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책]방
EP. 25
2024년 3월 9일 토요일
수르채그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은 때론 나에게 새로운 책방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된다. 작년에 인스타그램 알고리즘 나침반이 서울 연희동에 있는 희곡 전문 가게 <인스크립트>를 알려줬다면, 이번에는 <수르채그>라는 책방을 가리켰다.
책방 이름이 특이하다. 발음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책방 간판을 보면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수’와 ‘ㄹ’, ‘채’와 ‘ㄱ’를 합치면 ‘술’과 ‘책’이 된다. 그렇다. <수르채그>는 술과 책을 파는 책방이다. ‘읽고, 쓰고, 말하고, 마시는 곳’이라고 소개된 <수르채그>는 대구 서구에 새로 생긴 책방이다.
<수르채그>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대구에 책을 보면서 술을 마실 수 있고, 늦게 문 닫는 심야 책방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간절히 원했던 책방이 뜻밖에도 서구에서 생겼다! 서구에서 20년을 넘게 살아온 일이 뿌듯하게 느낀 건 처음이다.
밤 8시가 지났을 무렵에 책방으로 향했다. 책방이 있는 길에 들어서는 순간 술에 취한 남자 두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술을 더 마시기 위해 다른 술집을 찾으러 이동하는 것일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심야 책방에 취객들이 안 찾아왔으면 좋겠는데‥… 벌써 괜한 걱정을 해본다.
<수르채그>의 생일은 3월 6일이다. 커피, 무알코올 칵테일,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를 판다. 위스키를 섞은 하이볼도 판다. 작년 추석 연휴에 방문한 <책 바>와 비슷하게 <수르채그>에도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바(bar)’가 있다.
책방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서가를 살펴봤다. 술도 좋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책이다. 내 취향이 잔뜩 묻은 책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서가는 가게 안에서만 볼 수 있는 비 판매용 도서와 구매할 수 있는 책들로 채워져 있다.
국내외 희곡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보랏빛 표지가 인상적인 ‘지만지 드라마’ 출판사의 책, 오스트리아의 작가 토머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의 책들, 워크룸프레스 출판사의 사무엘 베케트 선집,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책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내 지갑을 열게 만드는 책들이다.
내가 책방에 들어오기 전에 주인장은 베른하르트의 희곡 《연극쟁이》(연극과인간, 2021년)을 읽고 있었다. 어? 이 책 처음 보는데‥…. 주인장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책들로 ‘큐레이션’을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들을 소개하려는 주인장의 패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요즘 롤랑 바르트의 글에 푹 빠져 있어서 《소소한 사건들》(포토넷, 2014년)과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민음사, 2015년)를 골랐다. 그리고 이번 달 초에 《사서 한정판》(휴머니스트, 2021년)를 완독한 기념(?)으로 《묵자》 해설서인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시대의창, 2015년)를 선택했다. 주인장이 말하길, 내가 <수르채그>에서 책을 처음 산 손님이란다.
<수르채그>의 서가를 충분히 살펴보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마셨다. 가볍게 하이볼로 시작해서 책방지기가 추천한 위스키를 맛보았고, 달짝지근한 무알코올 칵테일까지 마셨다. 사실 이곳에 오면 술 마시면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일 생각은 잠시 제쳐두고 술을 마셨다.
책방 안에 혼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쓸 수 있는 방이 무려 세 개나 있다. ‘주책잡기(酒冊雜記: 술 마시고, 책 읽고, 잡문을 쓰는 일)의 밤’을 보내기 딱 좋은 곳이다. <수르채그>는 정오에 열어서 자정까지 연다. 평일에 내가 늦게 퇴근해도 방문할 수 있고, 가볍게 술 한 잔 마실 수도 있다. 조만간 독서 모임을 <수르채그>에서 진행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