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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우리 사회에 멘토(Mentor)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기업에서는 선후배끼리 멘토와 멘티(Mentee)를 맺고 지식을 전수하고 상담까지 하는 것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원래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오디세우스가 출전에 앞서 절친한 친구인 멘토에게 아들 텔레마코스의 양육을 부탁하고 떠났다. 멘토의 훌륭한 교육 덕분에 텔레마코스는 걸출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멘토는 선생을 넘어 조언자이자 친구이고 때론 아버지의 역할까지 하는 사람을 일컫게 됐다.
그러나 오늘날에 멘토는 조언자 혹은 상담자라는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짙다. 직장 선배로서 상사의 지시에 마지못해 맞은 멘토가 아버지나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멘토라는 단어가 스승과 혼용되는 것도 마뜩찮다.
하지만 스승은 다르다. 멘토가 머리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경험과 지식의 전수라면 스승은 가슴을 열고 영혼을 잇는 무게가 실린다. 다산 정약용은 20년의 유배생활 중 많은 젊은이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는데, 특히 황상이라는 애제자가 있었다.
나이 70이 넘어서도 황상은 책을 놓지 않았다. 책을 읽고 베껴 쓰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신분이 미천했던 까닭에 그의 이런 모습은 주위의 비웃음을 샀다. “책만 읽고 있으면 떡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며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스승이 내려준 고귀한 선물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산이 황상에게 처음 문사(文史)를 닦도록 권했을 때 황상은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 막혀있고, 셋째 미욱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다산은 “공부하는 자는 세 가지 큰 병통이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 외우기를 빨리하면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고, 둘째 글짓기를 빨리하는 사람은 부실하게 되는 폐단이 있으며, 셋째 이해가 빠른 사람은 대충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상은 스승의 말씀을 삼근계(三勤戒)로 마음에 새겨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스승은 그러면서 부족한 것들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면’ 풀린다고 했다. 스승이 내린 이 삼근계(三勤戒)는 제자의 인생을 바꿔놓는 선물 꾸러미였다.
다산은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시골의 어린 청년에게, 남에게 뒤처지는 재주를 근면과 열성과 끈기로 극복하는 것이 참된 공부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말이 황상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자극으로 다가왔겠는가.
황상은 다산을 스승으로 유배 생활 내내 극진히 모신다. 매사에 자신이 부족하고 소극적이었던 소년을 다산은 달래기도 하고 꾸지람도 하면서 잘 보살펴 준다. 황상도 스승의 참모습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가르침을 철두철미하게 지켜나간다. 이렇게 하면서 18년이 흘러 제자 황상은 30세에 이르고, 다산은 56세의 중년이 된다. 18년 만의 유배에서 풀린 스승은 전남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쉰다. 황상은 다산이 좋아하는 차를 정성껏 준비해 매년 다산이 사는 고향으로 보내곤 한다.
황상은 스승을 마냥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스승을 뵙고자 찾아 나선다. 스승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뵈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열흘을 걷는 긴 여행에 오르게 한 것이었다. 18년 만의 스승과 제자의 꿈같은 해후를 만끽하고 황상은 다시 강진으로 떠난다. 그러나 귀향 도중에 스승의 부음을 듣고, 직접 상을 치른 후 강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0년 지난 후 58세가 된 황상은 스승이 그리워 열흘길을 걸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와 스승의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린다.
스승의 말씀을 들은 황상은 60년 세월이 지나도록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회고한다. 자상하게 이끌어주는 스승의 말씀이 삶을 바꾸어준 것이다. ‘삼근계’는 스승과 제자를 이어주는 확고한 신뢰의 끈이 되었다. 믿음이란 그토록 단단하고 강인한 것이다.
교육이 불신 받고 학교가 위기인 오늘, 과연 선생님들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세상이 변하다 보니, 스승과 제자의 관계 또한 예전과 같기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지나치게 도구화되고 형식화된 만남만 지속하면 인격적 감화와 도덕적 감응을 주고받는 본질로서의 교육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그저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다. 가는 정 오는 정이 켜켜이 쌓여 관계를 만들어간다. 진심과 성의라야지, 다른 꿍꿍이가 들어앉으면 중간에 틀어지고 만다.” (17쪽)
도타운 정과 깊은 관심을 가진 스승만이 훌륭한 제자를 키워 낼 수 있다.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학문의 지혜를 주는 스승일수록 제자들의 감동이 크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가르쳐도 되고, 고생될 것이 없는 쉬운 일이 교육이었다면 아무도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조금 서툴면 깨칠 때까지 기다려 주고, 빗나가면 바로잡아 주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독여주면서 잘하라 채찍질해 주는 사람이 진정한 스승이다. 비가 내려야 초목이 쑥쑥 자라듯, 제자가 잘되도록 제때에 바로 잡아주는 스승이 많아야 한다.
인생의 암흑기에 스승이 없다면 삶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스승의 존재는 어둠 속에서 만나는 불빛과도 같다. 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부지런한 게 좋은 거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이든 정보든 내게 부지런하라고 말할 스승은 곳곳에 넘친다. 다만 내게 황상 같은 우직함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둔하고, 막히고, 어근버근한 그 우직함을 황상에게서 빌려오고 싶다. 스승 사랑 담뿍 받고 그 사랑 실천한 황상의 어진 마음을 본받고 싶다. 스승과 제자 간의 멋스러운 관계를, 그들이 속내에 품었던 따뜻한 생각과 마음을, 그들이 연출해 냈던 삶의 진정성을 따라하고 싶다. 이런 스승과 제자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