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fka on the Shore (Paperback)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필립 가브리엘 옮김 / Vintage Books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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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아닐까 싶다. 15세 소년이 도쿄의 집으로부터 가출해서 겪는 '환상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러 층위의 얘기들이 섞여 있으며 상징들을 잘 사용했고 사건의 전개가 빨라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요즘 영화 '오딧세이' 때문에 모험 여행기가 핫한데, 이 책도 일종의 모험 여행기-성장기로 읽을 수 있겠다. 읽으면서 번역가가 참 번역을 잘 했다고 생각했다. 문장도 잘 읽히고 대화와 등장 인물들이 살아 있다. 


하루키를 이전에도 읽었으므로(<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다른 소설의 장치-주제들이 자꾸 생각난다. 그림자 얘기라든지, 원래 하나였던 몸의 절반을 찾아 헤맨다는 얘기는 뭔가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이 소설에서 하루키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밀고 나가지는 않는다. 


'카프카'는 일본어로 '可·不可'로 쓸 수도 있다고 한다. '가능-불가능'의 뜻을 가지므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이름이라고, 하루키는 이후 작가의 말에서 얘기한다. 소설에는 여러 황당한 얘기들이 섞여 있지만 별로 이상하게 읽히지 않는다. (이제 하루키에게 익숙해진 것인가.) 엄청난 철학이 들어 있는 대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읽는 재미의 기준으로 별 다섯을 준다. 


몇 구절을 밑에 옮겨 놓는다. 


  So Nakata lived a contented life in the small apartment his brother provided, receiving his monthly subsidy, using his special bus pass, going to the local park to chat with the cats. This little corner of Nakano became his new world. Just like dogs and cats, he marked off his territory, a boundary line beyond which, except in unusual circumstances, he never ventured. As long as he stayed there he felt safe and content. No dissatisfactions, no anger at anything. No feelings of loneliness, anxieties about the future, or worries that his life was difficult or inconvenient. Day after day, for more than ten years, this was his life, leisurely enjoying whatever came along. (p. 199)

"A revelation leaps over the borders of the everyday. A life without revelation is no life at all. What you need to do is move from reason that observes to reason that acts. That’s what’s critical." (p.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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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 등에서 오식이 눈에 띈다. 다음에 기록해 놓는다. 


- 117페이지: 위에서 8번째 줄, ln(g_2 + N_2) -> ln(g_2 – N_2)


- 144페이지: 위에서 6번째 줄, E – E_F -> E_c – E_F


- 145페이지: 밑에서 3번째 줄, exp[-(E – E_F)/(k_B T)] -> exp[-(E_c – E_F)/(k_B T)]


- 146페이지: 위에서 2번째 줄, exp[-(E – E_F)/(k_B T)] -> exp[-(E_c – E_F)/(k_B T)]


- 147페이지: 위에서 1번째 줄, exp[-(E_F – E_c)/(k_B T)] -> exp[-(E_F – E_v)/(k_B T)]


- 147페이지: '같거나 작다' 부호 -> '곱하기' 부호


- 152페이지: 그림 밑, n형 반도체 -> p형 반도체


- 203페이지: 사진 밑, 'Metal Oxode Semiconductor ...' -> 'Metal Oxide Semiconductor...'


- 213 페이지: 그림 위 밑에서 5번째 줄, 게이트 변압 -> 게이트 전압


- 219 페이지: 두 번째 사진 옆 설명, 직접회로 -> 집적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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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쉬운 과학 수업 : 반도체 혁명 - 반도체 소재의 발견부터 트랜지스터 발명까지 노벨상 수상자들의 오리지널 논문으로 배우는 과학 10
정완상 지음 / 성림원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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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물질의 발견, 양자역학을 통한 반도체 물성의 이해, 다이오드/트랜지스터 등 반도체 소자의 발명 등, 반도체 혁명의 기반이 되는 역사와 물리 이론에 대해 수식을 곁들여 살펴본다. 수식을 이해하려면 고등학교 미적분학 정도의 수학 지식이 필요하다. 챕터나 섹션은 ‘정교수’와 ‘물리양’의 대화로 친근하게 시작한다. 이후는 그냥 ‘~이다’, ‘~했다’ 식의 설명이 따른다. 처음에는 어디서 대화가 끝나는지 몰라 말투가 이상하다 싶었다. 익숙해지면 괜찮다. 


저자가 설명하는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연관된 물리 이론의 수학적 설명이 나름 유익해서 잘 모르던 내용을 알게 된다. 교과서는 아니지만 교과서를 보완하는 역할을 확실히 할 듯싶다. 물리에 관심 있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아니면 이공계 졸업생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반도체의 기반이 되는 물리 현상 및 이론에 대해 설명하기 때문에 현재의 기술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기대하면 안 된다. 


우리가 오늘날 반도체를 쓰는 데 기여한 워낙 여러 명의 과학자들이 나온다. 중요한 인물(특히 노벨상 수상자)에 대해서는 출생과 학문 이력 등이 나오는데, 나오는 순서대로 다음에 정리해 본다. 


샤를 기욤(1861~1938, 1920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스위스의 물리학자로 1883년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철 63.5%,니켈 36.5%를 섞어 열팽창계수가 아주 작은 인바(invar)로 불린 합금 등에 관하여 연구.


피에르-질 드 젠(1932~2007, 199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1957년 에콜 노르말 슈페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액정에 관하여 연구. 


위의 학자들은 다양한 물질—금속, 세라믹, 액정—에 관한 설명에 나온다. 


피에르 뒬롱(1785~1838): 프랑스의 화학자, 물리학자로 에콜 폴리테크니크 의학부 중퇴. 이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물리학 교수가 됨. 프티와 함께 고체의 비열에 대해 연구.


알렉시 프티(1791~1820):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에콜 폴리테크니크 졸업. 뒬롱의 전임 물리학 교수로 23세에 최연소 교수가 됨. 뒬롱과 함께 고체의 비열에 관한 연구를 했으나 결핵으로 사망.


뒬롱-프티의 법칙은 고체의 몰비열이 아주 높은 온도에서는 고체의 종류와 상관없이 일정한 값이 된다는 사실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워낙 다른 책에도 많이 나오니 약력이 언급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뒬롱-프티 법칙 설명이 수식을 곁들여 상세히 제시된다. 


피터 디바이(1884~1966, 1936년 노벨 화학상 수상): 네덜란드 출생으로 독일과 미국에서 활동한 물리학자. 1908년 뮌헨 대학에서 조머펠트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음. 아인슈타인의 비열에 관한 연구를 이어 받아 온도가 작을 때에도 성립하도록 공식을 수정. 이를 ‘디바이 법칙’이라고 부름. 그는 독일에서 반유대주의자로 활동했으며 1940년 초 미국으로 이민하여 코넬 대학 화학과장이 됨. 홀로코스트 관련 보고서에 기회주의자로 언급됨. 


옌스 베르셀리우스(1779~1848): 스웨덴의 의학자, 화학자. 웁살라대학에서 의학 전공. 이산화규소(‘실리카’)에서 순수한 규소(실리콘)를 최초로 분리. 


클레멘스 빙클러(1838~1904): 독일의 화학자. 프라이베르크 광업기술대학에서 분석화학 공부. ‘아가로다이트’라는 광물로부터 저마늄을 최초로 분리.


펠릭스 블로흐(1905~1983, 195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스위스의 물리학자로 ETH에서 드바이, 바일, 슈뢰딩거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고 1928년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첫 번째 대학원생으로 박사학위를 받음. 주기성을 갖는 격자 속 전자의 운동을 양자역학적으로 해석.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쫓겨난 후 미국으로 가서 스탠퍼드 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됨. 


랠프 크로니크(1904~1995): 독일의 물리학자. 1925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파울리의 비판으로 전자의 스핀에 관한 아이디어를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은 사건이 있음. 동일한 아이디어를 울렌벡과 고우트스미트가 논문으로 발표(1925년). 


윌리엄 페니(1909~1991): 영국의 물리학자로 1935년에 케임브리지 대학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크로니크와 함께 고체 내 에너지 밴드를 설명하는 크로니크-페니 모델을 만듦. 


앨런 윌슨(1906~1995): 영국의 수리물리학자이자 기업가. 파울러에게 양자역학을 배웠으며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금속과 반도체의 전기 전도에 양자역학을 적용하는 방법을 연구. 


위의 블로흐, 크로니크, 페니, 윌슨은 고체물리와 양자역학을 연결한 4명의 과학자로 언급된다. 


사이엔드라 보즈(1894~1974): 인도의 물리학자로 프레지던시 칼리지, 무케르지 경이 설립한 과학 대학에서 공부. 새로운 방법으로 플랑크의 양자 복사 법칙을 도출하는 논문을 작성하여 양자통계역학 분야를 창안하는 데 큰 역할을 함. 출판이 거부된 논문을 아인슈타인에게 보냈으며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간을 도와줌. 이 논문의 내용이 책에서 상세히 수학적으로 논의된다. 이 방법은 이후 ‘보즈 아인슈타인 통계’로 알려짐. 하나의 양자 상태에 여러 개가 들어갈 수 있는 입자들이 이 통계를 만족하며, 이러한 입자들을 ‘보손boson’이라고 부른다. 책에서는 덧붙여, 하나의 양자 상태에 단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입자들이 만족하는 ‘페르미 디랙 통계’도 논의된다. 


이후 고체의 ‘양자 상태 밀도’에 관한 논의가 수학적으로 상세히 이어진다. 그 다음에는 반도체 이전에 사용되던 진공관 기술에 대한 설명이 있다. 


프레데릭 거스리(1833~1886): 영국의 화학자, 물리학자. 1855년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베크렐이 1853년에 발견한 가열된 전극에서 전자가 방출되는 ‘열전자 방출’ 현상을 1873년에 다시 발견하여 널리 알림. 당시에는 전자가 발견되기 전이었으므로 ‘열이온’으로 불렸으나 톰슨이 전자를 발견한 후 ‘열전자’라는 이름으로 바뀜. 


진공관에서 열전자 방출 현상을 이용하여 만든 다이오드를 ‘열전자 다이오드’ 또는 ‘진공관 다이오드’라고 부른다. 에디슨이 이 현상에 대해 연구했으며, 리처드슨이 이 연구를 이어 받았다.


오언 리처드슨(1879~1959, 192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영국의 물리학자로 1904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리처드슨의 법칙’으로 알려진, 가열된 전선에서 발생하는 전류의 온도 의존성을 알아냄. 


존 플레밍(1849~1945):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왕립과학대학(현재 임페리얼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 여러 회사의 과학 고문 역할을 함. 열전자 다이오드를 개량하여 ‘플레밍 밸브’를 만들어 무선전신의 수신 감도를 향상시킴. 


굴리엘모 마르코니(1874~1937, 190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정식 고등교육을 받지 않고 개인 교수에게 화학, 수학, 물리학을 배움. 무선전신의 선구자. 


카를 브라운(1850~1918, 190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독일의 물리학자로 1872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브라운관의 발명으로 유명. 1874년 점접촉 금속-반도체 접합이 교류를 정류하는 다이오드로 작동함을 발견. 이것이 반도체를 이용한 최초의 다이오드. 


러셀 올(1898~1987): 미국의 물리학자. 1939년 벨 연구소에서 p-n 접합 발명. 


머빈 켈리(1894~1971). 미국의 물리학자로 1918년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벨 연구소에서 실용적 진공관을 개발했으나 생산비용 및 신뢰성의 문제로 진공관의 대안을 모색함. 고체 연구 그룹을 결성하여 반도체 트랜지스터 개발을 지휘. 쇼클리를 채용하여 반도체 증폭기 개발 책임자를 삼음. 


존 바딘(1908~1991, 1956년, 197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미국의 물리학자. 1936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유진 위그너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음. 1947년 12월 17일, 벨 연구소에서 브래튼과 함께 점접촉 트랜지스터(point contact transistor)를 발명. 


윌리엄 쇼클리(1910~1989, 195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미국의 물리학자로 1936년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1948년 1월 23일, 벨 연구소에서 쌍극형 접합 트랜지스터(bipolar junction transistor)를 발명. 


월터 브래튼(1902~1987, 195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미국의 물리학자로 1929년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벨 연구소에서 바딘과 함께 점접촉 트랜지스터를 발명.


바딘, 쇼클리, 브래튼은 ‘트랜지스터 삼총사’로 불리며 1956년에 노벨상을 공동수상했다. 


율리우스 릴리엔펠트(1882~1963): 오스트리아-미국의 물리학자로 1905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1921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1926년 장효과 트랜지스터(field effect transistor, FET)의 이론을 제시. 


모하메드 아탈라(1924~2009): 이집트-미국의 공학자로 1949년 퍼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벨 연구소에서 소규모 트랜지스터 연구팀을 이끌며 MOSFET(metal oxide semiconductor field effect transistor)을 발명.


강대원(1931~1992): 한국-미국의 공학자. 1955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조기 졸업한 후 도미하여, 1959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전기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음. 벨 연구소에서 아탈라와 함께 MOSFET을 발명.


MOSFET은 현대 반도체 산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잭 킬비(1923~2005, 2000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미국의 공학자로 1950년 위스콘신 대학에서 전기공학 석사학위 취득.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에서 1958년 하이브리드 집적회로(IC) 발명. 


로버트 노이스(1927~1990),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기업가. 1953년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1956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에 들어갔다가 1년 후 사표를 던진 후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창립. 1959년 모놀리식 집적회로를 발명. 최초의 단일체 집적회로로 대량생산이 가능. 노이스는 1968년 고든 무어와 함께 인텔을 설립. 인텔에서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발명을 지휘했다. 


이제 끝. 위에서 보듯 반도체 혁명에 기여한 과학자는 너무 많다. 한 두 명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누구는 노벨상을 수상하고, 누구는 기업을 세워 상용화에 앞장섰다. 누구는 단지 역사에 한 줄을 남겼다. 위에서 자세한 기술적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책의 구성과 템포는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뒤에 있는 논문 원문은 훑어만 보고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 숙제로 남겨 놓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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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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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가 그린 이순신 장군의 내면이다. 사면초가의 외로움이 뼈에 사무친다. 최근에 다시 읽었는데, 예전에 감상을 남겨두지 않아서 이제라도 몇 자 적어둔다. 다시 읽으니 감동이 예전만큼은 아닌 것 같다. 그가 남몰래 울었다는 내용이 난중일기에도 나오며 소설 자체는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래도 역사 속의 이순신 장군이 이만큼 현대적 내면을 지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처음 읽었을 때는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지만, 우리 사회나 나도 이제는 이 소설을 지나 성장한 것일까. 처음 읽었을 때를 생각해서 별점을 매겼다. 


책의 몇 구절을 다음에 옮겨 놓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1년에 나온 초판본인데 알라딘 검색에 나오지 않는다. 다음의 페이지 수는 초판본 기준이다. 


서해의 물길은 낯설고 어려웠다. 여기서 사납고 좁은 물길 하나를 잘 골라서, 거기서 적을 맞을 수 있다면 또 한 번 존망을 역류할 만도 했지만, 아직도 그나마 온전한 백성들의 넓은 들 뒤쪽 어귀에서 나는 적을 맞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적들은 서해를 따라 임금에게 갈 것이었고, 영산강을 따라 백성에게 갈 것이었다. 여기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나의 사지였지만, 편안히 죽을 수 있는 사지는 아니었다. 고하도에서도 나는 나의 사지를 찾지 못했다. 아마도 나의 사지는 경상 해안 쪽으로 좀더 앞으로 나아간 어떤 자리라야 마땅할 것이었다. (151 페이지)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죽음 또한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나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들이 힘겹게 겨우겨우 흘러갔다. 저녁이면 먼 섬들 사이로 저무는 햇살에 갯고랑 물비늘이 반짝였고, 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멸하는 날들은 기진맥진했다. (181 페이지)

나는 환도 아래서 몸을 뒤채었다. 나는 강화 협상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골로 뒤덮인 강토에 쑥부쟁이가 우거졌고, 도성은 잿더미가 되었다. 적이 나의 강토와 연안을 내습했으므로, 적이 전쟁을 끝내기를 원한다면 군대를 거두어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온 국토를 갈아엎고 돌아가는 적을 온전히 살려서 돌려보낼 것인지, 종자를 박멸해서 시체로 바다를 덮을 것인지는 적이 아니라 나와 내 함대가 결정할 일이었다. 적은 귀로의 바다 위에서 죽음을 통과해야만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고, 그 바다에서 적의 죽음과 나의 죽음은 또 한 번 뒤엉킬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그토록 단순하고 자명한 일이 단순하지도 자명하지도 않았다. (260~261 페이지)

적의 인후 앞에서 나는 온 천지의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전쟁이 끝나는, 이 세상의 손댈 수 없는 무내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숨죽여 울었다. 관아 객사로 올라간 등자석 패거리들은 거기서 또 술을 마시는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달이 높이 떠올라 숙사 방 안을 비추었다. 나는 새벽까지 잠들지 않았다. 나는 달빛 속에서 뒤채었다. 등판을 적시는 식은땀에서 누린내가 났다. 내가 맡는 내 몸의 냄새는 고단했다. 말하여질 수 없는 적의가 산더미처럼, 파도처럼 내 마음에 밀려왔다. 임진년에 이물의 앞쪽에서 눈보라로 나부끼며 달려들던 적을 맞을 때보다 더 크고 깊은 무서운 적의로 나는 잠들지 않았다. 적은 가까이 있었다. (27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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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8-12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칼의 노래>는 생각의나무 출판사 판본인데, 김훈 작가의 얼굴이 나온 표지였어요. blue님이 언급하신 2001년 초판본이 절판된 구판인 것 같습니다. ^^

blueyonder 2026-08-13 09:48   좋아요 0 | URL
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이 말씀하신 표지의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겁니다. 이제는 절판되어 찾아보기 힘든 것 같네요.

잉크냄새 2026-08-12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1년 재판 3쇄네요. 절판되었군요.

blueyonder 2026-08-13 09:49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2001년 초판본 2쇄네요. 초판본 나온지 벌써 25년이 되었네요.

yamoo 2026-08-13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소설 중 저는 <언니의 폐경>과 <칼의 노래>가 가장 좋더라구요..^^
이걸 다시 읽으시다니! 저는 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어요..ㅎㅎ

blueyonder 2026-08-13 13:52   좋아요 0 | URL
<언니의 폐경>이 좋으셨다니 관심이 가네요. 기회되면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

yamoo 2026-08-13 18:26   좋아요 2 | URL
김훈의 모든 작품 중에서 <언니의 폐경>이 원탑이라고...김훈 추종자들이 하두 그러길래 저도 읽어봤는데, 명불허전이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6-08-28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책은 내용도 좋지만 문체가 엄청 간결해서 힘이 느껴집니다. 문장이 짧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알면서도 이런 글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blueyonder 2026-08-28 19:01   좋아요 0 | URL
네 김훈의 간결하면서 힘 있는 문체는 정말 따라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그의 글이 인기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신진서 9단이 카타고와의 2점 접바둑에서 승리한 후, 이세돌 9단과 함께 하는 대담.


중국 바둑계를 얘기하며, 다양성-개성에 대한 언급이 있어 동영상을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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