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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
조이스 애플비 지음, 주경철.안민석 옮김 / 까치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자본주의의 경제적 패러다임
신자유주의가 비판받으면서 작년부터 자본주의 4.0 등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대안의 핵심은 시장 축소, 정부 확대 그리고 사회적 기업을 앞장선 휴머니즘 회복 등이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 금융자본의 폐해 등을 개선해야 하며 정부와 시장이 이전의 자본주의처럼 적대적이 아니고 협력적인 관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자유시장 즉 신자유주의가 비판을 받지만 강한 시장이 칭송받던 시절이 있었으니 역사는 반복하면서 조금씩 진전하는가 보다. 인간의 역사가 이 처럼 반복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불완전성으로 인해 인간은 진리에 가까워질 뿐이지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경제를 지배한 논리나 이념은 산업화 이후 시장과 정부의 길항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산업화 초기에는 정부가 시장을 압도했다. 이른바 중상주의로 국부 축적을 위해 관세와 규제로 수입을 억제하고 식민지 건설을 통해 수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각국의 소비자를 희생하고 상인과 제조업자만 배불린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가 대두됐다. 시장경제는 수많은 기업과 개인들의 의사결정으로 생산과 소비가 작동되는 경제시스템이며 가격에 의해 조정된다. 애덤 스미스는『국부론』에서 인간은 이기적일 정도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창출하게 된다고 봤다. 이런 시장경제체제에서 사람들은 과거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풍족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후생이 조화롭게 작용함으로써 시장경제의 자연스러운 작동이 중앙통제경제의 계획보다 우월함을 뜻한다.
애덤 스미스가 구축한 시장경제의 영향력은 산업혁명의 등장에까지 이어졌지만 빈곤 확산, 노사 대립, 경제 공황 등의 문제점이 유발하기 시작하자 정부는 제멋대로인 '보이지 않는 손'을 결박하기 위해서 직접 나서야 했다. 그것이 수정자본주의로 시장기능과 정부 통제가 혼합된 경제체제다. 이 이념 또한 소득분배의 불평등, 대량 실업, 자원 이용의 비효율 등으로 결국 미국의 대공황을 초래해 다시 정부가 강해지는 케인즈주의가 등장했다. 독점 금지, 소득 재분배, 정부가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뉴딜정책 등이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정부의 시장 개입이 더 이상 효과를 보지 못하고 기업 도산, 물가 상승, 실업 증가 등이 나타나자 애덤 스미스 체제로 회귀한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적 용어인 '트리클다운(Trickle down) 효과'는 넘쳐흐르는 물이 바닥을 적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고소득층 등 선도부문의 경제적 성과가 늘어나면 중소기업이나 저소득층 등 낙후부문에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가 활성화되는 효과를 말한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안에서 경제적으로 양극화는 오히려 심해져서 중간계층은 점점 빈곤층으로 떨어졌고 상류층과 극빈층의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는 현상이 심화됐다. 세계경제를 주름 잡았던 미국의 거대 은행 및 금융기관들이 도산을 하게 되면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나타나고 빈부격차, 경제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신자유주의 폐기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정부가 다시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이념이 대두된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이 우리가 경제 교과서에서 배우는 자본주의의 역사다. 긴 설명을 다시 짧게 축약하자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이렇게 세 가지의 경제원리로 분류할 수 있다. '자본주의 4.0'을 제안한 아나톨 칼레츠키는 이 세 가지로 축약된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경제 원리가 작동되었던 시대를 구분지을 수 있도록 일종의 경제적 패러다임으로 보고 있다. 시장경제가 등장한 애덤 스미스를 '자본주의 1.0', 경제 대공황 이후 케인스가 제안한 수정자본주의를 '자본주의 2.0',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3.0'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는 진화하는 시스템으로 인식하고 역사상 네 번째 구조적 전환인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자본주의 4.0'을 제시하였다.
'자본주의 4.0'에서는 딱 두 가지를 강조한다. 대기업은 자본주의의 '원칙'을 먼저 지키면서 사회공헌을 경영활동의 하나로 인식하는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정치권이 만들어내는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역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중심인 '시장'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있는 지금도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세계경제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본주의'를 바라본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 모두 틀렸다!
'애덤 스미스, 케인즈, 하이에크' 순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경제 패러다임의 과정은 경제를 공부할 때 배우게 되는 내용이며 경제학사에서는 오랫동안 하나의 통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논하는 모든 서적에서도 '애덤 스미스, 케인즈, 하이에크',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단골 인물들이다.
이번에 출간된 조이스 애플비의 『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역시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는 광범위한 역사의 과정을 담고 있는 책 중의 하나다.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는 내용에서는 하이에크 대신에 시카고학파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을 언급하는 것만 빼면 자본주의의 역사적 흐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논했던 그 이전의 책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 작용했던 특정한 요인에 대한 관점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변동시킨 거대한 경제 체제인 동시에 문화 체제라고 봤으며, 인류의 관행과 사상, 가치와 이념을 뒤흔들어 정치를 변형시켰다고 설명한다. 즉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형성과정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그는 경제학의 역사를 거론할 때 언급되는 애덤 스미스의 관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스미스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재화를 통해 거래하고 교환하려는 시장경제체제가 자연스럽게 구축되었다고 봤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 형성에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애플비는 시장경제의 발전이 자본주의의 발달로 서서히 이어져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애덤 스미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경제발전이 사람들이 시장을 통해 거래하고 교환하는 문화적 특성을 촉진시켰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자본의 축적이야말로 '전통적인 경제활동 방식(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같은 농촌사회 내에서 이루어진 생산방식)과 단절하는 첫걸음'(pp 25)이라고 강조한 마르크스의 주장도 반박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원리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유럽의 전통적 사회에서는 생산방식을 혁신하는 데 필요한 문화자본의 축적 그리고 노하우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애플비의 반박을 비추어 보자면 마르크스 역시 자본주의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문화적인 측면의 요인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판하고 있는, 애플비의 관점은 막스 베버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다. 저자 역시 스스로 막스 베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문화적인 특성이 자본주의의 발달에 끼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베버 역시 재화를 통해 거래하려는 성향을 지닌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인간관을 부정하고 있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시장경제의 방식이 존재했다고 가정한 마르크스를 비판했다.
중세 말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금융위기까지 방대한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의 발달은 애덤 스미스의 생각처럼 '인간의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마르크스처럼 역사 발전의 필연적 도달점도 아니다. 이미 도래할 것으로 예정된 불변의 역사가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도 포함된 인류의 문화적 행동이 만든 관행과 제도의 집합일 뿐이다.
'혁신'이라는 새 옷을 입는 것이 두려웠던 자본주의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은 시간에 따라서 변화되는 연쇄적 진보 단계로 파악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경제가 등장하기 전의 과거의 체제와 다를 수 밖에 없는 인정하게 되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의 귀결로 본다. 하지만 애초부터 자본주의는 헌 옷을 버리고 상황에 따라서 새 옷을 갈아입을 줄 아는 능동적으로 변신할 줄 아는 혁신적인 체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까지 서양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진보적인 혁신을 추구하지 않았다.
피터르 브뤼헐 「월력도 연작 중 두번째 그림 : 곡물 수확, 8월」 1565년
16세기 이전 유럽의 전통 사회에서는 농업이 주된 생산방식의 과정이었다. 인구의 절반이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그 당시 사회 질서 역시 농경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농경 중심 사회에서만 나타나게 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근에 의한 흉작이다. 특정한 해에 기근 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농업에 의지해서 생산되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어 수많은 인구들은 아사(餓死)의 공포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오랜 세월동안 농경사회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농업을 중시하다보니 당연히 상업은 무시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경제체제를 크게 변화할 수 있는 어떠한 혁신도 꿈꿀 수가 없었으며 농업 중심의 사회 질서를 그대로 순응하기에 이른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농경 사회 자체가 한순간에 바뀐다는 점이 기근에 의한 흉년이 찾아오는 것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고 나면서부터 오랫동안 유지될 것만 같았던 농업 중심의 경제체제에 새로운 기운이 꿈들대기 시작했다. 대륙 간 교역이 본격화하면서 '자본'의 실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러한 체제 속에서 상공업자의 세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자본에 사적 투자라는 개념이 더해져 최초로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전환점의 시작을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최초로 자본주의에 의한 혁신이 이루어진 시점을 산업혁명이 등장하기 이전을 거슬러 올라 17세기로 정하고 있다. 신. 구교 간의 종교적 갈등 그리고 혁명에 의해 국왕이 바뀔 정도로 정변이 잦았던 내분의 과정 중에도 상인들은 전국시장을 형성할 정도로 경제질서를 변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에 계몽사상이 등장하게 되면서부터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는 진보적인 경제질서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영국이 자본주의를 발달하게 만든 최초의 유럽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영국에서 불어닥친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비단 유럽 전체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특히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전력사업을 발전시킨 에디슨, 강철왕 카네기 등과 같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혁신적인 기술가와 사업가들의 등장으로 자본주의는 더욱 더 진보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유행을 타게 된 국가들은 자신들의 경제 및 사회적 상황에 맞게 딱 어울리는 옷을 입을 줄 알게 되었다. 이제는 구 경제체제의 질서를 순응하는 낡은 옷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알고 혁신을 강조하는 새 옷을 갈아입는 것이 중요해졌다.
자본주의자들의 행동은 반복된다
아돌프 폰 멘첼 「쇠 압연 공장 (현대판 키클롭스)」 1872~1875년
저자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로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혁신에 의한 구 질서가 파괴되는 원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 기존에 입었던 헌 옷을 입지 않는다거나 버리게 된다. 그러나 신상에 대한 허영심은 절제되지 않는 과소비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는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등장했던 증기기관, 자동차, 산업 등이 근대로 이행하게 만드는 '창조적 파괴'의 사례라면 21세기에 이르게 된 지금은 우리 눈 앞에서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 기술의 등장이 현대판 '창조적 파괴'를 진행하고 있는 과정의 일부이다.
이렇듯 '창조적 파괴'의 원리로 작동되던 자본주의도 진보와 성장에 대한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이렇다보니 자본주의의 무시무시한 파괴적인 측면은 금융위기, 경제적 불평등, 빈곤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것을 묵인한 채 자본주의는 가차없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자본주의자들의 행동은 반복된다. 위기가 임박했음에도 그것을 막으려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누구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떤 성질을 강화시키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다. 자본주의의 '정신'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세일즈맨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는 않은 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방법 - 가능하다면 쉬운 방법 - 으로 돈을 버는 것에만 몰두하면 위기와 공황, 대폭락은 불가피해진다.
- 조이스 애플비 『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중에서, 까치, pp 452 -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금 작동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판을 통째로 뒤엎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위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비판론을 제기하는 측면이 자본주의의 '혁신적 파괴'의 장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실수에서 배우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들어 시장의 자정 기능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냉혹할 정도로 가차없이 작동되는 자본주의의 혁신도 스스로 종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무차별적인 '생각없는 혁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멈출 줄 모르는 가차없는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조이스 애플비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결론을 내리는 저자의 태도에 대해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적 경제의 유동성은 그 아무리 똑똑한 전문가라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으며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 과거를 공부한다고 해서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pp 466)
다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을 법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빈곤층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으로 운영되는 그라민 은행을 설립한 무하마드 유누스,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 문제를 부의 배분 및 사회적 약자의 보호와 관련된 정치적 문제로 바라봤던 아마르티아 센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대안은 공통적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에도 문제점이 있다. 대안의 실마리로서 제시한 무담보 소액대출 제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저자는 이 제도 역시 빈민 중에서 그나마 잘 사는 사람들이 혜택을 볼게 될 뿐,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책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적인 대안이 될 것만 같았던 유누스의 무담보 소액대출 제도와 그라민 은행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라민 은행의 금리가 고리대금 수준으로 높아진데다 가혹한 추심으로 대출 받은 이들이 자살하면서 원래 취지는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라민 은행을 역임하고 있었던 유누스가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1억 달러의 기부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의 명성에 흠집이 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불명예 퇴진이라는 씁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누스의 대출제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과 문제 제기가 점화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말부터다. 원서가 2010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본다면 애플비는 유누스의 대안에 대해서 문제점을 거론했지만 그렇다고 심각할 정도로 몰락에 처하게 될 줄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세운 저자의 대안은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의 내용과 유사한 면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움직이게 만드는 시장 중심의 기능, 즉 혁신에서 비롯된 부의 창출 능력을 유지하되 이에 대한 탐욕을 줄일 수 있는 적절한 정부의 규제와 개입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가차없을 정도로 탐욕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난폭한 성격을 규제하려는 목표와 취지는 인정할 만하나 아나톨 칼레츠키나 애플비 역시 마찬가지로 경제발전을 바라보고 있는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현대 경제 발전의 공로를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만 해석하고 있고 여전히 자본주의적 시각의 범위 하에서 해결책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안에는 모순적인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를 '가차 없지만 생각 있는 혁명으로 이어갈 것'이라고 진단한 점은 그가 지적했던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와 별 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남다른 관점만 부각되었을 뿐, 그도 역시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반성하는데만 그쳤다.
인간은 경제적 위기를 마주하게 되면 '시장-정부'를 오가는 쳇바퀴를 반복해서 돌려왔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지구에서 작동되고 있는 상태다. 끝없이 가동되고 있는 와중에 환경 파괴, 자원 고갈, 다음 세대에 떠안아야 할 막대한 빚 따위의 호소는 들리지도 않는다. 끝없이 새롭고 독창적인 혁신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소비해야만 경제가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원리 하에 인간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적인 대안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줄 모르는 자본주의의 '혁신적 파괴'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혁신적 파괴에 대한 맹목적인 예찬에 사로잡혀 이것을 적절하게 규제하지 못하게 된다면 세상을 파괴해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될 수 있다. 시장경제 내에서 불확실성은 누구에게나 적이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기업이나 개인은 모험을 회피한다. 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에 맞서 극복하려는 의지도 약화시킨다. 이러한 태도는 앞에서도 설명한 농경사회에서의 상업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역사의 선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진보와 발전에 있어서 때때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지속된다면 나중에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파괴의 효과는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가차없는 자본주의의 작동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지만, 문제가 크게 악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기존에 유지되어 있는 질서의 체계에 약간의 변화가 있더라도 불확실성의 두려움을 넘어서야 지금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책 한권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처한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또 저자가 제시한 대안이 당위성을 넘어 실제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미완의 과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지적인, 현실적인 고민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