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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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 기회 없이 맏이로 태어나 여러 일을 행하며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심장 깊숙이 자리하였다. 밥 지을 때는 어김없이 돌아와 친구들과 놀다가도 집으로 돌아가 할머니 밥상을 차리는 동안 놀다 들어온 남동생은 수저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남녀 차별을 느끼며 살아와서인지 머리가 굵어질 무렵부터 해방자유존중배려공감소통등의 단어가 좋아졌다. 학인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쓰기 공부를 꾸준히 해온 작가가 쓴 << 해방의 밤>>은 곁에서 책 이야기에 일상을 버무려 소담한 밥상을 차려 놓은 듯하다.


  밥 먹을 대상을 떠올리며 음식을 준비하고 정성스레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따스해지는 광경을 그리며 책을 읽었다. 글쓰기 공부를 함께하던 사람들과의 인연은 강좌가 끝이 났어도 면면이 이어져 햇살 말간 낮에는 전하지 못한 글들을 주고받았다. 무딘 감성을 깨우는 비라도 내려 빗줄기가 창을 두드리기라도 하면 추억 속 인물을 불러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아련한 그리움에 잠길 때가 있다. 배움에 목말라 있던 어머니의 열망을 담은 학인의 글을 보고는 충청도 할매들의 <<요리는 감이여>>라는 책의 감칠맛 나는 음식에 쏠린다.


   밤이라는 시간은 원기왕성한 양의 기운이 음의 기운에 자리를 내어 주고 사위를 감싸기 시작할 때, 내면의 감각을 일깨우는 사유의 깊이를 짙게 돋운다. 지난 시절 겪은 일들 중 지우지 못할 상처는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 일상이 매끄럽지 못한 성폭력 피해자들이 받은 피해를 글로 남겼다. 고압적이고 물리적 인 힘에 짓눌려 치욕스런 일을 겪고 휘청거리는 자신을 다독이며 자정할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글쓰기 시간의 숭고한 의식으로 비춰진다.


   다르게 생각하며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관행대로 살아가려는 습성으로 현실에 안주하려는 때가 있다. 기득권으로 지내다 보면 기존의 질서가 어그러져 혼란을 가중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는 자신과 맞닥뜨렸을 때의 무참함이 떠올라 괴란쩍어진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는 나이지리아 상류층 가정의 10대 소녀가 밖에서는 존경받고 집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가는 성장 서사를 담았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는 여행처럼 히비스커스 색깔에도 보라색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성취만을 위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삶보다는 타인을 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길이 더 나은 방법일 것이다.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현실에서 대한민국은 안전 불감증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나라라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한 개인을 존엄한 유기체로 여기지 않고 기계의 부품처럼 여겨 한 노동자의 주검을 사고로 처리하는 현실에서 유족의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로 열일곱의 고등학생들이 수장되었을 때에나 이태원 참사로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에도 책임 있게 나서서 유족의 아픔에 함께하려는 권력층은 흔치 않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직시하고 피붙이를 잃은 유족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하는 공감 능력은 개개인을 연결하는 고리로 작용할 것이다.


   양성 평등 사회로 진화하여 여성들의 삶이 많이 편해지고 나아졌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목도한다. 함께하자는 말 대신 도와줄게라고 말을 버젓이 하는 남편을 보면서 변화란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애써서 만들어야 하는지를 일깨우게 된다. 능력대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출발선이 다른 사회적 환경을 간과한 채 자본주의적 논리를 펴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용기를 배운다. 애초부터 개인의 능력이 판가름 나는 불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기억하며 관념의 빗장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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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글과 약이 있는 인문약방 - 현직 약사가 들려주는 슬기로운 병과 삶, 앎에 관한 이야기
김정선 지음 / 북드라망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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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고 없이 걸린 질병의 고통에 짓눌려 살다 천상의 별이 된 혈육을 그리워하며 인문 약방을 읽었다. 그가 세상을 뜬 지도 2년이 지났지만, 처연한 슬픔으로 힘들었던 시간도 무참히 흐르는 세월과 함께 엷어질 때가 늘어났다. 그를 가슴에 묻고 돌아선 날, 다음 생에는 아프지 말고 건강한 몸 받아 응급실을 찾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구애됨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행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건강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아 연줄을 대어 서울 대형 병원으로 옮겨 치료받았다. 두 달에 한 번은 의사를 만나 약 처방을 받느라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며 발품을 파는 시간이 쌓여 갔다.


  대여섯 시간을 들여 내원해 예약된 의사를 만나 약 처방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3분이라 허탈감은 더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서울행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하철역과 연계된 셔틀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서는 약을 처방받아 병원 근처 약국에서 처방전을 내밀어 약을 받는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약을 건네는 무표정한 약사를 뒤로 하고 예약된 버스를 타기 위하여 걸음을 바삐 옮긴다. 병약하게 태어나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고 서둘러 이승을 떠난 혈육이 더 이상 질병의 고통 없는 세상에서 지낼 수 있는 일을 위로로 삼으며 오늘도 지난 흔적이 남은 일기장을 들춘다.


  의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하는 의료의 진보가 질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만들어진 신화일지도 모른다는 약사의 판단에 공감한다. 갱년기를 거치며 늘어난 체중으로 성인병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복용하기 시작한 고혈압약이 있다. 지금껏 약물 복용 없이 지냈는데 2년 전부터 매일 혈압약을 삼키고 있다.


  식생활 개선과 적절한 운동으로 생활하며 지내고 싶은 바람이 컸지만, 해마다 오르는 혈압으로 약 복용을 미룰 수 없었다. 사는 동안 행복하게 보내고 싶은 열망은 넘쳐나는 건강기능식품 시장의 번성과도 맥을 같이 한다. 고혈압에 좋다는 보조식품을 함께 섭취하며 고혈압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도 하였다. 자신에 대한 이해보다는 임상 효험이 있다는 말에 혹하여 지낸 시간을 돌아보며 책을 읽는다.


  약대를 졸업하고 저자는 종합병원 약제과, 의약품 도매상, 제약회사, 약국 등에서 약사로 십수 년을 일하며 에너지를 쏟았다. 한 권의 책을 만나면서 저자는 개인의 자율적 소비보다는 약제 소비를 돕는 약사로 전락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집단 지성이 활발하게 피어나는 공동체를 찾았다. 약사로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고액의 연봉을 보장받는 안정적인 생활보다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바람은 사람 냄새 나는 공간에서 약 처방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약을 공급하는 길을 택하였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일리치의 책을 통해 의료계에 종사하는 이들의 전문성이 상품이 되고, 전문성에 대한 의존성이 깊어지게 됨에 따라 의료 권력이 비대해지는 현실에서 전문가 주의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에 수긍하며 자신을 성찰한다.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잠을 못 자는 시간이 늘어난 직장 동료는 하루하루 버티기가 힘들 정도라 진통제를 상비약으로 쟁여두고 있다고 하였다. 통증이 심한 날에는 서너 알을 삼키는 경우가 있다고 해 약물 의존도가 너무 높은 듯 아닌가 싶었는데 탈이 나고 말았다. 복용한 약물을 장기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지 극심한 복통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고 속은 메스꺼워 구토하느라 생존조차 힘겨웠다니 약물 복용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다. 과체중과 비만을 비정상으로 보며 정상 체중이 만들어낸 다이어트 시장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커지는 상황에서 식욕억제제의 부작용을 간과해서는 안 됨을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향정신성 의약품인 식욕억제제는 약물 의존도를 높이며 중독성을 키워 정신적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애, 고통, 질병, 노화, 죽음과 같은 인간의 조건들을 바람직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한 트랜스휴머니스트의 불멸성은 위험을 안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예외일 수 없는 나 또한 시절 따라 변화를 겪으며 살아갈 뿐이다. 노화의 진행과 함께 늘어나는 주름을 걷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려는 마음으로 나이 들어 퇴행하는 신체 기관이 보내는 알림을 받아들여 자정의 시간으로 삼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생각한 대로 살아지지 않는 시간을 받아들이며 돌연한 일들 역시 소용 있기에 내게로 오는 것이라 여기며 자신을 관조하며 이해하는 데 공을 들인다. 자기 이해 없이 전문가의 판단에 매몰되기보다는 스스로 몸을 돌보며 살아갈 필요를 찾는다. 사익을 앞세워 분투하기보다는 친구와 함께 공부하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며 연대하는 시간은 양생(養生)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믿으며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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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황금종이 1~2 세트 - 전2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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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면 최고라는 생각이 많아지는 십대들과 생활하면서 물음을 던질 때가 있다. 장래에 사회 속 한 구성원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열에 아홉은 돈 많이 벌어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고 싶다고 한다. 욕망대로 살아가는 데 돈이 전제되어야 함을 극명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지금도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 중 하나가 돈을 많이 모아 건물 하나 사서 월세 받으며 살고 싶은 바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종이>>라는 제목에서부터 구린 돈 냄새는 진동하여 인상을 쓰게 하더니 옴니버스 형식으로 쓰인 소설은 읽을수록 점입가경이다. 청렴 개결함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인권 변호사에게 의뢰하는 송사는 돈을 매개로 하는 구린내 짙은 일들이 대부분이다. 돈 앞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자매도 무용해지는 천민자본주의 시대의 만화경을 보는 듯하다. 부모 생전에 재산을 오롯이 물려받은 자식들이 약속한 생활비를 부모에게 주지 않아 거리로 내몰린 노인들의 딱한 사정이 언론에 보도되는 현실에서 돈의 무소불위의 괴력을 행사한다. 돈의 노예로 전락한 이들은 아버지가 어머니 몫으로 남긴 유산마저 빼앗으려 소송을 걸고,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금고를 습격한 형제들의 모습은 아버지 죽음을 애도하는 인간의 도리마저 저버렸다.

 

평생 철물을 두들겨 모은 아버지가 마련한 건물을 날릴 위기에 몰린 아들은 임대료를 4배나 올려 받으려 작정하고 세입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정성을 다하여 식당을 운영해 단골이 많은 부부는 건물을 옮겨 식당업을 새롭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식당 사장은 건물주에게 상해를 입히는 일이 벌어졌다. 돈 되는 일에 매달리는 변호사와는 달리 서민 편에서 이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적극적인 이태하 변호사는 금력과는 거리를 두고 신념에 부합하는 일에 도움을 전한다. 불의와 타협하여 안일한 생활에 젖지 않으려 의식을 무장하고 사는 이들은 돈의 노예로 돈에 지배당하는 삶을 배척한다.


   수임료와는 상관없이 정의롭고 청렴한 행보로 약자를 변호하는 이태하에게 돈과 관련된 송사는 끊이지 않는다. 카지노에 미쳐 전 재산을 다 날리고 건물까지 날려먹은 아들은 어머니의 생명까지 빼앗았다. 도박과 가상 화폐 투자에 빠져버린 두 남자는 죽음을 결행하며 폭주하고, 사색이 짙어져 가면서도 돈 욕심과 살 욕심을 부리는 큰고모 등을 통해 돈에 혈안이 된 이들의 처연함을 떠올린다.

  “나도 돈 좋아해. 다만 노예로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라는 변호사의 한마디는 휘둘리지 않을 신념대로 사는 용기 있는 자의  자기 관리이다.

 

   이 소설에서는 인권 변호사와 결을 같이 하는 인물이 나와 긍정적인 의미를 두텁게 한다. 부정을 축출하고 정의로운 시대를 여는 민주화 운동을 지도력 있게 폈던 한지섭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와 과학 영농가로 활동 중이다. 끝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영농가로 애플망고를 수확한 날, 변호사 부부를 초대하여 첫물을 선보이고 싶은 바람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중략)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중략)’

마치 바라는 손님이 와서 알알이 박힌 포도를 따 먹을 때의 기분 좋음은 농사 짓기 까다로운 애플망고를 수확하는 데 든 수고와 상쇄되는 것처럼 전해진다.


    생활에 불편함을 초래할 정도로 돈을 지니지 못하면 돈은 인간의 존엄마저 박탈해 버린다. 유산 상속이 걱정돼 홀로된 아버지의 만혼을 저지하려는 자식, 수천 억 거부의 후손에게 마음을 줬다 죽음으로 내몰린 딸,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노인을 돌보는 20대 여성의 생활은 돈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물욕에 눈이 멀어 정체성을 잃고 돈을 탐하다 생명까지 않게 된 사례는 지금도 흔하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져서는 안 될 돈을 탐하다 보면 돈에 종속된 삶을 살아야 할 운명에 갇히고 만다. 범법 행위임을 알면서도 미성년자에게 담배 심부름에 기생해 사는 노인의 이야기는 길어진 노년에 경제 활동이 전무한 노인들의 실존의 적신호를 드러내는 듯해 마음이 무거워진다

   옹색한 살림에 돈이 없어서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시절에도 갖지 말아야 할 것은 취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존엄성을 잃지 않을 용기로, 돈에 종속된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하여 써야 할 데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고, 아껴야 할 때에는 아끼는 삶을 살아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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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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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치 못한 일이 불러오는 파장은 자못 커서 어떻게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사라져 버린 소녀를 찾아 한평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40대 중반의 남자가 있다. 열일곱 살에 만난 열여섯 살 소녀를 잊지 못한 채 소녀를 찾으러 나선다. 예민한 촉수로 감각이 살아날 때, 이성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빙산이 녹아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이름 모를 생물을 길러내는 것처럼 근원적 사랑을 낳는다. 찰나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지는 않았지만, 이별의 시간도 예비하지 않은 채 헤어진 만남에는 아쉬움이 밀려 든다.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알아차린다.

 

   나를 사랑한다고 여기던 소녀가 던진,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나는 가짜

  라는 한마디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모호할 때를 직면할 때마다 떠오른다. 1부에서 3부로 이어지는 시간적 서사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영역에 대한 경계는 모호해진다. 장자의 꿈에 나비가 나였는지, 내가 나비였는지 경계가 확연치 않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소설 속 인물들은 책을 모티프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라고 말하던 소녀는 소년을 떠났고, 고열에 시달리며 곤란을 겪던 나는 소녀와의 만남을 갈구하였다. 간절함이 소녀에게 전해졌는지 벽을 관통하여 소녀가 생활하는 도시로 갈 수 있었다. 죽음이 차안과 피안의 세계를 가르는 것처럼 높디높은 요새 같은 벽을 통과한 순간, 벽 바깥으로 나가기는 쉽지 않아 스스로 감당하며 지내야 할 몫은 숙명처럼 자리한다. 시간의 축적은 무효하므로 공간의 광장에 서 있는 시계탑에는 바늘이 없다. 이 도시에 순응해 사는 이들은 현재만의 시간을 살고 있을 뿐이다.


  둘이 상상 속에 만들어 낸 비밀의 도시인,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버려야 한다. 도시 생활자는 자신의 그림자는 벽 바깥에 두고 지내야 하고, 벽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은 그림자를 지녀야 한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 도시로 들어간 나는 애타게 그리던 소녀와 재회하지만 그녀는 소년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소녀는 열여섯 살에 머물러 있어 십 수 년이 흘러 만난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어느새 나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소녀는 오래 된 꿈을 읽는 이의 두 눈에 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약초로 달인 특별한 차를 내놓는다. 열여섯 살에 머물러 있는 소녀는 숙명처럼 추운 겨울에는 책 한 권 없는 도서관 난로에 불을 지피고 약초 차를 내놓는다.

 

   도서관 문을 닫고 집으로 가는 소녀와 함께 나는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강물을 보며 걷는다. 날이 밝으면 나는 무심한 채로 현실에 순응하며 소녀가 건네는 약초차를 마시며 오래된 꿈을 읽는 시간들에 회의가 들었는지 그림자 수명이 다하기 전 이 도시를 벗어나려 한다. 문지기의 감시를 피해 철옹성 같은 벽을 넘어 헤어나기 힘들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도시를 벗어날 생각조차 않는 사람과는 달리 용기 있게 도시의 벽을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나는 사십대 중반에 축적된 마음과 기억을 유지한 채, 몸만 십대의 소년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녀는 열여섯 살 모습 그대로인 채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관념의 실이 소녀의 몸과 마음을 촘촘히 엮어 하나로 이어지기를 갈망하며 소녀와 하나로 이어지지 않은 현실을 직시한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2부 마지막에 나오는 한마디는 불확실성이 대두되는 도시에서 자신의 정체를 잃지 않고 생존하려는 이의 분투가 담겨 있는 듯하다. 도서관에 있는 나는 진짜인 나의 대역에 지나지 않은 가짜는 아닌지 의문을 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독해져 본질을 찾아 나서는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도시의 웅덩이에는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 두었지만, 본체가 내는 진정한 소리에 용기 있게 귀 기울이는 이에게는 문제되지 않았다

  ‘무언가가 무언가와 이어져 있다.’

  문장처럼 출판 유통 회사에서 일하며 책과 함께한 시간은 허투루 흐르지 않은 듯하다. 나는 변방에 자리한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 고야스 관장이 물러난 자리를 이어 도서관장직을 수행한다. 산책하다 유명을 달리한 고야스 관장의 유지대로 작을 마을 도서관에서 책 속에 의미를 발견하고 또 다른 꿈을 꾸며 인생의 이정표를 찾는 여정은 도서관에서 시작될 수 있다. 문명 세계와는 동떨어진 공간일수록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늘려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하며 미래를 설계할 수가 있다.


   나는 마을 도서관 지하 정사각형의 방에서 그림자가 없는 고야스 유령(?)과 만나 도서관 운영에서부터 주변 동정을 나누며 비밀을 공유한다. 불의의 사고로 다섯 살에 세상을 뜬 아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부인의 극단적인 선택 등 일가족이 주검으로 함께 누워 있는 묘소를 찾을 때 뒤따르는 자가 있었다. 생전에 고야스 씨와 소통하며 교류하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다. 소년은 고등학교 진학 대신 마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방대한 지식을 암기한다. 말없이 도서관에서 책만 읽던 아이가 도시 이야기를 듣고 세밀한 지도를 그려 나에게 건넸다.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형상이 소녀에게서 정밀한 사진 기억력을 가진 소년에게로 이어졌다.

 

   이렇다 할 흔적도 없이 엘로 서브마린 소년이 증발되었다. 가족은 소년의 종적을 찾아 헤맸지만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시일이 지날수록 의구심만 늘어날 뿐 소년을 찾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나의 심증대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허물을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숲속에 숨겨놓고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이로 존재하고 싶은 바람을 좇아 문지기 눈을 피해 도시로 잠입하였다. 소년은 나의 오른쪽 귓불을 깨물어 도시의 불확실한 벽으로 40대 중반의 아저씨를 유인한 셈이다. 꿈속의 선명한 일들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지는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불가항력적인 의식은 벽을 통과해 도시의 도서관에서 꿈을 읽으며 지내는 자신과 맞닥뜨렸다.

 

   오래된 꿈을 읽기 위하여 나와 하나가 되고 싶은 소년은 나의 침대 곁에서 그의 바람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저는 원래 당신이고, 당신은 원래 저니까요.’

   라는 소년의 말에 당황해 하는 나에게 우리의 시원은 하나였음을 역설하였다.

소년은 마을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읽고 지냈지만 현실에서는 꿈 읽는 이가 되는 방법을 찾을 길 없어 헤매다 고야스 씨의 무덤에서 말하던 나를 만나 방법을 찾아 나선 듯하다. 소년은 나와 하나가 되어 이 도시의 도서관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꿈 읽는 이의 직무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통념과 세간의 잣대로 눌러 놓은 의식을 껍질 밖으로 끌어내 스스로의 생각을 자유로이 펼치도록 유도한다. 나는 도서관을 닫고 나오는 소녀를 별다른 말없이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서 기쁨을 찾았다. 사람들과 교유하며 시는 시간이 강퍅할수록 사회적 적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을 때가 있다. 시간이 나아가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의 마음이 내는 소리를 관조하며 현재에 충실한 시간은 잊고 지낸 자신과 조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본질을 숨긴 채 가면을 쓰고 생존하느라 버거운 현실을 벗어난 공간에서 지난한 시간을 성찰하며 잊고 지낸 오랜 꿈을 꺼내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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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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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50이 넘으면 타인의 시선과 뒷공론에도 휘둘리지 않는 의연함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살아갈 것으로 여겼지만 기대와는 달리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일로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믿었던 친구에게 일상의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해결하려 했던 일들이 여러 친구들의 가십거리로 전락하였던 때 후로는 내면의 소리를 전하는 일이 두려워졌다세상에 마음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자는 공허함에 숲길을 거닐며 부는 바람에 근심을 털어 놓으며 날려 보낸다흙길을 거닐며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무거운 마음은 다소 가벼워져 자연과의 교감 시간이 늘어날수록 삶의 에너지는 비축된다.

 

    절망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견디며 스스로에게 처방하는 심리학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치유의 도구들이 있어 관련 서적을 찾곤 한다회한으로 남아 있는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한 저자는 이전의 책 이야기와 여행 산문집과는 사뭇 다른 내면을 진솔하게 담았다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향성을 띠는 내 마음과 친구 되는 법을 터득한 저자는 어떤 절망적 순간에도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갈 에너지를 얻었다. 30대 중반 이후 저자는 내성적인 성격의 장점을 발견하며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창조하는 작가로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내 안의 최고의 힘을 끌어내는 용기로 무의식이 지닌 최고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실재계에서 자기 안에 잠든 거인을 일깨우는 연마의 과정은 필요조건이다.

 

   적정 나이에 이르면 통과의례대로 학교를 다녀야 했고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 크고 작은 갈등과 화해를 거치며 조금씩 우리는 성장한다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선생님은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가랑비 옷 젖는 것처럼 서로에게 스며들 수밖에 없다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진위 여부를 따져 보지도 않은 채,

   “또 너니?”

   라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의 한마디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아이로 낙인찍힌 후로는 혼자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다이와 달리 고등학교 대 만난 고담임은,

   ‘여울인 걱정할 거 전혀 없어요어딜 가든 잘 해낼 거예요.’

   불안해하는 어머니와 딸을 배려하였다이후 저자는 심리학을 공부하며 떨쳐내고 싶었던 아픈 기억과 마주하며 내면아이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삶을 바꿀 용기를 내었다

 

   어린 시절 행상 나간 어머니가 며칠 집으로 오지 못할 때면 불안은 굴린 눈덩이처럼 커져갔다어른들 말대로 젊은 어머니가 팔자를 고칠 생각에 남매를 버리고 가버리면 어쩌나 싶어 애어른 역할을 자처하였다가난한 삶에서 오는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방어기제로 현실적 문제를 회피하던 정신적 퇴행은 조금씩 나이 들면서 줄어들었다어떤 외부의 공격도 내 힘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자기 관리로 전체를 조망하며 상처를 아우르는 그림자까지 포용하게 되었다내면의 희열로 통용되는 블리스를 가꿈으로써 심인성 장애를 극복한 사례를 접할 때면 나 역시 인생이 쓰디쓴 약으로 여겨질 때면 백지를 꺼내 삶의 흔적들을 토해낸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며 지내는 동안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유아적 사고에 편향된 이들은 부정적인 결과를 두고 환경과 남 탓을 주로 하였다심지어는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까지 내뱉으며 비난할 때가 있어 부끄러워 계속 이 친구를 만나야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어떤 감정에 빠져 이성적인 판단을 그르치고 있을 때 마음 놓침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때 내가 좀 더 내 마음을 관찰하고스스로 내 마음을 보살필 수 있었더라면.’

   이라는 마음 챙김으로 내 상처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는 에고와 눈에 보이지 않는 셀프와 대화하며 자기와의 관계를 잘 맺는 일은 자기 공감을 잘하는 일로 연결된다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반색하고 부정적인 언행을 피하려는 이분법적 행동에서 벗어나 전체성에 눈을 뜰 필요가 있다빛만 선택할 것이 아니라 그림자까지 함께 받아들이며 자기 안의 전체성을 통합해 더 나은 자기를 만들어가는 개성화를 지향해야 한다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은 산티아고 노인은 꿈을 꾸는 한 편견에 갇히지 않음을 생생히 보여줬다그는 청새치를 낚았지만 상어 떼의 습격에 용기 있게 맞서 간난신고 끝에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 뼈를 들고 왔을 때사람들은 노쇠하여도 꿈을 꾸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면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쓰기는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 모두의 마음을 바꾸는 연마제이다상처를 표현하는 글쓰기로 쉽사리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통제하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는 실천이 필요하다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글쓰기 지도 교사로 아이들의 슬픔을 등에 짊어지고 가기로 마음먹은 저자의 다정함은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려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열등감의 요소로 생각하며 부정적으로만 여겼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이를 무의식의 가능성으로 여기며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할 날을 기다리는 노력이 병행될 때 우리는 진화 발전할 것이다내 인생의 주도권을 스스로 쥐고 내 안의 큰 나를 만나며 개성화를 이뤄갈 때 중년의 삶에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어린 시절의 결핍이 양분으로 자리해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만든 것이라 자신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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