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학창 시절에 한 번쯤은 번안시집을 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집의 여백에 감상문 몇 자 끼적거린 경험도 있을 것이다.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미라보 다리』는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알려진 외국 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주1]
아폴리네르는 절친한 피카소(Pablo Picasso)의 소개로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을 만난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은 결혼을 전제로 5년간 교제했으나 양가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헤어지고 만다. 사실 두 사람을 갈라서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아폴리네르는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돼 절도 혐의로 구속된다. 다행히 그는 구속 일주일 만에 풀려나지만, 이미 그의 이름에 크게 찍힌 ‘범죄자’라는 낙인은 쉽게 사라지지 못한다. 로랑생은 ‘사랑받지 못한 이방인’ 아폴리네르를 감싸 안지 못하고 이별을 선택한다. 『미라보 다리』에는 세월이 가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실루엣이 남아 있다.
* 아폴리네르 《알코올》 (열린책들, 2010)
* 아폴리네르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민음사, 2016)
* 아폴리네르 《동물시집》 (난다, 2016)
아폴리네르의 시를 읽으면 범접할 수 없는 뜨거운 충동성이 느껴진다. 첫 번째 시집 《알코올》은 구두점이 하나도 없다.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에 삽입된 두 번째 시에는 과격한 욕설이 있다. 《칼리그람(Callimgrame)》은 언어를 배치하여 그림으로 만든 상형시집이다. 문자를 읽고 내면 깊숙이 느끼며 감상하는 보통의 시와 달리 《칼리그람》은 언어로 만들어진 그림을 보여준다.
올해는 아폴리네르 사후 100주기이다. 1918년 아폴리네르는 ‘빨강 머리 여인’ 자클린 콜브(Jacqueline Kolb)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스페인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폴리네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가 올해 세상을 떠났다. 황 교수가 경남대학교 조교수로 일하고 있던 시기에 파스칼 피아(Pascal Pia)의 《아뽈리네르》(열화당, 1981)를 번역했다. 황 교수가 생전에 남긴 저작물(학술 논문 제외)에 대해서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아뽈리네르》는 황 교수가 대중 앞에 처음으로 선보인 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뽈리네르》는 1983년에 나온 2판이다. 황 교수는 이 번역서에 부록으로 《동물시집》 일부를 수록했다. 《동물시집》은 동물을 주제로 한 짤막한 시 30편과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의 목판화 30점이 채워진 시집이다. 황 교수는 《동물시집》 12편과 목판화 12점을 《아뽈리네르》의 부록으로 선보였다. 《아뽈리네르》에는 아폴리네르의 삶 전체뿐만 아니라 다채롭고 폭넓은 그의 문학 세계를 보여주려는 황 교수의 열망이 느껴진다. 이 책 덕분에 나는 아폴리네르와 황현산이라는 두 명의 사내를 알게 됐다.
그런데 알라딘에 파스칼 피아의 책을 찾을 수 없다. 알라딘이 이 책을 등록하지 않아서 유감스럽다. 이 책이 알라딘에 정식으로 등록될 수 있게 내가 ‘사소한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아폴리네르와 황현산, 이 두 개의 실루엣이 멀어지기 전에 이 특별한 책 한 권을 ‘망각의 안개’ 속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세월은 가더라도 책은 남아야 한다.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안개 속으로 회색 실루엣 두 개 멀어진다
[주2]
[주1]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중에서, 황현산 옮김, 《알코올》, 열린책들, 2010, pp. 52.
[주2] 아폴리네르, 『가을』 중에서, 같은 책, pp.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