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벽광나치오 - 한 가지 일에 미쳐 최고가 된 사람들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3월
평점 :
조선의 벽광나치오
조선의 18세기는 참으로 묘한 시대였다. 동양과 서양, 중세와 근대, 재래와 신문물이 도입되고 뒤섞이고 대립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정체성과 가치관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수백 년간 정체됐던 문화는 젊은이의 혈관처럼 팔팔한 활기가 돌았다. 오늘날에도 18세기를 ' 조선의 르네상스 ' 라고 평가할 정도로 14~15세기에 서양에 수많은 천재를 배출했듯이 조선에도 셀 수 없는 인재들이 나왔다.
조선 르네상스의 인재들의 업적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들과 견줄만한 독보적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알려지지 않고 뜬소문처럼 사라져버린 이름 모를 인재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책에 소개한 11인의 벽광나치오들이 바로 역사의 기록에 사라져 ' 이름 모를 인재 ' 가 될뻔한 인물들이다. 벽광나치오(癖狂懶痴傲)란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고질적인 버릇을 못 고치며 어딘가에 미쳐 있고, 게으르고 바보 같고, 오만한 사람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 벽광나치오들이란 여행가, 프로 기사, 춤꾼, 만능 조각가, 책장수, 원예가, 천민 시인, 기술자 등 한 가지 일에 능통한 '전문가' 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가' 로 인정받았기 보다는 한마디로 ‘괴짜’ 라고 할 수 있다. 한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 그 외의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은 그들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했고 범상치 않고 기행을 일삼는 괴팍하게 여겼다.
벽(癖) : 몰입의 대가들
벽광나치오들은 사람들이 '미쳤다' 라고 할 정도로 자기 전공과 재능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경상도의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 출신인 정란(1725~1791)은 전문 여행가였다. 그는 세속적인 부귀영화의 명예를 이어가는 것보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조선의 모든 명산을 등반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당대 사대부들은 정란의 여행길을 ‘ 현실 도피’ 라고 손가락질하였으나 그는 “허황된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느니 실제 존재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 낫다” 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둑기사 정운창(생몰년 미상, 18세기 후반에 활동)은 10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바둑만 공부한 끝에 조선 팔도 바둑 '명인' 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으며 천민으로 시인이 되고자 했던 이단전(1755~1790)은 10년 동안 독학으로 주경야독했다. 독학 끝에 쓴 시 한 편으로 문단을 휘어잡고 있었던 대문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광(狂) : ' 조선의 반 고흐 ' 최 북
애꾸눈 화가, 최북
최북(생몰년 미상, 18세기에 활동)은 출신 성분이 낮은 직업 화가였다. 그림 한 점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말년의 생활은 곤궁했고 비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비참한 일생 속에서도 호를 호생관(豪生館: 붓에 의지해 살아가는 자)으로 짓고 오로지 자기만의 예술에 도취되어 살았다.
그는 각박한 현실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기행과 취벽 등 다양한 일화로 남겼다. 최북과 함께 동시대에 살았던 시인 신광하가 묘사한 최북의 모습은 그의 사나운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북은 사람됨이 몹시도 다부지고 사나운데
자칭 화사(畵辭) 호생관이라 했지.
체구는 단소한데 한쪽 눈은 멀었고
술 석 잔을 기울이면 꺼리는 게 없네.
- 신광하 <진택문집> 중에서, 안대회 <벽광나치오> pp 68 -
부자가 돈 보따리를 싸들고 와도 거드름 피우는 태도가 왠지 거슬리면 그는 그림을 팔지 않았으며 자신을 낮춰 부르는 양반 서열의 사람들 앞에서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객기로 자신의 눈을 찔러 외눈이 된 최북 주변에는 그 어느 누구도 지긋이 붙어 있을 사람이 없었고, 세상을 뜨는 최후까지도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절친한 사람들과의 교류가 뜸했으며 그나마 절친한 동료 화가였던 폴 고갱과 심하게 다투고 난 뒤 홧김에 자신의 귀를 자른 반 고흐처럼. 최북의 최후 역시 정신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입원 생활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권총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운을 달리한 고흐의 비극적 최후와 유사하다. 열흘을 굶다가 그림을 한 점 팔아 빈 속에 흥건하게 대취한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성 귀퉁이에서 쓰러져 얼어 죽고 말았다.
치(痴) : 벼루에 미친 바보, 정철조
정철조(1730~1781)의 호는 석치(石痴)다. 석치란 ‘돌에 미친 바보’ 란 뜻이다. 여기서 돌은 먹을 가는데 사용하는 벼루를 말한다. 그러니 벼루를 깎는 데 미친 바보다. 정철조는 벼루 깎는 것을 취미와 예술로 삼았다. 그의 별명에는 벼루 깎는 취미를 폄하하는 의미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생전에는 말할 나위가 없고,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벼루를 잘 깎는 명사로서 그의 호는 인구에 회자되었다.
벼루는 글을 쓰는데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하나이다. 18세기에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멋진 벼루를 수집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는데 그 유행의 선두주자는 단언 정철조였다. 수많은 문인과 선비들은 그가 만든 벼루를 소장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그의 솜씨는 예술적으로 인정받았다.
정철조는 벼루를 먹을 가는데 사용하는 도구라는 일반적인 용도의 인식을 넘어서 멋진 장식과 문양이 있는 예술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는 벼루를 만드는데 돌의 재질을 따지지 않고 칼과 끌을 잡는 순간부터 순식간에 벼루로 완성시키는 재능을 가질 정도로 동시대의 문인들과 절친한 교우들은 그의 벼루 만드는 능력을 손꼽았다.
하지만 정철조는 단순히 벼루 잘 깎는 선비로 불리기에는 그가 생전에 펼쳤던 활동들은 다재다능했다. 기계, 지도 제작에 조예가 있었고, 천문지리에도 관심을 가져 해시계도 제작할 정도로 만능 지식인이었다.
오(傲) : 나는 나다!
벽광나치오에서 '오(傲)' 에는 '거만하다' 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천성이 사나웠고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대부가 그림에 대해서 무지하면 거리낌없이 독설을 날렸던 최북의 오만한 기질은 그렇다치더라도 이 책에 소개된 나머지 벽광나치오는 동시대인들로부터 특별히 당대 사람들 눈에 거슬릴 정도의 오만함을 떨지 않고도 재능을 널리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재능과 기술을 가졌음에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갈고 닦은 노력 역시 그들이 활동하게끔 만드는 원동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벽광나치오들이 남들과 다른 독특한 재능과 기술을 당당히 보여줄 수 있었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아무래도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북은 호생관이라는 호를 스스로 붙임으로써 붓 하나만으로 온 세상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자신만의 예술적인 긍지를 표현하였으며 시작(詩作) 활동으로 당대로부터 널리 이름을 떨치게 했던 사대부 집안의 노비(종) 출신의 시인 이단전은 자신의 신분을 호와 이름에 사용하였다. 그의 이름 단전(亶佃)은 ‘진실로 밭가는 놈' 즉 종놈, 소작농을 뜻한다. 자신의 호를 ' 필재(疋齋) ' 라고 삼았는데 필(疋)을 파자하면 하인(下人)이 된다. 그는 스스로 진짜 종놈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신분사회에 대한 조롱을 퍼 부은 것이다. 그리고 정철조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대부임에도 불구하고 평생동안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집대성한 저서를 단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당대 사람들은 이들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신의 신분적 위치도 모른 채 불손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건방진 태도로 비춰질 뿐이었다.
하지만 당대로부터 벽광나치오라고 불리던 인물들은 자신의 재능을 겸손히 여길 줄 아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으며 부끄럽고 천하게 여기기는커녕 떳떳하게 자신의 재능을 어필 할 줄 알았던 전문가들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에는 신분이 미천했던 벽광나치오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 자기PR ' 과 유사한 자신만의 홍보 방식인 것이다.
벽광나치오가 아니라, 벽광 '근'(勤) 치오!
사람들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조선의 '폐인' 들은 공통적으로 세속과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신분사회임을 감안하면 벽광나치오들은 한 가지 우물에만 파려고 하는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취미와 재능을 알아주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묵묵히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오랜 노력 끝에 신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둑의 명인 정운창과 시인 이단전 그리고 벼루 깎는 것이 좋아서 그저 오랜 세월동안 벼루를 깎다보니 예술작품에 비견될만한 벼루를 제작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정철조까지, 벽광나치오들은 남들 모르게 부단히 노력하였다.
사납고 술주정뱅이 최북 역시 가만히 집 안에 앉아서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최북의 화풍 스타일은 초기 남종화풍에서 후기 조선의 고유색인 진경산수화로 변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시점이 금강산, 가야산, 단양 등은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다니게 되면서 비롯된다. 최북은 당시 조선 화풍을 지배하고 있었던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숭상하는 경향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천을 찾아 직접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벽광나치오, 그들이 찾으려고 했던 것
이 책에 소개된 11인의 벽광나치오들 중에 최북과 이단전과 같은 재주 있는 자를 세상은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던 경계인의 생은 끝내 불행했다. 이들은 시대와의 불화를 비켜가기 어려웠다.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의 열정이 인정받기에는 당시의 사회 관념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둑기사 정운창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평양의 또 다른 바둑의 명인 김종귀와의 대국을 위해서 직접 평양까지 찾아가 청을 하였지만 상대로부터 묵살을 당하게 된다. 그러자 그가 내뱉은 탄식은 재능이 있음에도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벽광나치오들의 불운을 잘 나타내고 있다.
|
|
|
|
" 재능을 지닌 선비가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이, 그래 이런 정도란 말인가? 내 차마 걸음을 되돌릴 수 없구나! 내가 떠나온 고향 땅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얼추 수천 리다. 고갯길의 험준함과 나그네의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어렵사리 여기까지 이른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바둑이라는 기예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웅을 겨뤄서 잠깐 사이의 기분을 맛보자는 것뿐이다. 허나 끝끝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모양이니 어찌 기구하지 않은가? ” (같은 책, pp 269) |
|
|
|
|
정운창의 탄식에는 단순히 바둑 대결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 소개된 11명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역사의 시간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던 수많은 이름 모를 벽광나치오들의 고뇌도 느껴진다.
결국 그들이 그들이 미친 사람 소리 들어가면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은 전문가로서의 인정이 아닌 좋아하는 일에서 얻을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이었다. 그들에게 ‘즐거움’ 이란 최고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전문가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동시에 사회와의 불화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용기와 집념을 지닌 조선시대의 전문가들은 자신이 선택한 한 가지 일에 즐기면서 몰두함으로써 최고의 능력과 기술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자독식의 사회, 거짓과 부패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운명처럼 정해진 틀을 박차고 나갔던 그들의 열정과 중심 세력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섰던 벽광나치오의 패기와 열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