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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Scene #1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1762년 윤5월 13일. 창경궁에서는 조선왕조사의 가장 처참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조선의 사백 년 종사가 다 망하겠지만, 네가 죽으면 종사는 보존할 수 있으니, 네가 죽는 것이 옳느니라.” 노기등등한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의연하던 세자는 끝내 무너진다. 혈육의 정에 호소하며 매달렸다. “아버님, 어머님, 잘못하였느니, 이제는 하라 하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그러나 영조는 매몰찼다.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자 직접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자물쇠를 잠근 뒤 대못을 박았다.
그 여드레 뒤 세자는 숨진다. 복날이 낀 여름이었다. 세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컴컴한 절망 속에서 죽어 갔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사도세자. 그는 영조가 마흔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유일한 혈손이었다. 7월의 여름 무더위에 사방팔방으로 꽉 막힌 뒤주 안에서 그가 겪었을 마음과 몸의 고통이 마치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의 행적이나 역사나 조상에 대한 관점은 어느 면을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리 나온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든 이유에 관한 가설도 그렇다. 사도세자는 왜 ‘뒤주의 왕’이 되어야만 했을까?
학계에선 그동안 사도세자가 미쳐서 영조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광증설'과 사도세자가 우수한 자질을 가졌지만 집권층인 노론 세력에 맞서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쟁희생설'(이덕일)이 제기됐다. 하지만 두 가지 가설 모두 확고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정병설 교수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역사서와 개인 문집 등 사료를 바탕으로 ‘광증설’과 ‘당쟁희생설’ 모두 반박한다. 사도세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영조로서도 아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주장을 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칼을 차고 영조를 죽이려고 하다 역모에 걸렸다는 가설에 힘을 실었다.
Scene #2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영조는 맏아들이 죽은 뒤 7년 만에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곧바로 원자(元子)에 책봉했다. 그리고 제왕 교육을 하기 위해 그를 멀리 떼어놓고 신하에게 맡긴 채 별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결국 부모와 자식은 낯선 관계가 됐다. 그렇다 보니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가 늘 무서웠다. 영조는 쭈뼛쭈뼛하는 아들을 심하게 혼냈다. 아버지에 대한 사도세자의 두려움은 정신질환으로 이어졌다. 영조의 질책을 받으면 사도세자는 사람들을 때리거나 죽임으로써 스트레스를 풀었다. 영조는 더욱 분노했고 이것이 사도세자의 목숨을 빼앗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어린 시절 부모의 무관심이 사도세자의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13일부터 21일까지 꼬박 8일 동안 뒤주에 갇힌 28살의 피 끓는 청춘, 사도세자는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고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 영조와 생모 선희궁 영빈 이씨에 대한 끝없는 한과 원망에 속 깊이 소리 없이 울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미움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야했던 사도세자는 비극 그 자체였다. 성실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영조의 성격과 반대로 사도세자는 밥 먹기는 좋아하고 책을 싫어한 예술가형 기질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절대로 섞일 수가 없는 물과 기름이었다. 영조는 아들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세자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세자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하들 앞에서 세자를 꾸짖고 조롱하기 일쑤였다. 세자의 광증이 깊어질수록 부자의 갈등 골도 깊어져만 갔다. 세자에 대한 영조의 믿음은 점점 잃어가고 오히려 세자의 심장에 대못을 박는다. 대못을 박아놓은 뒤주에 갇히기 전에 영조는 이미 어린 사도세자를 더욱 외롭게 했고, 거대한 궁궐 안에 갇히게 만들었다.
Scene #3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어찌 그러하니?”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나이다.”
“어찌하여 상하였니?”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
(혜경궁 홍씨 『한중록』 재인용, 정병설 『권력과 인간』중에서, 150쪽)
사도세자는 왕이 될 수 없었다.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 다음으로 궁궐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에게 궁궐은 그저 서러움이 쌓여 있는 땅이었다. 절대 권력의 왕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슬픔과 서러움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은 눈물의 왕이었다.
사도세자는 참으로 비운의 주인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생전 그런 취급을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조가 뜻을 펼쳐줬다 하지만 승자를 중시하는 역사의 속성 때문에 정신이상자로 역사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 사이의 불신과 두려움, 거기에 더하여 최고 권력을 둘러싼 갈등까지 겹쳤으니 무슨 일이든 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마흔 둘에 얻었다. 늦게 얻은 아들인지라 기쁨은 남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은 피붙이를 얻었다는 데서 온 게 아니라 나라를 맡길 후계자를 얻었다는 데서 온 것이었다. 권력이 친자식에 대한 부정(夫情)을 억누른 셈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권력을 위해 아들을 죽이는 기이한 역사. 그만큼 권력은 무서운 것이다.
(*) 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구절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