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0. ‘책의 날’ 질문 이벤트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이제야 ‘책의 날’ 질문 이벤트에 응모하는 거죠? 뒷북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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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뒷북(book)을 잘 쳐요. 유행에 둔감해요. 유행이 지나가서 사람들 반응이 잠잠할 때 뒤늦게 따라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그래요. 남들이 많이 읽는 베스트셀러를 몇 개월 혹은 일 년 지난 뒤에 읽어요.
Q1. 말장난 그만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책 한 권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다 좋습니다. 책 단 한 권도 없는 장소에 혼자 있으면 지루하고 허전해요. 조용한 밤에 소파에 앉아 책을 읽을 때가 좋아요. 그러면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잠이 스르르 옵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분에게 독서를 권장하고 싶어요. 책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유익한 최고의 수면제입니다. 아, 그리고 변비로 고통받는 분이라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보세요. 일단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책이 있는지 골라보세요. 그러면 장 속에 그토록 원하던 신호가 와요. 책이 많은 곳에 가면 화장실 생각이 나요. 저는 변비에 걸리지 않았지만, 배변 기간이 불규칙합니다. 뱃속이 찝찝하고 그럴 때 도서관에 가서 책 구경을 하거나 책을 읽어요. 신기하게도 뱃속에서 신호가 옵니다. 우리나라는 도서관이 많아져야 합니다. 변비 환자들을 위한 치유소가 될 수 있을 거예요.
Q2. 조금 지저분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제대로 된 독서 이야기 좀 합시다.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제 별명이 ‘책성애자’입니다. 새 책이든 헌책이든 종이책이 제 손으로 들어오면, 냄새를 맡는 특이한 습관이 있어요. 새 책에 나는 냄새와 헌책에 나는 냄새. 확실히 달라요. 냄새의 느낌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힘들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져요. 헌책 냄새 한번 맡아보셨어요? 어렸을 때 시골집에 가면 맡을 수 있었던 오래된 이불 냄새 기억하십니까? 그거랑 조금 비슷해요. 눅눅한 습기 냄새가 나는데, 이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헌책방에 자주 가게 되니까 헌책 냄새가 좋아졌어요. 헌책방 내부로 들어가면 헌책 가게 사장님보다 헌책 냄새가 먼저 저를 반깁니다. 마음이 편해져요. 헌책 냄새 없는 헌책방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책 읽을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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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은 종이책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전자책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나라 전자책이 읽을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꼭 그렇지만 않습니다. 잘 찾아보면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외국 작가의 작품이나 장르문학 작품을 번역한 전자책이 있어요. 예전부터 ‘페가나북스’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페가나북스는 1인 전자책 전문 출판사입니다. 러브크래프트와 함께 환상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알려진 로드 던세이니의 작품을 번역했어요. 아무도 관심 없는 작가의 작품을 혼자서 번역 출간한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이런 출판사와 직원이 있기에 함부로 전자책을 ‘읽어볼 가치가 없는 책’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요.
책 읽으면서 메모하는 것을 싫어해요. 책을 대할 때는 결벽증 환자가 됩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책을 접는 것도 안 좋아해요. 한 번은 동생이 제가 산 책을 읽다가 한 번 종이를 접은 적이 있어요. 저는 동생에게 그렇게 읽지 말라고 핀잔을 줬어요. 그렇지만 헌책은 예외입니다. 종이에 낙서가 남아 있고, 물에 젖은 흔적이 있어도 가지고 싶은 책이라면 삽니다.
Q3. 말씀하시는 자세가 진지한데요. 마음에 듭니다. 혹시 지금 침대 머리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저는 3번 질문이 마음에 안 들어요. 침대 없는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잖아요. 저는 침대가 없어요. 맨바닥에 이불을 깔고 잡니다. 자기 전에 배 깔고 책을 읽어요. 이미 말했듯이 책은 종이로 만든 수면제입니다. 잠이 안 오면 일부러 재미없고, 어려운 내용의 책을 읽습니다. 지난주에는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를 읽었습니다. 그 책은 좋은 수면제였습니다.
Q4. 애서가라면 늘 괴로워하는 고민이 있어요. 그 고민이 바로 바로 장서 관리 문제입니다.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맞아요. 처음에 책을 살 때 하늘 위로 날아갈 정도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서 샀던 책을 책장에 꽂으려고 하면 갑자기 우울해져요. 책이 너무 많아서 보관할 자리가 없거든요. 책을 분야별로 구분해서 배열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아요. 보관 공간을 확충하는 일이 시급하니까요. 책 욕심이 많아서 책을 가져야 기분이 좋아져요. 알라딘 서점에 책을 팔아서 받은 돈으로 다른 책을 삽니다. 이러면 책을 줄이지 못합니다. 최근에 30권 정도의 책을 종이 상자에 담아 다른 방에 옮겼습니다. 책장에 빈자리가 생겼는데, 그것만 보면 다른 책을 사서 채워 넣고 싶어요. 책에 대한 탐닉이 무서워요.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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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명화백선》이요. 유명 화가들의 대표작 100점을 모아놓은 도록입니다. 요즘에 나오는 명화 도록과 비교하면 선명도가 떨어지는 편이에요. 그래도 전 이 책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 책이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줬어요. 여기서 밝히기가 부끄럽지만, 사실 전 이 책을 읽으면서 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 집에 혼자 있으면 마네의 <올랭피아>만 봤어요. 비록 그림 속 여인이지만, 올랭피아의 육체가 아름다웠어요. 그때는 올랭피아가 엄청난 그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당연히 마네가 누군지도 몰랐죠. 올랭피아는 소년의 마음을 홀리는 야한 여자였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서양미술사에 ‘입덕’하게 된 계기가 《세계명화백선》이었어요. 이 책을 보지 않았으면, 서양미술사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여자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진짜 충격적이었어요. 아시죠? 올랭피아가 매춘부라는 사실요. 그리고 훌륭한 그림을 그저 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으로 봤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그림을 보는 방법을 알게 되니까 올랭피아가 야한 그림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이 오기만 기다렸습니다.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놀랄 만한 책' 몇 권 가지고 있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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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보도 담당 사장 겸 ‘뉴스룸’ 진행자인 손석희 씨도 오래 전에 책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이 바로 《풀종다리의 노래》입니다. 2014년에 제가 운 좋아서 JTBC 사옥 내부를 구경하고, 손석희 씨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특별한 날을 위해서 한 달 전에 《풀종다리의 노래》를 샀습니다. 절판본이라서 가격이 비쌌어요. 그래도 이 희귀 도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요. 저는 이 책을 가지고 JTBC에 갔습니다. 손석희 씨의 친필 사인을 받으려고요. 손석희 씨는 자신의 책을 본 소감으로 구하기 힘든 책을 가진 사람을 십 년 만에 봤다고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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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으로 소개할 ‘놀랄 만한 책’은 오늘 처음 공개합니다. 《세계고전삽화백과》라는 책입니다. 자연, 기술, 건축,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도안 삽화가 실려 있습니다. 1851년 독일에 출간된 그림 백과사전에 수록된 삽화를 옮긴 겁니다. 즉, 19세기 판 《세계만물 그림사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19세기 당시 지구상에 알려진 모든 지식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죠. 책에 있는 그림들을 보면 눈이 즐거워요. 세밀한 표현에 감탄하게 됩니다. 책에 있는 그림들을 조금만 공개하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이 책을 상세하게 소개하겠습니다.
Q7. 정말 놀라운 책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홍윤 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분이 알라딘 서재에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분은 ‘물만두’라는 닉네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어요. 추리소설을 많이 읽고, 천 편이 넘는 서평을 남겼습니다. 제가 너무 늦게 알라딘 서재를 알게 돼서 홍윤 님과 댓글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습니다. 홍윤님의 서평집을 읽어봤어요. 그녀는 혼자서 광활한 추리문학의 세계를 자유롭게 거닐면서 수많은 탐정과 범인들을 만났습니다. 홍윤 님은 그 만남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열심히 서평으로 기록했습니다. 홍윤 님의 서평집은 저 같은 추리문학의 세계를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한 한 권의 지도입니다. 저는 홍윤 님의 발자국을 믿고 서평의 지도를 보면서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헌책방에 가면 홍윤 님의 서평집을 참고합니다. 헌책방에 홍윤 님이 읽었던 절판된 추리소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녀처럼 문장으로 된 발자국을 많이 남기고 싶습니다. 홍윤 님이 생전에 읽지 못한 추리소설은 많습니다. 만약 홍윤 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제가 헌책방에서 찾아낸 추리소설들을 소개하고 싶어요. 그리고 추리소설 읽기의 재미를 알려준 홍윤 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굳이 꼭 한 권만 골라야 됩니까? 저는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잠잘 때까지 끊임없이 책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고 나면 새 책이 나옵니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습니다. 이럴 때 정말 괴롭습니다.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이것도 많은데요. 중간에 읽다가 만 책도 언젠가 다시 읽게 됩니다. 그래서 끝까지 다 읽지 않은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끝내지 못한 책’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죽을 때까지 완독하지 못한 책이 있으면, 그 책이야말로 진짜 ‘끝내지 못한 책’입니다.
Q10. 음, 갑자기 대답이 점점 짧아지는데요. 이제 끝나갑니다. 마지막 질문이에요.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그런데요, 정말 무인도에 가면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 왠지 무인도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책 읽을 분위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아요. 일단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가정에 따라 세 권의 책을 가져가겠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우울과 몽상》, 최인자 씨가 번역한 마틴 가드너 주석의 《앨리스》, 그리고 앵거슨 디턴의 《위대한 탈출》 구판입니다. 세 권 모두 오역과 발췌 번역으로 논란이 있었던 책입니다. 무인도에 살아남으려면 몸의 체온을 유지해야 합니다. 세 권의 책은 불쏘시개로 쓰기에 좋습니다. 아니면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해도 됩니다. 옛날에 방영된 추억의 일본 만화 <빨강머리 앤>에 보면 앤이 추위를 이겨내려고 책의 종이를 찢어서 뭉친 뒤에 몸 안에 넣더군요. 실제로 몸 안에 종이나 낙엽 뭉치를 넣으면 체온이 올라갑니다. 절대로 읽으면 안 되는 엉터리 책도 가끔 쓰일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