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

 

EP. 25







2024년 3월 9일 토요일

수르채그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은 때론 나에게 새로운 책방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된다. 작년에 인스타그램 알고리즘 나침반이 서울 연희동에 있는 희곡 전문 가게 <인스크립트>를 알려줬다면, 이번에는 <수르채그>라는 책방을 가리켰다.


책방 이름이 특이하다. 발음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책방 간판을 보면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다. ’, ‘를 합치면 이 된다. 그렇다. <수르채그>술과 책을 파는 책방이다. 읽고, 쓰고, 말하고, 마시는 곳이라고 소개된 <수르채그>대구 서구에 새로 생긴 책방이다.


<수르채그>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대구에 책을 보면서 술을 마실 수 있고, 늦게 문 닫는 심야 책방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간절히 원했던 책방이 뜻밖에도 서구에서 생겼다! 서구에서 20년을 넘게 살아온 일이 뿌듯하게 느낀 건 처음이다.


8시가 지났을 무렵에 책방으로 향했다. 책방이 있는 길에 들어서는 순간 술에 취한 남자 두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술을 더 마시기 위해 다른 술집을 찾으러 이동하는 것일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심야 책방에 취객들이 안 찾아왔으면 좋겠는데‥… 벌써 괜한 걱정을 해본다.









<수르채그>의 생일은 36일이다. 커피, 무알코올 칵테일,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를 판다. 위스키를 섞은 하이볼도 판다. 작년 추석 연휴에 방문한 <책 바>와 비슷하게 <수르채그>에도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는 (bar)’가 있다.

 

책방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서가를 살펴봤다. 도 좋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책이다. 내 취향이 잔뜩 묻은 책들이 생각보다 많았다서가는 가게 안에서만 볼 수 있는 비 판매용 도서구매할 수 있는 책들로 채워져 있다.

     













국내외 희곡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보랏빛 표지가 인상적인 지만지 드라마출판사의 책, 오스트리아의 작가 토머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의 책들워크룸프레스 출판사의 사무엘 베케트 선집,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책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내 지갑을 열게 만드는 책들이다.

 







내가 책방에 들어오기 전에 주인장은 베른하르트의 희곡 연극쟁이(연극과인간, 2021)을 읽고 있었다. 어? 이 책 처음 보는데‥…. 주인장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책들로 큐레이션을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들을 소개하려는 주인장의 패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요즘 롤랑 바르트의 글에 푹 빠져 있어서 소소한 사건들(포토넷, 2014)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민음사, 2015)를 골랐다. 그리고 이번 달 초에 사서 한정판(휴머니스트, 2021)를 완독한 기념(?)으로 묵자해설서인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시대의창, 2015)를 선택했다. 주인장이 말하길, 내가 <수르채그>에서 책을 처음 산 손님이란다.











<수르채그>의 서가를 충분히 살펴보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마셨다. 가볍게 하이볼로 시작해서 책방지기가 추천한 위스키를 맛보았고, 달짝지근한 무알코올 칵테일까지 마셨다. 사실 이곳에 오면 술 마시면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일 생각은 잠시 제쳐두고 술을 마셨다.


책방 안에 혼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쓸 수 있는 방이 무려 세 개나 있다. 주책잡기(酒冊雜記: 술 마시고, 책 읽고, 잡문을 쓰는 일)의 밤을 보내기 딱 좋은 곳이다. <수르채그>는 정오에 열어서 자정까지 연다. 평일에 내가 늦게 퇴근해도 방문할 수 있고, 가볍게 술 한 잔 마실 수도 있다. 조만간 독서 모임을 <수르채그>에서 진행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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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3-22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곳 좋네요.
집 근처 있어서 더 좋으실 듯해요^^

cyrus 2024-03-24 20:12   좋아요 1 | URL
집에서 밥 먹고 도보로 책방에 가니까 10분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이곳에 자주 가려고요. 걷는 것도 운동이잖아요.. ㅎㅎㅎ

은하수 2024-03-24 21:20   좋아요 0 | URL
바야흐로... 걷기의 계절이 돌아왔죠^^ 밤산책..생각만해도 낭만적이네요! 술 한잔 홀짝이며 책 보러 밤산책이라니 ... 넘흐 좋아요~~

새파랑 2024-03-22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구에 좋은 독립서점들이 많은거 같아요. 부럽습니다~!! 술과 책이라니 환앙의 조합이네요~!!

cyrus 2024-03-24 20:13   좋아요 1 | URL
매년 대구에 책방이 한 곳 생기는 것 같아요. 다 가보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

stella.K 2024-03-2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냥 생각없이 발음하면 수그르책으로 나오는데 이름 한번 절묘하네. 늦게까지 하는 책방이 있다니 우리동네에도 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나는 막상 가게될 것 같지는 않다. 밤늦게 돌아다니는 거 안 좋아해서. 밤엔 일찍 씻고 자는 게 장땡이야. ㅋㅋ
그래도 그런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될 것 같다. 희곡 전문 책방이 있다는 것도 첨 알았다. 아고, 책이 그리도 좋냐? ㅋ

cyrus 2024-03-24 20:16   좋아요 0 | URL
제가 혼자 놀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책방이에요. 편안하게 책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장소가 하나둘씩 늘어나서 좋아요. ^^

자성지 2024-03-2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에 가면 꼭 들를고 싶은 수르채그입니다. 가볍게 술 한 잔 마시며 이웃들과 독서 모임을 하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cyrus 2024-03-24 20:17   좋아요 0 | URL
대구에 오신다면 서대구역에 내려서 수르책방으로 가는 길이 빨라요. ^^

blanca 2024-03-2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대구라니 아쉽네요. 저는 무알콜 칵테일로 하겠습니다. ^^

cyrus 2024-03-24 20:18   좋아요 0 | URL
무알콜 칵테일 마셨봤는데 달콤한 맛이 일품입니다. ^^

햇살과함께 2024-03-22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 여행을 부르는 책방입니다!

cyrus 2024-03-24 20:21   좋아요 1 | URL
공간이 쾌적해서 혼자 머물기 좋아요. 책방 안에 손님이 저 혼자 있으면 진짜 조용해요. ^^;;
 
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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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예술 책 읽기 모임 두루미’ 세 번째 선정 도서





태양은 지구를 향해 빛을 흩뿌리면서 다닌다. 낮에 열정적으로 일한 태양은 제대로 쉬고 싶다. 태양은 숙면을 위해 어두운 이불을 푹 덮는다. 태양이 잠들기 시작하면 자고 있던 달이 잠에서 깨어난다. 달은 잠잘 때 덮고 있던 푸른 이불을 갠다. 태양은 자고 있어도 계속 빛을 뿜어낸다. 태양 빛은 매우 강렬해서 어두운 이불을 뚫고 나올 정도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태양 빛은 못생긴 달을 위한 조명이 되어준다. 태양 빛을 받지 못한 달은 지구에서 보이지 않는다. 달의 반쪽 부분에 태양 빛을 받으면 반달이 된다. 태양 빛이 달을 감싸 안으면 보름달이 된다. 밤이 되면 태양 빛으로 화장한 달의 얼굴이 나타난다. 중력에 몸을 맡긴 달은 지구 주변을 돈다. 하지만 달은 자신의 뒷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불자가 덕망이 높은 승려를 만나러 직접 찾아왔다. 불자는 승려에게 가르침을 청했으나 승려는 자신도 글을 모른다면서 거절했다. 헛걸음한 불자가 실망감을 드러내자, 승려는 불자에게 달을 보라면서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면서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불자를 나무랐다. 어리석은 불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눈이 쏠려 제대로 봐야 할 달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달을 잘 보는 승려도 달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승려는 달의 앞모습만 쳐다봤기 때문이다. 승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달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달의 얼굴이다.


항상 태양 빛을 받아서 생기가 넘치는 앞모습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사실 뒷모습도 살아있다. 뒷모습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그렇지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은 앞모습에 있다. 눈 하나만 뒤에 달려 있으면 좋으련만. 뒷모습이 아쉬워한다. 하지만 세상은 뒷모습의 소원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얼굴에 있어야 할 눈이 뒤통수에 있으면 세상은 앞모습을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한쪽 눈만 있는 얼굴은 매력이 없다. 비난이 두려운 앞모습은 한쪽 눈을 절대로 뺏기고 싶지 않다뒷모습은 할 말이 많은데, 말을 할 수 없다. 하필이면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입이 얼굴에 있다. 뒷모습은 냄새를 맡고 싶다. 그런데 한 번 열면 쉬지 않는 입 바로 위에 냄새 맡는 코가 달려 있다. , , 입이 앞쪽에 몰려 있다.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는 세간의 빛을 잘 받지 못해 시들시들해진 뒷모습을 향해 카메라를 비춘 사진작가다. 그는 뒷모습이 살아있다는 진실을 확인했다.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에 어깨가 축 처져 있던 뒷모습이 부바의 카메라가 반가워서 어깨를 들썩인다. 뒷모습을 찍은 부바의 카메라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바로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뒷모습이 부바의 밝은 방(Camera Lucida)’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도 살아 있다면서 온갖 동작으로 표현한다.


부바의 카메라 루시다에 찍힌 뒷모습은 찬란하지 않다. 나무 쟁기를 짊어진 인도의 어느 농부와 앙상한 소 두 마리의 뒷모습, 양손에 물뿌리개를 들고 정원을 걷는 정원사의 뒷모습, 허리를 구부리면서 산책하는 할머니의 뒷모습,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길바닥에 깔린 파리의 거리.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파리의 거리가 찍힌 사진을 보면서 글을 썼는데, 이 글에 등 뒤에서 본 파리라는 제목을 달았다. 사진 한가운데에 멀리 떨어져 있는 에펠탑(Tour Eiffel)이 희미하게 보인다. 밤이 되면 아름다워지는 철의 여인(La Dame de Fer)’ 에펠탑에 현혹된 사람들은 낮이 되면 나타나는 더러운 진실을 보지 못한다. 쓰레기통에 담지 못한 더러운 진실이 여기저기에 방치된 거리는 도시의 지저분한 뒷모습이다.


뒷모습은 세련되지 않으며 하찮다. 그렇지만 카메라에 찍히면 사진을 보는 감상자의 눈과 마음을 찌르는 위력을 가진다. 에두아르 부바의 카메라가 주목한 뒷모습에 생기가 돋는 푼크툼(punctum)’이 있다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자신의 책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에서 푼크툼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푼크툼은 원래 찌름또는 작은 구멍을 뜻하는 단어다. 바르트는 푼크툼이 있는 사진이 자신을 찌르고,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고 했다바늘로 피부를 찌르면 아프듯이 사진 속 푼크툼은 감상자의 눈과 마음을 콕 찔러 아프게 만든다.


화려하지 않은 뒷모습은 억지로 꾸미지 않는다. 따라서 뒷모습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부바는 화려하지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앞모습에 전혀 관심이 없다. 앞모습을 찍은 사진에 푼크툼이 없어서 시시하다. 반면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가슴이 뛴다. 뒷모습이 살아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사진은 감상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감상자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바라볼 때 푼크툼을 만난다.


사진 속 뒷모습은 조용하다. 뒷모습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꾹 참는다. 앞모습은 제 할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 사람들 앞에서 멋진 모습을 과시할 수 있거든. 이렇듯 앞모습을 찍은 사진에 익숙한 사람은 과묵한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낯설어서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말이 없는 뒷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사진에서 푼크툼을 찾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모험이다. 사막 한가운데에 푼크툼이라는 바늘을 찾는 일이랄까바르트는 사진의 매력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로 모험을 골랐다. 푼크툼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고, 특별한 의미가 없다. 사진 속 뒷모습을 보면서 해석하지 않는 순간부터 감상자는 자신만의 푼크툼을 찾아 나선다. 이때부터 화려하지 않은 모험이 시작된다푼크툼이 있는 사진은 감상자를 찔러댈 뿐만 아니라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살아있는 감상자는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말한다. 그늘이 진 삶의 일부라든가 사람들 앞에 보여주면 부끄러운 치부를 숨기지 않는다. 자신이 진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줄 안다사진의 푼크툼을 찾는 모험은 어렵지 않다. 마음이 솔직하지 못하거나 외면을 멋지게 꾸미는 일을 좋아하는 성격이 모험을 어렵게 만든다.


카메라 루시다와 함께 만든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집 뒷모습자신의 진솔한 마음과 모습을 만나게 해주는 거울이다. 뒷모습만 보여주는 거울에 아름다움을 찾지 마시라. 그 대신에 우리가 찾아야 할 푼크툼이 있다. 푼크툼은 우리에게 진실하게 살아 보라면서 힘껏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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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Me)



No. 3








<실패를 목적으로 한 정상적 질서>

장소: 국제 갤러리 서울

전시 기간: 202421~ 202433

202431일 오전 1120분에 첫 만남





완벽(完璧)의 원래 의미는 흠 없는 구슬(玉)이다. 완벽은 고대 중국에 존재했다는 화씨의 구슬이라는 진귀한 보물에서 유래된 단어다. 완벽의 반대말은 하자(瑕疵)’. 하자는 구슬의 얼룩진 흔적을 뜻한다

















* 플라톤, 김유석 옮김 티마이오스(아카넷, 2019)


* 마이클 벤슨, 지웅배 옮김 코스미그래픽: 인류가 창조한 우주의 역사(롤러코스터, 2024)

 



완벽한 상태는 아름답고, 완전해야 하며 조화로운 질서에 가깝다. 일단 무조건 좋은 것이어야 한다. 플라톤(Plato)에게 완벽함이란 천상에 있는 이데아(idea)’. 그는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이데아를 모방한 불완전한 것들이라고 인식했다플라톤의 저서 티마이오스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거인이 나온다. 이 거인은 우주를 창조한다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우주 역시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라고 봤다그에 따르면 물질의 네 가지 원소인 물, , , 공기는 무질서한 상태다. 데미우르고스는 네 가지 원소에 각각 정다면체 형태를 부여하면서 우주를 만든다. 플라톤은 우주가 정십이면체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플라톤 입체라고 알려진 우주론은 예술가와 천문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자신이 쓴 책 우주의 신비에서 플라톤 입체를 이용해서 행성의 공전 궤도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정다면체 형태로 된 우주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세계로 이해했다.


도예가는 완벽한 도자기가 나올 때까지 계속 굽고, 마음에 안 들면 망치로 깨뜨린다. 일반인이 보면 멀쩡해 보이는 도자기를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도예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인정하자. 누구나 완벽한 것을 선호한다.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생각하는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한 번쯤은 노력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별 하나를 완전한 형태로 그리려고 애쓴 적이 있다. 내 눈에는 별이 비뚤비뚤해 보여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다. 원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다. 보기 좋게 동그란 원이 나오지 않으면 여러 번 그리곤 했다. 여러 번 시도해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 마음 한구석에 실현 불가능한 벽을 세우려고 애쓴다. 그 벽의 이름은 완벽이다.


마음속에 세우고 있는 완벽을 무너뜨리려면 결국 실패를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여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굴복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패의 가치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속담을 언급하고 싶지 않다. 실패를 경험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실패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완벽해지기 위해 애쓰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김홍석

시지프스의 돌

2024년




김홍석의 개인전 <실패를 목적으로 한 정상적 질서>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완전하고 완벽한 삶(또는 예술)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완벽과 조화로움과 거리가 먼 김홍석의 작품들은 성공과 실패로 명확히 나누려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한다









김홍석

믿음의 오류(운석)

2024년


믿음의 오류(운석)국제갤러리 K3 에 따로 설치된 작품이다. K3 관에 흘러나온 음악주춤거리는 행진이었다.








김홍석

A Star

2011년





관람객이 김홍석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홍석은 관람객이 단번에 이해하기 쉬운 완벽한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이런 작가가 관람객의 마음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난해한 작품을 선보였다고 해서 단순히 개인전을 실패로 규정할 수 없다따라서 김홍석의 작품들은 성공과 실패라는 경계가 무의미한 뒤엉킴(entanglement)’을 보여준다전시 제목은 정상적 질서에 가까운 완벽함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절대로 완벽할 수 없기에 실패하더라도 무언가를 계속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완벽해지지 말자. 되는대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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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03-1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 ‘완벽‘과 ‘하자‘ 가 그런 뜻이었다는 게 정말 너무 신기해서 놀라는 중이에요.

cyrus 2024-03-20 06:27   좋아요 0 | URL
‘완벽’과 관련된 사자성어 ‘화씨지벽’에 관한 일화는 《한비자》에 있고요, ‘하자’와 관련된 일화는 《회남자》라는 책에 있어요. ^^

페크pek0501 2024-03-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되는대로 막 살고 싶어용...

cyrus 2024-03-20 06:29   좋아요 0 | URL
사실 되는대로 살기를 안 좋게 표현하면 막 사는 거죠.. 때론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때가 있어요.. ^^;;
 
버자이너 - 과학의 ‘아버지’들을 추방하고 직접 찾아나선
레이철 E. 그로스 지음, 제효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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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가는 책방들을 운영하는 분들 대부분은 여성이다. 그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고, 책방에 이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책방에 이 책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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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3-19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임신한 와이프를 둔 남자나, 애기아빠들이 읽어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cyrus 2024-03-20 06:29   좋아요 1 | URL
결혼할 마음이 없는 남자도 읽었으면 좋겠어요. ^^
 
버자이너 - 과학의 ‘아버지’들을 추방하고 직접 찾아나선
레이철 E. 그로스 지음, 제효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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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점  ★★★★☆  A






아이고, 저게 뭐야? 망측해라.”


, 쟤한테 비린내가 나.”


왜 자꾸 싸돌아다니는 거야. 제발 좀 가만히 있어.”



V는 오늘도 입을 꾹 닫는다. 큰맘 먹고 말해보려고 하지만,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다너무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V의 이름은 ()’, 영어 이름은 버자이너(Vagina). 그런데 V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지 않는다. XY들도 V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이름을 알면서도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그들은 V를 마주 보는 것도,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부끄러워한다. 웃긴 건 XY들끼리 모여 있으면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이 V를 속되게 부른다.


V를 대하는 XY의 태도는 이중적이다V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XY이지만, 사실 그들은 V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XY가 좋아하는 V는 무조건 깨끗한 상태여야 한다반면 지저분한 V를 만나면 더럽다고 말하면서 욕지거리를 퍼붓는다V에게 이상한 냄새가 나면, V가 문란하게 살아왔다고 수군거린다


XYV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 똑똑한 XY는 본인 스스로 불가사의한 V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라고 생각한다의학자들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V의 자궁이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진화론자들의 아버지 다윈(Charles Robert Darwin)XY의 지능이 V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심리학자들의 아버지 프로이트(Sigmund Freud)V페니스가 없는 작은 존재로 인식했다프로이트는 몸집도, 정신도 작은 V가 건강해지려면 커다란 페니스가 달린 XY를 만나라고 권장했다XY를 물려받은 아버지의, XY를 물려받은 아버지의, XY를 물려받은 아버지들은 V를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XY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V를 아이 낳는 존재’로만 봤다하지만 XY는 V의 몸속에 태아가 어떻게 생기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입을 다문 V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맴돈다. 나는 누굴까? 왜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거지? 나도 이름이 있는데,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 와중에 XYV를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한다. V는 XY의 무지와 편견이 만든 세상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이때 V는 결심한다. 어떻게든 입을 열자, 난 혼자가 아니야, 나랑 똑같은 신세인 V를 만나보자V는 조용하고, 항상 가만히 있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V는 끊임없이 움직인다질 속에 엄청난 양의 미생물이 떼 지어서 모여 살고 있다. 이 미생물들은 외부에서 오는 물질이나 세균을 방어한다. 따라서 질은 몸의 첫 번째 방어선이다. 만약 방어선이 무너져서 미생물 생태계가 흐트러지면 세균성 질염을 일으키는 미생물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그래서 세균성 질염이 생기면 질에서 비린내가 난다. 하지만 세균성 질염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질을 자주 씻는다거나 항생제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오히려 질 건강이 더 나빠진다대부분 사람은 정자가 난자의 두꺼운 표면을 뚫는 힘이 강해서 난자를 향해 돌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자의 힘은 생각보다 약하다. 난자의 도움 없이는 수정할 수 없다


버자이너는 혼자가 아니다. 제각기 다른 생김새의 VV를 만나면 ‘W’가 되고, 비로소 다양한 여성(Woman)의 몸을 제대로 말할 수 있다건강한 여성의 몸’, ‘날씬한 여성의 몸’, ‘임신할 수 있는 생물학적 여성의 몸은 여성의 몸을 획일적으로 보게 만든다. 이러면 장애인 여성의 몸, 자궁이 없는 여성의 몸, 난임 여성의 몸은 비정상적이고, 가치 없는 몸이 된다.


버자이너와 늑대는 공통점이 있다.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에 시달렸다. ‘외로운 늑대라는 부정적 의미의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늑대가 동료들과 연대하면서 생활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버자이너는 번식과 출산을 위한 신체 기관으로 여겼다버자이너와 늑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적개심은 잔인한 대학살로 이어졌다. 질 모양이 이상한 여성은 마녀로 몰렸으며, 늑대는 공격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사냥꾼들의 손에 희생당했다버자이너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이름은 버자이너 울프(Vagina Wolf)’버자이너 울프는 더 많이 말해야 한다. 민망하다는 이유만으로 입을 다물어선 안 된다. 질의 침묵이 너무 길어지면 질을 둘러싼 무지는 엄청나게 두꺼워진다두꺼운 무지를 뚫고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찾으려면 계속 말로 두드리면서 생각하고, 탐구해야 한다.






<cyrus의 주석>



* 32





 프랑스 수상[주1]을 열한 번이나 지낸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을 비롯하여 유럽 전역의 고위급 남성들과 열정적인 연애를 이어갔다.


[원문]


 Then She embarked on a series of passionate affairs with high-ranking men across the Continent, including Aristide Briand, the eleven-times prime minister of France.

 


[1] 프랑스는 이원집정부제 국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President of the French Republic)과 국회가 선출한 총리(prime minister of the French Republic)가 프랑스 정부를 이끈다. 대통령이 국가 원수에 해당한다. 현재 프랑스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이며, 총리는 가브리엘 아탈(Gabriel Attal)이다. 따라서 수상이 아니라 총리로 번역해야 한다.





* 378쪽 옮긴이 주





 1800년대 말[주2]에 활동한 미국의 화가. 모더니즘 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며 자신만의 꽃 사물화를 완성했다.

 


[2]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에 대한 주석이다. 오키프는 1887년에 태어나 1986년에 세상을 떠났다. ‘1800년대1800~1809년까지의 기간이며 넓게 보면 19세기(1800~1899년)에 해당한다. 1800년대 말에 활동한 오키프는 너무 어리고 화가가 되기 전이다. ‘20세기에 활동한이라고 고쳐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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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14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늑대를 연구해 봐야겠군. 이책 표지가 맘에 안 들어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책값이라도 싸면 좋겠는데 넘 비싸. ㅠ

cyrus 2024-03-18 02:57   좋아요 1 | URL
늑대의 생태계를 소개한 책 한 권 가지고 있긴 한데, 절판됐어요. 생각보다 늑대를 조명한 책들이 많지 않아요. 안 사더라도 읽어보면 좋아요. 참고로 저 이 책 북펀딩에 참여했어요. 책 안에 북펀딩에 참여한 분들의 이름이 적힌 카드가 있는데, 거기에 제 이름 있어요. ^^

추풍오장원 2024-03-16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총리와 수상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틀린 번역이라기보다는 수상이 요새 잘 쓰이지 않는 직위명인것 같네요... 이원집정부제나 의원내각제같은 통치구조하고는 별 상관 없는 것 같군요.

cyrus 2024-03-18 03:03   좋아요 1 | URL
‘프랑스 총리’라는 표현이 많이 보여서 아무래도 ‘수상’보다는 ‘총리’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총리’가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라고 해서 꼭 그 단어만 써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요. 사실 처음에 주석을 달기 전에 수상과 총리는 크게 차이가 없는 직함이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

추풍오장원 2024-03-18 11:46   좋아요 1 | URL
이젠 ‘수상‘이라는 직위명은 거의 쓰지 않는것 같네요 ㅎㅎ
너무 권위적인 표현이라고 여겨서 그런건지 우리나라 총리랑 일치시키려고 그런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