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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 과학의 ‘아버지’들을 추방하고 직접 찾아나선
레이철 E. 그로스 지음, 제효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3월
평점 :
평점
4.5점 ★★★★☆ A
“아이고, 저게 뭐야? 망측해라.”
“윽, 쟤한테 비린내가 나.”
“왜 자꾸 싸돌아다니는 거야. 제발 좀 가만히 있어.”
V는 오늘도 입을 꾹 닫는다. 큰맘 먹고 말해보려고 하지만,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다. 너무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V의 이름은 ‘질(膣)’, 영어 이름은 버자이너(Vagina)다. 그런데 V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지 않는다. XY들도 V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그들은 V를 마주 보는 것도,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부끄러워한다. 웃긴 건 XY들끼리 모여 있으면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이 V를 속되게 부른다.
V를 대하는 XY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V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XY이지만, 사실 그들은 V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XY가 좋아하는 V는 무조건 깨끗한 상태여야 한다. 반면 지저분한 V를 만나면 더럽다고 말하면서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V에게 이상한 냄새가 나면, V가 문란하게 살아왔다고 수군거린다.
XY는 V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 똑똑한 XY는 본인 스스로 불가사의한 V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의학자들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V의 자궁이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진화론자들의 아버지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은 XY의 지능이 V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심리학자들의 아버지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V를 ‘페니스가 없는 작은 존재’로 인식했다. 프로이트는 몸집도, 정신도 작은 V가 건강해지려면 커다란 페니스가 달린 XY를 만나라고 권장했다. XY를 물려받은 아버지의, XY를 물려받은 아버지의, XY를 물려받은 아버지들은 V를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XY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V를 ‘아이 낳는 존재’로만 봤다. 하지만 XY는 V의 몸속에 태아가 어떻게 생기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입을 다문 V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맴돈다. 나는 누굴까? 왜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거지? 나도 이름이 있는데,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 와중에 XY는 V를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한다. V는 XY의 무지와 편견이 만든 세상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이때 V는 결심한다. 어떻게든 입을 열자, 난 혼자가 아니야, 나랑 똑같은 신세인 V를 만나보자. V는 조용하고, 항상 가만히 있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V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질 속에 엄청난 양의 미생물이 떼 지어서 모여 살고 있다. 이 미생물들은 외부에서 오는 물질이나 세균을 방어한다. 따라서 질은 몸의 첫 번째 방어선이다. 만약 방어선이 무너져서 미생물 생태계가 흐트러지면 세균성 질염을 일으키는 미생물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그래서 세균성 질염이 생기면 질에서 ‘비린내’가 난다. 하지만 세균성 질염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질을 자주 씻는다거나 항생제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오히려 질 건강이 더 나빠진다. 대부분 사람은 정자가 난자의 두꺼운 표면을 뚫는 힘이 강해서 난자를 향해 돌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자의 힘은 생각보다 약하다. 난자의 도움 없이는 수정할 수 없다.
버자이너는 혼자가 아니다. 제각기 다른 생김새의 V와 V를 만나면 ‘W’가 되고, 비로소 다양한 여성(Woman)의 몸을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건강한 여성의 몸’, ‘날씬한 여성의 몸’, ‘임신할 수 있는 생물학적 여성의 몸’은 여성의 몸을 획일적으로 보게 만든다. 이러면 장애인 여성의 몸, 자궁이 없는 여성의 몸, 난임 여성의 몸은 ‘비정상적이고, 가치 없는 몸’이 된다.
버자이너와 늑대는 공통점이 있다.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에 시달렸다. ‘외로운 늑대’라는 부정적 의미의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늑대가 동료들과 연대하면서 생활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버자이너는 번식과 출산을 위한 신체 기관으로 여겼다. 버자이너와 늑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적개심은 잔인한 대학살로 이어졌다. 질 모양이 이상한 여성은 마녀로 몰렸으며, 늑대는 공격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사냥꾼들의 손에 희생당했다. 버자이너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이름은 ‘버자이너 울프(Vagina Wolf)’다. 버자이너 울프는 더 많이 말해야 한다. 민망하다는 이유만으로 입을 다물어선 안 된다. 질의 침묵이 너무 길어지면 질을 둘러싼 무지는 엄청나게 두꺼워진다. 두꺼운 무지를 뚫고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찾으려면 계속 말로 두드리면서 생각하고, 탐구해야 한다.
<cyrus의 주석>
* 32쪽
프랑스 수상[주1]을 열한 번이나 지낸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을 비롯하여 유럽 전역의 고위급 남성들과 열정적인 연애를 이어갔다.
[원문]
Then She embarked on a series of passionate affairs with high-ranking men across the Continent, including Aristide Briand, the eleven-times prime minister of France.
[주1] 프랑스는 이원집정부제 국가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President of the French Republic)과 국회가 선출한 총리(prime minister of the French Republic)가 프랑스 정부를 이끈다. 대통령이 국가 원수에 해당한다. 현재 프랑스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이며, 총리는 가브리엘 아탈(Gabriel Attal)이다. 따라서 ‘수상’이 아니라 ‘총리’로 번역해야 한다.
* 378쪽 옮긴이 주
1800년대 말[주2]에 활동한 미국의 화가. 모더니즘 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며 자신만의 꽃 사물화를 완성했다.
[주2]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에 대한 주석이다. 오키프는 1887년에 태어나 1986년에 세상을 떠났다. ‘1800년대’는 1800~1809년까지의 기간이며 넓게 보면 19세기(1800~1899년)에 해당한다. 1800년대 말에 활동한 오키프는 너무 어리고 화가가 되기 전이다. ‘20세기에 활동한’이라고 고쳐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