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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Scene #1 시간을 집어 삼키는 자
프란시스코 데 고야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0~1823년
여기 눈을 돌리게 싶어지게 하는 그림이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튀어나온 광인(狂人).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더 이상 벌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벌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무엇을 뜯어 삼키고 있다. 이런! 광인이 먹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머리 부분과 오른팔을 이미 물어 뜯겨 없어졌고 하나 남은 팔이 뜯겨 나가려고 한다. 이제는 그림을 보는 관객마저도 집어 삼킬 기세다. 놀랍게도 그가 먹고 있는 것은 광인의 아들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무자비한 신의 모습을 묘사한 무시무시한 그림이다. 사투르누스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경의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된다. 크로노스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시간의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의 소중한 ‘시간’을 거대한 낫으로 싹둑 잘라버린다.
사투르누스는 아버지이자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를 살해하고 신계(神界)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우라노스의 무시무시한 예언은 사투르누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사투르누스도 자신처럼 자식의 손에 죽는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예언에 대한 공포감을 이길 수 없었던 사투르누스는 대지의 여신 레아와 결혼해서 낳은 포세이돈, 하데스, 헤라를 비롯한 다섯 자녀를 집어 삼켰다. 자신 앞에 놓여진 ‘시간’을 집어 삼키듯이.
핏물이 줄줄 흐르는 자식의 팔뚝을 한입 베 물은 광기 어린 야만의 표정은 나치 정권을 세워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자살로 세계 대전을 마감시킨 히틀러가 묘하게 오버랩된다. 히틀러는 누구인가. 그는 평화로운 세계의 시간뿐만 아니라 유대인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 그리고 ‘히틀러’라는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신을 둘러싼 역사마저 완전히 집어 삼켜버린 무서운 인물이다.
Scene #2 ‘미친 존재감’ 히틀러
1934년 총통과 수상을 겸한 지위를 겸하여 명실상부한 독재자가 되어 1945년 자살로 세계 대전이 종전의 막이 내릴 때 히틀러가 활동했던 시기는 한마디로 ‘시간과 역사 잡아먹기’의 향연이었다. 아니, 이보다 더한 것들도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는 전 세계를 군림하고 싶은 현대의 크로노스였다.
죽어서도 그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최근에 흥미로운 내용의 기사가 나왔는데 세계 24개 언어로 구성된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디피아의 알고리즘을 분석한 결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온라인상의 인물이 바로 히틀러였던 것이다. 2위가 마이클 잭슨, 3위는 마돈나였고 4위는 예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은 위키디피아에서 검색 횟수가 많은 인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키디피아에 기록된 인물의 인생에 다른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사건에 연관이 많이 되는 일종의 ‘링크’ 관계를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여섯 단계만 걸치면 연결된다는 링크의 원리를 입증할 때 인용되는 ‘케빈 베이컨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히틀러의 존재는 그야말로 ‘미친 존재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동에 따라 전쟁의 판세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 또한 달라졌으니까. 히틀러가 유대인 억압 정책을 펼쳤을 때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원자 폭탄 제조에 관여했다. 만약에 히틀러가 유대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나라 한 개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원자 폭탄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면? 이렇게 역사가 진행된다면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극적인 작전을 펼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역사의 순간이 없었다면 일본은 패전되지 않았을 것이며 1945년 8월 15일은 그저 평범한 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광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수용소와 가스실은 수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의 장소였지만, 안네 프랑크와 프리모 레비의 소중한 기록은 살아남아 끔찍한 역사 한 페이지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1)
Scene #3 왜곡된 ‘천상천하 유아독존’
히틀러는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가난한 무명화가였다. 그림 실력으로 영 재미를 보지 못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서 훈장을 두 개나 받은 전쟁용사가 되었지만, 종전 이후에 별 볼일 없는 백수가 되었다. 젊은 히틀러의 시기는 거의 가난, 실패, 무기력함 그 자체였다고 보면 된다.
세상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가끔 세상이 원망스럽고 모든 것들이 다 부정적으로 본다. 가난과 실패로 점철되는 청춘을 보낸 히틀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으로 변했고, 감정 조절, 자기비판 능력이 결여되었다. ‘인정받지 못한 자’는 인생 역전을 위해서 ‘총통’이 되기로 결심한다. 결핍의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이 바로 ‘정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가 결합된 나치즘이 탄생되었다. 이때부터 반유대주의에 대한 광기의 그림자가 히틀러를 지배하게 된다.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히틀러가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사랑도 그의 삶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작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의 삶에 많지는 않아도 몇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는 그녀들을 하찮게 여겼고,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했다. 에바 브라운은 늘 소홀한 대우를 받고 계속 모욕을 받은 끝에(“그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나를 필요로 한다.”)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30쪽)
그의 지나친 과대평가는 왜곡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히틀러는 특별한 영웅이 되고 싶었다. 총통이 된 히틀러는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맞추었다.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후계자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권력을 이을 정당의 후계자도 만들지 않았다.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친위 돌격대 지도부를 체포하고 처형했다. 만약에 히틀러에게 자식, 특히 아들이었다면 사투르누스처럼 벌써부터 자신의 후환이 두려워서 제거했을 것이다. 그의 밑에서 활동했던 히믈러, 괴링, 괴벨스 등은 히틀러의 권력을 돋보이고 기반을 유지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정당도 마찬가지. 권력의 초점뿐만 아니라 독일의 운명도 히틀러에게 향해야만 했다.
945년에 자살하기 직전에 패배를 직감한 히틀러가 독일에 남아 있는 것을 모두 폭파하라고 말할 정도면 삶의 개인적 패배를 독일이라는 국가의 패배와 동일시하는 무시무시한 발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길지만 짧은 생애동안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싶었다. 독일이라는 나라와 함께. 인간이라면 신이 아닌 이상 시간을 지배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불행히도 나는 모든 것을 한 인간의 생애라는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해야 한단 말이지... 남들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쓰는 판에 내겐 겨우 보잘것없는 몇 년밖에 없으니.” (53쪽)
Scene #4 지금도 세계는 히틀러의 유령이 떠돈다
히틀러라고 하면 에너지가 과다하게 노출되는 듯한 그의 연설 장면이 연상된다. 우리는 그런 장면을 통해 대중을 선동할 줄 아는 지능적 정치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히틀러를 연구하고 분석한 독일의 언론인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입장은 다르다. 히틀러가 집권할 때 600만 명의 실업자가 3년 후에 완전 고용이 되는 ‘경제기적’의 시기가 있었다. 이것은 히틀러 집권기에 있어서 ‘대박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금상첨화로 군사력까지 증강시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독일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한 성과가 더욱 강조될수록 정치인의 업적도 부각되는 법. 그래서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정할 수 있어도 성과만 가지고 역사적 과오를 가릴 수 없다. 우리는 히틀러가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책을 통해 왜 그가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시간과 평화, 세계마저 집어 삼키고 싶었던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합리적인 이성과 비판의식을 잃은 한 인간의 광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하겐 크로이츠와 욱일승천기를 들고 행진하는 일본 극우단체2)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분명히 히틀러의 작품이다.
(22쪽)
지금도 세계는 히틀러의 유령이 떠돈다. 하프너는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분명히 히틀러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히틀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피카소처럼 불후의 걸작을 남기지 못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작품은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 전쟁’이라는 거대하고도 잔혹한 풍경화를 완성했고, 지금은 그 시대를 증언해주는 역사화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히틀러가 남긴 작품을 보고 있고 그 속에 살고 있다.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은 여전히 히틀러와 나치를 옹호하고, 전 세계에 각인시킨 반유대주의는 여전히 살아남은 유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을 쓰고, 역시 히틀러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귀도 크노프의 말처럼 히틀러의 볼모로 남아 있지 않기 위해서 독일의 트라우마 히틀러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 이 말 속에 우리가 히틀러를 이해해야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히틀러는 단순히 독일만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전 세계의 트라우마다. 히틀러가 남긴 광기의 유산을 기억하는 것은 제2의 히틀러의 탄생과 어리석은 역사의 반복을 방지한다.
사투르누스는 우라노스의 예언을 피할 수 없었다. 레아가 사투르누스의 광기가 삼키기 직전에 제우스를 따로 숨겼다. 결국 성장한 제우스는 사투르누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덕분에 뱃속에 들어간 신들은 살아남았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시간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것을 하나로 이어지면 역사가 된다. 20세기의 사투르누스 히틀러는 시간과 자신의 삶마저 지배하려다가 자멸에 이르고 말았다. 만약에 제우스 같은 강력한 견제자가 있었더라면 광기의 시간을 길지 않았을 것이며 자멸에 이르는 시간이 더 앞당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곡된 히틀러 현상을 바로잡고, 광기의 풍경화가 다시 나오지 않기 위해서 히틀러의 작품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제우스와 같은 견제자가 되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히틀러가 왜 미쳤는지, 그리고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싫어도 그를 이해하고 검토해야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1) 히틀러와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를 첨가하자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故 손기정과의 관계도 빠질 수가 없다.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사람이 히틀러였다. 참고로 서울시 기념물이 된 일명 ‘손기정 월계수’는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히틀러가 직접 준 선물이라고 전해졌지만, 근거가 없는 허구에 가깝다. 그리고 그 당시 독일에서는 월계수를 구하기 힘들어서 참나무로 대체했다.
2) 사진출처: 日극우 "히틀러 기리자"… 나치旗 들고 도쿄시내 행진
(오마이뉴스, 2014.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