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기의 전문가들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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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는 곰과 호랑이로부터 시작한다. 환웅(桓雄)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마늘과 쑥을 준다. 곰과 호랑이는 동굴에 들어가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지낸다. 호랑이는 환웅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실패하였고, 곰은 그 약속을 잘 지켜 여자가 되었다. 곰에서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熊女)는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檀君)을 낳는다. 단군신화에서부터 전설, 민화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동물이다. 호랑이들은 1920년대까지만 해도 한반도 곳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일제의 무분별한 남획과 벌목이 자행되면서 그 후 남한에서는 호랑이가 멸종되다시피 했다. 세월이 지나 호랑이는 동물원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동물이 됐다.

 

신화가 사회상의 반영이라면 그것은 사람의 행태가 보여준 보편적 현상이다. 단군신화만큼 ‘우리’라는 한민족의 마음을 상징하는 이야기도 없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가 지향하는 점은 같다. 그것은 ‘사람’이다.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사람 생각이 이 신화 속에 그려져 있다. 곰이 겪은 고난의 과정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조상들은 햇빛이 들지 않는 동굴, 먹기 역겨운 쑥과 마늘, 그리고 100일이라는 삼중고를 겪는 곰의 인내심을 ‘성공한 사람’의 자세로 생각했을 것이다. 호랑이의 충동적인 야성이 아니다. 우리는 호랑이의 투쟁성보다 곰의 인내를 더 선호하는 교훈에 익숙하다. 그래서 주어진 현실을 불평하는 ‘호랑이 같은 인간’을 싫어한다.

 

김한민 작가의 그래픽 노블 《비수기의 전문가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버린 ‘호랑이 같은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호랑이 유형의 인간을 연구하는 ‘김 아무개’로 등장한다. 그는 호랑이 유형의 인간을 ‘호모 티게르’ 또는 ‘퀭’이라고 명명하고, 20년의 추적 끝에 호모 티게르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호모 티게르는 홀연히 종적을 감춘다. 김 아무개는 호모 티게르가 직접 남긴 글들을 취합하여 독자에게 들려준다.

 

호모 티게르의 시선은 어느 것 하나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쇠창살에 갇힌 장애 콘도르(condor), 싸늘한 주검이 된 동물, 그리고 항상 혼자 다니는 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호모 타게르는 길에서 만난 존재들을 관찰하면서,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호모 티게르의 글쓰기 방식은 마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묘사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푹스(Eduard Fuchs)처럼 일상의 세속적인 것들을 모으는 수집가의 자세와 비슷하다. 호모 티게르는 자신의 눈으로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존재들을 눈으로 수집하고 기록한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존재들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타자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것들의 존재 가치에 따라 서열을 매기거나 배제와 차별의 원리를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호모 티게르의 시선은 이러한 태도에서 벗어나 있다. 그의 시선은 존재들 그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려고 한다.

 

독자가 이 그래픽 노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모 티게르의 말 걸기’를 직면해야 한다. 호모 티게르는 너무나도 익숙한 질문 하나를 툭 꺼내면서 독자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넌 알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비수기의 전문가들》 19쪽)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혹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이런 간단한 질문은 멀쩡하게 잘 지내던 우리를 갑자기 곤란하게 만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림과 글을 빨리 훑어보는 성질 급한 독자들은 이 질문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꽂히는 순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뭐라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고, 그럭저럭 대충 살고 있는 자신이 하찮게 느껴진다. ‘삶의 의미’라는 프레임은 때때로 우리 마음을 괴롭힌다. “그래, 이왕이면 ‘호모 티게르’처럼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보자”라고 생각하면서 그럴듯한 삶의 계획을 만든다. 그렇지만 어설픈 꿈은 가장 어려운 질문을 일시적으로 피하기 위한 변명이다. 우리 사회는 호랑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학교는 단군신화의 곰을 인간으로 변하는 데 성공한 ‘승자’로 규정하면서 가르친다. 동굴을 뛰쳐나와 인간이 되지 못한 호랑이는 ‘패자’의 위치로 남는다. 단순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다수의 지지를 얻은 곰(‘성공한 사람’)은 권력을 얻으면서 ‘주류’가 된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도는 호랑이/호모 티게르는 ‘비주류’ 또는 ‘약자’로 전락한다. 이러한 일상화된 분류로 존재를 서열화하는 우리 사회에서 ‘호모 티게르’에 대한 어떠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다.

 

‘곰 같은 인간’이 살기에 아주 편안한 ‘동굴’ 같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하는 것이 바로 ‘어쩔 수 없다’는 태도이다. ‘각자도생’이 우선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없다. ‘헬조선’을 탈출하고 싶다는 절망 섞인 목소리만 높아지고 있을 뿐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주류는 비주류를 짓밟아서라도 자기 살길을 마련한다. 비주류는 주류에 속하기 위해 경쟁하고, 죽지 않기 위해 불편한 현실에 순응한다. ‘호모 티게르의 말 걸기’, 즉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계속된 질문들은 독자들의 자아 성찰을 유도한다. 독자는 호모 티게르를 미행하면서 자신의 불행(주류 사회 밖에 겉도는 삶), 세상의 불행(호모 티케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 점) 모두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하게 된다. 독서는 그 책 속에 간접적으로 묘사된 우리의 모습을 보기 위해 저자와 텍스트의 길을 동행하는 일이다. 《비수기의 전문가들》을 읽는다는 것은 ‘불편한 동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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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9-01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이~ 오랜만!
한동안 안 보인 걸 보면 분명 늦은 휴가를 다녀왔으렷다!
어디를 다녀왔는공...?
암튼 다시 보니 반갑네.
어디를 가도 책은 안 빠트렸겠구만.ㅋ

cyrus 2018-09-01 13:56   좋아요 1 | URL
이번 휴가는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지냈어요. 이번 주는 책방 독서모임이 있어서 낮에 책방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책 읽고, 아시안게임 중계 보면서 휴일을 즐겼어요. 시간 금방 지나가네요.. ^^;;

포스트잇 2018-09-01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같은 인간은 ADHD를, 곰같은 인간은 신경쇠약을 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열인가....... ㅜ

cyrus 2018-09-01 17:00   좋아요 1 | URL
곰, 호랑이 유형의 인간을 정신의학 관점으로 볼 수 있겠군요. 포스트잇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곰 유형의 인간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계속 쌓기만 할 것 같습니다. 마음속의 분노를 배출하지 못해서 혼자 끙끙 앓는 성격인거죠. 사실 제가 곰 유형의 인간에 가깝습니다. ^^;;

페크pek0501 2018-09-01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며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 지금 떠오른 생각으로...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사람으로 살기, 라고 답하겠습니다.

cyrus 2018-09-01 17:01   좋아요 2 | URL
저도 페크님과 같은 생각을 했는데, 《비수기의 전문가들》을 읽고, 멘붕에 빠졌습니다.. ㅎㅎㅎ
 
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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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가들은 서재 얘기든 책에 대한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들이 좋아하는 책에 특별한 특징이 있다. 애서가가 쓴 책은 또 다른 어떤 책에 대한 입맛을 돋운다.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킨다. 고구마 줄기처럼 꼬리를 물고 나오는 ‘책 속의 책들’은 《신곡》, 《돈키호테》 같은 서양 문학의 알토란들이다.

 

책방 점원에서 시작해서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 자리까지 오른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은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든 애서가이다. 학창 시절부터 망겔의 꿈은 도서관 사서였다. 작가가 되고 책을 모으다 보니 어느 사이에 책장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결국 프랑스 루아르강 계곡에 3만 5천여 권의 책이 소장된 개인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듯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 망겔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 맨해튼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면서 개인 도서관에 있던 책들을 떠나보냈다.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해체를 맞이하는 개인 도서관에 보내는 일종의 송별사(送別辭)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서재 속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이란 책을 남긴 저자들의 정신이다. 결국 서재는 책들의 공동묘지이고, 서재를 애지중지 관리하는 애서가는 묘지기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서재를 떠나보낸 망겔 입장에서는 사르트르의 비유가 우울하게 느껴질 것이다. 서재의 해체는 곧 ‘서재의 죽음’, ‘기약 없는 이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싸는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책을 한 권 한 권 서가에서 빼내고, 그 책을 종이 수의 속에 집어넣는 것은 우울하고 사색적인 행위로 마치 오래도록 지속되는 작별 인사 같은 것이다. (60쪽)

 

 

서재에 잠든 ‘죽은 사람들’을 지켜본 묘지기가 공동묘지 하나가 사라져가는(죽어가는) 모습까지 봐야 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 서재는 온전히 나에 대한 ‘자서전’이며, ‘나’라는 존재의 일부이다. 서재는 오로지 나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책을 꽂을 수 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은 공공 소유물이다.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거나 필기를 하면서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개인 서재에 꽂힌 책은 개인 소유물이다. 망겔은 책을 빌려주는 행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 서재를 잃은 것에 대한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책은 나의 소유물이고 또 나라는 사람의 일부라고 느낀다. 나는 책을 빌려주는 것을 귀찮아한다. 나는 책을 빌려준다는 것은 절도를 유혹하는 행위라 믿는다. 나의 서재는 나라는 사람을 에워싸고 또 반영하는 온전히 사적인 공간인 것이다. (17~18쪽)

 

 나는 늘 공공 도서관을 사랑했지만 한 가지 모순은 고백해두어야겠다. 나는 도서관에서 글을 쓰거나 일을 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조급한 나는 원하는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빌려 온 책의 여백에 필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도 너무 싫다. 책에서 어떤 놀랍고 진귀한 것을 발견했는데 그 책을 도서관에 다시 반납해야 하는 것도 싫다. 나는 탐욕스러운 약탈자처럼 내가 다 읽은 책이 나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28~29쪽)

 

 

서재를 떠나보내고 난 뒤에 망겔은 국립 도서관장이 된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염두해서 그런지 책의 후반부에 국립 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가 운영하고 싶은 국립 도서관은 누구나 마음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보금자리 같은 곳이다. 망겔에게 서재와 도서관은 개인과 사회 전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글의 영감과 간접경험을 얻는 곳이기도 하고, 때론 번잡한 삶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안식의 장소였다. 책 속에 담긴 방대한 인류 정신의 원형을 기억하게 만들고, 활자와 세상을 향해 더 열린 상상력을 갖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서재는 삶의 기록이며, 독서편력의 역사이다. 다소곳하게 책이 놓인 서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스해진다. 서재는 우리의 마음에 활력을 불어주는 오아시스 같은 천국이다. 책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서재야말로 보르헤스(Borges)가 원했던 ‘천국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 Trivia

 

2쇄를 찍을 때 다음과 같은 오자들을 교정해야 한다.

 

28쪽에 안나 슈웰(Anna Sewell)의 사망 연도가 ‘1978년’으로 되어 있다. 그녀는 1878년에 세상을 떠났다. 52쪽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작가 이름을 ‘마르셀 푸르스트’라고 표기되어 있다. 176쪽 옮긴이 주에 ‘프루스트’로 적혀 있는 걸로 봐선 52쪽의 ‘푸르스트’는 인쇄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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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8-22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8~29쪽)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cyrus 2018-08-23 16:54   좋아요 1 | URL
망겔의 책을 다 읽고 도서관에 반납했을 때 기분이 이상했어요.. ㅎㅎㅎ
 

 

 

안토니우스(St. Anthony)사막의 성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수도승이다. 젊은 안토니우스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부자 청년에 대한 설교를 들은 뒤 처음으로 성령의 뜨거운 기운을 받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사막에 들어가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 [품절]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사막의 안토니우스(분도출판사, 2015)

* 아타나시우스 성 안토니의 생애(은성, 2009)

 

 

 

온갖 종류의 유혹과 환영이 안토니우스에게 나타나 그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그는 이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아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사막으로 옮겨갔다. 10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단 두 번 은둔처를 벗어났다. 첫 번째는 311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박해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는 아리우스 파(Arianism)와 논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예수의 신성(神聖)을 부인한 아리우스 파에 맞서 싸우던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를 도와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록했고, 그가 쓴 성인 전에 영향을 받은 젊은 성도들이 사막에 찾아왔다. 안토니우스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은 사막에 모여든 제자들에게 금식과 기도와 자선에 관해 가르쳤다. 최초의 수도원은 사막에서 시작되었다.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에코의서재, 2008)

* 로이 포터, 미쿨라시 테이흐 엮음 섹슈얼리티와 과학의 대화(한울아카데미, 2001)

 

 

 

안토니우스는 금욕과 고행, 그리고 청빈한 생활을 중시했다. 그는 하루 한 끼만 먹었고, 배가 고플 때는 맹물을 잔뜩 퍼마셨으며, 빈 동굴 무덤에서 거지처럼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일정 기간 간격으로 친구들이 마른 빵을 가져다준 덕분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안토니우스의 생활을 보면 극단적인 금욕에 가까운 고행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중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마음속의 욕념을 깨끗이 비워 버리는 방법이다. 안토니우스뿐만 아니라 여러 종파의 수도승, 신비주의자들은 마음속에 층층이 남아 있는 잡다한 악덕의 모습을 기도 속에서 훌훌 털어버림으로 마음을 정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고통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믿음에 일치시키기 위해 예수를 따르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육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고행을 실천했다. 고행자들은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려고 때로는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육신에 직접 고통을 가하기도 했다. 소박한 종교적 반성에서 시작한 채찍질 고행은 마조히즘(masochism)의 이상 현상에 휘말려 미친 듯 인기를 끌게 된다. 중세 말기에 와서 자기 파괴적 고행 방식은 이단으로 규정 받기 시작했고, 채찍질 고행은 악마의 행위와 동일시되었다.

 

정신분석학자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Elisabeth Roudinesco)는 자신의 책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 (에코의서재, 2008)에 중세의 극단적인 고행 문화를 소개하면서 인류의 도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섹슈얼리티와 과학의 대화 (한울아카데미, 2001) 2(사디즘, 마조히즘의 역사, 언제 어떤 행동이 사도마조히즘이 되는가)은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의 용어 성립에 대한 통념을 깨는 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통념이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19세기 근대 성과학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사도마조히즘은 병리적인 형태가 아니라 인류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원초적 본능이다. 섹슈얼리티와 과학의 대화도 중세 고행자들의 마조히즘을 근거로 내세워 고통으로부터 느끼는 쾌락을 누리는 문화가 오래전부터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중세 고행자들은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이 태어나기 전에 마조히스트로 살고 있었던 셈이다.

 

 

 

 

 

Trivia

 

섹슈얼리티와 과학의 대화서론 15쪽에 괴테(Goethe)의 작품명이 언급되어 있다. ‘괴테의 사고력 실험소설 선택적인 유사성(Elective Affinities)이라고 적혀 있는데,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우리말로 옮긴 작품명에 영문명이 안 적혀 있었다면 작품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Elective Affinities’18세기에 나온 화학 용어인데 물질의 결합을 일으키는 힘을 뜻한다. 과학에 조예가 깊은 괴테는 이 과학적 개념을 빌려 인간의 관계를 묘사한 친화력이라는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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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 안토니우스의 금욕과 고행 그리고 극단적 청빈
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할 터인데
오늘날 한국 대형교회의 모습과는 정말 동떨어진 것 같
아 씁스릅하기만 합니다.

cyrus 2018-08-22 17:34   좋아요 0 | URL
종교인들도 사람이라서 쾌락을 누릴 수 있어요. 그런데 성행위를 부도덕한 행위로 보면서도 자신들은 남 몰래 즐기는 위선적인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아요. 특히 ‘신의 이름’을 내세워서 여신도들에게 접근하는 사이비들은 싫어요.

페크pek0501 2018-08-2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으로부터 느끼는 쾌락을 제가 경험한 게 있어요. 발레 시간에 앉아서 동작을 하다가
누워서 동작을 하는데 꽤 힘들어서 끙끙대게 되는데 묘한 쾌감이 있습니다. 윗몸 일으키기도 하는데 꽤 많이 시켜서 땀을 흘리며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그 시간이 싫지 않은 거예요.
왜 그럴까, 생각을 하곤 해요.
저는 인간들의 공통점이 많을 거라고 봐요. 다만 느낄 기회가 없거나 무지해서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입니다. ㅋ

cyrus 2018-08-23 17:00   좋아요 1 | URL
페크 님의 경험은 고통의 쾌감이라기보다는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주는 쾌감인 것 같아요. 발레 동작을 하려면 고통을 참아야 하잖아요. 그 고통을 견디면 몸이 유연해지고, 발레 동작이 가능해져요. 발레 동작을 할 수 있다는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 고통을 못 느낄 수 있어요. ^^
 
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최종렬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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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실업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을 나와서 다녀본 직장이라는 게 대학교 행정실에 계약직으로 일한 것과 지금 다니는 기계제품을 판매 · 설치하는 회사이다.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고 싶어도 이직할 곳을 찾기가 만만치 않고, 잘못하다간 정말로 오갈 데 없는 백수가 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청년 실업에 대한 뉴스를 들을 때면 남 일 같지 않다.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이 실업이다. 거기에 지방대 출신은 취업 전선에서 가장 불리하다는 말까지 들으면, 따뜻한 말 한마디 정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청년 실업도 서러운데, 지방대 출신이라고 해서 이 사회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너무 서글프다.

 

지방대 재학생과 졸업생, 학부모를 심층 면접하여 분석한 복학왕의 사회학(오월의봄, 2018)을 다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지방대생이 행복하게 살려면 뭘 해야 하는 거야?” 게으른 것도 아니고 다들 열심히 살려고 고군분투를 하는데도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지방대생의 삶이 왜 이 지경이 됐나.

 

복학왕의 사회학은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최종렬 교수의 논문을 보완한 책이다. 논문 제목은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 분석이다. 복학왕은 매주 수요일 네이버에 연재 중인 웹툰이다. 지방대 생활의 사실적인 모습을 묘사해 호평을 받고 있다. 저자는 지방대에서 10년 이상 가르치면서 만난 청년들이 웹툰에 나온 지방대생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연구를 진행했다. 저자는 6명의 지방대 재학생과 17명의 지방대 졸업생, 그리고 지방대생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묻고 얻은 답변을 분석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없는 지방대생의 서사를 새롭게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래서 저자는 감정을 제대로 들어주는 상대가 없다는 점에서 지방대생을 소수자로 본다. 특정 지역, 특정 학교에 국한된 현상의 구조를 전체 지방대 학생에게 적용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위험은 분명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일반화된 경험적 사실을 도출하는 것이 연구의 주된 의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누군가는 지방대생을 생존 경쟁에서 낙오된 패배자라고 말한다. 또는 지방대라 부르지 않고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라고도 부른다. 주로 지방대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자조적인 속어로, 패배주의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오늘날 청년층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생존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각자도생에 익숙한 생존주의 세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시선으로는 지방대생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학생들은 한결같이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사는 것을 행복의 가치로 삼았다. 이들에게 생존은 가족 안에 머물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경쟁이 치열한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공부, 입시, 스펙 경쟁 속에서 처지고 낙오했던 쓰라린 경험을 겪었거나 이미 그 경험을 하기 전에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어차피 도전해도 실패한다고 체념하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겸연쩍어한다. 저자는 적극적으로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 지방대생의 감정 상태를 성찰적 겸연쩍음이라고 표현한다. 생존을 위한 자기계발 의지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한 자기보존 의지가 강할수록 행복을 위한 목표를 높게 잡지 않는다. 자신과 가까이에 있고, 얼마든지 자주 만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도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에 실패로 귀결되는 도전을 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주변 환경에 익숙한 학생들은 가족 밖, 더 나아가 지방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저자가 만난 지방대생들의 행동 양식은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로 요약된다. 지방대생뿐만 아니라 지방대 졸업생, 부모들 대부분은 적당히 돈을 벌고, 적당히 즐기면서 가족과 함께 사는 소소한 일상을 꿈꾼다.

 

그렇다면 지방대생은 어떻게 하면 가족지방이라는 이중 울타리에 벗어날 수 있을까? 지방대생들이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대학과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을 해야 한다. ‘대학생활을 즐겨라!’라는 말조차 쉽게 꺼내기 힘든 지금의 지방대는 기운이 팔팔한 자유로운 영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자기 세계에 갇힌 무기력한 영혼들이 캠퍼스를 배회한다. 저자는 미적 체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는 것이 가족주의에 벗어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학이 미학적 폴리스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용어를 쓴 것에 약간 불만이 있다. 왜냐하면, 용어 자체에 인문학적 향기가 물씬 풍기고 책을 접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일부 독자는 저자가 문제 해결 대안으로 제시한 미학적 폴리스개념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저자가 제시한 미학적 폴리스는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교육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새로운 타자들을 만나 상호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저자의 대안이 이상적이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지방대생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기 세계에 갇힌 채 살아가는 지방대생들이 있다.

 

복학왕의 사회학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부대꼈다. 지방대 졸업생의 위치에 서서 대학교에 일하는 동안 다양한 모습의 지방대생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취업에 번번이 실패해서 졸업을 유예하는 친구들, 이러한 반복되는 실패에 지쳐버린 친구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겪은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 지레 겁먹어 도전을 꺼리는 친구들.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은 금방 나오지 않겠지만,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지방대생들의 목소리를 사회 전체에 울릴 수 있는 공적인 서사 형태로 듣는 일이다. 이 일은 책상에 앉아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귀 기울여 듣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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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1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22 11:51   좋아요 1 | URL
대구에 일자리가 줄어들면, 지방경제가 침체될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누릴 수 있는 문화자본도 줄어들어요. 이러니까 대구가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 비해서 문화 공간이 부족해요. 특히 서점과 책방! 지역에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으면 문화에 대한 지역주민의 관심도 단순해져요. 그래서 대구에 오래 살면 보수적인 집단 분위기를 쉽게 벗어나지 못해요.

syo 2018-08-21 18: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왜 눈물이 나지?? ㅠ_ㅜ

cyrus 2018-08-22 11:5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보면서 대학생 시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저도 얼른 취직해서 소박하게 지내면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마음가짐도 보수적인 환경이 만들어 낸 생각이었어요.

감은빛 2018-08-21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방대 졸업생이라 공감이 많이 가네요.
아마도 저 역시 시민단체 활동가라는 직업을 택하지 않았다면,
기나긴 실업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거라는 생각을 가끔해요.
활동가가 아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저자의 대안은 별로 대안으로 느껴지지 않는군요.

한편으로 저는 대학이 너무 많고,
대학을 나와도 딱히 인생에 도움될 것이 없는
그러니까 대학 다니면서 대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입시 학원의 연장처럼 단순히 각종 자격증과 스펙 쌓고,
고시 준비하는 그런, 굳이 대학생이 아니어도 될 활동을 대학에서 하는 것이 문제다 싶어요.

대학입시와 대학생활과 취업준비까지 쓸데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 여겨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뭔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혹은 잘 하는 것을
통해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특히 요즘처럼 뭐든 찾아보면 다 알 수 있고,
요즘 젊은 분들처럼 뭐든 척척 잘 하는 사람들이라면 말이죠.

cyrus 2018-08-22 11:57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책의 저자가 내세운 대안이 ‘대학만능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학창 시절에 한 번쯤은 번안시집을 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집의 여백에 감상문 몇 자 끼적거린 경험도 있을 것이다.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미라보 다리』는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알려진 외국 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주1]

 

 

 

아폴리네르는 절친한 피카소(Pablo Picasso)의 소개로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을 만난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은 결혼을 전제로 5년간 교제했으나 양가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헤어지고 만다. 사실 두 사람을 갈라서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아폴리네르는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돼 절도 혐의로 구속된다. 다행히 그는 구속 일주일 만에 풀려나지만, 이미 그의 이름에 크게 찍힌 ‘범죄자’라는 낙인은 쉽게 사라지지 못한다. 로랑생은 ‘사랑받지 못한 이방인’ 아폴리네르를 감싸 안지 못하고 이별을 선택한다. 『미라보 다리』에는 세월이 가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실루엣이 남아 있다.

 

 

 

 

 

 

 

 

 

 

 

 

 

 

 

 

 

 

 

 

* 아폴리네르 《알코올》 (열린책들, 2010)

* 아폴리네르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민음사, 2016)

* 아폴리네르 《동물시집》 (난다, 2016)

 

 

 

 

아폴리네르의 시를 읽으면 범접할 수 없는 뜨거운 충동성이 느껴진다. 첫 번째 시집 《알코올》은 구두점이 하나도 없다.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에 삽입된 두 번째 시에는 과격한 욕설이 있다. 《칼리그람(Callimgrame)은 언어를 배치하여 그림으로 만든 상형시집이다. 문자를 읽고 내면 깊숙이 느끼며 감상하는 보통의 시와 달리 《칼리그람》은 언어로 만들어진 그림을 보여준다.

 

 

 

 

 

 

올해는 아폴리네르 사후 100주기이다. 1918년 아폴리네르는 ‘빨강 머리 여인’ 자클린 콜브(Jacqueline Kolb)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스페인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폴리네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가 올해 세상을 떠났다. 황 교수가 경남대학교 조교수로 일하고 있던 시기에 파스칼 피아(Pascal Pia)《아뽈리네르》(열화당, 1981)를 번역했다. 황 교수가 생전에 남긴 저작물(학술 논문 제외)에 대해서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아뽈리네르》는 황 교수가 대중 앞에 처음으로 선보인 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뽈리네르》는 1983년에 나온 2판이다. 황 교수는 이 번역서에 부록으로 《동물시집》 일부를 수록했다. 《동물시집》은 동물을 주제로 한 짤막한 시 30편과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의 목판화 30점이 채워진 시집이다. 황 교수는 《동물시집》 12편과 목판화 12점을 《아뽈리네르》의 부록으로 선보였다. 《아뽈리네르》에는 아폴리네르의 삶 전체뿐만 아니라 다채롭고 폭넓은 그의 문학 세계를 보여주려는 황 교수의 열망이 느껴진다. 이 책 덕분에 나는 아폴리네르와 황현산이라는 두 명의 사내를 알게 됐다.

 

그런데 알라딘에 파스칼 피아의 책을 찾을 수 없다. 알라딘이 이 책을 등록하지 않아서 유감스럽다. 이 책이 알라딘에 정식으로 등록될 수 있게 내가 ‘사소한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아폴리네르와 황현산, 이 두 개의 실루엣이 멀어지기 전에 이 특별한 책 한 권을 ‘망각의 안개’ 속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세월은 가더라도 책은 남아야 한다.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안개 속으로 회색 실루엣 두 개 멀어진다

 

[주2]

 

 

 

 

 

[주1]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중에서, 황현산 옮김, 《알코올》, 열린책들, 2010, pp. 52.

 

[주2] 아폴리네르, 『가을』 중에서, 같은 책, pp.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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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8-08-21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억은 오래 가지 못하지만 사진은 남고 감상은 금새 가물해지는데 그래도 책은 남아 있더군요 ... 어떨땐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도 않지만 그래도 서가에 꽂힌 책을 보면 그냥 흐믓 ㅋㅋㅋ

cyrus 2018-08-21 16:55   좋아요 0 | URL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는 게 애서가다운 마음이죠. ^^

카알벨루치 2018-08-2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역쉬 시는 맛이 있어요!

cyrus 2018-08-21 16:56   좋아요 1 | URL
홍시도 맛있어요.. 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08-21 17:03   좋아요 1 | URL
푸하하하! 홍시가 맛있을라믄 여름이 완전히 죽어야겠네요 여름의 눈물샘이 마르면 홍시의 맛의 진가를 알 수 있겠슴돠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