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
조이스 애플비 지음, 주경철.안민석 옮김 / 까치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자본주의의 경제적 패러다임

 

신자유주의가 비판받으면서 작년부터 자본주의 4.0 등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대안의 핵심은 시장 축소, 정부 확대 그리고 사회적 기업을 앞장선 휴머니즘 회복 등이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 금융자본의 폐해 등을 개선해야 하며 정부와 시장이 이전의 자본주의처럼 적대적이 아니고 협력적인 관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자유시장 즉 신자유주의가 비판을 받지만 강한 시장이 칭송받던 시절이 있었으니 역사는 반복하면서 조금씩 진전하는가 보다. 인간의 역사가 이 처럼 반복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불완전성으로 인해 인간은 진리에 가까워질 뿐이지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경제를 지배한 논리나 이념은 산업화 이후 시장과 정부의 길항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산업화 초기에는 정부가 시장을 압도했다. 이른바 중상주의로 국부 축적을 위해 관세와 규제로 수입을 억제하고 식민지 건설을 통해 수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각국의 소비자를 희생하고 상인과 제조업자만 배불린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가 대두됐다. 시장경제는 수많은 기업과 개인들의 의사결정으로 생산과 소비가 작동되는 경제시스템이며 가격에 의해 조정된다. 애덤 스미스는『국부론』에서 인간은 이기적일 정도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창출하게 된다고 봤다. 이런 시장경제체제에서 사람들은 과거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풍족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후생이 조화롭게 작용함으로써 시장경제의 자연스러운 작동이 중앙통제경제의 계획보다 우월함을 뜻한다.

 

 

 

 

 


애덤 스미스가 구축한 시장경제의 영향력은 산업혁명의 등장에까지 이어졌지만 빈곤 확산, 노사 대립, 경제 공황 등의 문제점이 유발하기 시작하자 정부는 제멋대로인 '보이지 않는 손'을 결박하기 위해서 직접 나서야 했다. 그것이 수정자본주의로 시장기능과 정부 통제가 혼합된 경제체제다. 이 이념 또한 소득분배의 불평등, 대량 실업, 자원 이용의 비효율 등으로 결국 미국의 대공황을 초래해 다시 정부가 강해지는 케인즈주의가 등장했다. 독점 금지, 소득 재분배, 정부가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뉴딜정책 등이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정부의 시장 개입이 더 이상 효과를 보지 못하고 기업 도산, 물가 상승, 실업 증가 등이 나타나자 애덤 스미스 체제로 회귀한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적 용어인 '트리클다운(Trickle down) 효과'는 넘쳐흐르는 물이 바닥을 적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고소득층 등 선도부문의 경제적 성과가 늘어나면 중소기업이나 저소득층 등 낙후부문에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가 활성화되는 효과를 말한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안에서 경제적으로 양극화는 오히려 심해져서 중간계층은 점점 빈곤층으로 떨어졌고 상류층과 극빈층의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는 현상이 심화됐다. 세계경제를 주름 잡았던 미국의 거대 은행 및 금융기관들이 도산을 하게 되면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나타나고 빈부격차, 경제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신자유주의 폐기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정부가 다시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이념이 대두된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이 우리가 경제 교과서에서 배우는 자본주의의 역사다. 긴 설명을 다시 짧게 축약하자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이렇게 세 가지의 경제원리로 분류할 수 있다. '자본주의 4.0'을 제안한 아나톨 칼레츠키는 이 세 가지로 축약된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경제 원리가 작동되었던 시대를 구분지을 수 있도록 일종의 경제적 패러다임으로 보고 있다. 시장경제가 등장한 애덤 스미스를 '자본주의 1.0', 경제 대공황 이후 케인스가 제안한 수정자본주의를 '자본주의 2.0',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3.0'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는 진화하는 시스템으로 인식하고 역사상 네 번째 구조적 전환인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자본주의 4.0'을 제시하였다.

 

 '자본주의 4.0'에서는 딱 두 가지를 강조한다.  대기업은 자본주의의 '원칙'을 먼저 지키면서 사회공헌을 경영활동의 하나로 인식하는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정치권이 만들어내는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역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중심인 '시장'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있는 지금도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세계경제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본주의'를 바라본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 모두 틀렸다!

 

'애덤 스미스, 케인즈, 하이에크' 순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경제 패러다임의 과정은 경제를 공부할 때 배우게 되는 내용이며 경제학사에서는 오랫동안 하나의 통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논하는 모든 서적에서도 '애덤 스미스, 케인즈, 하이에크',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단골 인물들이다.

 

이번에 출간된 조이스 애플비『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역시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는 광범위한 역사의 과정을 담고 있는 책 중의 하나다.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는 내용에서는 하이에크 대신에 시카고학파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을 언급하는 것만 빼면 자본주의의 역사적 흐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논했던 그 이전의 책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 작용했던 특정한 요인에 대한 관점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변동시킨 거대한 경제 체제인 동시에 문화 체제라고 봤으며, 인류의 관행과 사상, 가치와 이념을 뒤흔들어 정치를 변형시켰다고 설명한다. 즉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형성과정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그는 경제학의 역사를 거론할 때 언급되는 애덤 스미스의 관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스미스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재화를 통해 거래하고 교환하려는 시장경제체제가 자연스럽게 구축되었다고 봤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 형성에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애플비는 시장경제의 발전이 자본주의의 발달로 서서히 이어져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애덤 스미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경제발전이 사람들이 시장을 통해 거래하고 교환하는 문화적 특성을 촉진시켰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자본의 축적이야말로 '전통적인 경제활동 방식(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같은 농촌사회 내에서 이루어진 생산방식)과 단절하는 첫걸음'(pp 25)이라고 강조한 마르크스의 주장도 반박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원리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유럽의 전통적 사회에서는 생산방식을 혁신하는 데 필요한 문화자본의 축적 그리고 노하우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애플비의 반박을 비추어 보자면 마르크스 역시 자본주의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문화적인 측면의 요인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판하고 있는, 애플비의 관점은 막스 베버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다. 저자 역시 스스로 막스 베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문화적인 특성이 자본주의의 발달에 끼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베버 역시 재화를 통해 거래하려는 성향을 지닌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인간관을 부정하고 있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시장경제의 방식이 존재했다고 가정한 마르크스를 비판했다.

 

중세 말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금융위기까지 방대한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의 발달은 애덤 스미스의 생각처럼 '인간의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마르크스처럼 역사 발전의 필연적 도달점도 아니다. 이미 도래할 것으로 예정된 불변의 역사가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도 포함된 인류의 문화적 행동이 만든 관행과 제도의 집합일 뿐이다.

 

 

 

 

 '혁신'이라는 새 옷을 입는 것이 두려웠던 자본주의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은 시간에 따라서 변화되는 연쇄적 진보 단계로 파악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경제가 등장하기 전의 과거의 체제와 다를 수 밖에 없는 인정하게 되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의 귀결로 본다. 하지만 애초부터 자본주의는 헌 옷을 버리고 상황에 따라서 새 옷을 갈아입을 줄 아는 능동적으로 변신할 줄 아는 혁신적인 체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까지 서양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진보적인 혁신을 추구하지 않았다.

 

 

 

 

 

피터르 브뤼헐 「월력도 연작 중 두번째 그림 : 곡물 수확, 8월」 1565년

 

 

 

16세기 이전 유럽의 전통 사회에서는 농업이 주된 생산방식의 과정이었다. 인구의 절반이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그 당시 사회 질서 역시 농경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농경 중심 사회에서만 나타나게 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근에 의한 흉작이다. 특정한 해에 기근 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농업에 의지해서 생산되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어 수많은 인구들은 아사(餓死)의 공포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오랜 세월동안 농경사회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농업을 중시하다보니 당연히 상업은 무시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경제체제를 크게 변화할 수 있는 어떠한 혁신도 꿈꿀 수가 없었으며 농업 중심의 사회 질서를 그대로 순응하기에 이른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농경 사회 자체가 한순간에 바뀐다는 점이 기근에 의한 흉년이 찾아오는 것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고 나면서부터 오랫동안 유지될 것만 같았던 농업 중심의 경제체제에 새로운 기운이 꿈들대기 시작했다. 대륙 간 교역이 본격화하면서 '자본'의 실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러한 체제 속에서 상공업자의 세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자본에 사적 투자라는 개념이 더해져 최초로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전환점의 시작을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최초로 자본주의에 의한 혁신이 이루어진 시점을 산업혁명이 등장하기 이전을 거슬러 올라 17세기로 정하고 있다. 신. 구교 간의 종교적 갈등 그리고 혁명에 의해 국왕이 바뀔 정도로 정변이 잦았던 내분의 과정 중에도 상인들은 전국시장을 형성할 정도로 경제질서를 변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에 계몽사상이 등장하게 되면서부터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는 진보적인 경제질서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영국이 자본주의를 발달하게 만든 최초의 유럽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영국에서 불어닥친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비단 유럽 전체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특히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전력사업을 발전시킨 에디슨, 강철왕 카네기 등과 같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혁신적인 기술가와 사업가들의 등장으로 자본주의는 더욱 더 진보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유행을 타게 된 국가들은 자신들의 경제 및 사회적 상황에 맞게 딱 어울리는 옷을 입을 줄 알게 되었다. 이제는 구 경제체제의 질서를 순응하는 낡은 옷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알고 혁신을 강조하는 새 옷을 갈아입는 것이 중요해졌다.

 

 

 

 

 

 자본주의자들의 행동은 반복된다

 

 

 

 

 

아돌프 폰 멘첼  「쇠 압연 공장 (현대판 키클롭스)」 1872~1875년

 

 

 

저자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로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혁신에 의한 구 질서가 파괴되는 원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 기존에 입었던 헌 옷을 입지 않는다거나 버리게 된다. 그러나 신상에 대한 허영심은 절제되지 않는 과소비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는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등장했던 증기기관, 자동차, 산업 등이 근대로 이행하게 만드는 '창조적 파괴'의 사례라면 21세기에 이르게 된 지금은 우리 눈 앞에서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 기술의 등장이 현대판 '창조적 파괴'를 진행하고 있는 과정의 일부이다.  

 

이렇듯 '창조적 파괴'의 원리로 작동되던 자본주의도 진보와 성장에 대한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이렇다보니 자본주의의 무시무시한 파괴적인 측면은 금융위기, 경제적 불평등, 빈곤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것을 묵인한 채 자본주의는 가차없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자본주의자들의 행동은 반복된다. 위기가 임박했음에도 그것을 막으려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누구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떤 성질을 강화시키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다. 자본주의의 '정신'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세일즈맨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는 않은 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방법 - 가능하다면 쉬운 방법 - 으로 돈을 버는 것에만 몰두하면 위기와 공황, 대폭락은 불가피해진다.

 

 

 - 조이스 애플비 『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중에서, 까치, pp 452 -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금 작동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판을 통째로 뒤엎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위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비판론을 제기하는 측면이 자본주의의 '혁신적 파괴'의 장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실수에서 배우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들어 시장의 자정 기능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냉혹할 정도로 가차없이 작동되는 자본주의의 혁신도 스스로 종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무차별적인 '생각없는 혁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멈출 줄 모르는 가차없는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조이스 애플비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결론을 내리는 저자의 태도에 대해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적 경제의 유동성은 그 아무리 똑똑한 전문가라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으며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 과거를 공부한다고 해서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pp 466)

 

다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을 법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빈곤층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으로 운영되는 그라민 은행을 설립한 무하마드 유누스,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 문제를 부의 배분 및 사회적 약자의 보호와 관련된 정치적 문제로 바라봤던 아마르티아 센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대안은 공통적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에도 문제점이 있다. 대안의 실마리로서 제시한 무담보 소액대출 제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저자는 이 제도 역시 빈민 중에서 그나마 잘 사는 사람들이 혜택을 볼게 될 뿐,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책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적인 대안이 될 것만 같았던 유누스의 무담보 소액대출 제도와 그라민 은행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라민 은행의 금리가 고리대금 수준으로 높아진데다 가혹한 추심으로 대출 받은 이들이 자살하면서 원래 취지는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라민 은행을 역임하고 있었던 유누스가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1억 달러의 기부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의 명성에 흠집이 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불명예 퇴진이라는 씁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누스의 대출제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과 문제 제기가 점화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말부터다. 원서가 2010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본다면 애플비는 유누스의 대안에 대해서 문제점을 거론했지만 그렇다고 심각할 정도로 몰락에 처하게 될 줄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세운 저자의 대안은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의 내용과 유사한 면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움직이게 만드는 시장 중심의 기능, 즉 혁신에서 비롯된 부의 창출 능력을 유지하되 이에 대한 탐욕을 줄일 수 있는 적절한 정부의 규제와 개입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가차없을 정도로 탐욕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난폭한 성격을 규제하려는 목표와 취지는 인정할 만하나 아나톨 칼레츠키나 애플비 역시 마찬가지로 경제발전을 바라보고 있는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현대 경제 발전의 공로를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만 해석하고 있고 여전히 자본주의적 시각의 범위 하에서 해결책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안에는 모순적인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를 '가차 없지만 생각 있는 혁명으로 이어갈 것'이라고 진단한 점은 그가 지적했던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와 별 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남다른 관점만 부각되었을 뿐, 그도 역시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반성하는데만 그쳤다.

 

인간은 경제적 위기를 마주하게 되면 '시장-정부'를 오가는 쳇바퀴를 반복해서 돌려왔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지구에서 작동되고 있는 상태다. 끝없이 가동되고 있는 와중에 환경 파괴, 자원 고갈, 다음 세대에 떠안아야 할 막대한 빚 따위의 호소는 들리지도 않는다. 끝없이 새롭고 독창적인 혁신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소비해야만 경제가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원리 하에 인간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적인 대안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줄 모르는 자본주의의 '혁신적 파괴'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혁신적 파괴에 대한 맹목적인 예찬에 사로잡혀 이것을 적절하게 규제하지 못하게 된다면 세상을 파괴해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될 수 있다. 시장경제 내에서 불확실성은 누구에게나 적이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기업이나 개인은 모험을 회피한다. 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에 맞서 극복하려는 의지도 약화시킨다. 이러한 태도는 앞에서도 설명한 농경사회에서의 상업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역사의 선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진보와 발전에 있어서 때때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지속된다면 나중에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파괴의 효과는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가차없는 자본주의의 작동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지만, 문제가 크게 악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기존에 유지되어 있는 질서의 체계에 약간의 변화가 있더라도 불확실성의 두려움을 넘어서야 지금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책 한권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처한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또 저자가 제시한 대안이 당위성을 넘어 실제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미완의 과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지적인, 현실적인 고민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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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9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3-1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실하고 꼼꼼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간만에 들렀더니 배경이 산뜻하게 바뀌었군요~

cyrus 2012-03-20 12:48   좋아요 0 | URL
봄이잖아요 ㅎㅎ 오늘까지 꽃샘추위라는데 생각보다 바람도
괜찮고 햇살도 따사로워서 좋네요. ^^

마녀고양이 2012-03-2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사이러스님의 리뷰는 논문 같아요....
대단하시기도 하고, 그로 인해 좀 딱딱하달까 아니면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 면도...
그저 제 느낌이었어요. 오랫만에 들려서 이런 말이라니, 죄송... 아이고.

하지만 참 좋은 페이퍼입니다.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cyrus 2012-03-20 12:54   좋아요 0 | URL
ㅎㅎ 죄송하긴요, 저도 글 쓰면서 그렇게 느껴왔는데요.
소설 리뷰 같은 건 내용에 대한 느낀점을 쓰면 되니깐 쓸만한데
인문, 사회과학 도서 같은건 정말 쓰기 어려운거 같아요.
나름 책의 핵심 내용을 요약해서 적는다고 쓴거 같은데
쓰다보면 내용이 길어져있고요,, 그렇다고 책의 내용을 적게 적으면
그 책을 읽어보려는 독자들한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까봐
그것이 또 걱정이고요, 글을 쓰면서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요 ㅎㅎ 역시 습관이라는게 무서운거 같습니다. ^^;;

그래서 저는 마고님 같은 분의 이해심이 담긴 지적을 환영합니다.
앞으로도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시지 말고
틀린 부분 있으면 지적해주고 고쳐주세요 ^^

꽃도둑 2012-03-2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세대에서 조한혜정 교수랑 우석훈 교수의 주도로 <경제인류학>이라는 강좌를 개설한 적이 있었어요, 여러 강사들이 초빙되었는데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혹은 대체할만한 것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었지요.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내리막길로 달리는 자본주의를 세울 수는 없으리라는 암담함 속에서도 이제 가파르지 않은 평지가 가까이 왔다는 희망 속에서 이 강의를 지켜보았는데요. 아나톨 칼레츠키의 4.0은 글쎄요..탐욕만 줄이려는 정부의 규제와 개입이 과연 효력이 있을까? 틀을 바꾸지 않는다면 행동은 반복될텐데요...그죠?...^^

cyrus 2012-03-21 19:28   좋아요 0 | URL
저도 4.0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대안이라고 보는 낙관적인 생각에서는 저도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이론만 따져 본다면 실제로 일어난다면 정말 좋은 일이죠.
하지만 지금 현 상황으로봐서는 서로 등을 돌렸던 노사가 마주쳐서
화해와 상생의 악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요즘 경영학 수업에 <노사관계론>을 배우고 있는데 교수님 말씀으로는
정부나 언론이나 경영학자들이나 노사 관계 문제를 바라보면 공통적으로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주는 이가 드물다고 하더군요..

카스피 2012-03-2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기업은 자본주의의 '원칙'을 먼저 지키면서 사회공헌을 경영활동의 하나로 인식하는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참 가슴에 와 닿는군요.
하지만 현실을 보자면 국내 굴지의 목 기업은 직장인은 열심히 회사 발전에 이바지하다가 스스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면 자발적으로 사표를 쓰라는 내용을 빙빙 돌려서 회사 다이어리에 적어놓은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직원들 반감와 외부의 눈때문인지 언젠가 부터 없어졌지만 그 정신이야 어디 사리지겠어요ㅡ.ㅡ

cyrus 2012-03-21 19:30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기업 이익에 집중하는 혁신에 매달리게 된다면 회사 내 조직원들은
노동하는 기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죠. 요즘 사회적 기업, 인간적인 면을
내세우는 기업을 강조하고 있는데,, 글쎄요,, 취지느 좋으나 그것이
노사관계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에는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2-03-22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3의 길로 유명한 앤서니 기든스는 사회학 경제사에도 정통한 학자인데 그는 마르크스와 베버의 자본주의 발달에 관한 연구가 통념과는 달리 많이 겹치고 상호보완적이라고 했습니다.그가 쓴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한길사)을 참조하세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 관한 논쟁을 다룬 해외거장들의 논문집이 하나 있는데 절판이네요.경제사 공부할 때 정말 좋은 책인데...

cyrus 2012-03-23 20:35   좋아요 0 | URL
한길사에 나온 기든스의 책, 언젠가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에요.
노자님 말씀대로 그 책에 마르크스랑 베버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데
일단 마르크스와 베버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고 읽어보려고 해요.

최근에 막스 베버와 관련된 책을 알라딘에 검색해봤는데요, 정말로
절판된 책이 꽤 있더군요. 그래서 중고샵을 통해서 구입하려고 해요. ^^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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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나라에게 있어서 5월 18일은...?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는 말이 하나 있다. '북한의 소행이다'라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는 일이 생긴다거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흔히 등장하는 어휘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기르던 강아지가 죽어도 ‘북한의 소행’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심지어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울 때에도 이들에게 ‘북한에나 가라’고 비판 같지 않은 비판을 하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할 때에도 그렇고, 무상복지를 운운할 때에도 모든 의견들을 ‘좌익’의 입장으로 바라본다.

일부 보수단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반대를 위해 ‘반대 청원서’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개입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때마침 정부는 새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삭제하려고 했다. 광주시는 새 역사 교과서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삭제키로 한 정부여 결정에 광주지역 80여개 기관 및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의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5.18 민주화운동이 삭제된 것을 규탄하고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교과부의 의견이 수렴, 반영되었다면 2013년부터 중학교에서 사용될 교과서를 펴낼 때 ‘지침’ 구실을 하게 될 ‘2009 개정 교육과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중심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전두환 신군부 정권’ 등 독재와 민주화 관련 주요 내용들이 모두 삭제되는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에 반발하여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광주 정신은 오늘날에도 계승되어 민주주의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채택되기 이전에는 ‘광주 사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광주항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 하지만 반대하던 보수단체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적으로 선정되었다. 민주, 인권, 평화로 상장되는 5월의 광주정신이 온 세계가 인정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데 교과부는 한국 민주화 발전 과정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한국인이라면 기억해야 될 역사를 삭제하려는 역사적 퇴행을 결정하려는 것인가?  정부가 왜 역사 교과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와 자국 문화유산의 중요성과 찬란함을 안다면 절대로 역사 앞에 티끌만한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역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면 국민들이 설령 반대한다 해도 먼저 나서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올바른 역사를 삭제하자고 나서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현대사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특히 현대사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수준이 뒤떨어짐을 느낀다. 필자가 고등학생 3학년 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때에도 제5공화국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1980년대 시절의 내용을 제대로 배웠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사 교과서라는게 연대기순으로 서술, 편집되어 있다 보니 정작 교과서에는 ‘현대사’라는 명칭을 붙여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현대사’를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학교 현장에서 현대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설령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단조로운 교과서와 주입식 설명들로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것도 역사교육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1980년 광주가 지금 나와 과연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5.18이 우리나라 역사에 어떠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느냐를 깊이 생각해보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몇 몇 학생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8.15 광복절과 착각하고 있다는 씁쓸한 기사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는 것만 천만다행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5.18광주 민주화 운동은 생소한 그 무엇에 그치고 만다. 사건 자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학생들도 많다. 필자는 지금 듣고 있는 대학 강의 중에 ‘한국정부론’이라는 이름의 전공과목이 있다. 이 과목을 통해서 한국정부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는데 때마침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동영상을 시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5.18 관련 영상을 시청하는 데 졸고 있다거나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광주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의 독재정권에서 시작한다.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한 박정희는 마침내 한계에 도달해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1979년 10월 26일 사망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세상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들떴다. 비상계엄 상태였지만 정치·사회, 문화 전반은 유신체제 하에서 억눌려 왔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후 시민들은 민주화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독재정권 시절부터 군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가동해 12. 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인 전라도 광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막강한 권력을 움켜쥔 전두환은 실세로 부상했고, 집권을 위해 숨 가쁘게 움직였다. 신군부는 쿠데타로 행정부와 국회 등을 무력화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면서 권력 찬탈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군부의 학살만행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시민 전체가 일심동체로 저항했던 광주는 결국 피의 진압으로 5.18 민중항쟁의 끝을 본다. 하지만 이를 촬영하고 보도한 외신 기자에 의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낙후된 민주주의를 알리게 됐고 이후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돼 결국 전두환은 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직선제로 개헌하기에 이르렀다.


저는 광주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현실을 가장 많이 규정지은 사건이 바로 5.18 광주라고 봅니다. 5.18은 수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든 사건이었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 ‘광주의 자식들, 그리고 노무현’ pp 20)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기록물들은 인권, 민주, 법치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세계인들의 가슴에 새기고 정의를 지향하는 인권교육의 중요한 지침서가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척박한 영토에 민주주의적 사회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촉진제가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이처럼 6.25 전쟁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오늘날 한국 민주화의 초석이 된 5.18의 가치와 그 유산을 세계가 인정해 준 것임에도 극우 보수단체들의 입장과 역사 교과서에서 삭제하려는 정부의 입장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 5.18 진상규명과 학살책임자 규명, 그 배후세력 규명 등이 여전히 미완인 상태다.   

  

 

 지금 이 순간, 역사를 기억해야 될 시점

‘역사를 인식하는 사람’은 지나온 과거와 오늘, 다가올 미래의 흐름 속에서 ‘오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따라서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행적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역사를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역사를 인식하지 않기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오늘의 이익과 눈앞의 권력에 현혹되고, 진실을 조작하고, 미화시키고, 합리화하려고 든다. 진실을 호도하면서 역사가 그들의 뜻대로 기록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의 최면이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강'이 흘러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역사의 강'은 진실을 향해서만 흘러가기 때문이고, 진실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역사의 진실 앞에서 어떤 이들은 왜곡하거나 아예 외면하려고 한다. 과거와 현재의 단절의 역사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심지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전 세대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만든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은 점점 퇴색되어져만 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프다. 우리가 정녕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돌이켜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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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 -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김성동 지음 / 녹색평론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이 중음신(中陰身)이 되어  
이 땅 위를 떠돌고 계신 어르신들 이야기이다.

 

  독립유공자 인정, '하늘의 별 따기' 

8.15 즈음을 맞이하게 되면 언론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기사들을 보게 되면 독립유공자 선정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해방을 맞은지 66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선조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고군분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국가보훈처가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의 독림유공자 선정 결정을 또다시 보류하여 적잖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조봉암 선생은 이승만 정부 시절에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올해 초에 재심을 통해서 5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게 되어 오랫동안 꼬리표가 자리잡은 왜곡된 누명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동안 공산주의자라는 오해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받지 못했기에 이번 국가보훈처의 결정은 조 선생의 유족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올해 초 조 선생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을 수 있게 된 재심 결과와 배치되는 상반된 결정이다.   조봉암 선생은 이번에도 무슨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일까?  

보훈처 측에서는 조 선생의 과거 공산주의적 행적이 서훈 심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다만 일제 말기 때 부적절한 행위가 확인되어서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었다면서 보류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의 퇴색이 짙었던 1941년에 조봉암 선생의 이름으로 국방헌금 150원을 기부한 사실을 그 당시 매일신보 기사에서 확인되었으며 매일신보 단 한 건의 기사 때문에 무기한 보류를 결정한 것이다.   

이번 보훈처의 심사 과정과 결정은 애매모호하다.  5공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에 대해서는 복권됐다는 이유만으로 국립묘지 안장을 승인해 준 최근의 결정과 비교하면 조 선생의 보류 결정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국방헌금 사실이 있다고하더라도 올해 복권되었으니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줘야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국방헌금 기부한 사실만 가지고 조 선생이 친일행위 그리고 변절자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 선생 경우는 친일 행위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심사가 보류된 사례이지만 지금까지도 조 선생과 같은 수많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여전히 독립유공자로서 인정을 못받고 있다.  그 중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심사의 기준이 불공평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보훈처 측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부터는 이들에 대해 해방 이후 북한과 관련이 없다는 전제하에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즉, 독립운동가들의 사회주의 노선 역시 그 당시 독립운동 방식의 일환이며 해방 이전의 사회주의 행적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의 유족들이 내세우는 자료라는게 전문성이 부족해서 입증하는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보훈처가 내세우는 심사 자료에도 한계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작성된 재판 기록이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이전의 사회주의 행적에만 심사 결정에 문제가 없다고 보는 보훈처의 입장에도 문제가 있다.  해방 이후의 사회주의 행적이 단지 국가 정체성에 반한다는 이유만으로 심사 결정에 불리한 근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거의 이면에는 이승만 정부 시절이 만들어낸 반공 헤게모니의 망령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지나친 과장에 불과한 것일까?   

 

  

   이념의 갈등에 희생된 두 민중 해방자, 조봉암과 김원봉   

<만다라>의 소설가 김성동은 <현대사 아리랑>이라는 책 한 권에 그동안 민중의 역사 속에서 떠돌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뻔한 독립운동가 및 예술가들의 이야기들을 모았다.  이들의 행적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인생을 바쳤지만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 갈등의 역사 앞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어르신들' 이야기이다.  

그래서 <현대사 아리랑>에 소개된 독립운동가 및 예술가들은 근현대사를 배웠다던 학생들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생소하다.   또 절반의 인물들 중에는 해방 이후 스스로 북한으로 향한 사회주의자들도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패망으로 갑작스레 독립을 맞이한 이후 급격한 사회적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던 조국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나라 내부의 안정화 및 통일할 수 있는 방편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조봉암 선생처럼 민중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을 위해서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에 치중한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 중에 조봉암과 김원봉의 삶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뚜렷한 독립 운동의 공적이 있음에도 불과하고 남한과 북한, 이념으로 인해 갈라 돌아서버린 두 나라로부터 명예를 인정받기는커녕 버림 받아야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조봉암과 김원봉. 두 사람의 이름 속 '봉' 은 '받들 봉(奉)' 자를 쓰고 있다.  이들의 호에도 공통적으로 '뫼 산(山)' 자가 들어가 있다.  출생년도도 두 사람 다 1898년이며 남조선과 북조선에서 장관에 부임하면서 해방 이후에도 조선의 안정화를 위해 이바지하였다,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 김원봉은 남조건의 국방장관과 동등한 국가검열상)   그러나 두 사람은 이념의 갈등에 눈이 먼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조봉암은 남조선에서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사형당했으며 김원봉은 북조선에서 불었던 김일성을 비판한 연안파 제거의 피바람에 휘말리면서 숙청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의 인생에는 공통적인 악연의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장택상(1893~1969)이다. 해방 이후 수도경찰청장 시절에 김원봉을 체포하기도 했으며 이승만 정권이 수립하면서 초대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하여 반공투쟁에 앞장섰다.  그리고 국민장을 치러 국립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조선의 '봉황새' 가 되지 못한 비운의 정치가, 조봉암

 

 

죽산(竹山) 조봉암 (1898~1959)   

 

죽산 조봉암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드라마틱하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조봉암은 원래 이름의 '봉' 을 '봉황새 봉(鳳)' 자를 쓸뻔했다.  사연은 이렇다.  조봉암의 어머니는 봉황새가 나오는 태몽을 꾸었는데 처음에는 봉황새 봉 자를 쓸려고 하다가 평생 가난한 삶을 살았던 부모는 둘째 아들의 이름이 너무 엄청난 것 같아 그냥 '받들 봉' 자로 썼다.    

봉황새는 동양에서는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 여긴다. 예젼부터 높은 벼슬의 명칭이나 평화로운 세상을 비유하는 표현 속에는 이 봉황새를 상징하는 봉(鳳) 자가 포함되었다.  만약에 어머니가 둘째 아들의 이름에 봉황새 봉 자를 썼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펴보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그의 불우했던 삶을 생각하면 이름 작명부터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다.   

절은 시절, 3.1 운동 때 참여하기도 했으며 사회주의야말로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원동력 그 이상으로 모든 조선 민족들이 잘 살 수 있는 완전한 진리라고 생각하여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당시 남조선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지휘하던 박헌영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통해서 지도노선을 비판함으로써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노선과의 거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봉암은 '반노반자(反勞反資)' 라는 정치이념으로 전향하였다.    

이승만 정부 시절 농림부 장관에 역임할 정도로 사회주의 노선과 결별한 조봉암의 정치적 선회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그가 우익 진영으로 돌아섰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이 내용 역시 조봉암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인식 중 하나이다.

소련의 지배 하에 통제당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면서도 자본계급의 독재로 이루어진 정책도 거부하는 순전히 조선의 민중을 위한 민족주의적 정치적 행보였다.  조봉암은 박헌영의 노선처럼 지하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좀 더 민중을 위한 현실적인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공과 단독 정부를 고집하는 이승만 정권의 막강한 권력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으로 대표되는 반한민당 세력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 조봉암을 자신들의 정치적 터전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야말로 조봉암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호랑이 굴 속에 제 발로 들어가게 된 셈이다.  

민족을 위한 정치적 행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은 그를 '배신자' 라 규정하였으며 남조선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팽팽한 이념의 갈등 사이에서 그 어느 누구도 환영받지 못한 입장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눈엣가시' 인 조봉암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서 정부가 내세운 농민정책에 반대할 정도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 1952년과 1953년에 두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승승장구하였다.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 번번히 낙선했지만 지지율에서만큼은 이승만보다는 앞섰으며 온갖 부정으로 점칠된 당시 선거 과정을 생각하면 조봉암의 존재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만큼 민중으로부터 인정받던 정치가였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모습 (1958년)

  

조봉암은 낙선의 굴복 속에서도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내건 진보당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도 반노반자 이념이 그래도 진보당 창당에도 적용되었다.  공산독재와 친미수구적인 북진통일이 아닌 민주화의 개혁을 통한 평화통일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점점 세력을 확장되어가는 조봉암의 진보당 활동을 가만히 있을 이승만 정부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는 죄역을 만들어 그를 체포하는 동시에 진보당은 오래가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  조선을 통치할 수 있었던 정치가에서 한순간에 간첩이 되어버렸다.  정치적 모략이 만들어낸 재판으로 인해 조봉암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원대한 꿈의 날개를 펼쳐보지 못한 채 사형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 김원봉  

 

 

 약산(若山) 김원봉 (1898~1958?) 

 

이 책의 부제는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이다.  민족 해방을 위한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명예의 '꽃다발' 이라는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무덤도 없이 떠돌아야하는 불행한 망령들이다.    특히 약산 김원봉은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공적이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의열단을 조직한 무정부주의적 투쟁 노선을 취한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행적만 가지고 그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   아니, 의열단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단장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과서에 단 몇 줄로 거론되기에는 남한에서의 그의 평가는 너무 인색하기만 하다.  그와 함께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여 일본의 관공서나 고급 관리, 심지어 천황에게까지 폭탄을 던지던 김상옥, 김익상, 박재혁, 김지섭 열사는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아마도 김원봉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해방 이후에 펼쳤던 그의 사회주의적 노선 때문이리라.  

 

 

이육사 (1904~1944)

의열단원에는 저항시인 이육사도 활동하기도 했었는데 이육사의 일생을 그린 8.15 특집 드라마  

<절정>에 의열단의 단장인 김원봉이 잠깐 등장하기도 했다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 투쟁을 통해 조선총독부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은 일제 권력의 중요 근거지와 조선총독과 친일파 등 반민족적인 인물들을 암살대상으로 삼아 활동한 무력 독립운동 단체로 이름을 떨쳤다.  의열단원 중에는 저항시인 이육사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과격하면서도 혁명적인 독립 운동은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할 정도로 일본 섬멸에 선봉으로 나섰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소속되어 활동하지만 임정 보수파들과의 갈등으로 임정과 결별하였다.   김원봉은 조선 민족 순수의 힘으로 독립을 원했다.  그래서 그는 총과 폭탄을 든 무력 항일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의 뜻을 저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승리로 조선은 해방되었고 그 전부터 준비되어온 무장혁명군을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였다.    

그 이후로 김원봉은 사회주의 노선으로 걷기 시작하였고 본인 스스로 월북하였으며 북조선에서 국가검열상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에 그의 이름은 공식 석상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당시 김일성을 비판했던 연안파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는 설과 명예로운 은퇴를 했다는 설 등 지금도 김원봉의 사망연도에 대해서 입증할만한 사료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김원봉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서 권력의 각축장에서 밀려나간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북한의 혁명열사들이 안치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그의 이름이 새긴 묘비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이름 없는 혁명가가 된 것이다.

 

    

  이들의 영혼을 어떻게 달래주랴 

조봉암과 김원봉 이외에도 그동안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이 최근에 역사가들에 의해서 빛을 보고 있다고 하지만 반공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는 어두운 그늘을 이 한반도에 완전히 걷히지 않는 이상 수많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유족들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한 험난한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반대로 자신의 위대한 업적은 부각시키고 이면에는 어떻게든 친일 행위를 덮어버리려는 친일파 또는 후손들은 허세를 부리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조국을 위해 몸바친 선조의 명예, 친일파의 후손은 선조의 옛 땅을 찾기 위해서 법정을 드나들고 있다.  그러나 두 집안의 후손의 표정의 명암이 엇갈린다.  사회주의적 또는 친일 행위 때문에 진정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반면에 친일파의 후손은 법정 공방 끝에 어마어마한 옛 땅을 되찾고야 만다.  이것이 해방된지 66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나에게는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러데 나는 이 박사(= 이승만)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내 죽음이 이 나라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 사형당하기 전 조봉암의 마지막 말, <현대사 아리랑> 김성동, pp 299 - 

  

조봉암은 사형당하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이념의 역사에 억울하게 밀려난 마지막 희생물이 되기를 바랬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혐오했던 친일파들에게 밀릴 정도로 영혼이 되어서도 또 다시 희생되어야 했다.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은 우리 스스로 국격과 정통성을 깎아 낮추는 꼴이다.  <현대사 아리랑>을 통해서 수많은 혁명가들의 업적을 알아주기에는 그리고 무덤 없이 떠도는 망령들을 달래기에는 부족하다.   지금도 역사가들이 잊혀져가는 혁명가들의 삶을 찾아내고는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어르신들이 하는 옛날 이야기로 뜰릴 뿐이다.

역사의 세월 속에서 비굴한 이들의 허세는 날로 커져만가는데 정작 양심적인 영혼들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채 더욱 더 잊혀져가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얄궂게 느껴진다.  

 

   

 

***님,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

 

 

 

* 내용 관련기사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번번히 유공자 탈락…유족들 불만 팽배]  노컷뉴스 2011년 8월 14일 

[‘5공 비리’ 안현태 유해, 국립묘지에 기습 안장]  경향신문 2011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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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8-16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탁환의 소설 제목인 줄 알았어요. 저 좀...큭!>.<;;

cyrus 2011-08-16 22:04   좋아요 0 | URL
네, 소설 제목을 차용했어요. 제가 본의 아니게 낚시질을 했군요 ^^;;

마녀고양이 2011-08-1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루스님의 페이퍼를 읽을 때마다
이런 글을 쓰려면 얼마나 노력과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할까 궁금해져요.
그리고, 이런 글을 쓰시는 시루스님은 어떤 직업을 가지시려나도 마찬가지로 궁금하구요.

음... 시사인이나 한겨레21의 기자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제 개인적 바람이예요!! 아하하!

cyrus 2011-08-16 22:08   좋아요 0 | URL
어제는 광복절이라서 집에 있었어요. 혹시 마고님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이육사 시인의 일생을 그린 특집극 <절정> 이외에는
TV는 볼 것도 없었고요,,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날(?)을
그저 노는 날도 보기에는 좀 그렇고,, ^^;;
그래서 서재 이웃분님이 주신 책을 읽었어요, 그게 바로
현대사 관련된 <현대사 아리랑>이었어요.

조만간 이웃분님들에게 받은 책들을 읽으려고 해요.
미루다간 못 읽을거 같아요. 책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요.. ^^

2011-08-25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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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왕족의 말 못한 고민  

 

   
 

매사가 나를 고발하며 내 무딘 복수심을 채찍질하는구나!  허구한 날 하는 일이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사람이란 대체 뭐지?     (중략)   난 왜 ' 이 일을 해야 한다 ' 고 뇌까리고만 있는 거지?   그럴 만한 명분, 의지, 힘, 수단을 다 갖췄으면서도 말이야.  막중한 사례들이 나를 훈계하는구나.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제4막 5장 중 햄릿의 대사, pp 236, 펭귄클래식코리아 -

 
   

 

'햄릿' 이라고 하면 아마도 우유부단한 인간형의 대표적 인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맞다. 그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나이 30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래서 결국엔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덴마크의 왕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처음 읽는다거나 혹은 두 세 번 읽게 되면 이 젊은 덴마크의 왕자가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을 만큼 덕망이 있었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친의 혼령을 본 이후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분노에 사로잡혀 미치광이 노릇을 할 뿐이지 그는 분명 사색적인 성향의 왕자임에는 틀립없다.  햄릿은 분명 정상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갈수록 우유부단한 면이 많이 부각되다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극명한 평가로 엇갈려져 있다.  

 

햄릿뿐만 아니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역사적인 황제와 왕족들 중에는 후대의 역사가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 많다. 

진시황. 그 이름은 최초로 중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한 영웅이면서 폭군이라는 상반된 평가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출생부터 평범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진시황 역시 햄릿처럼 기형적인 친자 관계를 안은채 세상에 등장했고 증명할 수 없는 역사적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자신의 기형적인 출생 비밀로 인해서 적잖이 고뇌를 겪어야했다.     햄릿은 선왕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함으로써 조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친자라고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가 된 반면에 진시황은 사생아로 태어나 두 명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진나라를 다스려야했다.   진시황의 출생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불위라는 사람의 존재로 거슬러 올러가게 된다.  

 

  

  나의 진짜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친척보다는 가깝고 혈육만큼은 못 되지!  

- <햄릿> 제1막 2장 중 햄릿의 대사, 같은 책 pp 102 -

 
   

 

전국시대 여불위라는 장사꾼은 진(秦)나라 왕손인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의 소양왕은 연로했고, 그의 아들 안국군에게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비(正妃)인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자초의 가치를 알아보고,엄청난 자금력으로 자초가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도록 힘쓴다.  나중에 자초는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오르고 여불위는 재상이 된다.  멀리까지 내다볼 줄 아는 여불위의 시야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과 미래를 보는 시야를 가진 그 역시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비극적인 운명으로  종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운명, 아니 진나라의 운명에 판도를 뒤바뀌게 되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애첩인 조희를 자초에게 선사한 것이다.  자초와 결호한 조희는 왕후가 되었고 그녀가 낳은 여불위의 아들은 자초의 왕위를 승계했다. 그 아들이 바로 진시황이다.  

사마천은 <사기> ‘진시황본기’ 에선 진시황이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해놓고 같은 책 ‘여불위열전’ 에선 장양왕을 왕으로 만든 여불위의 아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여불위가 이미 뱃속에 자신의 아이를 갖고 있던 애첩 조희를 장양왕에게 보내 그 아이가 대국을 있게 한 음모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진시황과 여불위, 복잡미묘한 관계

하지만 20대의 진시황에게는 복잡미묘한 출생 관계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태후와 환관과의 은밀한 내연 관계였다.   

마침 자신에게 날아온 익명의 투서 한 장이 진시황의 의혹을 증폭시켜주고 말았다.  투서에는 환관 노애는 진시황의 어머니 태후를 유혹하기 위하여 환관 행세를 하면서 접근한 것이며 노애와 태후의 내연의 관계를 맺어주게 한 사람이 바로 여불위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그치기 위해서 여불위가 노애를 태후의 시종을 들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태후와 노애는 서로 정을 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전국책>이라는 또 다른 사료에는 여불위와 노애는 서로 권력을 다투는 대립 관계라고 기록되어 있다.  엇갈린 기록으로 인해 노애와 태후와의 내연 관계에 여불위가 실제로 연루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여불위 역시 태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태후와 자신의 은밀한 관계가 진시황에게 발각되면 그동안 누리고 있던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자신의 치명적인 비밀을 막기 위해서 노애를 불러들였건만 도리어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부채질하고 만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노애는 자신을 둘러싼 태후와의 내연 관계가 진시황의 귀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지만 이는 여불위의 몰락을 재촉하는 화근이 되었다.   다행히 그동안 공로 덕분에 여불위는 무거운 처벌 대신에 관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진시황의 마음에는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만큼 여불위는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여불위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편지를 읽고난 뒤 여불위는 독주를 마시고 자살을 하고 만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가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 호의 식읍을 내렸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리오?   그대는 가족과 함께 촉 땅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오.  

 - 사마천 <사기열전> '여불위열전' 중에서, 김원중 역, 민음사, pp 620~621 -     

 

사마천은 여불위가 진시황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할까봐 자살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역사가들은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는 사마천의 기록이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기록의 진위성을 의심하고 있다.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고 똑부러지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려던 진시황에게는 여불위의 존재가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환관과의 추찹한 내연관계에 중부라고 칭할 정도로 존경해온 여불위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젋은 진시황에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궁정에서의 모의가 두렵고 불안했을 것이다.  반란으로 거대한 정권을 무너지기도 하며 십년도 채우지 못하고 왕의 얼굴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권력 타툼의 장소나 다름 없는 궁정의 현실을 생각하면 진시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첩의 자식' 이라는 콤플렉스

그런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1장 '여불위의 숙청' 편에 들어있는 각주에 의하면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설이라는 기록은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사생아' 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정말로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인정 없는 잔인한 황제로 묘사하기 위한 의도로 기록했을까?

진시황의 일생을 기록한 <사기본기>의 '진시황본기' 에는 정양왕이 여불위의 첩에 반해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진시황을 낳았다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저자는 '여불위의 숙청' 편 각주에 " 사마천은 <사기> '여불위열전' 에서 이 설을 받아들였지만, '진시황본기' 에는 적지 않았다. " (pp 55)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내용만 가지고 사마천이 여불위 생부설을 부정하고 있다기에는 근거로 삼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진시황은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왕족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라 첩의 자식이라는 점이다.  여불위가 생부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진시황에게는 자신이 첩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의 비밀이 권력자로서의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만약에 이 사실이 궁정에 알려진다면 왕족으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으며 훗날 권력을 확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력했지만 고독했던 권력가

현존하고 있는 사료를 통해서 진시황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족함 없이 완벽할 것만 같았던 어린 진시황에게는 이런 사실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고민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상황 속에서 두터운 신임과 존경을 보낸 '중부' 여불위가 은밀한 음모 관계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알아버린 진시황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거나 다름없다.    

진시황은 중국의 황제이기 전에 번뇌와 불안에 시달려야하는 불완전한 '인간' 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환관이랑 놀아다니고 무한한 신뢰를 주었던 중부 여불위는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였다.  두 가지 사건이 진시황에게는 강력한 군주로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던 커다란 인생의 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진시황은 쉴 틈 없이 하룻동안 업무에 매진할 정도로 진나라 국정의 기틀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시황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른 것이 '분서갱유' ,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게 한 장본인' , ' 불로초를 찾으려고 했던 왕 ' 으로만 알려져 있다.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서 유학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시켰으며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기 위해서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였고 아방궁은 향락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지금 진시황에게 남아있는 것은 난폭하고 절대권력을 추구한 군주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진시황이 절대권력의 군주로 변하게 만들 수 있었던 원인에는 황제가 되기 전 태자 시절 때 겪은 사건들도 무시할 수 없다.   여불위의 계획에서 비롯된 환관 노애와 어머니인 태후와의 내연 관계는 황제가 되려는 진시황에게는 절대로 잊혀질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방술사의 말에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로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진시황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권력이 무너질지 모르다는 극도의 불안감은 궁정에 비밀통로로 만들 정도로 철저한 비밀주의적 생활을 하였고 자신에게 충언하는 아들 부소를 의심하고 스스로 자결하도록 명할 정도로 냉소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간언만 듣고 여불위 다음으로 자신의 곁에 둔 이사를 처형시켰다.  무엇보다도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하루 국정 업무에 열심히 했던 진시황은 주위 신하들로부터 ' 권력욕에 지니치다 ' 라고 할 정도로 거꾸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갈면 갈수록 진시황에게는 주위에 자신을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없고 고독한 권력은 이어져만 갔다.   

 

   
 

나는 최초의 황제다. 나는 이 땅에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 왔다.  나는 법을 세워 힘센 자들의 횡포를 없앴다.  나는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내가 이 백성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일을 했는데 왜 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내가 아니라 어디에 이 백성은 마음을 준단 말인가?  

 - 김태권 <한나라 이야기 1> pp 210~211 -

 
   

  

그의 고독한 읊조림을 파헤쳐 보면, 진시황은 꽤나 복잡한 관계에 얽혀 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미칠 듯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인간 자체로서 할 수밖에 없는 고뇌가 아니라 ‘ 한 나라의 황제이기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고뇌’, 그 중심에 강력한 군주인줄만 알았던 진시황은 누구 하나 믿고 의지할 사람 없이 피바람이 부는 권력 다툼의 장에서 너무나 외롭게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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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7-3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반가와요 ㅇㅅㅇ
앞으로 알라딘 블로그에서 자주 뵈요 ㅋㅋ

cyrus 2011-08-01 22:23   좋아요 0 | URL
ㅎㅎ 카페에서도 자주 뵈요 ^^

아이리시스 2011-07-3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시루스님, 이 많은 리뷰 페이퍼를 언제 다 읽으라고... 더워 죽겠어요. 그리고 토요일이예요. 멋진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1-08-01 22:2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알라딘에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을 때 제일 더워요.
그래서 항상 제 앞에는 시원한 것이 있어야해요. 지금도 시원한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답글을 달고 있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1-07-3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조도 자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었음을 평생 열등감으로 생각했다지 않습니까...김두한의 어머니도 김좌진의 스쳐지나가는 여인이었을 뿐...여하튼 여러 여자에게서 자식을 보면 그 후손들이 골치아파집니다.

cyrus 2011-08-01 22:2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복잡한 출신 관계 때문에 인생 역시 복잡하게 꼬아버리는거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1-07-3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불쌍하죠, 진시황제.
두고두고 최고의 폭군이라는 소실에, 생전에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 했으니 말이예요.
과연 제가 진시황의 입장에 서서, 역사에 끌려 어쩔 수 없는 위치로 간다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그저 저런 위치에는 가지 않도록 빌 뿐이예요.

요즘 문재인 이사장은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야하는 심정... 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답니다.

cyrus 2011-08-01 22:28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지도자라면 고독이라는 권력의 특성을 견디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님도 그렇고,,
역시 지도자의 길은 정말 쉽지도 않고 어려운 일인거 같아요,,
 
벽광나치오 - 한 가지 일에 미쳐 최고가 된 사람들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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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벽광나치오

조선의 18세기는 참으로 묘한 시대였다. 동양과 서양, 중세와 근대, 재래와 신문물이 도입되고 뒤섞이고 대립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정체성과 가치관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수백 년간 정체됐던 문화는 젊은이의 혈관처럼 팔팔한 활기가 돌았다.  오늘날에도 18세기를 ' 조선의 르네상스 ' 라고 평가할 정도로 14~15세기에 서양에 수많은 천재를 배출했듯이 조선에도 셀 수 없는 인재들이 나왔다.   

조선 르네상스의 인재들의 업적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들과 견줄만한 독보적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알려지지 않고 뜬소문처럼 사라져버린 이름 모를 인재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책에 소개한 11인의 벽광나치오들이 바로 역사의 기록에 사라져 ' 이름 모를 인재 ' 가 될뻔한 인물들이다.  벽광나치오(癖狂懶痴傲)란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고질적인 버릇을 못 고치며 어딘가에 미쳐 있고, 게으르고 바보 같고, 오만한 사람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 벽광나치오들이란  여행가, 프로 기사, 춤꾼, 만능 조각가, 책장수, 원예가, 천민 시인, 기술자 등 한 가지 일에 능통한 '전문가' 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가' 로 인정받았기 보다는 한마디로 ‘괴짜’ 라고 할 수 있다. 한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 그 외의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은 그들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했고 범상치 않고 기행을 일삼는 괴팍하게 여겼다.


 

  벽(癖) : 몰입의 대가들    

벽광나치오들은 사람들이 '미쳤다' 라고 할 정도로 자기 전공과 재능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경상도의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 출신인 정란(1725~1791)은 전문 여행가였다. 그는 세속적인 부귀영화의 명예를 이어가는 것보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조선의 모든 명산을 등반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당대 사대부들은 정란의 여행길을  ‘ 현실 도피’ 라고 손가락질하였으나 그는 “허황된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느니 실제 존재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 낫다” 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둑기사 정운창(생몰년 미상, 18세기 후반에 활동)은 10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바둑만 공부한 끝에 조선 팔도 바둑 '명인' 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으며 천민으로 시인이 되고자 했던 이단전(1755~1790)은 10년 동안 독학으로 주경야독했다. 독학 끝에 쓴 시 한 편으로 문단을 휘어잡고 있었던 대문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광(狂) : ' 조선의 반 고흐 ' 최 북     

 

 

 


애꾸눈 화가, 최북

 

최북(생몰년 미상, 18세기에 활동)은 출신 성분이 낮은 직업 화가였다. 그림 한 점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말년의 생활은 곤궁했고 비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비참한 일생 속에서도 호를 호생관(豪生館: 붓에 의지해 살아가는 자)으로 짓고 오로지 자기만의 예술에 도취되어 살았다.

그는 각박한 현실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기행과 취벽 등 다양한 일화로 남겼다. 최북과 함께 동시대에 살았던 시인 신광하가 묘사한 최북의 모습은 그의 사나운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북은 사람됨이 몹시도 다부지고 사나운데 

자칭 화사(畵辭) 호생관이라 했지. 

체구는 단소한데 한쪽 눈은 멀었고 

술 석 잔을 기울이면 꺼리는 게 없네.   

 

- 신광하 <진택문집> 중에서,  안대회 <벽광나치오> pp 68 -

  

부자가 돈 보따리를 싸들고 와도 거드름 피우는 태도가 왠지 거슬리면 그는 그림을 팔지 않았으며 자신을 낮춰 부르는 양반 서열의 사람들 앞에서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객기로 자신의 눈을 찔러 외눈이 된 최북 주변에는 그 어느 누구도 지긋이 붙어 있을 사람이 없었고, 세상을 뜨는 최후까지도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절친한 사람들과의 교류가 뜸했으며 그나마 절친한 동료 화가였던 폴 고갱과 심하게 다투고 난 뒤 홧김에 자신의 귀를 자른 반 고흐처럼.   최북의 최후 역시 정신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입원 생활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권총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운을 달리한 고흐의 비극적 최후와 유사하다.   열흘을 굶다가 그림을 한 점 팔아 빈 속에 흥건하게 대취한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성 귀퉁이에서 쓰러져 얼어 죽고 말았다.

    

 

  치(痴) : 벼루에 미친 바보, 정철조  

정철조(1730~1781)의 호는 석치()다. 석치란 ‘돌에 미친 바보’ 란 뜻이다. 여기서 돌은 먹을 가는데 사용하는 벼루를 말한다. 그러니 벼루를 깎는 데 미친 바보다. 정철조는 벼루 깎는 것을 취미와 예술로 삼았다. 그의 별명에는 벼루 깎는 취미를 폄하하는 의미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생전에는 말할 나위가 없고,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벼루를 잘 깎는 명사로서 그의 호는 인구에 회자되었다.  

벼루는 글을 쓰는데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하나이다.  18세기에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멋진 벼루를 수집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는데 그 유행의 선두주자는 단언 정철조였다. 수많은 문인과 선비들은 그가 만든 벼루를 소장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그의 솜씨는 예술적으로 인정받았다.   

정철조는 벼루를 먹을 가는데 사용하는 도구라는 일반적인 용도의 인식을 넘어서 멋진 장식과 문양이 있는 예술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는 벼루를 만드는데 돌의 재질을 따지지 않고 칼과 끌을 잡는 순간부터 순식간에 벼루로 완성시키는 재능을 가질 정도로 동시대의 문인들과 절친한 교우들은 그의 벼루 만드는 능력을 손꼽았다.  

하지만 정철조는 단순히 벼루 잘 깎는 선비로 불리기에는 그가 생전에 펼쳤던 활동들은 다재다능했다.   기계, 지도 제작에 조예가 있었고, 천문지리에도 관심을 가져 해시계도 제작할 정도로 만능 지식인이었다.  

  

 

  오(傲) :  나는 나다!   

벽광나치오에서 '오(傲)' 에는 '거만하다' 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천성이 사나웠고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대부가 그림에 대해서 무지하면 거리낌없이 독설을 날렸던 최북의 오만한 기질은 그렇다치더라도 이 책에 소개된 나머지 벽광나치오는 동시대인들로부터 특별히 당대 사람들 눈에 거슬릴 정도의 오만함을 떨지 않고도 재능을 널리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재능과 기술을 가졌음에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갈고 닦은 노력 역시 그들이 활동하게끔 만드는 원동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벽광나치오들이 남들과 다른 독특한 재능과 기술을 당당히 보여줄 수 있었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아무래도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북은 호생관이라는 호를 스스로 붙임으로써 붓 하나만으로 온 세상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자신만의 예술적인 긍지를 표현하였으며  시작(詩作) 활동으로 당대로부터 널리 이름을 떨치게 했던 사대부 집안의 노비(종) 출신의 시인 이단전은 자신의 신분을 호와 이름에 사용하였다.   그의 이름 단전(亶佃)은 ‘진실로 밭가는 놈'종놈, 소작농을 뜻한다.   자신의 호를 ' 필재(疋齋) ' 라고 삼았는데 필(疋)을 파자하면 하인(下人)이 된다. 그는 스스로 진짜 종놈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신분사회에 대한 조롱을 퍼 부은 것이다.   그리고 정철조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대부임에도 불구하고 평생동안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집대성한 저서를 단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당대 사람들은 이들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신의 신분적 위치도 모른 채 불손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건방진 태도로 비춰질 뿐이었다.

하지만 당대로부터 벽광나치오라고 불리던 인물들은 자신의 재능을 겸손히 여길 줄 아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으며 부끄럽고 천하게 여기기는커녕 떳떳하게 자신의 재능을 어필 할 줄 알았던 전문가들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에는 신분이 미천했던 벽광나치오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 자기PR ' 과 유사한 자신만의 홍보 방식인 것이다. 

   

 

  벽광나치오가 아니라, 벽광 '근'(勤) 치오!   

사람들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조선의 '폐인' 들은 공통적으로 세속과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신분사회임을 감안하면 벽광나치오들은 한 가지 우물에만 파려고 하는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취미와 재능을 알아주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묵묵히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오랜 노력 끝에 신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둑의 명인 정운창과 시인 이단전 그리고 벼루 깎는 것이 좋아서 그저 오랜 세월동안 벼루를 깎다보니 예술작품에 비견될만한 벼루를 제작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정철조까지, 벽광나치오들은 남들 모르게 부단히 노력하였다.  

사납고 술주정뱅이 최북 역시 가만히 집 안에 앉아서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최북의 화풍 스타일은 초기 남종화풍에서 후기 조선의 고유색인 진경산수화로 변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시점이 금강산, 가야산, 단양 등은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다니게 되면서 비롯된다.  최북은 당시 조선 화풍을 지배하고 있었던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숭상하는 경향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천을 찾아 직접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벽광나치오, 그들이 찾으려고 했던 것


이 책에 소개된 11인의 벽광나치오들 중에 최북과 이단전과 같은 재주 있는 자를 세상은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던 경계인의 생은 끝내 불행했다. 이들은 시대와의 불화를 비켜가기 어려웠다.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의 열정이 인정받기에는 당시의 사회 관념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둑기사 정운창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평양의 또 다른 바둑의 명인 김종귀와의 대국을 위해서 직접 평양까지 찾아가 청을 하였지만 상대로부터 묵살을 당하게 된다. 그러자 그가 내뱉은 탄식은 재능이 있음에도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벽광나치오들의 불운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재능을 지닌 선비가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이, 그래 이런 정도란 말인가?  내 차마 걸음을 되돌릴 수 없구나!  내가 떠나온 고향 땅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얼추 수천 리다. 고갯길의 험준함과 나그네의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어렵사리 여기까지 이른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바둑이라는 기예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웅을 겨뤄서 잠깐 사이의 기분을 맛보자는 것뿐이다. 허나 끝끝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모양이니 어찌 기구하지 않은가? ” (같은 책, pp 269)  
   

  

정운창의 탄식에는 단순히 바둑 대결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 소개된 11명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역사의 시간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던 수많은 이름 모를 벽광나치오들의 고뇌도 느껴진다.  

결국 그들이 그들이 미친 사람 소리 들어가면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은 전문가로서의 인정이 아닌 좋아하는 일에서 얻을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이었다. 그들에게 ‘즐거움’ 이란 최고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전문가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동시에 사회와의 불화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용기와 집념을 지닌 조선시대의 전문가들은 자신이 선택한 한 가지 일에 즐기면서 몰두함으로써 최고의 능력과 기술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자독식의 사회, 거짓과 부패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운명처럼 정해진 틀을 박차고 나갔던 그들의 열정과 중심 세력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섰던 벽광나치오의 패기와 열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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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7-2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 소개를 보니까 생각나는 책이 있는데요,
허경진교수가 쓴 <악인열전樂人列傳>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악기, 노래, 가무에서 두각을 나타낸 예술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기이한 예술인들의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 놓았어요. 같이 읽어보셔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cyrus 2011-07-26 16:39   좋아요 0 | URL
허경진 교수라면 예전에 <홍길동전> 읽을 때 그 분이 쓰신
<허균 평전>을 조금 읽어본 적이 있어요, 그 분이 그런 책을 쓰셨군요.
작년에 나온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이라고 안대회 교수가 쓰신 책이
<벽광나치오>랑 비슷해요, 역시 역사의 기록 속에 사라진 예술인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굿바이님이 추천하신 책 읽어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