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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개의 말·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평점 :

사라져가는 체코문학이 다시 타오르길 바라며! 부디 사라지지 말지어다!
2023년 7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94세의 나이로 밀란 쿤데라가 별세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지만 끝끝내 수상하지 못했다. 『89개의 말ㆍ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는 그의 2주기에 맞춰 출간된 유고집으로, 두 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앞서 밀란 쿤데라는 에세이 『커튼』을 통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먼 나라"의 작가로 살아가는 어려움과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이 책 역시 그런 고민들이 담겨 있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만큼 "번역 문제로 몸살을 앓는 작가"(16쪽)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1968년 러시아 침공이 있기 전까지는 프라하에서 그의 작품들이 출판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체코슬로바키아(1993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이 해체되고 체코 공화국이 탄생했다)에서 출간될 수 없었다. 게다가 체코가 점점 더 러시아 지배권역의 변방으로 전락함에 따라 체코어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외국의 많은 출판사에서는 프랑스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번역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원칙적으로는 거절했지만, "그들 나라에 체코어 번역자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17쪽) 이것이 그의 고민이었고, 이런 이유로 잡지에 발표하는 글과 평론은 프랑스어로 직접 쓰기 시작했다.
『농담』은 1968년과 1969년에 서구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슬플 수가. 프랑스에서는 번역가가 나의 문체를 완전히 바꿔 소설을 거의 다시 쓰다시피 했다. 영국에서는 편집자가 내적 성찰이 이어지는 모든 단락을 짧게 자르고, 음악학적인 장들을 없애 버리고, 부部들의 순서를 바꾸어 소설을 재구성했다. 또 다른 어느 나라. 번역자를 만나 보니, 그는 체코어를 단 한 마디도 모른다. "번역을 어떻게 하셨나요?" 나의 물음에 그가 "마음으로요."라고 대답하며, 지갑에서 내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그의 태도가 너무도 호의적이어서 나는 마음의 텔레파시로 번역하는 게 진짜 가능한 줄로 믿을 뻔했다. (…) 아르헨티나 번역자가 그랬듯이, 그도 프랑스어판 '다시 쓰기' 판본을 번역한 것이었다. _13쪽
하지만 밀란 쿤데라는 이내 깨닫는다. 사유를 하는 것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소설까지 프랑스어로 쓰지는 못할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어 판본을 온전히 그의 텍스트로 여길 수도 없었다. 「89개의 말」은 밀란 쿤데라의 고민을 알고 있었던 피에르 노라(1980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지식층을 상대로 한 격월간지 《데바》 창간)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참고로 이 개인 사전의 일부는 에세이 『소설의 기술』 한 부部(6부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에도 실려 있다.
"그 모든 번역본을 검토할 때,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 깊이 숙고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렇다면 자네의 개인 사전을 써보면 어떻겠나? 자네가 중요시하는 말들, 자네를 골치 아프게 하는 말들, 자네가 애착하는 말들을 모은……?"(18쪽)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에는 "서구 운명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중심인 프라하가 자신이 한 번도 속한 적이 없는 동유럽의 안개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97쪽)는 것을 보며 느낀 작가의 고뇌가 담겨 있다. 그는 "체코의 언어, 외국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체코어가 아주 오래전부터 프라하와 다른 유럽 사이에 불투명한 유리창처럼 가로놓여 있다"(98쪽)고 말한다.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토로한 적이 있는 고민이라 작가의 안타까움이 더더욱 와닿는다.
소국들의 유럽은 다른 유럽이며, 다른 시선을 가지며, 그 사상은 종종 대국들의 유럽과 완전한 대위를 이루기도 한다. _99쪽
1914년 세계 대전 직후, 유럽 문학이 미래에 대한 찬란한 비전과 혁명의 종말론에 매혹되는 경향을 보일 때, 이들 프라하 출신 작가들은 진보의 숨겨진 얼굴, 위협적이고 병적인 그 검은 얼굴을 누구보다도 먼저 꿰뚫어 보았다. (…) 언제나 사건의 주체라기보다 대상이었던 소국들과 소수파들인 이 다른 유럽이 가진 환상 없는 시건이 그것이다. 여러 민족들에 둘러싸여 고뇌에 찬 고독을 경험한 유대인 소수파의 시선(카프카), 그 정치와 전쟁이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오스트리아 제국에 병합된 체코 소수파의 시선(하셰크), 자신들에겐 의견조차 묻지 않고 다음 재앙을 향해 달려가는 유럽 강대국들 한가운데서 소수파로 남은 신생 체코 국가의 시선(차페크) 등. _104~105쪽
1968년의 러시아의 침공은 60년대 세대 전체를 쓸어내 버렸고, 더불어 그 이전의 현대 문화 전체를 쓸어내버렸다. 우리의 책들은 프란츠 카프카나 체코 초현실주의자들의 책들과 같은 지하실에 갇혀 있다. 죽은 자가 된 산 자들과 두 번 죽은 자가 된 죽은 자들이 나란히 갇혀있다.
이제는 사람들이 알까. 프라하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단지 인권과 민주주의와 정의 등등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거기에서, 하나의 위대한 문화 전체가 불타고 있다는 것을,
시가 사라져 가는,
불길에 휩싸인 종잇장처럼. _130~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