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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주택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1
유은실 지음 / 비룡소 / 2021년 3월
평점 :
시간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움직이는 여행자로 미답의 세계를 밟는 자신을 상상하며 단조로운 일상을 견딘다.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상에서 비껴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이며 내면의 갈등을 직시하는 시간이 필요할 때면 순례를 떠올린다. 세상사 잊고 욕심을 털어버린 채 길 위에 서서 성자들이 걸었던 길을 묵묵히 따르며 살아온 시간을 반추하여 나를 돌아보는 일은 의미 있는 순례로 자리할 것이다.
70대 이혼녀 순례씨는 습기 가득한 공중목욕탕에서 세신사로 일하여 번 돈을 모아 순례 주택을 지었다. 장기 전세 붙는 것보다 순례 주택 들어가는 게 어렵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에게 순례 주택은 임대료가 싸다. 도로 확장 공사로 보상금을 많이 받아 순례 주택을 짓고 건물주가 되었지만, 순례씨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불로소득을 달가워하지 않는 순례씨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건물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임대료를 받으며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한다.
순례씨는 시세보다 낮은 월세에 형편이 어려운 세입자에게 일정기간 보증금을 받지 않았다. 순례 주택 입주자는 와이파이, 옥탑방, 옥상 정원을 공유하고, 순례 주택 입주민 수칙을 따른다. 몸과 마음이 엉망인 엄마를 대신하여 그녀는 수림을 사랑으로 키웠다. 수림의 외할아버지는 순례씨와 연애를 하였지만 외동딸의 반대로 부부의 연을 이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번 돈으로 좋은 입지에 위치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딸 부부는 경제적 자립과는 거리가 멀다.
사위는 전임 교수 될 때까지만 장인에게 도와 달라 하였고, 딸은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큰딸 사교육비를 충당하였다. 수림은 학교 갈 즈음 순례씨 집을 떠나 상위 등급에 해당하는 1군 가족과 합류하였다. 하지만 세속적인 성취에 골몰하는 생물학적인 가족과는 거리를 느낀 터라 부모와 언니와는 소원해졌다. 순례 주택으로 이주함으로써 공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1등을 고수하려는 미림의 현실적 꿈은 어려움에 봉착하였지만, 주도형 학습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양광 사업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휘말려 살던 집을 날려 오갈 데 없는 수림 가족을 순례씨가 받아줬다. 1군 가족은 5년을 대기하여도 입주하기 힘든 순례 주택으로 이사하였지만, 살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기존의 입주자에게 불편함을 주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얹혀 살며 의존하는 ‘캥거루족’으로 생존하느라 자립을 위한 경제활동은 없었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는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않는 부모를 보며 수림은 ‘어른은 어떤 존재일까?’를 화두처럼 붙들고 사유하였다. 순례씨는 최측근인 수림에게 ,
‘어른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잘라 말하며 수림의 부모가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녀는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관심을 두고, 입주자인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연대하였다. 양심적으로 번 돈을 귀하게 쓰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순례씨는 순례 주택을 국경 없는 의사회에 기부하는 상속을 선택하였다. 그녀는 측량에 필요한 줄자를 최측근 수림에게 주었다. 줄자로 외형적 크기를 재며 성장을 관측하고, 마음의 깊이를 재단하며 타인과 상생 ‧ 공존하는 삶을 지향하는 마음을 줄자에 연결하였다.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진 홍길동처럼 길동은 선의의 속임수를 써서 수림 부모가 경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수림은 마흔이 넘어 돈을 처음으로 번 엄마, 새벽 배송 포장을 돕는 아빠를 보며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어른을 그렸다.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지.’ [호밀밭의 파수꾼] 중
제도권 교육에 부적응하여 학교 밖으로 밀려난 홀든이 여동생 피비에게 한 말이다. 열여섯 살 수림이 홀든과 겹쳐 보인 이유는 철 들지 않은 어른을 성숙한 어른으로 유도하는 촉매이고 싶은 바람을 담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꺾지 않고 아이들의 성장을 도우며, 삶에 닥치는 어려움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을 때 인생의 순례자로 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