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존 러스킨(John Ruskin)이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러스킨의 생일은 2월 8일이다. 러스킨은 산업혁명으로 최성기를 구가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미술비평가, 사회 사상가로 활동했다.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과 러스킨은 같은 해에 태어났다. 1837년에 여왕이 왕좌에 오르면서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되었고, 여왕의 시대가 서서히 열리고 있던 1843년에 러스킨은 『근대 화가론』을 펴내면서 미술비평가로 주목받았다. 빅토리아 시대는 여왕이 1901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막을 내린다. 러스킨은 1900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의 죽음은 대내외적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대영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 영국 빅토리아 시대와 라파엘 전파에 대한 책들

 

 

 

 

 

 

 

 

 

 

 

 

 

 

 

 

 

 

 

 

 

 

 

 

 

 

 

 

 

 

 

 

* 존 러스킨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좁쌀한알, 2018)

* 이주은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 (이봄, 2016)

* [품절] 리처드 D. 앨틱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아카넷, 2011)

* 티머시 힐턴 《라파엘 전파》 (시공사, 2006)

* 팀 베린저 《라파엘 전파》 (예경, 2002)

 

 

 

1840년대 후반, 영국 화단의 보수성에 반기를 든 신진 예술가 집단이 등장한다. 1786년에 창립된 왕립 미술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는 고전주의에 바탕을 둔 역사화의 전통을 중시하고, 상류층 중심의 예술가를 배출하는 보수적인 곳이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보수적인 화풍을 벗어나 라파엘로(Raffaello) 이전에 활동한 중세 화가들의 작품을 본보기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세 사람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라는 이름으로 작품들을 남겼다.

 

‘Pre-Raphaelite Brotherhood’를 직역하면 ‘라파엘 전(全) 형제동맹’이다. 우리나라에선 ‘라파엘 전파’로 단순하게 번역되어 알려지는 바람에 라파엘로의 화풍을 이어받는 예술가 단체로 오해하기 쉽다.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주의 화풍을 거부하고 중세 예술을 선호했다. 라파엘로를 거부하는 화가들의 목적은 르네상스 미술을 모방하는데 급급하던 당시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전통을 넘어서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라파엘 전파는 전통적이고 엄격한 기법과 양식을 버리고 자연을 직접 관찰해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다.

 

러스킨은 라파엘 전파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준 지지자다. 라파엘 전파가 혹평을 받으면 러스킨이 나서서 라파엘 전파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러스킨은 1857년에 발표한 평론집 《라파엘 전파》에 밀레이와 홀트를 ‘온갖 만류와 반대를 무릅쓰고 견뎌대는’[주] 전도유망한 청년 화가로 소개했다. 러스킨과 밀레이는 서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러스킨은 밀레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그의 화풍의 방향성까지 알려주는 정신적인 스승이 되어주었다.

 

 

 

 

 

 

 

 

 

 

 

 

 

 

 

 

* 이주헌 《그리다, 너를》 (아트북스, 2015)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밀레이가 러스킨의 아내 유페미아 그레이(Euphemia Gray, 애칭은 ‘에피’)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에피도 밀레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는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에피와 러스킨의 결혼은 사랑보다 집안 체면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 에피의 연애 행각을 비난할 수만 없는 결정적인 원인이 있는데, 그건 러스킨과 관련되어 있다. 러스킨은 6년 동안 에피와 부부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는 아내와의 섹스를 피했다. 러스킨은 벌거벗은 에피의 몸에 난 털을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그는 음모(陰毛)를 싫어했다. 러스킨은 털 한 올도 없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여성의 몸을 좋아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과 시부모의 지나친 간섭에 싫증이 난 에피는 러스킨과 이혼하기로 결심한다. 이 삼각 스캔들이 몰고 온 파장은 엄청났다. 자신의 친구이자 지지자인 아내를 뺏어간 밀레이와 대담하게도 자기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낸 에피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 이혼 소송을 접수한 교회 법정은 에피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에피와 러스킨은 부부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다. 그 후 에피는 밀레이와 결혼하여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다.

 

 

 

 

 

 

라파엘 전파번역본 끝부분에 러스킨의 생애를 정리한 연표가 있다. 당연히 이 연표에도 러스킨, 밀레이, 에피의 삼각 스캔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에피와 이혼한 지 4년이 되던 해에 러스킨은 아일랜드 출신의 로즈 라 투셰(Rose La Touche)와 사랑에 빠졌다. 이때 로즈는 아홉 (!), 러스킨은 39, 곧 마흔()을 앞둔 나이였다. 러스킨은 로즈가 18살이 되던 해인 1866년에 청혼하지만, 로즈는 3년을 더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1869년에 러스킨과 로즈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만났지만, 그때도 로즈는 러스킨에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의 결혼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이 차이가 많은 것도 있지만, 로즈의 부모 입장에선 이혼 경력이 있는 섹스리스(sexless)인 러스킨을 신랑감으로 볼 수가 없었다. 결국 1872년에 로즈는 러스킨의 청혼을 거절했다. 1875년에 로즈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러스킨은 큰 충격을 받았고, 말년에 강신술에 빠질 정도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

 

러스킨의 연표에 러스킨와 로즈 라 투셰의 관계를 언급한 내용이 있지만, 상세하지 않다. 그리고 그 내용에 오류가 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된 로즈 라 투셰에게 청혼하나 투셰는 3년을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3년 후인 1872년 로즈는 러스킨이 사회주의자이자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청혼을 거절했다.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153쪽)

 

 

1866년에서 3년을 지나면 1869년인데, 책의 연표에는 ‘3년 후인 1872년’이라고 적혀 있다. 연도를 계산하면 저렇게 나올 수가 없다. ‘6년 후인 1872년’으로 쓰는 게 맞다.

 

 

 

 

 

 

 

 

 

 

 

 

 

 

 

 

 

 

* [절판] M. H. 에이브럼즈 《노튼 영문학 개관 2》 (까치, 1990)

 

 

 

절판된 《노튼 영문학 개관》 2권에 러스킨을 소개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도 삼각 스캔들, 그리고 로즈와의 관계가 언급된다. 하긴 두 번이나 실패한 사랑은 러스킨의 명성뿐만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사건이므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번역본은 러스킨이 에피와 결혼한 것을 ‘재앙’이라고 했고, 부부 관계은 ‘예식’으로 순화하여 표현되었다.

 

 

 1848년 그가 에피 그레이와 결혼한 것은 하나의 재앙이었다. 6년간을 동거한 후에 단지 예식을 치르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하여 결혼무효 소송을 제기하였다. 남들은 그녀를 대단한 미인으로 여겼으나, 러스킨 자신은 자기 아내의 몸매가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증언하였다. 그녀의 미모를 예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라파엘 전파 화가 존 밀레이는 그녀의 남편의 초상화를 그릴 때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 무효가 성립된 직후 그녀와 결혼하였다.

 

(M.H. 에이브럼즈, 《노튼 영문학 개관 2》, 213쪽)

 

 

인용한 문장만 보면 러스킨의 이혼 스캔들을 편파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러스킨은 에피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여성에 향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녀가 러스킨을 만나 결혼한 것, 또 이혼 소송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 시대를 만난 것이 재앙이었다.

 

 

 

 

[주] 존 러스킨, 임현승 옮김,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젊은 화가들의 새로운 도전』,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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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2-12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러스킨이 그 존 러스킨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처음 그의 이름을 들은 게 중학생 때였어.
2학년쯤 됐을 것 같은데 베스트셀러가 시큰둥한 거야.
어려운 책을 읽고 싶었지.
단골 동네 서점에 존 러스킨의 책이 있냐고 했더니
없다는 거야. 내가 알기론 그 주인 아저씨도 나름
책 꽤나 아시는 분인데 말야.
난 속으로 그럼 그렇지 이런 동네에서 그런 책이 있을 리
없지 했는데 그때 참 겁이 없었어.
모르긴 해도 그때 러스킨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기 전이었던 것 같아.
그때 누가 러스킨은 존경한다고 했걸랑 그래서 알고 싶었던 건데.ㅎㅎ

cyrus 2019-02-12 17:07   좋아요 0 | URL
<깨와 백합>이라는 책이 1972년에 을유문화사에서 문고판으로 출간된 적이 있어요. 혹시 누님이 읽은 책이 이거 아닌가요? ㅎㅎㅎㅎ 그 책이 작년 12월에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라는 이름으로 나왔어요. ^^

stella.K 2019-02-12 17:41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그게 또 작년에 새로 나왔구나.ㅋㅋ

페크pek0501 2019-02-1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의 이혼은 꽤 큰 사건이겠고 무척 상처가 되는 사건이었을 텐데 잘 극복했나 보군요.
다른 사람과 재혼하여 여덟 명의 자녀를 두다니... 질질 끌게 아니라 때론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할 때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cyrus 2019-02-18 15:24   좋아요 0 | URL
러스킨이 에피의 이혼 요구를 무시하고 질질 끌었죠. 왜냐하면 이혼 스캔들이 나면 미술비평가, 사회사상가로서 자신의 명성에도 흠집이 생기니까요. 아마도 러스킨은 본인의 체면을 유지하고 싶었고, 가족과 같은 친구 밀레이에게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기 싫어서 에피의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한 책읽기 - 세상을 이해하는 깊고 꼼꼼한 읽기의 힘
로버트 P. 왁슬러 지음, 김민영 외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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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것은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은 읽어도 남는 게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설은 유용한 정보를 주는 책이 아니다. 소설 속에도 지식이 있지만, 전문 분야를 다룬 책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도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소설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소설은 누군가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 인생의 정답이 없다. 그래서 소설 한 권 읽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소설 읽기의 가장 큰 목적은 소설 속 상황에 부닥친 등장인물을 로 설정한 후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인물과 더불어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한다. 때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소설을 읽을 때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공감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소설 속 인물에게 깊이 감정이입을 할수록 재미있고, 그렇지 못할수록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지와 영상, 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소설 속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낯설어한다. 그래서 그런가? 이제 사람들은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아예 책을 멀리하고 인터넷이 있는 스마트폰을 더 좋아한다. ‘마음의 양식이 될 만한 책은 아무도 찾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쾌락을 찾는 데 점점 더 익숙해져 간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끈질기게 책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책의 매력을 느끼려면,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위험한 책읽기언어로 빚어진 이야기(linguistic narrative)를 이해하기 위해 깊이 읽기(deep reading)를 강조한다. 언어로 빚어진 이야기는 종이책 속에 있다. 위험한 책읽기에 언급되는 깊이 읽기종이책을 느리게 읽으면서 사색하는 방식이다. 위험한 책읽기의 저자가 깊이 읽기를 강조하는 것은 작가의 화려한 문체를 익혀 좋은 문장을 쓰라는 말이 아니다.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나 자신과 타자를 둘러싼 미지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책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나 자신이 누구이며 내가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과정이다.

 

깊이 읽기는 산책(散策)으로 비유될 수 있다. 산책은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의 언어를 읽는 일이다. 산책은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 흙냄새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언어에 집중하는 깊이 읽기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독자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여덟 가지 산()코스를 공개하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들려준다. 코스는 다양하다. 창세기 1~3, 프랑켄슈타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암흑의 핵심, 노인과 바다, 호밀밭의 파수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파이트 클럽,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등이 있다. 코스의 순서에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대로 가면(읽으면)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책 읽기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까. 왜냐하면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줄거리가 아닌 이야기로 표현된 유한한 인간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조우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 우리에게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은 무엇인지 상기시켜준다.

 

(27)

 

 

  우리는 상황을 용이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이터와 정보를 수집한다. 그러나 내러티브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간을 질문으로 몰아넣는데, 중요한 것은 질문 자체이다.

  이야기는 무엇이 인간 세계에서 지속되며 무엇이 이 세상의 인간을 만들어내는지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이 가진 불안정함,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과 평범함이다.

 

(291)

 

글꼴을 굵게 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작가와 독자 모두 인간이며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나약한 면모를 이야기를 통해 노골적으로 전하고, 독자도 자신 또한 초라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앞서 언급했듯이 소설에는 인생의 정답이 없다. 인간은 날마다 인생은 무엇이다라고 여러 번 정의를 내리면서 살아간다. 독자는 그러한 정의를 수차례 번복하면서까지 소설을 읽는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독서는 내가 누구인지, 나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아가는 지적인 여정이다.

 

저자는 깊이 읽기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 불능이다. 갈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데 인색해진다. 그들은 타인이 겪는 삶의 고통이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듣기 위해서는 우선 타인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데 독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책을 접할 때 비로소 독자는 자신과 타인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발견한다. 그렇게 받아들인 타인의 이야기는 독자의 자아를 성장시킨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비로소 책은 따분하고 위험한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이 될 것이며 평생 내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Trivia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말을 인용한 문장에 큰따옴표(”) 한 개가 없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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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2-11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는 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전보다 조금 더 그런 생각이 들어요.
cyrus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cyrus 2019-02-12 16:20   좋아요 1 | URL
소설도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많이 주죠. 그래서 소설은 절대로 저평가해선 안 되는 장르입니다. ^^

레삭매냐 2019-02-11 1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로 소설을 읽습니다만.

소설읽기를 통한 내재화의 쾌락
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습니다.

단언코.

cyrus 2019-02-12 16:22   좋아요 0 | URL
요즘 소설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솟아나고 있습니다. 독서모임을 통해서 만나는 분들이 소설을 즐겨 읽어서 제가 이분들 덕분에 편식 독서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뒷북소녀 2019-02-14 1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전 소설을 재미로 읽는데, 사람들도 만나고...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회사에 보고서 제출할 때도 훨씬 빠르고 쉽게 작성하는 것 같구요... 소설도 도움이 되는데... 왜 ㅠㅠ

cyrus 2019-02-14 17:20   좋아요 1 | URL
대부분 사람은 소설을 ‘시간 때울 때 읽는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소설이라는 장르를 가볍게 보는 거죠. ^^;;

카알벨루치 2019-02-14 1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은 위대합니다!!!

cyrus 2019-02-14 17:2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소설이 위대한 이유는 그 속에 다양한 사람들의 서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뒷북소녀 2019-02-1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문학의 깊이를 알면 좋을텐데요. 킬링타임용 소설만 있는게 아닌데, 안타까워요. 저도 예전에 대표님께 소설책 나부랭이 읽는다고 여러 말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갑자기 울컥하네요ㅠㅠ

cyrus 2019-02-18 15:28   좋아요 0 | URL
상대방이 어떤 장르의 책을 읽느냐에 따라 시선과 반응이 다르죠. 상대방이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으면 ‘재미있는 책을 읽는구나’ 정도로 생각하지만, 인문학 책 같이 생소하고 어렵고 분량이 많은 책을 ‘들고 있기만 해도’ 그 사람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

페크pek0501 2019-02-14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알기까지 여러 권을 읽어야 합니다. 수십 권 정도?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해 알게 된다고 느낍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을 읽었는데 그런 게 나와요. 큰 농장을 가진 주인이 나이가 들어 자신은
늙었고 언젠가는 죽게 될 텐데, 하면서 자기 대신 농장을 경영할 사람이 없나, 하고 고민합니다.
딸이 대신 농장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딸은 그곳 좁은 지역에서 사는 게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큰 도시로 가고 싶어도 아버지의 농장 때문에 갈 수도 없고... 결국 많이 가진 아버지와 딸은 불행한 사람인 거죠. 소설 주제는 다른 거예요. 그런데 주제보다 저는 주제와 관련 없는 이런 이야기 - 부자들은 근심이 많다, 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소설로 배웁니다. 소설을 읽어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면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지 생생하게 느끼게 되지요.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가 보지 않아도 소설을 통해 그 느낌을 공유하게 되어요. 이런 게 소설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합니다.

cyrus 2019-02-18 15:33   좋아요 0 | URL
소설을 많이 읽으면 다양한 삶을 살고,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비록 가상 인물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했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가 않아요. 종이 위에 살아 숨쉬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페크님의 말씀처럼 소설을 읽어야 인물을 이해할 수 있어요. ^^
 

 

 

이름만 들으면 친숙하게 느껴지는 작가가 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가 쓴 작품들이 뭔지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 읽은 건 하나도 없었다. 올해 1월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독서 모임 선정 도서는 《그 후》였다. 소세키의 중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소세키의 초기 문학 중 걸작으로 알려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봤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진 못했다. 언젠가 다시 시도해보려고 한다.

 

 

 

 

 

 

 

 

 

 

 

 

 

 

 

 

 

 

 

 

* 나쓰메 소세키, 노재명 옮김 《그 후》 (현암사, 2014)

* 나쓰메 소세키, 윤상인 옮김 《그 후》 (민음사, 2003)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고등유민(高等遊民)이다. 고등유민은 ‘인텔리 백수’를 뜻하는 단어다.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부유한 실업가이다. 그는 가족에게 용돈을 받아 비교적 풍족하게 살아간다. 다이스케가 살았던 일본 메이지(明治) 말기는 출세주의가 오늘날 못지않게 치열했던 시대였다. 에도(江戸) 시대의 봉건 가신들은 메이지 시대의 귀족이 되었고, 러일전쟁(1904~1905년)으로 큰 부를 쌓아 올린 신흥 부르주아들은 혼인을 통해 상류사회에 들어가고자 했다. 유산계급 밖으로 밀려나는 것은 곧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었다. 금전적 기반을 가족에게 의지하고 있던 다이스케 역시 그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대학 동창 히라오카의 아내 미치요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두 사람은 가족에게, 사회에게 버림받아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자연의 아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사이에서 다이스케는 번민했다. [중략] 그는 자신의 생활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후》, 윤상인 옮김, 256쪽)

 

 

※ 글꼴을 굵게 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자신에게 떠안겨진 무겁고 벅찬 현실 때문에 고뇌하는 다이스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문장이다. 작품 해설(민음사 판본)에 따르면 ‘자연’은 소설의 핵심 주제이면서도 다양한 의미가 있는 단어다. ‘자연의 아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인위적인 사회제도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다이스케가 미치요와 결혼해서 살아가려면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이스케는 예전처럼 한량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제는 미치요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직업을 구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하는 ‘의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 전에 다이스케, 즉 ‘자연의 아들’이었던 그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에 반대한다. 소설의 6장 후반에 노동의 의미를 두고 히라오카와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만일 일을 한다면 단지 생활만을 위한 일이어서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지. 모든 신성한 일이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빵과는 무관한 법이야.”

 

(《그 후》, 윤상인 옮김, 107쪽)

 

 

 

민음사 판본의 역자는 다이스케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사회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가 쓴 글의 제목이다. 라파르그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위다.

 

 

 

 

 

 

 

 

 

 

 

 

 

 

 

 

 

 

* 폴 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새물결, 2005)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가들이 ‘신성한 노동’이라는 일종의 교리를 만들어 동물실험을 하듯 민중에게 적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라는 이상한 꿈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라파르그는 방직기계 한 대가 1분 동안 작업한 양이 숙련 여공이 100시간동안 일한 정도로 보면서 노동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을 불태울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라파르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구조 아래서 ‘일할 권리’는 ‘착취당할 권리’일 뿐이다. 그는 하루 노동시간을 3시간으로 정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소비가 이뤄지고, 개개인에게는 더욱더 많은 휴식이 주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존 러스킨 《존 러스킨의 생명의 경제학》 (아인북스, 2018)

* 존 러스킨 《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좁쌀한알, 2018)

* 티머시 힐턴 《라파엘 전파》 (시공사, 2006)

* 팀 베린저 《라파엘 전파》 (예경, 2002)

 

 

 

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을 위한 노동’을 강조하는 다이스케의 입장이 존 러스킨(John Ruskin)에 근접하다고 생각한다. 러스킨은 영국 빅토리아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했지만, 인간적 가치를 금전 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를 혐오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산업자본이 노동자를 기계로 전락시키는 참상을 목격한 러스킨은 시각 · 건축예술로 관심을 옮겼다. 그가 예술 분야에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파편화된 사회를 인간 정신이 구현되는 곳으로 되돌리려는 열망이었다.

 

국내에선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책(현재 ‘생명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에서 러스킨은 노동은 단순히 상품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는 단순히 임금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창조의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러스킨이 생각한 ‘노동을 위한 노동’인 것이고, 이는 다이스케의 입장과 비슷하다. 다이스케가 들려주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전국시대에 일본을 통일한 무장)의 요리사 이야기에서 ‘노동을 위한 노동’에 대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최고의 요리사를 고용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맛보고는 맛이 없다면서 꾸짖는다.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요리사는 평소와 다르게 이류, 삼류 음식을 만든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 음식이 맛있다면서 칭찬한다. 다이스케는 요리 기술을 위해 일하는 요리사가 매우 불성실하고 타락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요리사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류 음식을 만든 거라고 본 것이다. 다이스케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거부하고, ‘일하기 위해 먹는 것’을 선호한다.

 

러스킨이 1851년에 발표한 《라파엘 전파》의 첫 번째 글은 『위대한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이다. 러스킨은 빅토리아 시대 런던 미술계를 점령했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소속 화가들을 옹호하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도 그는 자신의 노동관을 언급한다. 『위대한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라파엘전파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글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추구해야 할 예술과 노동을 역설한 러스킨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창의성과 성취욕을 갖춘 노동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노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중세에 활동했던 장인들이다. 따라서 러스킨은 노동자가 모두 이런 장인이 될 수 있을 때 이상적인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정신적 공황이 심해지는 산업자본주의를 비판했던 러스킨은 신앙심으로 충만한 중세의 영성과 근대인의 삶을 일체화시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라파엘전파가 추구했던 것은 중세의 미학이다. 러스킨과 라파엘전파 소속 화가들이 생각하는 중세는 때 묻지 않은 소박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이다.

 

 

 

 

 

 

 

 

 

 

 

 

 

 

 

 

 

 

 

 

*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 (현인, 2018)

* 나쓰메 소세키 《런던 소식》 (하늘연못, 2010)

* 도가와 신스케 《나쓰메 소세키 평전》 (AK커뮤니케이션, 2018)

 

 

 

《그 후》를 읽다 보면 다이스케가 ‘일본의 러스킨’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영국에서 2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한 나쓰메 소세키는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에 심취했고, 박물관이 된 칼라일의 집을 세 번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수필에 가까운『칼라일 박물관』은 소세키가 칼라일의 집을 방문하면서 느낀 소회를 기록한 글이다. 칼라일도 러스킨처럼 자본주의를 비판했는데, 영국 문화와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소세키가 칼라일과 동시대에 활동한 러스킨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소세키의 초기작인 『환영의 방패』『해로행』[주]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두 작품을 위한 삽화가 나온다면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그림으로 정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좀 더 분석해봐야겠지만 존 러스킨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요긴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주] 故 노재명 씨가 번역한 하늘연못 번역본에 적힌 '해로행'의 작품명은 ‘북망행’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노재명 씨는 '북망행'으로 제목을 바꾼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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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1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1 17:08   좋아요 1 | URL
미래에 자본의 힘이 도시 밖을 넘어 시골에도 미친다면 자급자족하는 공동체 사회도 이상향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반유행열반인 2019-02-1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양이...만 읽어봤는데 집에 있는 다른 소세키 작품들(그 후, 마음)도 차차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cyrus 2019-02-12 16:25   좋아요 1 | URL
나쓰메의 장편소설을 다 읽어본 독자들의 평을 보니 장편소설 모두 일독할 가치가 있다고 하네요. ^^

blueyonder 2019-02-12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소개해 주신 여러 권을 저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cyrus 2019-02-12 16:29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blueyonder님 덕분에 과학 정보를 많이 알아갑니다. ^^
 
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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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게 된다면? 뜻하지 않는 재난과 질병으로 장애인 또는 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우리는 불안에 휩싸인다. 활기 넘치는 젊음과 건강함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 몸은 사회로부터 ‘소외당할’ 가능성에 늘 노출돼 있다.

 

장애와 죽음의 공포에 떠는 우리 몸은 계속해서 ‘좋은 몸’이 되라는 정언 명령을 듣게 된다. ‘좋은 몸’이란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이성애자’의 몸이다. 경제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 통치는 국민의 몸을 생산의 주체, 혹은 생산에 참여하지 못한 타자로 나눈다. 병든 몸, 늙은 몸, 장애를 가진 몸, 출산하지 못하는 몸, 그리고 퀴어(queer)[주1]한 몸은 생산 ․ 재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비(非)국민’으로 분류된다. 인간은 누구든 자기 위치에서 ‘좋은 몸’에 대한 강박을 짊어지고 산다. ‘정상성’의 굴레 속에서 인간은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이성애자’로 살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 채근하고, 통제한다. 또 ‘좋은 몸’에 부합되지 않은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면서 자신의 정상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개인들의 강박을 사투로 만드는 것은 ‘정상적인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을 구분하게 만드는 권력과 그로부터 비롯된 지식이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다양한 몸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는 지식이 무엇이며, 사회 안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쓴 김승섭 교수는 인간의 몸을 위계화 하는 지식에 향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지식은 타인을 차별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생산되어 왔다는 것이다. 모든 지식에는 누군가의 관점이 반영하기 마련이고, 어떤 지식은 권위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의학 지식은 성인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해서 발견된 것이다. 이렇다 보니 남성 의학자와 의사들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증상이나 의약품의 부작용 등을 진지하게 분석하지 않았다. 진화가 잘 된 백인과 진화가 덜 된 유색인종을 분류하는 인종주의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 인종주의 과학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에 주요한 관심사가 된다. 일본은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함을 과시하는 동시에 조선을 통치해야 할 과학적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

 

과거의 구습으로 남게 된 지식과 그로 인해 생긴 폐해를 지금에서야 따지면 뭐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차별과 불평등을 부추기는 지식은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으며 타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지식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지 않는 것 자체가 위험한 수준이다. 무관심으로 가장한 차별은 혐오를 강화하는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를 낳을 뿐이다. 알게 모르게 일상생활 속의 크고 작은 지식은 타인에 향한 차별,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게 만든다. 그러한 지식 일부는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거나 특정 세력의 필요에 따라 날조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의료 기술과 의료 복지 수준은 선진국에 뒤지지 않지만, 정작 성소수자들은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성소수자의 건강 실태를 전면적으로 파악하는 연구 분위기조차 조성되어 있지 않다. 성소수자들에게 필요한 지식이 빈곤할수록, 또 덜 알려질수록 성소수자의 몸은 소외되고, 아무도 그들의 몸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지식이 있어야 할 곳에 편견과 가짜 뉴스가 채워진다. 이로 인해 성소수자는 건강하지 않은 존재로 이야기되며, 건강하지 않은 존재는 사회와 질서를 위협하고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비국민’이 된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 부조리한 사회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일을 계속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말을 빌리자면, 김승섭 교수의 글쓰기는 ‘성찰하는 일에 친숙해지는’[주2]이다. 정상적인 몸, 건강한 몸, 우월한 인종, 순수한 민족이라는 것은 과장되었고 어떤 의미에서 허구적이다. 우리는 조작된 환상의 몸이 아닌 ‘진짜 몸들’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 ‘나쁜 몸’, ‘이상한 몸’을 규정하는 지식을 어떻게 간파하고 벗어날 것인지 계속 질문해야 한다. ‘당연한 것들’에 질문하는 일은 각자가 서로 다른 진짜 몸과 삶의 실체를 알아가는 일이다.

 

 

 

 

 

※ Trivia

 

* 29쪽

 

1890년 미국의 여성 소설가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 발표한 단편소설 「노란 벽지(The Yellow Wallpaper)」의 줄거리입니다.

 

→ 「노란 벽지」가 발표된 해는 1892년이다.

위키피디아 ‘Charlotte Perkins Gilman’ 항목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Charlotte_Perkins_Gilman#Short_stories

 

 

 

* 258쪽

 

20세기 초 미국 남부 앨라배마 메이컨 카운티의 면방직 공장의 사장이었던 브루커 T. 워싱턴(Brooker T. Washington)은 여러 자선사업가들의 자금을 모아 흑인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학교, 공장, 기업 등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합니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의 오자다.

 

 

 

 

 

[주1] 지정 성별, 성별 정체성, 성별 표현, 성적 지향의 측면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 인구 집단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시우, 《퀴어 아포칼립스》, 현실문화, 2018, 277쪽 참조.

 

[주2] 오드리 로드, 주해연 ․ 박미선 공역, 《시스터 아웃사이더》, 『시는 사치가 아니다』, 후마니타스, 2018,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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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2 16:41   좋아요 0 | URL
일상의 절반은 책 읽는 시간이라서 책 안 읽으면 마음이 허전해요. 독서와 글쓰기가 저의 헛헛한 시간을 채워줍니다. ^^
 

 

 

 

저는 1월 30일 화요일에 공개한 <아마노자쿠와 천탐녀>라는 글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천탐녀와 아마노자쿠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썼다”, “소세키가 ‘천탐녀=아마노자쿠’라고 쓰는 바람에 우리나라 번역가들은 아마노자쿠를 ‘여신’으로 오해한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오늘 일문학을 전공하신 분<아마노자쿠와 천탐녀>에 대한 의견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아마노자쿠의 유래를 설명한 사전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서 아마노자쿠가 천탐녀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천탐녀는 원래 미래나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샤먼(shaman)과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탐녀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 그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요괴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요괴가 바로 천사귀(天邪鬼), 즉 아마노자쿠입니다.

 

저는 <아마노자쿠와 천탐녀>에서 천탐녀가 여신이고, 아마노자쿠가 요괴이기 때문에 둘 다 비슷해도 다른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쓰메 소세키가 소설 『몽십야』에서 천탐녀를 아마노자쿠로 쓴 표현이 문제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문학 전공자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노자쿠와 천탐녀는 같은 존재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쓰메 소세키의 표현은 문제가 없는 것이고, 번역본에 천탐녀를 아마노자쿠로 옮긴 표현은 오역이 아닙니다.

 

 

 

 

 

 

 

 

 

 

 

 

 

 

 

 

 

 

 

 

*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 (현인, 2018)

 

 

 

저는 일문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일본어도 잘 모르는 독자입니다. 그런데도 어설픈 논리로 작가와 번역가를 지적하는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제가 댓글로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현인)을 ‘이름만 전집인 선집’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이 말 또한 잘못된 내용이기에 이를 바로 잡습니다.

 

알라딘에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을 검색하면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문구가 나옵니다. 제가 그 내용의 일부를 인용해보겠습니다.

 

 

 

  약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총 10편의 중단편 소설을 썼다. 그 수가 많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중편소설과 단편소설을 하나로 묶은 책이 없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물론 지금까지 그의 중단편소설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단편 소설 및 수필 등을 모아 하나로 엮은 책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 책의 번역에는 심각한 오류가 산재해 있어서 나쓰메 소세키의 올바른 번역서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독자에게 나쓰메 소세키 아닌 나쓰메 소세키를 소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에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소설과 중편소설 전부를 하나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중단편소설 전부를 우리 독자들에게도 올바로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지금까지 나쓰메 소세키의 중단편소설을 전부 읽었다 할지라도 그건 진짜 나쓰메 소세키가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남긴 업적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번역된 나쓰메 소세키의 중단편 전집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에 수록된 작품은 총 10편입니다. 다른 단편소설 전집(하늘연못 출판사에 나온 중단편소설 전집)에 포함된 『런던 소식』, 『칼라일 박물관』 등의 소품은 ‘수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에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을 읽으려는 독자가 있으시다면 제일 먼저 알라딘에 있는 ‘출판사 제공 책 소개’를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출판사 제공 책 소개’가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을 번역한 분이 직접 쓴 ‘해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에는 해설이 없습니다. 저는 ‘출판사 제공 책 소개’를 보지 못한 채 《나쓰메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을 읽은 바람에 이 책을 ‘선집’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특정 번역본과 번역가를 성급하게 비판한 점 그리고 <아마노자쿠와 천탐녀>를 읽은 분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책 한 권 꼼꼼하게 읽을 것이며 글을 쓸 때 더욱더 신중히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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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2-0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리뷰에 이어지는 내용인가요. 해당 리뷰를 다시 한번 읽고 왔습니다.
이 페이퍼에 부가되는 설명을 읽으면서 저도 조금 더 배우고 갑니다.
cyrus님, 오늘부터 설연휴가 시작인 것 같습니다.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cyrus 2019-02-10 14:32   좋아요 1 | URL
오자 덕분에 저도 모르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야마노자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책과 책을 쓰는 사람은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잘못된 건 고쳐야 합니다. ^^

2019-02-01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0 14:33   좋아요 0 | URL
명절 잘 지내셨습니까? 휴일이 후딱 지나간 것 같습니다... ^^;;

카알벨루치 2019-02-01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연휴 잘 보내시고 늘 즐거운 글쓰기의 시루스박사님 기대합니다 🎶

cyrus 2019-02-10 14:35   좋아요 1 | URL
일주일동안 글을 안 쓰니까 마음이 편하네요. 글 안 쓰고 책만 읽는 것도 즐겁네요. ^^

짜라투스트라 2019-02-01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배우네요.ㅎㅎㅎ cyrus님 설연휴 잘 보내세요.^^

cyrus 2019-02-10 14:38   좋아요 0 | URL
제가 쓴 글의 내용 대부분은 ‘알아도 쓸모없는 잡식’이라서 배울만한 게 많지 않을 겁니다.. ^^;;

2019-02-01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0 14: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syo 2019-02-01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 박사님, 작작 읽는 명절 되시라구요 좀 ㅋㅋㅋㅋㅋㅋ 명절은 읽는 게 아니라 먹는 거예요 먹는 거....

cyrus 2019-02-10 14:40   좋아요 0 | URL
이번 설날에는 실컷 먹었는데요... ㅎㅎㅎㅎ 음식도 먹고, 책도 먹고.. ㅎㅎㅎ
통풍이 재발하지 않아서 다행일 정도로 많이 먹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