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사고 - 비우는 여백에서 만드는 여백으로
야마자키 세이타로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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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선지에 형태를 그린 선과 선 사이가 하얗게 비어 있는 수묵화를 보며 들은 미의식 중 하나가 여백의 미이다. 공간을 다 채우지 않고 비워둠으로써 절제된 미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상상으로 여백을 채우며 생각을 키워가는 시간을 그린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에는 호숫가를 찾아 호수의 물을 보며 하염없이 앉았다 올 때가 있다. 너울이 없는 수면을 보며 이는 바람에 떨어져 날리는 이파리가 내는 파문에 잡다한 생각을 덜어낸다. 지니고 있는 재화들을 버리지 못해 곳곳에 벌어진 물건들을 보면 물질이 정신을 잠식하는 듯해 개운치가 않다.

   저자는 예술적 영감을 중시하는 디자이너로 창조적인 활동을 중시한다. 그는 기업의 영리적 활동을 기획하면서 기업체를 운영하는 대표로 직원들과 소통하며 과업을 이뤄내는 과정에 여백 사고가 배어 있음을 적시한다. 여백 사고는 예술가의 사고와 디자이너로서 인간 중심의 사고를 바탕으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전제로 실행된다.

  ‘현재의 자신을 비추는 거울 과 같은 여백에 자신이 없으면 가득 채우고 싶어지고, 여유가 없으면 대우가 소홀해진다.’

   는 표현에 깃든 의미에는 쓰인 무엇인가를 돋보이도록 일부러 남겨 둔 공간이 여백이다. 자신과 외부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확보하고 자신의 소중한 핵을 보호하며 다른 사람의 핵까지 관여하지 않을 자유이다.

    한 공간에서 오래 일하는 직장에 근무하면서 한 사람의 내밀한 부분까지 알게 되어 괴로움이 늘어났다. 자신의 역량에 대한 이해 없이 상급자의 허물을 물고 늘어져 그 사람의 위신을 깎으려는데 안간힘을 쓰는 동료를 보며 마음의 여유 없이 원로의 자리까지 왔나 싶을 정도라 마음의 문을 닫고 말았다. 대화로 상대의 어려움을 헤아리기에는 아집이 큰 편이라 섣불리 다가서기 힘든 상황에 체념하며 지낼 뿐이다. 적정거리 확보를 위하여 타인과 여백을 두고 지내고 있음에도 쉽지 않은 인간관계에 공감하며 심호흡한다.

   학사 운영을 위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 학적 업무를 맡은 이가 일을 원활히 수행하지 못하여 시간에 쫓기다 보면 일을 맡아 처리할 때가 있다. 배움은 있으나 익힘의 과정이 없어 학사 운영에 차질을 빚게 되므로 손에 익은 이가 일을 처리하곤 한다. 담당자가 생각을 하여 일 처리를 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 시간만 길어질 뿐 여백 사고를 적용하기에는 힘들다. 창의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프로젝트 형식의 업무 처리에는 여백 사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새를 만들어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우선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기다리며, 서로의 능력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여백 사고에서 찾는다.

    어쩔 수 없었다거나 대안 없이 당연한 수순을 밟았다는 합리화 대신 다른 선택지를 도입하기 위하여 여백을 두는 일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결심이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며 관행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꼰대라는 오명을 듣지 않도록 여백을 두며 생활해야 할 일상이다. 채우지 못해 안달하기보다는 비움으로써 욕망의 완충지로 기능할 여백 사고를 놓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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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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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측 불허한 일을 겪을 때마다 인간은 가슴 깊숙이 방을 만들어 봉인한 채 일상을 살아간다.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제 몫을 살아내느라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입안으로 욱여넣으며 고단한 시간을 버틴다. 삶의 궤적이 쌓일수록 인생의 희로애락이 빚는 사연을 품고 오늘을 산다. 처연한 슬픔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부는 바람에 흐르는 땀을 식히고 꽃향기에 마음을 내어주며 존재할 수 있어 감사함을 느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하던 숙부의 영향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섭은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사회주의 사상에 기울어 아내 진과 세 아이를 남한에 둔 채 월북한다. 어디를 가든 식민지의 하수인 역할을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탄식하던 형은 국권을 잃은 나라의 지성으로 사는 일에 무력감을 느꼈다. 북한의 피폐한 현실을 목격한 이섭은 다시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내려오지만 사라진 빨갱이남편 대신 젖먹이를 품에 안고 끌려갔다는 아내와 형에게 맡겨진 두 아들이 그를 찾아 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빨갱이라 찍힌 낙인은 사회안전법으로 이어져 직업을 구하여 생계를 잇는 일상마저 힘들었다. 아내와 세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온 이섭은 다시 꾸린 가정은 꼭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이섭의 다짐과는 달리 딸 지우는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까지 덧대어 삶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형벌이 가해졌다.

   적이 아니면 동지로 선을 긋고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전쟁은 가학성을 띤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영석의 아버지는 무고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고 정신 질환에 시달리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신혼의 단꿈에 젖을 새도 없이 전쟁 중에 피란 짐을 꾸리다 탄피인 줄 알고 만졌던 수류탄이 터져 목숨을 잃었다.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남편을 땅에 묻고 친정으로 오게 된 미자는 우두망찰한 채로 현실을 견뎌야 했다. 미자의 계모는 열일곱 살이나 많은 이섭에게 딸을 보낸다. 이섭에게는 간첩이 되어서라도 남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기에 미자는 그의 처로 호적등본에 오르지도 못한 채 네 아이를 낳아 길렀다.

   평생을 달리기와 냉수마찰로 단련해 온 이섭은 뇌혈관이 터져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병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아끼던 만년필로 자서전 유령의 시간을 쓰겠다고 가족 앞에서 선언한 게 며칠 전이었는데 이섭이 쓰러져 사경을 헤맨다.

  ‘뭐든지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공부를 해도 뜨겁게 하고 연애를 해도 마음을 다 바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만 남고 사는 게 재미없어.’

   지형을 안고 딸에게 들려준 말은 이섭 자신이 육십 평생을 살면서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를 위하여 분투한 경험의 산물이다. 죽음으로 갈라진 산 자와 죽은 자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세계에서 서로를 가슴에 묻고 살아갈 뿐이다. 숱한 인물을 보내기를 반복하는 동안 영면한 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아슴푸레 받아들이며 유한한 시간을 견딘다.

   당연히 누려도 되는 것이라 여겼던 일에 부끄러움을 갖게 한 친구와의 만남을 계기로 이섭은 종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돌아오지 않는 식구를 기다리다 장인에게 떠밀리듯 살던 집을 나와 목장과 새우 양식장을 거쳐 이제는 가구 외판원으로 한 가정의 생계를 꾸려야 했다. 지금의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려는 그는 책임감 강한 가장이었지만 사회안전법이라는 올무에 채여 수감되었을 때의 되살아나는 공포감은 그의 남은 생을 갉아먹어 다시는 헤어나기 힘든 지경으로 이끌었다.

   아버지가 이웃과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지 못하였지만 아버지 실종사망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는 이웃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후손이 폭도로 몰려 주홍글씨를 화인처럼 낙인찍는 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정범죄를 다시 범할 수 있는 사람을 관찰해 보호한다는 사회안전법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 꿈을 펴나가는 데 제동을 걸었다. 출생은 죽음으로 귀결하여 한 사이클을 마무리한다. 우주의 작은 알갱이로 변화하여 머무른 데 없이 증발하고 마는 인생에 믿고 따르는 이념을 추구하며 사는 일이 힘든 결과를 초래한다고 꿈마저 꾸지 않고 사는 생은 덧없을 것이라 여기며 꿈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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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살리는 자연식 밥상 365 - 송학운 & 김옥경의
김옥경 지음 / 수작걸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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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은 음식이 나를 만든다.’

는 믿음으로 신선한 식재료를 조리하여 먹는다. 오감을 잃지 않고 감칠맛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어 감사함으로 일상을 보낸다. 건강에 자신 있던 체육교사인 남편이 직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깊은 산속에서 자연식으로 전환하여 건강을 회복하였다. 건강에 이로운 자연식으로 암을 극복한 남편의 식이를 중심으로 제철 음식을 준비하며 자연식을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전하고 있다. 건강을 잃기 전에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는 이들이 늘어나 자연생활 교육원의 치유 프로그램에 관심이 드높아졌다.

‘아침은 왕처럼, 점심은 서민처럼, 저녁은 거지처럼 먹어라.’

는 말이 있지만, 많은 이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아침은 건너뛰고 퇴근 후 저녁에 폭식하여 몸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쌓여 건강한 식생활에 위배된다. 아침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탓에 가공식품을 곁에 두고 먹다 보니 건강에 해를 더하는 현실의 악순환이 가속화된다. 생명력을 담은 자연식은 변형이 없고, 발효하지 않은 요리이다. 가짓수가 적은 음식이지만 영양의 균형이 잡힌 소박한 음식으로 최소한의 음식 섭취로 건강을 돕는다. 너댓 시간 간격을 두고 음식을 섭취하며 간식은 삼가는 대신 중간에 물을 마시는 습관이 중요하다.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자연식은 자연에서 가져온 재료들로 조리를 최소로 한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화학 첨가물을 조미료가 들어간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식생활 습관은 혈액에 열을 주고, 피를 탁하게 하여 염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싱싱한 식재료를 최소한의 간으로 조리하여 먹는 자연식으로 건강의 불균형을 개선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자연식 맛을 내는 찬연 재료 손질부터 아침과 점심, 저녁에 먹을 음식을 다양하게 준비하여 자연식 밥상을 차리는 일은 식단 짜기로 모아진다. 계절에 따른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하여 죽과 두유 밥상은 간편하면서도 영양 만점인 음식이다. 대두를 깨끗이 씻어 인 뒤 압력솥에 세 배의 물을 붓고 삶아 한 김 식혀 삶은 콩과 콩물을 붓고 믹서에 갈아 두유를 만든다. 대두는 오장을 보호하고 경락의 순환을 도와 장과 위를 따뜻하게 해주는 콩이다. 이에 넣는 재료에 따라 토마토두유, 쑥두유, 흑임자두유 등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전례 없는 폭염으로 여름나기가 쉽지 않은 올해, 더위가 기승을 부려 소화 기능이 약해질 때는 콩과 쌀을 불려 갈아 만든 콩죽이 좋다. 점심 밥상의 기본은 소화가 잘 되는 현미밥, 국은 자투리 채소를 넣어 우려낸 채소국물을 기본으로 전골이나 찌개 등에 쓰면 유용하다. 반찬으로 좋은 감자는 얇게 채 썰어 찬물에 담가 전분을 뺀 뒤 체에서 감자채 물기를 뺀 뒤 팬에 기름을 두른 후 감자를 넣고 구운 소금으로 간하여 감자볶음을 만든다. 파린 빛이 돌도록 김을 구워 손으로 김을 찢은 뒤 양념장을 만들어 볼에 담긴 김과 실파를 버무려 김무침을 만든다. 텃밭에 많은 깻잎을 따서 물에 씻어 물기를 제거한 뒤 홍피망과 노랑 파프리카, 실파를 가늘게 채 썰어 준비한다. 레몬즙과 물, 가루간장으로 양념장을 만들어 깻잎겉절이를 만들어 먹으면 입맛이 살아날 듯하다. 더위와 갈증으로 지친 몸에 원기를 돋우는 수분이 많은 채소와 과일을 먹으며 여름의 잔상을 감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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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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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구성원과의 수평적 위치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의 소리를 경청하는 가운데 소통과 공감 능력은 길러진다. 소통 부재로 부정적인 현상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차별과 불평등은 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공간을 달리한 아일랜드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여성적 차별은 비민주적 현실과 궤를 같이한다. 정서적 학대와 아동 학대, 고압적인 태도로 자녀를 돌보는 일 등에서 남성 중심의 완력이 느껴져 마음에 댓돌을 얹은 것처럼 울울함이 더한다. 소통보다는 일방적인 생각대로 판단하고 움직이며 뜻을 관철하는 남성의 이기심이 불협화음을 낳는 단편 소설을 읽으며 자유로이 들판을 거닐 날이 올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유치한 맹세로 마거릿과 결혼을 약속했던 사촌은 사제의 길을 걷기 위하여 그녀를 떠났다상대의 일방적인 이별로 버림받은 마거릿은 혼자 아이를 낳았지만 돌연사한 아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마거릿은 성직 생활을 하던 사제가 죽은 뒤 그가 남긴 집에서 생활하며 그와 함께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회한에 젖어봤자 소용없음을 직시한다. ‘퀴큰 나무 숲의 밤에서 마가목으로 불리는 퀴큰 나무는 기르기 쉬워 정원수로 많이 심어졌고, 계절마다 다채로운 빛깔로 물들어 개성을 드러낸다. 생명을 지켜준다는 마가목에 대한 믿음과는 달리 활활 타오르는 생명 의지를 함의하는 마거릿의 말에는 지난 사랑에 대한 회한을 거두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섰다. 사랑에 집착하기보다는 새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신경을 모으고 정성을 보태고 싶은 유기적 생명체를 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였다.

   결혼 후 남의 집으로 가 살 딸은 가르쳐 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은 작별 선물속 아버지의 지론이다. 공부를 잘했던 유진은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집에 남겨진 딸은 어머니의 묵인 아래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였다. 아버지의 성적 노리개로 살던 유진이 아버지의 말을 판 돈으로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하여 길 위에 섰다. 걸어보지 않은 세계를 찾아 서툰 걸음을 옮긴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줄 문은 존재할지 확언하기 힘들겠지만, 괜찮지 않은 시간을 괜찮지 않다고 당당히 말하며 살아갈 날이 오기를 바란다.

   ‘푸른 들판을 걷다속 신부는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순리를 따르는 삶을 지향한다. 한때는 롤러의 딸을 사랑하여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였지만, 신부는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를 두고 하나님의 제자로 살아갈 의지를 강화하였다. 사제는 자율 의지로 성직자 역할에 충실한 소명을 받들고 살면서 갈등하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하고,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도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걸으며 자신을 달랜다. 감정 표현에 서툰데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젬병인 사내는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꿈속으로 들어오는 황홀경을 겪을 때도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흐른다. 용기를 내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하지 못한 사내는 그녀를 잃고 나서야 회한에 젖어 참담함을 술로 달래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여인이 검은 말을 타고 그의 들판으로 와 풀을 뜯기를 바라며 비현실적 꿈속 세계를 맴돈다.

   ‘당신이 딸한테 화풀이한 게 유감스러울 뿐이야.’, ‘그뿐이야.’

   비밀을 품고 살던 삼림 관리인의 딸의 마사는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다 남편이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하자 숨겨왔던 비밀을 폭로한다. 다른 사람의 씨앗으로 수태된 딸을 출산한 사실을 숨기고, 윤리적 책무를 다하지 않은 결혼 생활에 대한 마침표를 찍기라도 하는 듯 어리숙한 아들이 불을 질러 집은 불탔다. 큰불로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는 잿더미로 변해 생계마저 위협받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사는 가벼움을 느낀다. 면죄부가 적용되지 않아 죗값을 치르게 되더라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마사의 용기가 불러올 파장은 크겠지만, 그녀는 비굴하지 않을 용기를 내었다.

   먹고 싶은 과일을 함께 나누며 정을 두텁게 하는 관계는 서로 간에 친밀감을 더한다. 누구에게도 나눠 주고 싶지 않은 오렌지를 혼자 까먹고, 어린 소년에게 돌아갈 흰 빵을 돈을 더 주고 사버리는 중사는 약혼녀를 외면하고 계산적 의도로 결혼을 결심한다. 이기심으로 상대에게 가해지는 학대에 쾌감을 느끼며 타인을 통제하는 굴복의 장본인은 자기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이기심을 극명히 드러낸다. 굶주린 아이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을 용기를 회복함으로써 이기심을 향한 욕망에 굴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며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선택 없이 결정된 채 세계로 나와 소속된 공동체의 관습을 따르며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쓰며 살던 시절이 생각난다. 배움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당연시 여겨 왔던 일들의 부당함을 깨닫고는 감내하던 생활 습관에 제동을 걸며 무례한 대우에는 맞서며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찾았다. ‘물가 가까이가고 싶은 할머니는 바다에 가고 싶은 바람이 실현되었을 때 씻을 수 없는 모욕과 함께 허탈함이 돌아왔다. 바다를 보고 돌아오기로 한 시각에서 5분이 늦었다고 자신을 혼자 버려두고 집에 가려 했던 남자와 평생 함께 살며 회한은 쌓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속담처럼 마음이 통한다고 여기며 살던 사람도 속내를 알기 힘든 것처럼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 없이 가정생활을 지속하는 어려움을 함의한다. 두려움에 바다를 다시 찾을 생각을 거두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단조로운 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날은 요원하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이의 손을 선뜻 잡기 힘든 불신은 깊기만 하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물으며 답하는 가운데 자신의 감정을 자유로이 내비칠 수 있는 유연한 태도가 쌓여갈 때 부부 관계는 발전해 갈 것이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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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공간 일기 - 일상을 영감으로 바꾸는 인생 공간
조성익 지음 / 북스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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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밋밋한 시간과 결별하고 낯선 공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거리 위를 나돌다 집으로 무탈하게 돌아와 또 다른 꿈을 꾸게 하는 동인으로 자리한다. 걸음을 옮기다 마주한 공간이 갖는 특별함은 가슴에 남아 공명하며 삶의 위안을 주기도 한다. 며칠 전 다녀 온 북유럽 여행지에서 만난 코펜하겐의 왕립 오페라하우스는 뉘 하운 운하 투어를 하면서 무주한 건물이다. 오페라하우스는 통문 유리로 운하의 반짝이는 물결을 끌어안고 있는 듯 서 있다.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실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축가인 저자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생 공간을 찾아 표현한 드로잉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실었다. 저자는 나만의 속도로 걸음을 옮긴 공간에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였고 떠오른 생각과 공간 주변의 소재들을 드로잉 하였다. 지치고 힘들 때 찾는 위로의 공간, 집중과 몰입으로 새로운 생각 도출의 공간, 평균적인 삶의 규모를 넘어 삶의 질을 높이는 공간, 여행지에서 타인의 삶을 살아보며 나만의 의미를 찾는 공간 등이 즐비하다.

네 명의 식구가 한 방에서 기거하던 시절 내 방을 갖는 게 소원이었다. 비밀이 보장되는 나만의 사적인 공간에서 생각하고 공부하며 자신의 성장을 목도하고 싶던 시절 모든 것을 공유하는 현실이 힘에 부칠 때면 농작물 저장 창고를 찾았다. 식량을 저장하는 곳이라 쥐들이 출몰할 때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 방해받지 않으면서 생각에 잠기기에는 맞춤형이었다. 공간에 나를 두고 감정 변화를 읽어 자신에게 쓸모 있는 소리를 건네는 공간을 찾아내는 일은 우리 몫이다.

스마트폰 사용 연한이 늘어날수록 폰에 종속되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과 맞닥뜨릴 때 후회를 한다. 해야 할 일은 있는데 친구와의 소통 공간에서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다. 디지털 디톡스를 위해 찾는 아날로그 공간은 산만해진 정신을 모아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빌 게이츠는 휴가를 내 책을 한 보따리 싸 들고 혼자만의 독서실로 들어가 오롯이 독서와 사색에만 몰두하는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월든 호숫가 옆 오두막을 연상케 하는 공간디지털 세상과의 접속과 결별하고 내면이 전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떠오른 영감을 찾기 좋을 듯하다.

여행하다 보면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좋은 공간을 발견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일상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소시민이 동경하는 공간을 찾아 떠나는 일이 쉽지 않으므로 주변 공간을 찾을 필요가 있다. 책을 읽고 사색을 즐기기에 방해 받지 않을 공간에서 나만의 세계에 잠길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하기 위해 관찰자의 시선을 갖출 필요가 있다. 도시의 광장에서 질 높은 삶을 유지하기 적합한 공간은 물질적인 것보다 감성 욕구를 충족할 공간일 것이다.

숲과 호수의 나라 핀란드에서의 행복지수는 사회적 시스템의 안전한 보장에서 나온 듯하다. 침묵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사우나는 무심한 듯 넌지시 작은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공간이다. 몸에 쌓인 독소를 배출하여 자기 정화에 이르는 동네 목욕탕 같은 사우나 상용화는 오욕에 찌든 자신을 정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빛나는 시간뿐 아니라 빛나지 않은 시간까지 포용하며 서 있는 건축물을 보며 ‘건축가의 공간 일기’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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