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그대로 써야 한다는 진보 진영의 학계와 이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는 보수 진영의 학계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지난 달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논란 끝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확정해 발표했지만 일부 학자와 역사관련 단체들의 반발은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이번 집필기준에서는 지난 교과서 집필기준과 달리 5.18 관련 내용이 빠지자 광주지역 범시민사회단체에서 성명을 내고 교과부 장관을 만나 항의하는 등 반발여론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처럼 역사교과서 공방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인 시각에서 교육과정을 손대려고 하는 정부와 역사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학자들 간의 씨름은 교육이 정치적 쟁점화된 데 있다. 현재 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역사교과서는 ‘2007 개정 교육과정’에 맞춰 집필되었다.
이는 지난 2008~2009년에 집필되어 지난해 검정을 거쳐 올해부터 적용됐다. 그러나 새 교과서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올 2월부터 개정작업이 시작됐다. 8월에는 개정내용이 확정, 이후 3개월 만에 중학 교과서 집필기준이 정해졌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르면 중학교는 2013년부터, 고등학교는 2014년부터 새 역사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출판사들이 6개월 만에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현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집필기간을 4년 정도 거친 것에 비하면 이번 경우는 초고속으로 집필하게 되는 셈이다. 문제는 해당 교과서로 공부해야 하는 학생과 이를 가르치는 교사, 또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검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기준이 모호하면 정권 성향에 따라 좌. 우편향 논란을 가중화되기 쉽다는 것이다.
기나긴 고심 끝에 확정 집필기준은 이런 논란을 감안해 '자유민주주의' 용어의 경우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토대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용어로 하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병기했다. 또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화'라는 표현을 써서 진보 진영의 시각을 수용했다. 반면 보수 진영 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부분은 분명한 사실로 판단해 그대로 쓰기로 했다. 교과부가 제시한 집필기준이 가급적 양측의 주장을 수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었지만 양 쪽 진영의 학계에서는 이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집필기준 확정과는 별개로 올바른 사관 정립을 위한 학계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관이 아무리 투철해도 교과서가 오류투성이거나, 교사가 사관에 진지하지 못하면 현장의 역사교육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관이라는 게 본래 완전무결한 합의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젠 그나마 마련된 틀을 기초로 보다 훌륭한 교과서와 좋은 현장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이런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싱크레티즘' 즉, '차이 속의 연대' 라는 사고가 필요하다. 자신의 역사적 사관이 무조건 옳다고 옹호를 한다거나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사고를 지닌 상대방에게 강요를 한다는 것은 서로 간의 대립의 골만 깊어지는 상처만 남길 뿐이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싱크레티즘은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관의 입장을 인정하되 잊혀질 만 하면 불거지는 왜곡되거나 오류로 이루어진 역사적 내용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Epilogue : 철학이라는 확대경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기
개인적으로 철학의 개념에 대해서 많이 부족한 상태라서 책의 첫 장을 펴기 전부터 칼럼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몇 몇 개념을 소개한 내용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특정한 사회현상을 예로 들어 철학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없을 듯하다. 단,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1년 간 쓴 칼럼들은 철학적 개념을 사회현상을 바라보면서 인식하게 된 주관적 견해이고 단지 개념들이 사회현상에 적용할 수 있는 사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자가 선택한 범례에 불과하다. 저자가 우려한 것처럼 그가 소개한 철학적 개념과 그 범례들이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지식의 수집품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진중권은 철학의 개념을 사회현상을 정교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확대경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오랜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유리로 만들어진 렌즈라는 도구의 기능을 알게 된 사람이 많았다. 그들에게 렌즈는 먼 곳을 가까이에 볼 수 있는 그저 신기한 발명품으로만 인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렌즈는 사물을 확대해 볼 수 있는 용도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2개의 렌즈를 통에 끼워 망원경을 발명하였다. 오늘날 갈릴레이의 공적은 망원경을 만들었다는 사실보다는 처음으로 망원경을 천체관측에 사용하여 그때까지 눈으로는 관측되지 않던 천체와 우주의 세계를 망원경에 의하여 최초로 탐색하였다는 데 있다. 확대경의 렌즈를 무조건 깨끗이 닦는다고 해서 멀리 있는 곳을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렌즈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뿐만 아니라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달 표면까지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실용적인 면들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인문학을 너무 소홀히 여기지 않나 싶다. 교양을 가르쳐야 할 대학에서는 학생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정부도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취업이 잘 되는 것이라고 최고라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순수학문의 발전이 없이는 결코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지속 가능한 성장의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 철학적 개념이라는 렌즈의 기능을 이해하고 직접 자신을 둘러싼 현상을 바라본다면 여태까지 몰랐던 현상의 이면, 그리고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면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을 숙성시키는 ‘인식의 효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