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미하엘 유르크스 지음, 김수은 옮김 / 예지(Wisdom)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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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평화를 위한 간절함이 느껴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마법을 부려도 좋다. 환상도 상관없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연속이면 또 어떠랴. 그것으로 가슴이 따뜻해지고, ‘거짓’임을 알망정 잠시나마 우리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가 있는 이맘때 한번쯤은 ‘기적’이 일어나도 괜찮다. 내가 아니라도 좋다. 거창하게 세상이 뒤바뀌는 것이 아닌 작은 만남, 성공, 사랑, 기쁨이라도 좋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기적’ 얘기를 꺼낸다면 황당무계하게 여겨지고 코웃음 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본 경험이 있었을까.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처럼 기적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삶의 특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기적을 바라고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비주의자들에게 어울릴 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비록 짧지만 실제로 한 사람의 사소한 간절함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마저 커다란 삶의 변화를 가져다준 기적으로 만든 일이 있었으니까.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 24일 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서부전선 어디선가 낯선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불과 50m 떨어진 독일군 참호에서 흘러나온 크리스마스 캐럴에 영국군은 당황했다. 처음엔 독일군의 심리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난 뒤 건너편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곧이어 어둠 저편에서 독일 병사 한 명이 일어나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바짝 긴장한 영국군은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이 병사는 촛불을 켠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를 양측 참호 사이 무인지대에 놓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외침이 들려왔다 “서로 총을 쏘기보다는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또다시 캐럴이 이어지고 이번엔 영국군도 따라 합창했다. 삭막한 전선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트리를 중심으로 양측 병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한 병사들은 곧 담배를 나눠 피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은 전쟁터에 투입되기 전에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낸 시간들이 그리웠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양측 병사들은 자신의 심장에 총알이 언제 박힐지도 모르는 살벌한 공포의 참호 속에서도 전쟁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독일군 병사는 간절히 원하는 소망을 담아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을 것이다.

 

전선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찾아왔다. 양측은 크리스마스 전후에 그동안 무인지대에 방치됐던 시체를 거둬 장례식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시체를 수습하는 동안 서로 일손을 나누고 장례식에서 기도해주는 등 친교를 쌓았다. 시체를 치운 자리에선 축구 시합이 열리고 군수품과 음식물이 교환됐다. 더 이상 전장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Scene #2  ‘전쟁의 개’들이 망쳐놓은 크리스마스의 기적

 

감동이 느껴지는 한 편의 영화 같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기적이 서부전선 서북단 예페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자발적 평화운동은 서부전선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주도한 사람은 없었지만 동참하는 사람은 많았다. 병사들이 만든 평화는 크리스마스를 넘어 연말까지 이어졌고 일부에선 수개월간 지속됐다. 타의에 의해 전장에 내몰린 대부분 병사들은 살생을 싫어했고 인간을 사랑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병사들이 만든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의 개’들이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각국 지도자들은 전장의 친교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들은 평화가 자신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그들은 평화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친교를 막기 위해 참호를 떠나는 행동을 금지했고, 이를 어기면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전투가 독려됐다. 어제까지 같이 공을 차던 친구에게 총을 쏘고 담배를 나눠 피우던 이웃의 등에 칼을 꽂았다. 참호는 다시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됐고, 무인지대는 다시 시체로 뒤덮였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밀려 휴전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전쟁은 이후 44개월이나 더 계속됐고 9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이 책에 나온 위대한 휴전의 주인공들 상당수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들이 무의미한 참호전 속에 목숨을 놓은 날에도 전선의 지휘소에서 본국 대본영에 보낸 전문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쓰여 있었을 것이다.

 

 

 

 Scene #3  ‘평화’라는 절박함이 총 대신 사랑으로 무장하다

 

예수가 마법과 상상, 환상과 우연을 아무리 동원한들 기적에 관한한 양국 병사들의 공통된 간절함에서 비롯된 평화로운 시간의 기록을 따를 자가 있을까. 물론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쟁사에 축도 들지 못하는 소사(小史)도, 예수의 기적도 다 환상이고 우연일 뿐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기적이란 없는지 모른다.

 

아름다웠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버린 몇 개월간의 평화. 이 이야기가 어쩌면 완충지대의 평화가 단 하루의 몽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암시할 수도 있겠다. 크리스마스의 휴전과 그 이후로 잠깐으로나마 지속된 평화의 시간이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기록한 전쟁이라는 참혹한 서사와 비교하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적이라고 하는 것도 ‘불가능의 가능’이 아니라, 단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의 실현.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눈물과 정성 그리고 사랑이 쌓여 이뤄진 결과일 수 있다. ‘기적’에도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간절함. 성서에서도 ‘간절히 원하면 주신다’고 했다. 간절함이란 모든 마음과 노력을 쏟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방점을 찍는 부분은 이 현실적 결말이 아닌 환상적 화해의 공간이다. 병사들의 감각을 얼어붙게 만드는 거대한 포탄 소리와 총소리가 가득하고, 앞날을 기약하지 못하는 적막한 전선의 기운은 ‘가족’과 ‘사랑’, ‘신의 은총’이라는 대의 명제 앞에서 휘발된다. 총과 군모 대신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사랑으로 무장했다. 양국 병사들은 서로 적을 향해 총구를 겨냥해야 자신들이 원하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이들은 단순히 총을 내려놓고 크리스마스 연휴를 즐기고 싶었을까. ‘평화’라는 절박한 마음이 ‘살인병기’였던 군인들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게 만들었다. 만약에 전쟁이 좀 더 일찍 끝냈더라면 전쟁이 만든 명분 없는 증오가 아닌 사랑이 승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보는 이들의 내면적 갈등을 잠재운다. 사람이란 욕망과 윤리, 당위와 선택 가운데서 흔들리는 존재라는 것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상흔은 거시적 담론의 폭력으로 전도되고 그 가운데 개인들은 선량한 피해자로 채색된다.

 

책 마지막 장 소제목으로 인용된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좋은 전쟁은 없다. 그리고 나쁜 평화도 역시 없다. 평화를 위해 반드시 거창한 이론이나 조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작은 행동만으로 충분하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북프랑스 전선에서 살벌하게 대치하던 독일, 프랑스,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진영논리나 국수주의,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순식간에 녹인 것은 의외로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독일군 참호에서 흘러나온 캐럴은 전선에서 오래전에 죽어버린 감정을 일깨웠다. 그가 부른 노래에는 유럽 젊은이들의 공통적 문화와 가치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공감대가 이루어지면서 적국임에도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거룩한 밤에 깊은 어둠을 뚫고 들려온 평화의 노래는 일시 전쟁의 위력을 잃게 만들었다.

 

어느 역사가는 진정한 20세기의 시작은 1914년 12월 14일이라고 말했다. 제국주의의 광기가 유럽 대륙을 휘몰아치던 시기, 유럽의 어느 들판에서 전쟁의 당사자인 젊은 병사들이 맺은 이 작은 휴전은 우리들로 하여금 전쟁과 평화의 의미에 대해서 곱씹어보게 한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소사일 수도 있겠지만 전쟁의 험상궂은 표정을 드러내 전쟁을 혐오하게 만드는 대신, 잠시나마 세상에 강림한 평화를 보여줬다. 이를 갈망하게 만드는 짧지만, 강렬했던 역사의 한 장면이다. 프로이트와 전쟁을 주제로 서신을 교환하던 아인슈타인이 남긴 다음의 말처럼. “우리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나머지 인류도 평화주의자가 될까요?”

 

‘Freedom and peace are not free.’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평화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꼭 무기에 의지한 희생에 의해서 평화를 얻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담대한 용기와 증오의 벽을 스스로 허무는 노력만 있다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희생 없는 평화가 단지 현실 불가능한 이상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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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펭귄클래식 43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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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산타클로스와 스크루지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교회에서 울린 단 한 번의 종소리가 얼어붙은 강을 타고 마을에 들어선다. 시간을 굽는 빵가게를 지나 차가운 손을 비비며 꽃을 파는 여인을 위로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자를 스친다. 도시를 울리는 청명한 종소리가 있는 시간,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떨어지는 눈송이보다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크리스마스이브다. 남루한 옷차림의 과일장수가 열손가락만으로도 계산되는 수입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지나가던 부랑자에게 사과 하나 건네 줄 수 있는 날, 당장 집에 먹을 것이 없더라도 따뜻한 난로가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날, 다리 밑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의 주머니가 가득 채워질 만한 날이다.

 

이런 날, 스노우볼 같은 지구에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눈송이가 한 사내만은 그저 스쳐지나간다. 그 앞에서는 종소리도, 눈송이도 힘없이 사라질 뿐이다. 평생 크리스마스 캐럴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을 것 같은 스크루지 영감. 그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들떠있는 당신을 노려보며 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떠들고 다니는 놈들은 모조리 푸딩과 함께 푹푹 끊여 버려야 해.”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으레 화제에 오르는 캐릭터가 산타클로스와 스크루지다. 산타는 착하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해주는 데 반해 스크루지는 인색한 성격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선행의 주인공인 산타 할아버지는 현실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동화속의 인물일 뿐이다. 오히려 이기적이며 탐욕스런 스크루지 영감이 우리들 모습에 훨씬 더 가깝다면 가까울 것이다.

 

 

 

 Scene #2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먼저 저 스크루지에게 돌을 던져라

 

스크루지를 보면 말 한 번 걸면 짜증 섞인 욕설이 나올듯한 욕쟁이 할아버지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성격이 괴팍하다는 이유만으로 스크루지를 욕하지 말자. 디킨스가 묘사하는 스크루지는 인색하고 욕심스러울망정 남에게 그렇게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젊어서부터 어렵게 모은 돈이기에 아끼면서 지내는 모습이 너무 지나쳐 사랑과 인정이 메마른 구두쇠의 화신처럼 비쳐질 따름이다. 자기 집이나 상점에서도 추위를 겨우 이겨낼 만큼만 석탄을 때는 정도다.

 

조금 달리 바라본다면 그렇게 비난을 받을 만한 부류는 아니라는 얘기다. 자신을 위해 흥청망청 쓰는 것도 아니고 씀씀이를 줄여가며 재산을 지키려 드는 데야 누구라도 나무랄 수 없다.

 

그는 우리보다 열심히 일했고 우리보다 검소했으며 우리보다 열심히 세금을 냈다. 그의 검은 옷차림과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보면 그 돈을 다 어디에 숨겨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보다 부지런히 살며 돈을 모았다. 말투와 표정을 제외하면 검은 옷을 입은 그는 성직자와 같은 금욕적인 생활을 해왔다. 가족을 떠나 홀로 지내는 성직자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혈육도 무시하고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사는 스크루지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규칙을 지키고 사는 또 하나의 성직자와도 같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정이 메마르는 고독의 그늘에 갇힌 현대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물론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 상점에서 일하는 점원의 급료를 자꾸 깎으려 든다거나 이웃을 돕는 데 인색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직원들의 월급을 기꺼이 더 얹어주려는 기업주가 드물고, 불우이웃 돕기에 대부분 등한하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는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캐릭터일 따름이다. 지금의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스런 까닭이다.

 

그가 숭배하는 돈, 그것만 바라보며 벽에 똥칠하지 않고도 먹은 욕을 명줄삼아 오래오래 살 스타일이다. 이 규칙적인 인간 스크루지는 그래서 독자들이 잊고 있거나 알면서도 스스로 묵인했던 인색한 인심에 자극을 줄 수 있다. 아무리 좋게 보려 죽을힘을 다해 애를 써도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심술궂은 시선 속에서는 그를 조롱하며 바라보는 우리도 멍청하고 방탕한 광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Scene #3  없는 산타를 기다리는 ‘어른 아이’ 스크루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렸을 때 동화로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스크루지가 개과천선하는 이야기의 과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스크루지는 세 명의 유령을 만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여행하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따뜻한 이유는 디킨스가 크리스마스에 끼워 넣어 억지로라도 만들려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내 것을 나누며 선을 베풀어 모두가 행복해야 의미가 있다는, 식상하지만 인류가 이뤄내야 마땅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요인으로는 비교효과를 들 수 있다. 돈 많은 구두쇠 스크루지의 외로운 크리스마스이브와, 돈 없는 가족의 따뜻한 크리스마스이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흡사 비교체험 극과 극을 보여준다. 스크루지의 비참한 죽음 이후 아무 의미 없어진 그의 구두쇠 노릇과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은 한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현실 사회의 문제점은 스크루지에 있다기보다 선물을 받기만을 내심 바라면서 오지도 않을 산타에 기대려는 분위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생활이 고단할수록,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수록 선물 보따리를 둘러멘 산타의 출현을 기다리는 마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다가 눈을 뜨고는 끝내 산타가 오지 않은 데 실망하고 마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처지다. 우리는 우습게도 세상에도 없는 산타는 잘 기다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법을 몰라 세상을 원망하면서 고독을 삼키는 ‘어른 아이’ 스크루지가 되어 있다.

 

어린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마스에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으며, 설혹 받은 경우라 해도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잣집 친구들에 비해 선물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다. 그나마 산타가 방문해 주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들뜬 나머지 다시 이듬해를 기대하면서 차츰 동화의 세계에서 벗어났던 기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화려한 차림의 산타들이 각종 상품을 선전하는 광고를 보면 이제 산타는 동화 속의 인물이기보다 장삿속을 위한 세일즈 도구로 전락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산타가 등장하는 요란한 크리스마스 행사들이 도리어 빈부격차를 느끼게 하고 동심을 멍들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 산타의 이름으로 선행을 베푼다면서 은근히 제 실속만 차리려는 사람들도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Scene #4  오늘의 스크루지는 언제나 외롭다

 

우리는 스크루지의 여행을 통해 외톨이로 지내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환경을 만난다. 스크루지는 언제나 외로웠고 고독했다. 가난은 그에게 한평생의 짐이 됐다. 어린 시절, 누군가 그에게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선물했다면, 마음을 위로하는 크리스마스를 만들어줬다면 어쩌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돈보다 마음이라는 이 유치한 원리를 그가 진정으로 깨닫기에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혹시 그의 변화가 효과 있는 이유를 스크루지의 재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린이 독자를 위한 축약본이 아닌 진짜 원작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가 가난해서 물질을 베풀지 못하더라도 스크루지의 각성은 의미를 지닌다.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그 양을 떠나 황폐한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크루지의 고지식한 인간성이 훨씬 더 돋보이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자신을 찾아온 유령의 안내로 과거와 미래 세계를 두루 둘러본 그는 자신의 인색함을 깨닫고 선뜻 거액의 자선 기부금을 내놓기도 하지 않는가.

 

혹시 자신이 스크루지와 비슷하다면 각자 스스로의 미래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단 하루라도 좋다. 특히 바로 이맘때.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와 그 다음날인 크리스마스 아무 날이어도 상관없다. 어리석은 우리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들이 우리를 위해 즐겁게 찾아온다면 정말 고맙겠지만, 유령이 무서워서 싫어한다면 어른의 눈으로 진짜 어른 스크루지를 다시 만나 보라.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을 수 없지만, 디킨스가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를 잊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만든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주위에 스크루지 영감이 있다면 그들에게 끊임없는 손길을 내밀어 온정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출간된 지 올해 170주년이 되었다. 소설 속 스크루지는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스크루지는 언제나 외롭다. 그 날이 크리스마스라 할지라도. 우리의 스크루지들이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모두 즐거운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맞는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내 옆의 스크루지가 행복해야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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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2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크리스마스 캐럴이 출간된지 160주년이예요? 와아....
사이러스님,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연말되셔요.

cyrus 2013-12-25 13:18   좋아요 0 | URL
메리 크리스마스, 마고님! :) 제가 숫자를 잘못 적었어요. 160주년이 아니라 170.. ^^;;
사랑하는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으시죠? 예전에는 크리스마스 따위 안중에도 없었는데
이 책 읽고 나니 기분이 즐겁고 행복하네요.얼마 남지 않은 올해 연말 이 크리스마스의 행복이 쭉
이어지길 바랍니다 ^^
 
식수 혁명 - 안전한 식수를 향한 인간의 권리와 투쟁
제임스 샐즈먼 지음, 김정로 외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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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네, 안녕하지 못합니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중국 구이린(桂林). 하지만 이 지역 주민의 평균수명은 50세에 불과하다. 중국인 평균수명인 71.8세에 비해 20세 정도 낮은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석회질에 오염된 물 때문이다. 몸속에 석회 성분이 쌓여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생명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계적으로 이같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는 인구는 11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몇 년 전에 공개된 UN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먹는 물 수질은 전체 122개국 중 8위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마시는 물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그래, 안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수질 기준을 초과한 수돗물, 지하수 등이 적지 않은 데다 먹는 물에서 발암물질까지 검출되면서 국민의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다.

 

‘2013년 상ㆍ하반기 상수도 미보급 지역 지하수 수질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실시한 조사에서 지하수 73%이상이 수질기준을 초과한 오염 지하수인 것으로 확인됐다. 관련 예산이 부족해 정밀조사를 추진하지 못한 채 오염된 지하수들이 방치하고 있으며, 해당 주민들은 본인들이 마시는 지하수의 오염 정보를 지자체로부터 통보받지 못한 채 계속해서 지하수를 음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음 소개하는 사례는 좀 더 강도가 센 충격적인 내용이다. 대구시가 지난 8~10월께 실시한 3개월치 수질검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 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동네 우물 13곳 중 8곳에서 발암물질인 ‘1.4-다이옥산’이 지속적으로 검출되었다.

 

이번에 검출된 1.4-다이옥신은 먹는 물 기준치인 0.05㎎/ℓ이하의 수치를 기록해 그나마 다행인 상태이지만, 시의 허술한 우물 관리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말았다. 대구시는 동네우물에서 검출된 유해물질이 어떤 경로로 유입됐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수질관리를 위해 매월 일반세균 등 47가지 항목의 수질검사를 실시했다고 변명했지만, 대부분 우물에서 다이옥신뿐만 아니라 황산이온, 불소 등 몸 안에 장기간 축적 시 각종 부작용을 유발하는 유해성분들이 계속 측정되고 있다. 한 곳당 하루 평균 360여명의 대구 시민이 우물을 통해 식수를 받고 있기 때문에 특히 노인이나 임산부 등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Scene #2  병에 든 생수가 수돗물보다 위생상 좋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우리는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이 아닌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있다. 식수로 수돗물이 외면당하게 된 이유는 수돗물에 대한 막연한 불신감 때문일 것이다. 수자원공사가 올해 제출한 국감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국민 3.7%만 수돗물을 그대로 마신다고 한다. 통계가 보여준 것처럼 수돗물에는 ‘막연한 불신’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수돗물 원수 중 70~100%는 하천수와 댐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의존한다. 그래서 각종 산업폐기물 오염과 대형 수질사고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수돗물을 기피하는 또 다른 이유로 '소독약 냄새'가 있다. 냄새가 날 거라는 걱정 때문에 마시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전국 200여 가정의 수도꼭지의 물을 검사해봤더니 수돗물의 수질이 정수기 물이나 먹는 샘물에 비해 별반 차이가 없었다. 비슷한 양의 미네랄 성분을 함유하고 있었고 먹고 마시는 물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해마다 크고 작은 수도 사고를 접하게 되면 평소 수돗물 공급을 원활하게 했더라도 사고가 한 차례 발생하면 신뢰는 대중의 불안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싸여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한 수도 사고에만 집착해 수돗물을 오랫동안 불신한다면 편하고 쉽게 마실 수 있는 물을 가게에 파는 생수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는 경제적 낭비다. 언론에 보도되는 수도 사고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알게 된 수돗물 소독약 냄새 루머를 자주 접하게 되면 하나의 고정 관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생각의 편향 때문에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그 쪽으로 치우치게 돼 버린다. 비행기 추락 사고를 연일 보도된다고 해서 비행기 사고로 사람이 죽을 확률이 자동차 사고 사망률보다 높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의 판단이다.

 

수돗물을 불신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지갑에 돈이 새는 것을 감수해서라도 병에 든 생수가 위생상 좋다고 믿을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마시는 물의 위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은 수도 사고로 인해 질병으로 사망하는 확률이 병에 든 생수를 마시고 사망하는 확률보다 높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Scene #3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은 인류의 원초적 욕망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러한 착각을 하도록 부추기는 세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병이 든 물을 파는 생수업체들이다. 생수산업이 단기간에 발전한 데에는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불신을 키운 것은 생수업체였다. 생수업체들은 자사의 제품을 선전할 때 '깨끗함', '안전', '믿음'을 내세웠다. 과거에는 자신들의 경쟁상대라고 할 수 있는 수돗물에 대해서는 '소독약 냄새 나는 비위생적인 물'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공격했다.

 

지금도 대중의 지갑을 열게 만들 정도로 생수업체의 힘은 막강하다. 그래서 다수의 대중은 생수업체가 만든 물을 믿고 마신다. 한 병에 만원이 넘는 최고급 생수가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워터 바'에서 맛 좋은 물을 권하는 '워터 소믈리에'까지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1초마다 1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생수병 마개를 연다고 한다. 대동강 물을 팔아넘긴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가 더 이상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생수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비싸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일명 프리미엄 생수. 하지만 정작 프리미엄 생수에 대해 잘 알고 마시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프리미엄 생수를 찾는 고객은 일반 생수보다 미네랄 성분이 더 풍부하고, 수질관리가 더 철저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식수 혁명』의 저자인 제임스 샐즈먼은 편리함과 맛, 건강 그리고 스타일로 무장한 ‘생수 마케팅’의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고, 생수의 안전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수돗물에 비하면 생수는 규제가 더욱 느슨하고, 감시도 더 적게 이루어진다. 또한 상표에 표시된 내용은 대개 무의미하고, 기재 사항도 적다. 일부 대규모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생수가 수돗물보다 더 많이 오염되어 있고, 때로는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많다. 생수가 수돗물보다 더 안전하다고 가정하면 마음이 편해질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거의 없다. (271쪽)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프리미엄급 생수는 프랑스 산 에비앙이다. 알프스 산맥 에비앙 지역에서 채취한 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생수다. 알프스 산은 평생 한 번 갈까 말까할 정도로 유명한 명소다. 비록 희고 차디찬 알프스에 쌓인 눈을 만져 보지는 못하지만, 그 곳에 있는 눈이 녹여서 생성된 물이 어떤 맛인지 알고 싶어 한다. 수돗물이나 병이 든 생수나 물맛의 차이는 없는데도 말이다. 알프스 산맥에 채취되었다는 제품의 소개 내용과 '에비앙'이라는 브랜드를 보는 순간 병에 들어 있는 물이 알프스 산 생수라고 믿는다.

 

그러나 좀 불순한 생각을 하자면 에비앙 문구가 붙어있는 병에 수돗물을 담아 높은 가격으로 판다면 공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전국 대형마트에 꽤 적지 않은 수량으로 진열되고 있는 그 많은 에비앙 생수에 진짜 알프스산 물을 담은 것인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에비앙을 판매하는 회사가 제아무리 100% 알프스산 물이라도 확신을 줘도 말이다. 똑똑한 소비를 지향하는 소비자라면 에비앙의 판매 전략은 최고급을 선호하는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한 마케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고급스러운 물을 마시고 싶고, 그 물이 위생상 좋다고 신뢰하는 소비자의 심리적 착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스놉 효과(Snob Effect, 속물주의)에 비롯된 소비 행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물이 인류의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물질임을 생각한다면, 생존을 위해서 깨끗하고 건강에 좋은 물을 마시고 싶은 인류의 원초적 욕망이 소비 행태로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 유럽 각지에서 순례 코스가 인기를 끌 때 사람들이 가장 찾고 싶었던 것이 ‘성스러운 물’이었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성스러운 물'을 불치병 환자가 한 모금만 마시거나 몸에 바르면 병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순례길 위에서 성직자들은 치유력으로 소문난 샘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급증하는 순례자들에게 진짜 성수(聖水)를 입증하기 위해 저마다 휴대용 물병을 만들었고, 여기에 다른 샘물과 구별되는 특수 문장을 새겨 넣기도 했다. 이미 중세에 쉽게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최고급을 선호하게끔 만드는 생수판매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생수병의 위생을 논하기 전에 꼭 알아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 또 있다. 생수병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의 사례가 있다는 점이다. 1L짜리 페트병을 하나 만드는 데 물 3~4L가 필요한데다 석유도 약 29mm가 들어간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페트병이 쓰레기로 버려진다는 사실이다. 환경친화적인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정말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다면 플라스틱으로 제조된 병에 있는 물을 안 마시는 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다.

 

 

 

 Scene #4  '블루골드' 시대에 맞춰 등장한 물 민영화 문제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매번 지겹도록 강조하는 사실이지만, 물은 우리 삶에 있어서 정말 소중한 자연의 물질이다. 오늘날 물은 우리 실생활에 다방면으로 사용될 정도로 필수적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물을 소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식생활에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이 중요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물은 너무 쉽게 쓴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과 이상 기후로 인해 점점 물이 고갈되어 부족할 수도 있는 위기의 현실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물의 소중함을 알리고 물 부족의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UN은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지정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물의 중요성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막연하게 물을 아끼자고 전하기보다는 우리 삶에 있어서 땔래야 땔 수 없는 '식수(食水)'를 아낄 것을 강조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지금 우리가 수돗물이 더 위생적이냐, 아니면 생수병이 건강하고 안전한 것인지 거기에 얽매여서 따질 처지가 아니다. 이 문제 또한 중요하지만, 물의 안전성을 둘러싼 전지구적 관심과 논쟁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수돗물 vs 생수병' 못지않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 정말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걱정하고 싶다면 좀 머리 아프겠지만 인류의 생존 여부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즉, 식수는 누구의 것이며 얼마나 안전하며 또 어떻게 관리·분배되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국가가 직접 해결해야 할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개인의 삶을 넘어서 인류 전체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기본적이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전문가들은 20세기가 '블랙골드(석유)'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블루골드(물)'의 시대라고 말하면서 물 산업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물 부족 심화로 해수와 폐수를 담수로 만드는 수처리 사업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데다가 중동, 아프리카 등 산유국이 막강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깨끗한 물을 찾고 있는 것이 전 세계가 물 산업에 주목하는 이유로 손꼽힌다.

 

물 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하수도 민영화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식수의 본질’을 논하기 위해서는 권리 대 시장 혹은 공유 대 사유 문제로 확대되는 물 공급 민영화 이슈를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 공급 민영화 찬성론자들은 민간 기업의 참여를 늘려 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서비스 질과 수도 접근성이 향상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민영화 반대론자들은 물 사용에 부과되는 세금이 높아져서 양질의 상하수도를 사용하지 못하는 가난한 국민이 소외되고, 양극화가 더 심화될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공공부문 민영화와 관련된 논란을 되돌아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일부 국가의 물 민영화 성공 사례도 있다. 깨끗한 양질의 물이 절실히 필요한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물 민영화를 도입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저자는 급수시설의 민영화 도입 이후 물 부족이나 오염된 물을 마셔 병사한 어린이 사망률을 감소시킨 통계자료를 물 민영화 필요성의 근거로 내세운다.

 

그렇다고 이 책의 저자가 단순히 보수적인 자세를 취해 물 민영화를 옹호하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 공급 민영화 문제를 단순히 시장논리가 아닌, 인간 기본권을 우위에 두고 바라볼 것을 주목하고 있다. 민영화 찬반 문제에 있어서도 '물은 인류 전체의 소중한 자연의 물질'라는 기본 전제를 놓치지 않는다. 지불 능력이 없는 가난한 국민도 안전한 식수를 마실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Scene #5  물은 인류 생존에 직결되는 자연권이자 기본권이다

 

전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공공기관에 '민영화'의 그늘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최근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철도 민영화', '의료 민영화'와 더불어 우리나라 역시 '물 민영화' 문제를 절대로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는데 물 민영화 문제만은 여유롭게 즐기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철도, 의료 민영화 논란에 묻혀서 그렇지 몇 년 전부터 물 민영화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지자체 재정 절감을 목표로 추진된 상수도 민간위탁은 현재 높은 수도요금과 낮은 유수율, 독소 계약 등의 문제를 낳으며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전국의 지자체 상수도 전면 위탁과 수익형 해외사업 등을 추진하며 ‘물 민영화’ 방침을 염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다른 민영화 문제나 해결되지 못한 여러 가지 장기적인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이에 만약에 정부가 '묻지마 식' 물 민영화를 조용히 추진한다면 언젠가는 지금처럼 정쟁으로 이어질 정도로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갈등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철도, 의료 민영화 그 다음에는 물 민영화. 조만간 '민영화 3종 세트'를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무조건 민영화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물 민영화 도입 여부 문제도 민영화의 장단점에만 초점에 맞춰 해결하려고 한다면 절대로 절충적인 합의를 도출할 수 없다. 저자의 생각처럼 물은 모든 사람의 생존과 직결되는 자연권이자 기본권이라는 사실은 숙지해야 햔다. 모든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삶의 양질을 높이도록 고민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 민영화 도입 여부를 먼저 따져보는 것보다 지금부터라도 물, 아니 자연권이면서도 기본권으로서의 식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책무가 필요하다. 결국, 깨끗한 물을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이 일상적인 권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의 지구에 살면서도 기본적인 삶의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나라도 있다.

 

'사 먹어야하는 물'과 '안전하게 먹어야하는 물'. 성분이 같은 물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물을 바라보고 사용하는 방식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의 물은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추상적이면서도 일반적인 정의에 가깝다고 한다면 후자는 인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식수의 실질적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안전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한 인류의 투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올바르고 정당한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수의 중요성을 깨닫는 인식의 변화가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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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 상 「거울」중에서 -

 

 

 

 

 Scene #1  대자보를 찢을 권리

 

고려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주현우씨가 코레일 노조 파업,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등을 언급하며 “하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다”고 교내에 써 붙인 대자보의 여파가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 대학가에는 주씨 주장에 호응하는 ‘릴레이 대자보’가 나붙고, 일부 중·고등학생들까지 이 같은 분위기에 동참하고 있다.

 

주씨는 앞서 지난 10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후문 게시판에 2장짜리 대자보를 붙였다. 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서 급속도로 퍼졌고 대학가는 물론 중·고등학생도 대자보를 써 붙이고 사진을 올릴 정도로 확산했다.

 

반면 보수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에는 고려대, 서강대에 붙은 대자보를 훼손했다는 글이 ‘인증 사진’과 함께 올라와 논란이 일고 있다. 건국대에서도 일베 회원에 의해 훼손된 대자보가 발견됐다. 일베 측은 반박 대자보를 제작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한편 교내에 붙은 대자보를 훼손하는 과정을 동영상을 촬영해 일베 사이트에 올린 사건도 있었다. 다음날인 문제의 학생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H 대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찢은 본인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H대생은 자신의 행위를 “소통의 묵살이 아니라 제 목소리를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누군가가 대자보를 붙일 권리가 있다면 그것을 찢을 권리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어떤 대자보를 교내에 붙이면 들어있는 메시지가 한성대를 대표하게 된다. 대표성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 또한 쉽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런데 H대생은 글 마지막에서는 “제 멋대로 행동을 했고 저로 인해 피해를 보신 분들께 사과드리며 대자보를 쓰신 분께도 사과드린다”고 적었다. 또 “이번 사건은 제 어린나이의 객기로 치부해주시면 감사하겠다”며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Scene #2  일밍아웃인가, 어린 나이의 객기인가? 

 

최근 일베 이용자들 사이에서 ‘일밍아웃’이 유행하고 있다. 과거 일베 활동 사실을 극도로 숨기던 행태를 벗고, 자신이 일베 이용자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알리는 방식은 은밀하다. 자신의 정체를 대놓고 밝히지는 않지만, 일베를 형상화한 손가락 표식을 통해 ‘인증’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는 과거 일밍아웃을 기피하던 일베 문화와는 대별된다. 이전 일베 이용자들은 스스로를 ‘장애인’, ‘병신’이라 부르며 일베 이용자임을 외부에 드러내는 걸 숨기며 자기비하적 유희를 즐겼다. 하지만 최근 일베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집단으로 묘사되면서 일부 일베 이용자들 사이에서 일베 이용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안녕들‘ 대자보를 찢은 행위를 자신의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고백한 H대생도 어찌 보면 일밍아웃이라고 볼 수 있다. H대생이 게시판에 남긴 글의 전문을 읽어보면 대자보를 찢는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인터넷 커뮤니티’가 바로 일베인 것이다.

 

하지만 H대생의 일밍아웃은 기존 일베 회원들의 악명 높은 일밍아웃 사례와 비교하면 꽤 순진한(?) 편이다. 일베 회원들이 이 사실을 본다면 그의 이중적인 태도에 ‘민주화’(일베 게시글에 대한 반대 또는 비추천. 진보적인 주장이나 일베에서만 가능하는 폭력적이고 비하에 가까운 농담을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의미함)한 배신자로 규정했을 것이다.

 

H대생은 대자보를 훼손하는 장면이 있는 동영상에서 일베를 상징하는 어떠한 손짓도 하지 않았으며 훼손한 뒤에 찍는 인증샷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이 일베 회원이라는 사실은 학교 게시판에서 너무나 정중하게 고백한다. 보통의 일베 사용자들은 모든 존칭을 생략하고 서로 반말을 한다. H대생이 대자보 훼손 동영상을 일베 사이트에 올렸을 때 반말투로 글을 썼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래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베 회원이라면 학교 게시판에서도 반말로 일밍아웃을 당당하게 선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H대생이 착한 일베 회원이라고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베 회원이라면 써야할 표현 방식 대신에 높임말과 완곡어법을 선택한 것뿐이다. 인증샷이나 일베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일베 회원들의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느낌을 덜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과문을 통해 일밍아웃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대자보를 훼손한 행위에 대해서도 기존의 일베 회원과 비슷하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자신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H대생이 일베 회원이라는 인식은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일베 회원들은 반사회적 행동으로 경찰에 입건되거나 법적으로 처벌을 받게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들 중에는 가끔 사과문을 작성해서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H대생의 행동이 자신이 스스로 표현한대로 ‘어린 나이의 객기’로 볼 수는 있겠지만 제아무리 일베 회원들이 혐오하는 표준말을 사용해도 일베 회원 특유의 행동과 그들만의 사상적 구조는 완전히 지울 수 없다.

 

 

 

 Scene #3  삐뚤어진 인정 욕구의 산물, 일베

 

일베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돌연변이 괴물”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일베충’은 상식을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빗대 이르는 말이 돼버렸다. 여성, 외국인, 다문화가정, 호남지역에 대한 일부 일베 회원들의 혐오는 도를 넘어섰다.

 

'여성 비하'는 그야말로 일베의 핵심 코드 가운데 하나다. 여성을 성적 도구, 심지어 성폭행 대상으로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게시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대상엔 연예인과 일반 여성들은 물론, 어린이와 종군 위안부까지 포함된다. 여성 혐오에 노소를 가리지 않는 셈이다. 초등학생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한 사진과 함께 '로린이'란 표현으로 물의를 빚은 끝에 임용을 포기한 예비 초등 교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로린이'는 로리타와 어린이의 합성어로, 어린 여자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일베 용어다.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인 '김치녀'는 그나마 점잖은 수준이다. 여성을 노골적으로 폄하해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한정시키는 단어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보슬아치'다. 여성 성기에 빗대 '여자인 게 벼슬인 줄 안다'는 뜻이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볼 수 없는 그들의 태도와 행동에서 박가분은 일베의 사상을 규정한다. 한 마디로 “나는 누군가의 정체성을 혐오할 권리가 있다”로 압축한다. 눈살 찌푸리는 일베 회원의 행동이 혐오스럽다고 비난과 욕설로 퍼부어도 소용없다. 이들에게 씨알도 안 먹힌다. “혹시 나, 너 혐오하냐?” 오히려 상대방을 공격적으로 혐오하는 권리를 하나의 일부심(일베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식할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일베가 성별·지역·정치적 지향 등에 대한 편견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회원들끼리 ‘묘한 해방감’을 공유하면서 정치·문화적 해방구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면서 박가분은 일베에도 나름의 사상적 의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컬트문화로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일베 회원들의 목적은 인터넷에서 타인이 불쾌하도록 도발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이들은 현실에 나오면 우스워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인터넷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공론장에 대해서는 불신하고 있다. 현실의 맨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고 있다. 결국 젊은 세대의 혐오문화가 현실에서 좌절한 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로 나타난 것이다. 삐뚤어진 인정 욕구의 산물이 만들어 낸 거대한 흔적들이 모여서 바로 지금의 ‘일베’를 탄생시켰다.

 

 

 

 Scene #4  촛불 시위자에서 일베 회원으로 변신하기까지

 

일베가 강경 극우의 집합소로 되는 과정을 되돌아보면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베의 시작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베는 ‘디씨인사이드’에서 갈라져 나왔다. 디씨인사이드에 올라온 게시물 중 ‘19금’, ‘하드코어’, ‘지나친 비난 글’ 등 수위가 높아 삭제될 우려가 있는 게시물을 따로 모아 저장하는 사이트에서 비롯했다. 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이다.

 

일베가 극우 혹은 강경 우익의 집결지로 자리매김한 것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여론 시장은 오랫동안 진보좌파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졌다. 일부 진보좌파 누리꾼들은 그간 온라인에서 보수 세력을 비방, 희화화하곤 했다. 진보좌파가 사실상 독점하던 온라인 여론 시장에 일베가 등장해 균형을 맞춘 측면도 있는 것이다.

 

특히 정치·윤리적 이상이 분출됐던 대규모의 촛불 시위(2002년, 2008년)가 현실 정치에서 좌절된 후 노무현 정부의 무능함을 비방하는 누리꾼이 등장했다. 이제는 촛불에 의지하는 ‘감성팔이’에 속지 않으며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떤 이상과 이념을 내세우며 행동하는 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온라인 여론 시장의 판도가 달라진 것이다.  “좌좀(진보진영을 좀비로 비하해서 지칭하는 말)의 행태를 고스란히 비방과 희화화로 갚아주고 있다.

 

그래서 박가분은 일베를 ‘촛불시위의 쌍생아’라고 주장한다. 일베는 과거 촛불시위에서 드러난 급진성, 욕망의 정치, 윤리적 이상주의가 변질된 형태로 계승된 것으로 본다.

 

 

 

 Scene #5  ‘안녕들 하십니까’를 보면 ‘일베’가 보인다

 

일베가 보수의 온라인 공간이라고 한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진보의 온라인 공간은 ‘오늘의유머’(오유)가 있다. 오유와 일베가 인터넷공간을 넘어 오프라인에서도 각계의 주목을 받으며 진보와 보수 간 치열한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구도로 나뉘면서 성향이 비슷한 사용자들끼리 똘똘 뭉치는 흐름을 보여준다. 공통적으로 오유와 일베는 운영자 개입을 최소화하며 운영되고 있다. 규제가 없는 사이트에서 네티즌들은 자유로이 자신의 생각을 올리고 나눴다. 그들의 구호는 "무한 공유"였다. 때론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게시물도 넘쳐났다. 표현에 대한 규제가 없다 보니 지나친 비난과 욕설이 난무하기도 하다.

 

서로 다르면서도 유사한 일베와 오유를 마르셀 모스의 ‘증여와 답례의 호수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물의 증여와 답례는 단순한 경제적 가치의 교환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시키는 의사소통의 방법이다. 관계를 맺고 사는 모든 인간과 집단에는 주면 받아야 하고 받으면 되돌려주어야 하며, 받지 않으면 상대의 의사를 거부하는 것이고, 되돌려주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의미로 잠재적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과거 진보 세력 누리꾼이 많았던 다음 아고라나 지금의 오유를 보면 보수 세력을 비하하는 짤방이나 글을 만들어 공유하면(증여) 그것에 대해서 동의하고 공감하는 반응(답례)을 하면 서로에 대한 결속력을 확인하고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일베도 이와 유사한다. 일베 회원들은 진보 세력, 여성, 5.18의 역사적 의미를 비난한다. 이에 대해서 서로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섞는 불손한 태도로 댓글을 달면서 ‘우리 모두 병신’이라는 논리가 전제된다. 자기를 혐오하면서도 타인을 함께 혐오하는 커뮤니케이션 형태는 일종의 동질감과 평등주의를 형성한다. 따라서 서로를 혐오할 수 있다는 것이며 상대방에 대한 적대와 폭력성을 너무나 쉽게 표면 위로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념 성향이 다른 ‘일베 vs 오유’ 또는 최근에 일어난 인기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팬클럽과 일베 간의 대립은 부정적인 호수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커뮤니티의 부정적 호수성은 대자보를 통해 부조리한 사회문제 관심을 촉구하는 ‘안녕들 하십니까’ 현상과 일베 간의 대립에서도 존재한다. ‘안녕들’의 대자보 열풍은 그동안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과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던 대학생들에게 일종의 각성제 역할을 해줬다. 젊은이들이 앞 다퉈 응답자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수록 젊은이들의 공감과 동참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러자 여기에 맞서기 위해서 일베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족족 대자보를 찢는 행위를 하고 있다. 대자보를 훼손한 상태에 일베 손가락 표시가 있는 인증샷을 공유함으로써 폭력적인 행동도 대자보 현상에 반박하는 소통의 행위로 정당화한다.

 

여기에서도 언제 어디서든 누구든지 혐오할 수 있다는 일베의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응답자보를 읽고 그 내용에 공감하는 대학생들은 ‘안녕들’ 집회에 참여한다면, 반대로 반박자보를 붙인다거나 ‘안녕들’ 자보를 훼손하는 인증샷은 일베 회원 그들 나름대로 공감하게 만들어 ‘안녕들’ 운동을 ‘좌좀이 주도하는 선동질’로 인식하게 만든다. ‘안녕들 하십니까’와 ‘일베’. 이들이 서로 지향하는 입장은 정반대지만, 그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증여와 답례의 호수성’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서로 합의적 협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한 단절된 상태가 지속된 채 말이다.

 

 

 

 Scene #6  희망 없는 불안은 혐오의 괴물을 낳는다

 

혐오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불안'이다. 현재 일베 회원들을 잠식하고 있는 극단적인 혐오들 역시 결국 궁극적으로는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불안들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 상승에 대한 남성의 불안', '민족 정체성의 불안', '갈수록 힘들어지는 취업에 대한 희망에 대한 불안' 등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그 내용을 모아 보면 결국 이는'세상에 대한 집단적인 불안'과 연결되어 형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대상에 대한 혐오는 하나의 맥락으로만 뭉뚱그릴 수 없는 각기 다른 불안과 윤리적, 사회적 맥락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혐오의 맥락은 각기 달라도 혐오의 조직화는 ‘일베’라는 이름으로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경제적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이를 활용하는 조직화된 혐오와 비하는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점점 일베가 판을 치는 한국 사회는 이제 극단화된 혐오의 시대를 맞이할 것인지 혹은 혐오로 표출된 불안을 다른 곳을 향해 분출시킬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혹자는 요즘 확산되고 있는 '안녕들 하신가요'라는 안부의 인사가 개인들의 불안이나 정치적 호소를 넘어, 차별과 혐오 속에 존재해 왔던 서로를 확인하는 더 세심한 인사로 확대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녕들’ 현상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안녕들’ 현상이 미묘하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촉매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단발적으로 끝날지 알 수 없다. 다만 대자보에 적힌 주장이 논리가 부실한 감성 호소에 불과한 채 긍정적인 호수성이 이어진다면 그들만의 자율적인 공론의 장이 될 수 있다. 현실 사회에서 요구하고 싶어 하는 대학생들의 열망을 대자보로 표출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촛불 시위의 실패가 재현될 수 있다. 촛불시위에서 보여준 변화와 개혁에 대한 희망 섞인 열망이 현실 정치에서 좌절되어 사라지자 불신과 불안만 남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식고,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면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직면하게 된다. ‘안녕들’ 현상이 단발성으로 끝난다면 비극적인 쌍생아가 태어날 것이다. 그 이름이 바로 ‘일베’다.

 

희망 없는 깊은 불안은 혐오의 괴물을 낳는다. 십여 년 전 변화된 세상을 바라는 희망을 양초에 피웠던 그 작은 불씨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거기에 동참했던 일부는 ‘일베’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채 오늘도 불확실한 이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괴상한 몸부림을 친다. 가상의 온라인 공간에서 희망 없는 불안을 숨기려고 나 자신을 ‘병신’ 취급하면서 타인을 혐오한다. 그들을 ‘일베충’이라고 혐오하고 업신여겨도 소용없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비화와 혐오을 먹고 살면서 낯짝 두꺼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의 내성을 지녔으니까.

 

박가분은 희망하는 사회에 대해 소통하는 공간을 많이 만들어가거나 진보좌파가 일상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어야 일베의 사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글쎄, 그의 대안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그것마저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는 미완의 ‘이상’으로 남게 될까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한다. 우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일베의 ‘조직화된 혐오’의 위험성을 방지하는 것이 시급하다. 혐오를 혐오로 맞선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知彼知己 百戰不殆. 그러기 위해서는 일베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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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의서재 2013-12-2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잘 읽었구요.

cyrus 2013-12-23 21:0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다른 분이 쓴 이 책의 서평도 읽어보고 있는데, 저자의 해석을 비판하는 내용도 있었어요. 오늘 다시 읽어보니 제가 저자의 관점에만 초점을 끼워 맞춰 현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생각해보네요. 그래도 긴 글을 읽어주시고, 제 생각에 공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여울 2013-12-2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약내용 잘 봤습니다. 감사!

cyrus 2013-12-23 21:1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긴 글인데도 읽어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하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일베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좀 더 다양해질거 같습니다. 그럴수록 잘못된 분석과 예측도 난무하겠죠... 제가 어제 글에 쓴 생각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틀렸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볼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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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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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것이 세상이라고 하면 결국 세상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체스 게임이겠죠. 와,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제가 그 말들 중의 하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말이 될 수만 있다면 졸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물론 여왕이 되는 것이 더 좋기는 하지만요.”

 

-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북폴리오(235~236쪽) -

 

 

 

 

 Scene #1  붉은 여왕 효과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은 쉼 없이 뛰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항상 제자리다. 주변 세계도 함께 뛰고 있기 때문이다. 앨리스가 말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렇게 빨리 뛰면 다른 곳에 도착해 있거든요.” 여왕이 말한다. “여기선 같은 자리를 지키려고 해도 죽어라고 뛰어야 해. 만약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 이상 빨리 뛰어야 한다고.” 이런 일화에서 비롯된 게 ‘붉은 여왕 효과’다. ‘붉은 여왕의 효과’는 어떤 대상이 변화하더라도 주변 환경이나 경쟁 대상이 더 빠르게 변화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뒤쳐지게 되는 원리를 의미한다.

 

무조건 빨리 뛰기를 원하는 붉은 여왕과 그녀의 빠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채 뒤처지는 앨리스. 이 두 사람의 제자리걸음은 소설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붉은 여왕과 엘리스'처럼 두 블록으로 갈라지고 있고 인류는 제자리걸음 중이다.

 

'플루토노미(Plutonomy)와 그 나머지로.’ 플루토크라트는 부(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플루토스’와 권력을 의미하는 ‘크라토스’의 합성어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부유층을 이른다. 용어는 생소하지만, 이들은 세계 경제의 혁명적인 변화의 물결을 타고 그 정점에 오른 글로벌 슈퍼리치라고 볼 수 있다.

 

 

 

 Scene #2  0.1% 글로벌 슈퍼 엘리트, 플루토크라트

 

오늘날 0.1%의 부자들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어들였을까? 현대 플루토크라트가 급속 성장한 배지는 기술혁명과 세계화다. 이 두 가지 힘이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정치적 요소와 결합해 산업혁명의 영향력과 규모에 필적할 만한 경제적 격변을 가져왔다.

 

이에 힘입어 미국과 서구 선진국은 19세기 말에 이어 두 번째 도금 시대를, 중국과 인도, 일부 개발도상국은 첫 번째 도금 시대를 맞는 ‘쌍둥이 도금 시대(Gilded Age)’가 도래했다. 이 두 도금 시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신흥 시장의 산업화는 서구 국가들에 새로운 시장과 공급망을 제공하고, 서구의 신기술들은 개발도상국들의 도금 시대를 가속화하는 형국이다.

 

오늘날의 승자 독식 경제를 이 세계화와 기술혁명의 산물로 볼 수 있다. 한 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이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지만 2등이나 3등으로 밀려나면 경제적 보상은 현저히 줄어든다. 이른바 ‘슈퍼스타 효과’다. 자신이 만들어낸 가치로 과거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더 부유해진 고객, 더 많아진 소비자. 금융기관의 더 좋은 거래 조건 덕에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구조다. 경제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인식하고 여기에 적응해 나가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벌어들일 기회임을 꿰뚫어본다.

 

1980ㆍ90년대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민영화와 규제 완화, 무역 장벽 완화의 흐름은 기술과 지식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 또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 모바일과 무선 등 신기술혁명은 새로운 비즈니스 무대를 열어가며 새로운 부를 탄생시켰다. 즉 혁명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프리미엄이 슈퍼엘리트의 등장을 촉진시킨 것이다.

 

 

 

 Scene #3  '상위 0.1%', 그들이 사는 세상

 

일반인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0.1%의 부자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우리가 TV나 언론에서 보는 몇몇 억만장자들의 모습은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대중친화적이다.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 발표 때마다 검정 터틀넥 티셔츠에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등장했고,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도 투자 설명회 때 후드 티를 입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 워런 버핏처럼 거액의 기부로 유명한 억만장자도 흔하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들 또한 플루토크라트에 속한다. 대중매체와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세계적 억만장자들이 아프리카에 있는 개발도상국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한다고 해도 '상위 0.1%'라는 아주 고귀한 수식어를 뗄 수 없다. 그들의 이름 앞에 '상위 0.1%'를 붙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

 

글로벌 신흥 갑부들이 점점 더 부유해질수록 더 폐쇄적이고 갈수록 일반인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산다. 그리고 그들의 기부 활동은 정부에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특권이다. 그러나 선한 목적이 있는 갑부들의 선행 활동을 비난하자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문제는 일부 신흥 갑부들이 폐쇄적으로 뭉치면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무시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들은 부당한 오해와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이 결국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또 다른 나라 동료 부자와 공동체를 이뤄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드러낸다. 파이는 커졌지만 슈퍼엘리트들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조각을 차지하는 셈이다.

 

 

 

 Scene #4  플루토크라트의 성벽이 높다하되 상위 1% 세상 아래 차단된 장벽이로다

 

2011년 가을에 시작된 반(反) 월가 시위는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플루토노미에 대한 저항이었다.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에 대해 경종을 울린 것은 물론 빈부 격차 심화라는 신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전 세계로 번져나갔던 시위 물결은 1년도 채 안 돼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 대한 분노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미국은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사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이렇게 꼬집었다. 그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이라 는 민주주의 정신과 '기회의 땅'을 내세운 미국이 현재 그들이 비웃던 유럽보다 못한 기회 박탈의 땅이 됐다고 지적했다. 스티글리츠가 산출한 계산법에 따르면 미국의 상위 1%가 소유하고 있는 국가 전체의 부는 40%에 이른다. 특히 상위층의 재산 구성을 보면 금융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노동이 아닌 금융자산을 통해 획득하고 있다.

 

미국의 양극화 문제가 월가시위로 본격적으로 표면화됐지만 한국도 양극화의 논란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회양극화이 심화될수록 슈퍼 리치의 영향력 또한 날로 높아져만 가고 있다.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의 백만장자는 5년 내로 지금보다 79%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제 한국의 상위 10% 이내 부자들의 다수가 강남에 몰려 그들만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고 있으며 경제위기 속에서도 소득은 크게 높아지고 있다.

 

누군가 엄청난 부를 거머쥐는 데에 정부가 한몫 거들기도 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하다. 누가 부를 얻을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플루토크라트들이 정부의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이유다.

 

세계화와 기술혁명이 가져다준 단맛을 맛본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는 파국 속에서도 오히려 중산층의 연봉이 지나치게 높다고 보며, 금융위기도 분수에 맞지 않게 처신한 중산층에게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부자증세 도입에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한다.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플루토크라트가 있다면, 그 세상의 나머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의 나머지들'은 상위 1% 부자들의 성공습관을 쫓고 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상위 1%'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는 장밋빛 희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세상의 나머지들'은 제자리걸음 중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오르지 못할 까닭이 없건데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 뫼만 높다 하더라 (泰山雖高是亦山 登登不已有何難 世人不肯勞身力 只道山高不可攀, 양사언)

 

누구나 쉬지 않고 노력을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는 근면의 교훈은 우리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만은 아니다. 플루토크라트가 만들어 낸 멋지고 화려한 성벽은 너무나 높기 만하고,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계층상승의 사다리'는 걷어차고 있다. 플루토크라트의 성벽이 높다하되 상위 1% 세상 아래 차단된 장벽이다. '세상의 나머지들'이 그들을 따라 오는데 너무나도 버겁기만 하다. 여왕이 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빈곤한 졸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발 빠르게 뛰고 있는 붉은 여왕을 따라잡지 못해 제자리에만 맴돌 수밖에 없는 앨리스처럼 말이다.

 

세상의 변화에 재빠르게 따라가고 부의 축적에 급급한 나머지 너무나도 동떨어진 세상에 헤매는 '붉은 여왕', 그리고 플루토크라트와 미처 따라가지 못해 뒤처지는 순진한 엘리스가 되고 만 '나머지들'. 결국, 이 세상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는 양극화 게임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체스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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