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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경보기 - 절실하게, 진지하게, 통쾌하게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6년 3월
평점 :
산업자본은 필요 이상의 상품을 사도록 소비자를 유혹할 수밖에 없으며, 유혹 전략의 핵심은 바로 신상품을 통한 유행의 전파였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사용가치가 아직도 있는 제품을 버리고 새로운 유행의 신상품을 앞다투어 구입했던 것이다. (231쪽)
렌탈 정수기가 또 말썽이다. 냉수와 온수 뿐 아니라, 얼음까지 빼 먹을 수 있게 설계가 되어있는 정수기는 모양까지 심플해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도 않는다. 가입비나 설치비없이 사용료와 관리비를 포함해 한 달에 4만원 가량의 비용으로 신제품을 쓸 수 있다는 판매원의 권유도 제법 괜찮은 조건으로 생각되어, 멀쩡히 잘 쓰던 정수기를 없애고 신제품으로 바꾼 것이 3년 전이었다. 반짝 반짝 빛이 나는 것이 처음 들여놓을 때는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살림을 새로 장만한 것처럼 기뻤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 물건이 정말 물건인 것이, 쓰는 동안 심심치 않게 고장이 나더라는 거다. 매번 AS를 신청할 때면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어 대기자 몇 십 명을 기다리기 일 수인데, 아침 아홉시를 알리는 핸드폰 알림음을 듣자마자 바로 전화 걸어도 그 모양이다. 끊고 다시 걸까를 몇 번쯤 망설이다 보면 상담원과 통화가 연결되고, 연결 후에도 내가 생각하기엔 쓸데없고 길기만 한 본인확인 절차를 거쳐 비로소 무엇 때문에 고객센터를 찾은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있다. 문제에 대해 이른바 상담이란 걸 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물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과, 대기 시간에 대한 짜증이 겹쳐 본의 아니게 상담원에게 불퉁거리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이다.
매번 거치는 그런 과정이 번거롭고, 전화를 끊고 나면 상쾌함 보다는 혹여 상담원에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나 하는 자기반성으로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그건 제품의 관리를 위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방문 관리인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직장인인 나로서는 방문시간 조율이 마음처럼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퇴근 하는 시간에는 그도 퇴근해야 할 것이고, 토요일은 내가 쉬고 싶은 만큼 그도 쉬고 싶기 때문일 것이기에, 내 편한 시간에 약속하는 것이 항상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뿐이라면 좋겠지만, 약속시간은 거의 대부분 늘어지기 일 수다. 우리 집 담당자가 관리해야 하는 곳은 우리뿐이 아닐 테고, 일을 하다보면 지체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래저래 불편하다 싶은 생각에 언제고 렌탈 제품을 끊어야 겠다는 다짐을 그동안 주욱 하고 있어 왔다. 그런데 드디어 일이 터졌다.
주말동안 정수기의 냉수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냉각기능에 문제가 생겼는지 냉수는 물론 얼음도 얼지 않았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 탓이 아니더라도, 물은 꼭 ‘냉’하게 마시는 습관이 되어 있는 식구들은 저마다 불편을 호소했고, 정수기 주 관리자인 주부로서 심각하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월요일 아침 아홉 시 ‘땡’치자마자 AS신청 전화를 한다는 것이 출근해 이것저것 하다 보니 이십분 쯤 늦었다.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통화 대기자가 무려 64명. 통화가 지연되어 죄송하다는 반복음을 열 몇 번 쯤 들었을 때, 드디어 상담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차저차 신원 확인을 하고, 정수기의 증상을 늘어놓으며 불편을 호소했다. 그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마치 몸이 아파 병원을 찾은 환자처럼 느껴졌는데, 어쨌든 상담원과 연결되었으니, 문제의 반은 해결했다고 내심 안도했던 것이다.
증상을 다 듣고 난 상담원은 반전문가로 이것저것 조언을 해 주었고, 그대로 했을 경우에도 ‘불편하신 사항이 있다면’ 다시 전화를 달라고 했다. 당장 정수기를 고친 것은 아니지만, 관리해주는 대로만 쓰느라 버튼 몇 가지로 이런 기능 저런 기능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대충 감사하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퇴근 후, 상담원의 충고대로 이렇게 저렇게 버튼을 누르자 정수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을 뿐, 정수기는 여전히 정수만 되는 정수기로서의 역할을 고수했다(정수 기능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대체 알 수 없지만 일단 그렇다 치자). 월요일도 역시 냉장고에 물을 넣어두고 마시는 불편을 감수하느라 이런저런 궁시렁거림을 들었던 나는 혈압이 약간 올라가는 징조를 느꼈다.
화요일 아침, 아홉시 땡. 열일을 제처 놓고 오늘은 꼭 정수기를 고치리라는 다짐으로 다시 고객센터에. 대기자 36명. 통화가 지연되어 죄송하다는 반복음을 청취하며 혈압이 약간 더 상승. 본인확인 절차를 거치며 혈압이 또 상승. 어제보다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상담원에게 오늘은 꼭 AS기사가 방문해 줄 것을 당부. 퇴근시간에 맞춰 제일 늦은 시간에 전화 통보 후, 기사가 방문할 것을 약속해줌. 전화를 끊은 후, 약속에 대한 확인 문자가 옴.
양해를 구하고 퇴근 시간보다 한 시간을 앞당겨 집에 도착했다. 방문 전 전화요청을 했음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 궁금하던 차에 시간은 5시 35분을 넘어섰고,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상담원은 방문 약속이 다음날로 잡혀있다고 했다. 이제 혈압이 많이 오른 나는, 무슨 소리냐, 아침에 통화한 상담원과 오늘 방문을 약속했는데, 확인 문자도 받았다, 방문하기로 한 기사 전화번호를 달라, 는 말을 내 생각에는 차분하게 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언성을 높였을 것이다. 기사에게 전화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처음 정수기를 들여놓을 때 계약했던 대리점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다 듣고 난 대리점 직원은 ‘AS는 우리 관할이 아닌데요.’혈압, 매우 상승.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그것은 다수를 깨알처럼 만들어 서로 연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서로를 불신과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지배와 통제의 핵심 수단이다. (235쪽)
여섯시 오 분 전에 전화를 걸어 온 방문기사는 상담원과는 다른 소리를 했다. 기사의 스케줄을 고려하지 않은 고객센터가 무리한 약속을 했으며, 이에 기사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 방문을 다음날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다 좋다. 상담원은 상담원대로 자기 역할을 했을 거고, 기사는 기사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스케줄을 잡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통보는 했어야 하지 않나? 분명 직장에 다니고 있어 시간을 자유롭게 낼 수 없다고 사정을 설명했고, 집에 가 있어야 하니 미리 방문 시간을 ‘꼭!’ 알려달라고 부탁까지 했건만! 아니, 직장에 다니지 않더라도 그렇지. 방문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라는 건가? 머리 꼭대기까지 혈압이 오른 나는 드디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A/S가 잘 안되서 물건 못쓰겠으니, 떼어가 주세요!!!!! .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기분이 좋지 않다. 무엇보다 정수기 회사의 시스템에 화가 났다. 상담원은 기사에게, 기사는 상담원에게, 관리 담당 대리점은 고객센터에 책임을 미루는 그 행태에 화가 났고, 결정적으로 ‘회사’가 무엇인지 모르겠어 화가 났으며, 도대체 화를 어디에 내야 하는지 몰라 더 화가 났다. 화가 난 차에 고객 불만은 어디서 접수하냐고 물었지만, 그런들 뭐 하나. 불만 접수를 조회하는 담당 직원이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상투성 피드백을 해 줄 뿐일 것을. 형체 없는 대상으로부터 듣는 ‘죄송하다’는 말뿐인 사과 때문에 더더더 화가 날 것을.
권리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의 부당함에 맞서서 주장되어야 한다.(73쪽)
고객, 죄송, 감사, 사랑. 기업에서 쓰는 이 따위 단어들은 나로 하여금 ‘화’를 불러일으킨다. 과도한 친절도 비굴도 필요치 않은 그런 깔끔한 관계는 정말 안 되는 건가? AS기사나 상담원이 사뭇 비굴한 어조로, 그렇지만 감정은 싹 뺀 채로, 전혀 죄송하지 않지만 죄송하게 생각해야만 한다는 자기최면을 띈 어조로,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 안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혈압이 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째서 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비굴하게 죄송해야만 할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죄송을 말하고도 물건을 떼어 가라는 협박성 멘트를 들은 그가 퇴근길에 들른 호프 집 알바에게 트집을 잡거나, 별일 아닌 일로 아내와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을까, 혹여 하루 이틀 일이 아닐 ‘갑’들의 갑 질에 세상사에 대한 회의마저 느끼지는 않았을까, 하마터면 AS기사에게 당신이 아니라 회사 시스템 때문에 화가 난다고, 소리 질러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낼 뻔 했다.
자본주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한다. (이건 나의 말)
한동안 잠들기 전에 침대 곁에 두고 한 두 꼭지 씩 읽었던 <비상 경보기> 생각이 났다. 화를 낼 곳에 정당하게 화를 내고 있는지, 혹여 내가 누군가의 존엄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가 듣는다면 그야말로 오지랖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번 일을 겪고보니, 냉장고를 없애면 공동체가 살고, 가족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먹일 수 있다는 다소 엉뚱한 내용도 그럴듯하게 여겨졌고, 어떤 자본가의 상품을 사야 하는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는 만큼, 우공이산이라고 조금씩 노력하다보면 노동자이며 소비자인 대다수의 우리가 행복하게 살 날도 올 것이며, 우리 공동체가 탁류처럼 되더라도 작으나마 맑은 샘물 한줄기라도 흘러들어야 그나마 완전히 썩지는 않을 거라는 다소 낭만적인 철학자의 강론이 가슴 따뜻하게 여겨졌다.
괘변이니, 사이비니, 독선가니, 대중 스타일뿐이니, 강신주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의 소리도 많지만, 삶 속에서 내 행동에 대해 여러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강신주의 글을 나는 좋아한다. 철학이란 것이 머리 아프게 지적 계보만을 줄줄이 외워대며 삶과 동떨어진 얘기를 주워섬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내 수준에 딱 맞는 철학자라 싶기도 하고. 자본주의에 반하는 혁명아닌 혁명을 꾀하면서 그가 막상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제 얼굴에 침 뱉기는 피하련다.
오늘 아침, 결국 정수기 계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다행히 의무 사용기간을 다해 위약금은 없었지만, 설치 당시 면제받은 가입비인지 설치비인지는 내야 한다고 했다. 흔쾌히 얼른 빼가시라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