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 -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김성동 지음 / 녹색평론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이 중음신(中陰身)이 되어  
이 땅 위를 떠돌고 계신 어르신들 이야기이다.

 

  독립유공자 인정, '하늘의 별 따기' 

8.15 즈음을 맞이하게 되면 언론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기사들을 보게 되면 독립유공자 선정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해방을 맞은지 66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선조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고군분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국가보훈처가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의 독림유공자 선정 결정을 또다시 보류하여 적잖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조봉암 선생은 이승만 정부 시절에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올해 초에 재심을 통해서 5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게 되어 오랫동안 꼬리표가 자리잡은 왜곡된 누명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동안 공산주의자라는 오해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받지 못했기에 이번 국가보훈처의 결정은 조 선생의 유족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올해 초 조 선생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을 수 있게 된 재심 결과와 배치되는 상반된 결정이다.   조봉암 선생은 이번에도 무슨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일까?  

보훈처 측에서는 조 선생의 과거 공산주의적 행적이 서훈 심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다만 일제 말기 때 부적절한 행위가 확인되어서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었다면서 보류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의 퇴색이 짙었던 1941년에 조봉암 선생의 이름으로 국방헌금 150원을 기부한 사실을 그 당시 매일신보 기사에서 확인되었으며 매일신보 단 한 건의 기사 때문에 무기한 보류를 결정한 것이다.   

이번 보훈처의 심사 과정과 결정은 애매모호하다.  5공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에 대해서는 복권됐다는 이유만으로 국립묘지 안장을 승인해 준 최근의 결정과 비교하면 조 선생의 보류 결정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국방헌금 사실이 있다고하더라도 올해 복권되었으니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줘야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국방헌금 기부한 사실만 가지고 조 선생이 친일행위 그리고 변절자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 선생 경우는 친일 행위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심사가 보류된 사례이지만 지금까지도 조 선생과 같은 수많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여전히 독립유공자로서 인정을 못받고 있다.  그 중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심사의 기준이 불공평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보훈처 측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부터는 이들에 대해 해방 이후 북한과 관련이 없다는 전제하에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즉, 독립운동가들의 사회주의 노선 역시 그 당시 독립운동 방식의 일환이며 해방 이전의 사회주의 행적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의 유족들이 내세우는 자료라는게 전문성이 부족해서 입증하는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보훈처가 내세우는 심사 자료에도 한계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작성된 재판 기록이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이전의 사회주의 행적에만 심사 결정에 문제가 없다고 보는 보훈처의 입장에도 문제가 있다.  해방 이후의 사회주의 행적이 단지 국가 정체성에 반한다는 이유만으로 심사 결정에 불리한 근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거의 이면에는 이승만 정부 시절이 만들어낸 반공 헤게모니의 망령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지나친 과장에 불과한 것일까?   

 

  

   이념의 갈등에 희생된 두 민중 해방자, 조봉암과 김원봉   

<만다라>의 소설가 김성동은 <현대사 아리랑>이라는 책 한 권에 그동안 민중의 역사 속에서 떠돌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뻔한 독립운동가 및 예술가들의 이야기들을 모았다.  이들의 행적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인생을 바쳤지만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 갈등의 역사 앞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어르신들' 이야기이다.  

그래서 <현대사 아리랑>에 소개된 독립운동가 및 예술가들은 근현대사를 배웠다던 학생들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생소하다.   또 절반의 인물들 중에는 해방 이후 스스로 북한으로 향한 사회주의자들도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패망으로 갑작스레 독립을 맞이한 이후 급격한 사회적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던 조국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나라 내부의 안정화 및 통일할 수 있는 방편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조봉암 선생처럼 민중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을 위해서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에 치중한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 중에 조봉암과 김원봉의 삶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뚜렷한 독립 운동의 공적이 있음에도 불과하고 남한과 북한, 이념으로 인해 갈라 돌아서버린 두 나라로부터 명예를 인정받기는커녕 버림 받아야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조봉암과 김원봉. 두 사람의 이름 속 '봉' 은 '받들 봉(奉)' 자를 쓰고 있다.  이들의 호에도 공통적으로 '뫼 산(山)' 자가 들어가 있다.  출생년도도 두 사람 다 1898년이며 남조선과 북조선에서 장관에 부임하면서 해방 이후에도 조선의 안정화를 위해 이바지하였다,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 김원봉은 남조건의 국방장관과 동등한 국가검열상)   그러나 두 사람은 이념의 갈등에 눈이 먼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조봉암은 남조선에서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사형당했으며 김원봉은 북조선에서 불었던 김일성을 비판한 연안파 제거의 피바람에 휘말리면서 숙청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의 인생에는 공통적인 악연의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장택상(1893~1969)이다. 해방 이후 수도경찰청장 시절에 김원봉을 체포하기도 했으며 이승만 정권이 수립하면서 초대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하여 반공투쟁에 앞장섰다.  그리고 국민장을 치러 국립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조선의 '봉황새' 가 되지 못한 비운의 정치가, 조봉암

 

 

죽산(竹山) 조봉암 (1898~1959)   

 

죽산 조봉암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드라마틱하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조봉암은 원래 이름의 '봉' 을 '봉황새 봉(鳳)' 자를 쓸뻔했다.  사연은 이렇다.  조봉암의 어머니는 봉황새가 나오는 태몽을 꾸었는데 처음에는 봉황새 봉 자를 쓸려고 하다가 평생 가난한 삶을 살았던 부모는 둘째 아들의 이름이 너무 엄청난 것 같아 그냥 '받들 봉' 자로 썼다.    

봉황새는 동양에서는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 여긴다. 예젼부터 높은 벼슬의 명칭이나 평화로운 세상을 비유하는 표현 속에는 이 봉황새를 상징하는 봉(鳳) 자가 포함되었다.  만약에 어머니가 둘째 아들의 이름에 봉황새 봉 자를 썼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펴보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그의 불우했던 삶을 생각하면 이름 작명부터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다.   

절은 시절, 3.1 운동 때 참여하기도 했으며 사회주의야말로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원동력 그 이상으로 모든 조선 민족들이 잘 살 수 있는 완전한 진리라고 생각하여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당시 남조선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지휘하던 박헌영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통해서 지도노선을 비판함으로써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노선과의 거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봉암은 '반노반자(反勞反資)' 라는 정치이념으로 전향하였다.    

이승만 정부 시절 농림부 장관에 역임할 정도로 사회주의 노선과 결별한 조봉암의 정치적 선회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그가 우익 진영으로 돌아섰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이 내용 역시 조봉암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인식 중 하나이다.

소련의 지배 하에 통제당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면서도 자본계급의 독재로 이루어진 정책도 거부하는 순전히 조선의 민중을 위한 민족주의적 정치적 행보였다.  조봉암은 박헌영의 노선처럼 지하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좀 더 민중을 위한 현실적인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공과 단독 정부를 고집하는 이승만 정권의 막강한 권력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으로 대표되는 반한민당 세력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 조봉암을 자신들의 정치적 터전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야말로 조봉암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호랑이 굴 속에 제 발로 들어가게 된 셈이다.  

민족을 위한 정치적 행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은 그를 '배신자' 라 규정하였으며 남조선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팽팽한 이념의 갈등 사이에서 그 어느 누구도 환영받지 못한 입장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눈엣가시' 인 조봉암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서 정부가 내세운 농민정책에 반대할 정도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 1952년과 1953년에 두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승승장구하였다.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 번번히 낙선했지만 지지율에서만큼은 이승만보다는 앞섰으며 온갖 부정으로 점칠된 당시 선거 과정을 생각하면 조봉암의 존재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만큼 민중으로부터 인정받던 정치가였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모습 (1958년)

  

조봉암은 낙선의 굴복 속에서도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내건 진보당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도 반노반자 이념이 그래도 진보당 창당에도 적용되었다.  공산독재와 친미수구적인 북진통일이 아닌 민주화의 개혁을 통한 평화통일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점점 세력을 확장되어가는 조봉암의 진보당 활동을 가만히 있을 이승만 정부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는 죄역을 만들어 그를 체포하는 동시에 진보당은 오래가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  조선을 통치할 수 있었던 정치가에서 한순간에 간첩이 되어버렸다.  정치적 모략이 만들어낸 재판으로 인해 조봉암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원대한 꿈의 날개를 펼쳐보지 못한 채 사형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 김원봉  

 

 

 약산(若山) 김원봉 (1898~1958?) 

 

이 책의 부제는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이다.  민족 해방을 위한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명예의 '꽃다발' 이라는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무덤도 없이 떠돌아야하는 불행한 망령들이다.    특히 약산 김원봉은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공적이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의열단을 조직한 무정부주의적 투쟁 노선을 취한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행적만 가지고 그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   아니, 의열단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단장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과서에 단 몇 줄로 거론되기에는 남한에서의 그의 평가는 너무 인색하기만 하다.  그와 함께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여 일본의 관공서나 고급 관리, 심지어 천황에게까지 폭탄을 던지던 김상옥, 김익상, 박재혁, 김지섭 열사는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아마도 김원봉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해방 이후에 펼쳤던 그의 사회주의적 노선 때문이리라.  

 

 

이육사 (1904~1944)

의열단원에는 저항시인 이육사도 활동하기도 했었는데 이육사의 일생을 그린 8.15 특집 드라마  

<절정>에 의열단의 단장인 김원봉이 잠깐 등장하기도 했다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 투쟁을 통해 조선총독부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은 일제 권력의 중요 근거지와 조선총독과 친일파 등 반민족적인 인물들을 암살대상으로 삼아 활동한 무력 독립운동 단체로 이름을 떨쳤다.  의열단원 중에는 저항시인 이육사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과격하면서도 혁명적인 독립 운동은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할 정도로 일본 섬멸에 선봉으로 나섰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소속되어 활동하지만 임정 보수파들과의 갈등으로 임정과 결별하였다.   김원봉은 조선 민족 순수의 힘으로 독립을 원했다.  그래서 그는 총과 폭탄을 든 무력 항일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의 뜻을 저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승리로 조선은 해방되었고 그 전부터 준비되어온 무장혁명군을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였다.    

그 이후로 김원봉은 사회주의 노선으로 걷기 시작하였고 본인 스스로 월북하였으며 북조선에서 국가검열상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에 그의 이름은 공식 석상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당시 김일성을 비판했던 연안파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는 설과 명예로운 은퇴를 했다는 설 등 지금도 김원봉의 사망연도에 대해서 입증할만한 사료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김원봉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서 권력의 각축장에서 밀려나간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북한의 혁명열사들이 안치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그의 이름이 새긴 묘비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이름 없는 혁명가가 된 것이다.

 

    

  이들의 영혼을 어떻게 달래주랴 

조봉암과 김원봉 이외에도 그동안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이 최근에 역사가들에 의해서 빛을 보고 있다고 하지만 반공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는 어두운 그늘을 이 한반도에 완전히 걷히지 않는 이상 수많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유족들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한 험난한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반대로 자신의 위대한 업적은 부각시키고 이면에는 어떻게든 친일 행위를 덮어버리려는 친일파 또는 후손들은 허세를 부리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조국을 위해 몸바친 선조의 명예, 친일파의 후손은 선조의 옛 땅을 찾기 위해서 법정을 드나들고 있다.  그러나 두 집안의 후손의 표정의 명암이 엇갈린다.  사회주의적 또는 친일 행위 때문에 진정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반면에 친일파의 후손은 법정 공방 끝에 어마어마한 옛 땅을 되찾고야 만다.  이것이 해방된지 66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나에게는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러데 나는 이 박사(= 이승만)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내 죽음이 이 나라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 사형당하기 전 조봉암의 마지막 말, <현대사 아리랑> 김성동, pp 299 - 

  

조봉암은 사형당하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이념의 역사에 억울하게 밀려난 마지막 희생물이 되기를 바랬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혐오했던 친일파들에게 밀릴 정도로 영혼이 되어서도 또 다시 희생되어야 했다.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은 우리 스스로 국격과 정통성을 깎아 낮추는 꼴이다.  <현대사 아리랑>을 통해서 수많은 혁명가들의 업적을 알아주기에는 그리고 무덤 없이 떠도는 망령들을 달래기에는 부족하다.   지금도 역사가들이 잊혀져가는 혁명가들의 삶을 찾아내고는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어르신들이 하는 옛날 이야기로 뜰릴 뿐이다.

역사의 세월 속에서 비굴한 이들의 허세는 날로 커져만가는데 정작 양심적인 영혼들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채 더욱 더 잊혀져가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얄궂게 느껴진다.  

 

   

 

***님,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

 

 

 

* 내용 관련기사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번번히 유공자 탈락…유족들 불만 팽배]  노컷뉴스 2011년 8월 14일 

[‘5공 비리’ 안현태 유해, 국립묘지에 기습 안장]  경향신문 2011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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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8-16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탁환의 소설 제목인 줄 알았어요. 저 좀...큭!>.<;;

cyrus 2011-08-16 22:04   좋아요 0 | URL
네, 소설 제목을 차용했어요. 제가 본의 아니게 낚시질을 했군요 ^^;;

마녀고양이 2011-08-1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루스님의 페이퍼를 읽을 때마다
이런 글을 쓰려면 얼마나 노력과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할까 궁금해져요.
그리고, 이런 글을 쓰시는 시루스님은 어떤 직업을 가지시려나도 마찬가지로 궁금하구요.

음... 시사인이나 한겨레21의 기자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제 개인적 바람이예요!! 아하하!

cyrus 2011-08-16 22:08   좋아요 0 | URL
어제는 광복절이라서 집에 있었어요. 혹시 마고님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이육사 시인의 일생을 그린 특집극 <절정> 이외에는
TV는 볼 것도 없었고요,,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날(?)을
그저 노는 날도 보기에는 좀 그렇고,, ^^;;
그래서 서재 이웃분님이 주신 책을 읽었어요, 그게 바로
현대사 관련된 <현대사 아리랑>이었어요.

조만간 이웃분님들에게 받은 책들을 읽으려고 해요.
미루다간 못 읽을거 같아요. 책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요.. ^^

2011-08-25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