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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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당신이 현세로 돌아가 이 긴 여행의 피로를 풀게 되거든," 두 번째에 이어 세 번째 망령이 말했다네. "나 피아를 기억해 주세요. 시에나에서 태어나 마렘마에서 죽었나니, 그 경위는 보석 반지로 나를 아내로 맞은 그가 알고 있나이다."

서머싯 몸은  <인생의 베일>을 단테의 <신곡> 연옥편의 마지막 구절인 피아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피아의 남편은 피아의 부정을 의심해 마렘마에 있는 성에서 유독가스로 피아를 죽이고자 하지만, 쉽게 피아가 죽지 않자 그녀를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인데,  몸은 이 이야기를 듣고 월터와 키티의 이야기를 상상해 냈던 것이다. 관습에 따라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결혼을 했지만, 남편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불행의 여자를 노래한 시를 읽고 그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작가라니, 작가라는 존재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내 어찌 서머셋 몸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교계와 사치, 허영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보고 배우며 자란 키티는 아름다움을 무기로 좋은 혼처를 찾지만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못한다. 그러다 동생에 밀려 서두르듯 세균학자 월터와 결혼하게 되는데, 월터는 예의바르고 지성적인 남자로 감정을 쉽게 내비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키티를 몹시 사랑했다.  

부모님의 결혼생활에서 단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있는 남편과 그를 조종해 사교계에서 유력한 가문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내라는 배움을 몸에 각인시킨 키티는 월터가 자신에게 쏟는 사랑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기에 그에게 어떤 욕망도 느끼지 않는다. 키티에게 있어 결혼은 아내와 남편이 맺는 계약관계의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월터가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것을 비웃으며, 그를 충실한 남편의 역할로만 이용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진짜 사랑이라고 여겨지는 남자를 만나는데, 그가 찰스다. 찰스와의 사랑이 진짜사랑이며, 그것을 위해서 희생하지 못할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키티는 사랑 앞에 그만큼 순진했다. 찰스는 자기관리에 뛰어난 바람둥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아내의 부정을 알게된 월터는 그녀를 죽음의 소굴로 데려가는데, 그 결말은 영국 작가 골드스미스의 시 <미친 개의 죽음에 관한 애가>로 표현된다. 한 남자가 잡종개와 친구가 되었는데, 그 개가 남자를 물어 사람들은 남자가 죽을거라고 하지만, 정작 죽는 것은 개였다는...

 

남자의 바람은 한때 지나가는 그야말로 바람일뿐이지만, 여자가 외도를 하면 집을 나간다는 말이 있다. 불륜을 저지르는 여자는 정열적이다. 적당히 즐기다 말 사랑이라면 모험을 시작하지도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여자는 그 누구보다 남편을 혐오하고, 단 한번도 남편을 사랑한적이 없으며, 따라서 자신은 몹시 불행하다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아니, 어쩌면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 사랑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 집에서 같이 사는 남자에게 사랑 대신 경멸을 느끼는 불행 속에 찾아든 사랑이라니, 그 무엇이 아까울까. 

 

당신은 사랑이 뭔지 몰라. 찰스와 내가 서로를 얼마나 간절하게 사랑하는지 짐작조차 못할걸. 중요한 건 바로 그것뿐이에요. 우리의 사랑을 위한 희생쯤은 식은죽 먹기에요.

 

어리석고 경박하며 머리가 텅비도록 사교밖에 즐길 줄 모르게 길들여져 왔던 그시대의 일반적인 여자인 키티가 콜레라로 온통 죽음의 도시가 된 오지에서 새롭게 갱생했다는 이야기보다, 아내와 딸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돈벌이 기계로만 취급되었던 아버지와 키티가 화해하는 장면보다, 키티가 찰스를 천상의 남자로 여기며 사랑하고, 결국에는 그 불륜이 들통날까봐 가슴떠는 장면이 너무도 절절하게 느껴졌다. 사랑에 빠진, 혹은 불륜에 빠진, 그리고 그 잘못된 사랑이 들통났을 때의 불안한 여자의 심리묘사가 자못 황홀할 정도다. 남자인 서머셋 몸은 어찌 이리도 여자의 심리를 잘 아는 것일까. <세설>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에게도 똑같은 경탄을 했었는데, 내 주변엔 왜 이런 남자가 없는 것일까. 이토록 여자를 잘 아는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행복할까? 아니 오히려 매사 너무 빤하게 들여다 보이는 속마음 때문에 애를 태우게 될까?

 

한편, 한평생 돈벌이 기계로 봉사하고서도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까닭에 아내와 딸들로 부터 무언의 경멸을 감수했던 키티의 아버지가 아내의 죽음 후 자유를 찾아 떠나고자 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배우자 사망은 스트레스 지수를 가장 높인다는 데, 이들의 경우는 전혀 아닌 것 같다. 반대로 키티의 엄마는 어땠을까. 자신보다 남편이 먼저 죽었다면 그녀 역시 해방감에 몸을 떨었을까? 이쯤되면 남녀를 결혼으로 묶는 것은 매우 실용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면에서는 몹시 몹쓸 것이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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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ohhoon 2016-06-2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침없이 나아가는 필체가 인상적입니다.
많은 리뷰, 정말 대단하세요 :)

잘 보고갑니다 ㅎㅎ

비의딸 2016-06-22 09:59   좋아요 0 | URL
거침없이... (-- )( __)
개인적인 감상을 쓰는거라 느낌을 솔직히 적거든요. 거침이 없다라.. 좋은 건 아닌것 같아요. ㅠ.ㅠ

헬가 2017-10-14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의 딸님 글을 좋아하는 1인입니다 허식없이 솔직하게 성찰하는 글이 좋아서요 오랫동안 뜸하고 계셔도 즐겨찾기를 지우지 않고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는거 기억해주셔요^ ^

비의딸 2017-10-16 10:29   좋아요 0 | URL
응?
별 것 아닌 제 개인적 감상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아준 분이 계시다니 정말 기쁘네요. 제가 좀 냄비기질이 있어 바르르 끓다가 곧 식곤 하죠... 책은 꾸준히 읽고 있지만 그 속도가 예전만 못하고요... 감상을 적어 남기는 일도 적잖이 귀찮아졌어요. 혼자 느끼고 말꺼면 무엇하러 애써 적어 남기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고요. ^^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가을날 헬가님에게도 기쁜 소식이 있길 소망합니다.
 
비상경보기 - 절실하게, 진지하게, 통쾌하게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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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은 필요 이상의 상품을 사도록 소비자를 유혹할 수밖에 없으며, 유혹 전략의 핵심은 바로 신상품을 통한 유행의 전파였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사용가치가 아직도 있는 제품을 버리고 새로운 유행의 신상품을 앞다투어 구입했던 것이다. (231)

 

렌탈 정수기가 또 말썽이다. 냉수와 온수 뿐 아니라, 얼음까지 빼 먹을 수 있게 설계가 되어있는 정수기는 모양까지 심플해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도 않는다. 가입비나 설치비없이 사용료와 관리비를 포함해 한 달에 4만원 가량의 비용으로 신제품을 쓸 수 있다는 판매원의 권유도 제법 괜찮은 조건으로 생각되어, 멀쩡히 잘 쓰던 정수기를 없애고 신제품으로 바꾼 것이 3년 전이었다. 반짝 반짝 빛이 나는 것이 처음 들여놓을 때는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살림을 새로 장만한 것처럼 기뻤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 물건이 정말 물건인 것이, 쓰는 동안 심심치 않게 고장이 나더라는 거다. 매번 AS를 신청할 때면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어 대기자 몇 십 명을 기다리기 일 수인데, 아침 아홉시를 알리는 핸드폰 알림음을 듣자마자 바로 전화 걸어도 그 모양이다. 끊고 다시 걸까를 몇 번쯤 망설이다 보면 상담원과 통화가 연결되고, 연결 후에도 내가 생각하기엔 쓸데없고 길기만 한 본인확인 절차를 거쳐 비로소 무엇 때문에 고객센터를 찾은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있다. 문제에 대해 이른바 상담이란 걸 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물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과, 대기 시간에 대한 짜증이 겹쳐 본의 아니게 상담원에게 불퉁거리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이다.

매번 거치는 그런 과정이 번거롭고, 전화를 끊고 나면 상쾌함 보다는 혹여 상담원에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나 하는 자기반성으로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그건 제품의 관리를 위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방문 관리인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직장인인 나로서는 방문시간 조율이 마음처럼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퇴근 하는 시간에는 그도 퇴근해야 할 것이고, 토요일은 내가 쉬고 싶은 만큼 그도 쉬고 싶기 때문일 것이기에, 내 편한 시간에 약속하는 것이 항상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뿐이라면 좋겠지만, 약속시간은 거의 대부분 늘어지기 일 수다. 우리 집 담당자가 관리해야 하는 곳은 우리뿐이 아닐 테고, 일을 하다보면 지체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래저래 불편하다 싶은 생각에 언제고 렌탈 제품을 끊어야 겠다는 다짐을 그동안 주욱 하고 있어 왔다. 그런데 드디어 일이 터졌다.

 

주말동안 정수기의 냉수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냉각기능에 문제가 생겼는지 냉수는 물론 얼음도 얼지 않았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 탓이 아니더라도, 물은 꼭 하게 마시는 습관이 되어 있는 식구들은 저마다 불편을 호소했고, 정수기 주 관리자인 주부로서 심각하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월요일 아침 아홉 시 치자마자 AS신청 전화를 한다는 것이 출근해 이것저것 하다 보니 이십분 쯤 늦었다.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통화 대기자가 무려 64. 통화가 지연되어 죄송하다는 반복음을 열 몇 번 쯤 들었을 때, 드디어 상담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차저차 신원 확인을 하고, 정수기의 증상을 늘어놓으며 불편을 호소했다. 그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마치 몸이 아파 병원을 찾은 환자처럼 느껴졌는데, 어쨌든 상담원과 연결되었으니, 문제의 반은 해결했다고 내심 안도했던 것이다.

 

증상을 다 듣고 난 상담원은 반전문가로 이것저것 조언을 해 주었고, 그대로 했을 경우에도 불편하신 사항이 있다면다시 전화를 달라고 했다. 당장 정수기를 고친 것은 아니지만, 관리해주는 대로만 쓰느라 버튼 몇 가지로 이런 기능 저런 기능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대충 감사하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퇴근 후, 상담원의 충고대로 이렇게 저렇게 버튼을 누르자 정수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을 뿐, 정수기는 여전히 정수만 되는 정수기로서의 역할을 고수했다(정수 기능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대체 알 수 없지만 일단 그렇다 치자). 월요일도 역시 냉장고에 물을 넣어두고 마시는 불편을 감수하느라 이런저런 궁시렁거림을 들었던 나는 혈압이 약간 올라가는 징조를 느꼈다.

 

화요일 아침, 아홉시 땡. 열일을 제처 놓고 오늘은 꼭 정수기를 고치리라는 다짐으로 다시 고객센터에. 대기자 36. 통화가 지연되어 죄송하다는 반복음을 청취하며 혈압이 약간 더 상승. 본인확인 절차를 거치며 혈압이 또 상승. 어제보다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상담원에게 오늘은 꼭 AS기사가 방문해 줄 것을 당부. 퇴근시간에 맞춰 제일 늦은 시간에 전화 통보 후, 기사가 방문할 것을 약속해줌. 전화를 끊은 후, 약속에 대한 확인 문자가 옴.

 

양해를 구하고 퇴근 시간보다 한 시간을 앞당겨 집에 도착했다. 방문 전 전화요청을 했음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 궁금하던 차에 시간은 535분을 넘어섰고,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상담원은 방문 약속이 다음날로 잡혀있다고 했다. 이제 혈압이 많이 오른 나는, 무슨 소리냐, 아침에 통화한 상담원과 오늘 방문을 약속했는데, 확인 문자도 받았다, 방문하기로 한 기사 전화번호를 달라, 는 말을 내 생각에는 차분하게 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언성을 높였을 것이다. 기사에게 전화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처음 정수기를 들여놓을 때 계약했던 대리점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다 듣고 난 대리점 직원은 ‘AS는 우리 관할이 아닌데요.’혈압, 매우 상승.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그것은 다수를 깨알처럼 만들어 서로 연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서로를 불신과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지배와 통제의 핵심 수단이다. (235)

 

여섯시 오 분 전에 전화를 걸어 온 방문기사는 상담원과는 다른 소리를 했다. 기사의 스케줄을 고려하지 않은 고객센터가 무리한 약속을 했으며, 이에 기사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 방문을 다음날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다 좋다. 상담원은 상담원대로 자기 역할을 했을 거고, 기사는 기사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스케줄을 잡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통보는 했어야 하지 않나? 분명 직장에 다니고 있어 시간을 자유롭게 낼 수 없다고 사정을 설명했고, 집에 가 있어야 하니 미리 방문 시간을 !’ 알려달라고 부탁까지 했건만! 아니, 직장에 다니지 않더라도 그렇지. 방문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라는 건가? 머리 꼭대기까지 혈압이 오른 나는 드디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A/S가 잘 안되서 물건 못쓰겠으니, 떼어가 주세요!!!!! .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기분이 좋지 않다. 무엇보다 정수기 회사의 시스템에 화가 났다. 상담원은 기사에게, 기사는 상담원에게, 관리 담당 대리점은 고객센터에 책임을 미루는 그 행태에 화가 났고, 결정적으로 회사가 무엇인지 모르겠어 화가 났으며, 도대체 화를 어디에 내야 하는지 몰라 더 화가 났다. 화가 난 차에 고객 불만은 어디서 접수하냐고 물었지만, 그런들 뭐 하나. 불만 접수를 조회하는 담당 직원이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상투성 피드백을 해 줄 뿐일 것을. 형체 없는 대상으로부터 듣는 죄송하다는 말뿐인 사과 때문에 더더더 화가 날 것을.

 

권리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의 부당함에 맞서서 주장되어야 한다.(73)

고객, 죄송, 감사, 사랑. 기업에서 쓰는 이 따위 단어들은 나로 하여금 를 불러일으킨다. 과도한 친절도 비굴도 필요치 않은 그런 깔끔한 관계는 정말 안 되는 건가? AS기사나 상담원이 사뭇 비굴한 어조로, 그렇지만 감정은 싹 뺀 채로, 전혀 죄송하지 않지만 죄송하게 생각해야만 한다는 자기최면을 띈 어조로,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 안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혈압이 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째서 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비굴하게 죄송해야만 할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죄송을 말하고도 물건을 떼어 가라는 협박성 멘트를 들은 그가 퇴근길에 들른 호프 집 알바에게 트집을 잡거나, 별일 아닌 일로 아내와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을까, 혹여 하루 이틀 일이 아닐 들의 갑 질에 세상사에 대한 회의마저 느끼지는 않았을까, 하마터면 AS기사에게 당신이 아니라 회사 시스템 때문에 화가 난다고, 소리 질러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낼 뻔 했다.

 

자본주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한다. (이건 나의 말)

한동안 잠들기 전에 침대 곁에 두고 한 두 꼭지 씩 읽었던 <비상 경보기> 생각이 났다. 화를 낼 곳에 정당하게 화를 내고 있는지, 혹여 내가 누군가의 존엄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가 듣는다면 그야말로 오지랖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번 일을 겪고보니, 냉장고를 없애면 공동체가 살고, 가족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먹일 수 있다는 다소 엉뚱한 내용도 그럴듯하게 여겨졌고, 어떤 자본가의 상품을 사야 하는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는 만큼, 우공이산이라고 조금씩 노력하다보면 노동자이며 소비자인 대다수의 우리가 행복하게 살 날도 올 것이며, 우리 공동체가 탁류처럼 되더라도 작으나마 맑은 샘물 한줄기라도 흘러들어야 그나마 완전히 썩지는 않을 거라는 다소 낭만적인 철학자의 강론이 가슴 따뜻하게 여겨졌다.

괘변이니, 사이비니, 독선가니, 대중 스타일뿐이니, 강신주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의 소리도 많지만, 삶 속에서 내 행동에 대해 여러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강신주의 글을 나는 좋아한다. 철학이란 것이 머리 아프게 지적 계보만을 줄줄이 외워대며 삶과 동떨어진 얘기를 주워섬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내 수준에 딱 맞는 철학자라 싶기도 하고. 자본주의에 반하는 혁명아닌 혁명을 꾀하면서 그가 막상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제 얼굴에 침 뱉기는 피하련다.

 

오늘 아침, 결국 정수기 계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다행히 의무 사용기간을 다해 위약금은 없었지만, 설치 당시 면제받은 가입비인지 설치비인지는 내야 한다고 했다. 흔쾌히 얼른 빼가시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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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vibrator 2016-09-09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글을 읽게 되었네요. 서평 너무 좋아요. 읽기 좋은 문장 너무 부럽습니다^^ 행복하세요!!

비의딸 2016-09-19 11:22   좋아요 0 | URL
내 희망과 실상은 너무도 달라 초라할 만큼이라서 주절주절 남긴 글인데요, 읽어봐 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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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주인공인 아홉 살 꼬마 오스카는 9.11 테러로 아빠를 잃었다. 아빠는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던 때에 죽었고, 아빠가 거기 세계무역센터에 갇혀있었던 그때, 오스카는 자동응답기를 통해 터져 나오던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공포에 젖어 다급하게 외치던 아빠의 목소리에 당황한 어린 오스카는 두려움에 전화를 받지 못했고, 그 후로 죄책감에 시달린다. 직접 통화하지 못한 것이 마치 아빠의 죽음의 원인이라도 된다는 듯이.

오스카는 아빠를 잃었다는 슬픔과 죄책감을 잊기 위해 엉뚱한 추리를 하는 과정에 만난 노인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 간다. 결론은 아무리 아파도 잊어야 할 것은 잊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해서 아픈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산 사람은 산 사람끼리의 사랑으로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왔다가 가버리냐! 다 셀 수도 없을 정도라고!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놔야 해!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들이 떠날 땐 잡지도 말아야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9.11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을 정치적인 시선은 배제한 채로, 한 인간의 개인적 비극과 그를 극복해 내는 여정으로 그렸다.

 

 

신사 숙녀 여러분, 기장이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하강을 시작했습니다. 19951220, 마이애미 국제공항을 출발해 콜롬비아 칼리로 향하던 아메리칸 항공 965편은 착륙 직전 산에 충돌해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159명이 사망했다. 비행기는 미 북동부의 겨울 폭풍으로 인해 2시간 늦게 이륙하였다. 몇몇 승객들은 출발 지연에 의해 비행기를 놓치거나 다른 비행기로 옮겨 타기도 했다. 그들은 운이 좋았던 사람들로, 사고 후 965편을 피하게 된 우연을 행운으로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엄마는 죽을 거고, 나 혼자 남겨놓을 거예요. 965편을 피할 수 있었던 운이 좋은 사람 축에 들지 못했던 탑승객들 명단에는 마야 프리츠의 엄마인 일레인 프리츠가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어떤 경로(실제로, 사고 직후 추락한 비행기의 항공 전자기기를 비롯한 비행물품이 도난 되었고, 도난품들은 이후 마이애미의 브로커들 사이에 형성된 암시장에서 다수 발견되었다)를 통해 사고 비행기의 블랙박스 녹음 테잎을 입수한 마야는 기장과 부기장이 착륙을 시도하는 과정과 사고 당시에 나누던 대화를 듣고 듣고 또 듣는다. 마치 그들의 대화 속에서 엄마의 이름이나 죽기 전 엄마의 상황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반복해서 녹음을 듣는다. 엄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안토니오. 왜 엄마가 그 비행기를 타야 했을까요? 왜 직항이 아니었고, 왜 그토록 운이 나빴을까요? 운이 나빴다는 것 말고는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죽음들이 있다. 어째서 그때 그 비행기에 있었을까, 그 다리를 지나고 있었을까, 왜 하필 그 건물에, 그 배에, 그곳에 있었을까. 그건 운명이라던가 운이라던가 하는 비과학적이고 비전문적인 말로 밖에는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칼리로 향하던 965편을 어떤 이유로 놓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놓친 사람을 대신해 비행기에 오른 사람도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야를 더 힘껏 껴안았다. 그녀를 껴안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었겠는가. 마약을 운송하는 일을 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20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마야의 아빠 리카르도 라베르데는 사고 비행기의 블랙박스 녹음 테이프를 입수한 후, 거리에서 총격사고로 죽는다. 소설의 화자인 안토니오는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총에 맞을 당시 같이 총격을 당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총상을 회복한 후에도 안토니오는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는 없었던 일처럼 비극을 잊는 대신 라베르데의 죽음을 추적하며, 자신이 겪은 비극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주인공 오스카는 더 이상 상상하지 않기 위해,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안토니오 역시 라베르데가 총을 맞게 된 이유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이 뒤틀려 버린 것이 바로 그 총격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만난 마야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라베르데가 죽기 전 들었던 녹음테이프가 1995년 추락한 비행기의 블랙 박스였으며, 비행기에는 라베르데의 아내이자. 마야의 엄마인 일레인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녹음 테이프를 반복해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마야를 힘껏 껴안는다.

 

나는 그때 일어난 일을 바꿀 수도 없었고, 녹음테이프에서 흐르는 시간, 이미 지난 순간을 향해, 결정적인 순간을 향해 가고 있던 시간을 정지시킬 수도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남은 사람끼리 체온을 나눈다. 체온을 나누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사실은 체온을 나누는 그 행위가 모든 것을 되살린다. 결국 모두가 모두를 보내고, 또 모두가 모두를 잊는다. 그래야만 살아지니까.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영원히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스카가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고 불현 듯 아빠의 죽음이 떠오를 테고, 다소 희석이 될망정 아빠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죄책감 또한 계속될 것이며, 엄마가 왜 그 비행기에 탔는지 모르겠다는 마야의 탄식도 계속될 것이다.

 

여러분 모두 즐거운 휴가 보내시고, 1996년은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기장이 녹음테이프에서 말하고 있었다.‘저희 항공편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소설의 배경이 된 20세기 말의 콜롬비아는 마약 밀매와 관련된 불법 행위와 통제되지 않는 폭력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였다. 거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거나, 폭탄이 터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때로는 비행기가 추락하기도 했는데, 전국가적인 폭력의 광기에 휘둘린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1995년의 비행기 사고는 테러와는 관련없는 조종사의 실수로 밝혀졌다. 작가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혼돈의 시절에 콜롬비아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개인의 비극을 꼼꼼하게 풀어냈다.

 

뭐라고요? 아저씨도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라고 어린 왕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조종사에게 묻고 있고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나 역시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하지만 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참고할 만한 블랙박스도 전혀 없고, 리카르도 라베르데의 추락에 대한 블랙박스도 전혀 없다고, 인간의 삶에는 그런 기술적인 사치품이 없다고 생각했다. (338)

 

한편 라베르데와의 총격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 된 안토니오는 라베르데의 죽음에 가리워진 진실을 보아야만 자신이 회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쫓느라 정작 옆에 있는 사랑을 놓치고 만다. 안토니오의 추락은 언제부터 였을까. 총을 맞던 순간부터 였을까? 라베르데를 만나던 순간부터 였을까? 혹시 아내 아우라와 딸 레티시아를 두고 마야를 찾으러 가던 그때는 아니었을까? 아우라가 그만 돌아올 것을 종용했던 그때, 멈출 수 있었다면 안토니오의 추락은 막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질문은 우리가 과거에 관해 하는 수많은 질문처럼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 어떤 것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고, 또한 그 어떤 것도 그후에 발생한 일을 바꿀 수 없다.(17) 오스카가 아빠의 마지막 전화를 받았다 해도, 아빠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 기껏해야 지난 일을 후회하거나 가지 못한 길에 대해 한탄할 뿐, 자신이 추락하고 있는 동안의 소음도 듣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콜롬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신진 작가로 무슨 상, 무슨무슨 상 무슨무슨무슨 상을 받았다는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의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는 것은 매우, 몹시, 상당히 지루했다(상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라는 나의 믿음은 이번에도 변함이 없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 대해 말하자면, 일상과 환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마구 얽혀, 시간 순으로 배열된 사건을 읽는 것에 익숙한 시선으로는 벅찬 책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이런일이!!!’를 연발하며 1,2권 통합 629쪽을 읽는 동안 지루한 줄을 몰랐다. 그에 반해,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이 지루했던 이유는, 마약 왕이 판을 치며 개인 동물원까지 만들었다는 20세기 말의 콜롬비아 상황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과거를 되짚어 가며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어떻게 느낄 것이다라는 방식의 글쓰기 스타일이 머릿속에 어떤 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되곤 했기 때문이다. 하여 때때로 애꿎은 번역가 탓을 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잘 된 외국문학에 상을 주는 인터내셔날 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문학 인터내셔널 상, 황순원 문학 인터내셔날 상, 이상 문학 인터내셔날 상 등등... 2의 창작이라는 번역문학을 위해 필요한 일 아닐까.

어떤 책은 스포일러를 읽고 나면 본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은 반드시 스포일러가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 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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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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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가족인가?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이른다고 국어사전에 기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가족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데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런데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든 소개를 받아 결혼까지 이어졌든, 남남이 만나 서류로 묶인 사이를 진정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아무리 죽고 못 살아 결혼한 사이라 해도 헤어지고 나면, 그러니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제부터 부부가 아니라는 증명을 하고 나면,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기 십상인 것이 바로 부부 사이이기 때문이다. 서류로 증명되지 않은 사실혼의 경우에도 살림을 작파하면 생판 남이 되거나, 서로를 원수 보듯 하기 쉬운데, 한때 서로에게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 이였기 때문에 돌아서면 그 반향이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서류상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생활을 지속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족애로 똘똘 뭉쳐 사는 것도 아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경외도 존중도 배려도 남아있지 않지만 가족이란 울타리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어느날 배우자가 사망한다면, 이후 배우자의 부모와 형제들은 계속 가족인걸까? 죽기 전에 이혼했다면 확실히 남이겠지만, 배우자가 사망한 경우는 혼인관계 파기가 아니므로, 배우자의 가족을 계속 내 가족으로 여겨야하는 것일까?

 

대학교수로 어느 정도 자리 잡기에 성공한 오기는 아내와 여행을 떠났다. 불행히도 그 길은 둘 사이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아내는 죽었고, 오기는 눈을 깜박이는 것 외에는 몸을 움직일 수도, 감각을 느낄 수도 없는 처참한 지경으로 살아남았다. 열 살에 어머니가 자살하고, 결혼 전에 아버지까지 세상을 뜬 오기에게는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장모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장모는 딸의 죽음을 뒤로 하고 사위의 재활을 위해 발 벗고 나선다. 나한텐 딸뿐이고, 자네한테는 나뿐일세. 그걸 알아야 하네. 죽은 딸의 방에 머물며 오기의 간병을 자처하고 나선 장모의 말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인 사위의 회복을 위한 기원이라기 보다는 어쩐지 너의 회복은 나에게 달려있다는 엄포처럼 들려 내가 오기였다면 그야말로 오금이 저렸을 것 같은데, 도대체 그동안 오기 부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처녀시절과 결혼 초기만 해도 오기의 아내에게는 재능도 있고,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비교적 화려한 직업여성들을 롤 모델로 삼던 아내는 그들처럼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만들지 못한 아내는 설상가상으로 엄마가 되는데도 실패한다. 이후 정원 가꾸기와 메모와 기록에만 집중하던 아내는 여행길에서 오기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자신은 그동안 괜한 메모를 해온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이 쓴 것은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 이라는 선포였다. 일찌감치 속물이 된 한 남자가 성공을 위해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 그런 그가 과연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입장에 있는 인물인지에 대한 것들을 세세하게 썼고, 그 기록을 남편의 학교나 지인들에게 보낼 생각이라는 것이다. 핸들을 잡고 있던 오기는 바로 그 순간 순식간에 무력해졌고, 어둠 속에서 커지는 구멍으로 빨려들었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209)

 

장모와 사위는 가족관계인가?

아내를 잃은 오기에게 남은 가족은 장모뿐이었다. 그건 몇 년 전 남편이 병사하고, 외동인 딸까지 떠나보낸 장모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라곤 세상에 단 둘뿐인 그들이 가족애를 발휘해 장모는 사지마비 지경의 사위를 일으키고, 장모 덕에 새 삶을 살게 된 사위가 장모의 남은 여생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면 무지막지하게 재미는 없을지언정, 딸이 없는 상태에서도 장모와 사위는 가족이다라는 미담으로 이해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피상적인 관계에 대해서였을 터. 서류가 빠지면 부부도 더 이상 가족이 아닌 것이다.

 

과장된 우아함으로 외로움과 삶의 고통 따위를 감추고 살아오던 장모는 간병을 위해 딸의 방에 머물며 딸의 결혼생활이 불행했다는 것을 차츰 알아간다.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장모는 사위에게서 여자문제로 일찍 퇴직한 남편의 모습을 보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물론 이것은 내 생각일 뿐이고, 소설은 끝까지 오기의 관점으로 쓰였다).

여자들이 종종 자신의 삶에서 전환점이 되었다고 믿는 오기는 삶에서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생각은 미치지 않는데, 그것은 그가 사경을 헤매는 지경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기는 무엇보다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하겠다는 선언을 하자, 그제서야 비로소 어둠 속의 구멍으로 추락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지만, 오기는 정작 아내가 빠져있는 구멍은 보지 못했다. 아내가 슬퍼할 때 그녀를 달래 줄 방법을 몰랐고, 달래줘야 할 이유도 몰랐으며, 달래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얼마나 많은 남편들이 오기와 같은지!). 아내는 제풀에 지쳐 자기만의 구멍으로 숨어들 뿐이었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십여 년 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아내에게 깊이 공감하지 못한 오기. 그건 오기에게 있어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기의 성공이나 기쁨을 아내 역시 제 몫으로 기뻐할 줄 몰랐고, 그랬으므로 그녀는 더더욱 고독해졌다.

부부는 가족인가. 물론 가족이다. 문제는 가족 간이라도 전적인 공감과 이해는 불가능할 터. 다만 배려만이 가족을 이루는 진정한 울타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배려하고 배려하고 또 배려하는 가운데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가족일지라도 타자인 것은 분명하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 알라딘 공식 신간 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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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5-1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서로 이해할 마음이 조금도 없이 자신의 잣대로 서로를 평가하는 사람들이었죠. 저는 조금 더 미스테리어스하게 읽었는데 해석이 명료하고 좋습니다

비의딸 2016-05-18 13:09   좋아요 1 | URL
어떤 새엄마가 아이를 앉혀놓고, `너와 네 아빠는 1촌이지만, 나와 네 아빠는 무촌이다. 부부는 촌수도 없을 만큼 한 몸인거다`라고 했다고 해요. 처음엔 그 얘길 듣는 아이가 느낀 충격이나 배신감, 아픔 그런것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었는데, 좀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가엾은 건 오히려 새엄만거예요. 얼마나 절박한 마음이었으면 어린애를 앉혀놓고 그런 얘길 했겠어요. 부부는 그만큼 아무것도 아닌 거죠. 이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장모와의 관계에서는 영화 `미저리`가 떠오를 만큼 긴장감이 넘치죠. 그런데 저는 장모와 보다는, 이전에 아내와 어땠을까가 많이 궁금해지더라구요. 분명한 것은 일방적인 건 없다는 거고.. 그렇다면 둘 사이도 그랬겠지 싶어요.
 
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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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씻기고 온 방에 튄 물을 닦을 때마다,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 그건 욕심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 희망이 이뤄지려면 남편이 시험에 붙어야 했다. 시험에 붙을 때까지는 공부를 해야 했고, 공부를 하는 동안은 내가 돈을 벌어야 했다. 일이라면 이골이 난 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이 허드렛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쳐 드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었다.(29)

등신. 그것도 희망이라고.

자기는 써보지도 못한 돈을 빚으로 떠안고 고시원으로 쫓겨나 낮에는 공장에서 눈알이 빠질 듯 선별작업에 몰두하고 그나마 밤에도 호객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먹고 살아지는 처지에 감히 사랑을 하고, 아이를 갖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남편이 공무원 시험에만 합격하면 고단한 삶이 당장 달라질 것처럼 희망을 갖고, 동생들이, 엄마가, 남편이, 아이가 죽도록 희생에 희생만을 요구하는데도 말도 안되게 수동적인 삶을 살며,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거는 머저리, 맹추, 등신...

 

환영. 눈 앞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는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착각. 눈 앞에 일어나지 않는, 일어날지 알 수도 없는 환영을 믿으며, 자신과 오늘과 내일까지 거는 이런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다. 그렇지만 환영일지라도 희망을 갖는 것이 잘못이 아니듯, 드문 일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모두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자신과 오늘을 희생한다. 단지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로.

 

그러나 희망을 갖고 오늘을 희생했더니 과연 바램이 이루어졌다 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희망을 이룬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몸뚱이를 굴리지 않아도 먹고 살아지는 것을 말하는 건지, 남보다 나은 입성을 자랑삼을 수 있을 만큼 살게 되는 걸 말하는 건지, 삼십 몇 개월 할부로 뽑은 새 차를 굴려 축제다 맛집이다 찾아다니며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는 것을 말하는 건지를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하니까.

아이를 씻겨도 물이 튀지 않는 욕실과 방의 구분이 명확한 집을 얻고 나면, 주방과 거실의 경계가 뚜렷한 집을 바라게 될 것이고, 그다음엔 아이와 부부가 개인적 공간을 확보할 만큼의 여유가 있는 집이 필요해 질 것이며, 그리고 그것들은 계속 욕심이 아닌 희망으로 남을 것인데, 과연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희망으로 여겨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말도 안되게 불행한 이야기를 읽으며,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불행을 잊고 싶었지만, 주인공처럼 이렇게 저렇게 몸을 써서 먹고 살지 않는다고 해서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 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이란 환영에 홀려 사실은 를 전부 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각성을 하게 되었으므로.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을만큼 신산스럽고, 그러느니 차라리 죽지 왜사느냐 묻고 싶은 주인공의 삶이지만, 김이설은 그걸 질척대지 않고 쓸 줄 아는 작가다. 늘어지는 감상을 거둬버린 건조한 문체, 꾸밈이나 더함없는 그 문체 때문에 이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으려 또다른 김이설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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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5-0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며 비의 딸님의 저 글들이 남 일처럼 읽혀 지지가 않네요.
나 역시 등신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희망...무서운 희망, 시험만 붙으면 바뀔 것이라는 그런 무서운 희망.
저 역시 환영의 주인공처럼 그러고 있네요. 독서는 못 한지 꽤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처지가 더 우울해 질 것이라는 직감은 들지만 말입니다. ㅎ
잘 지내시죠? ㅎ

비의딸 2016-05-04 16:48   좋아요 0 | URL
희망을 걸고 있는 한, 우리는 모두 등신일 수 밖에 없다는 `자조`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보면 희망이 없다면 살아지지 않을 것 같아요.
책 읽을 시간도 없이 고시원에서 공부하고 계시는 루쉰 님께 함부로 드릴 말씀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싸해지네요. 이깟 리뷰에도 마음이 왔다갔다 하는데,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가들은 글에 얼마나 많은 마음을 담아야할까요.. 읽는 사람이 아프지 않게, 마음 다치지 않게, 희망을 잃지않게...
그런데 저는 기질이 어두워서 그런지 소설들을 읽으면 희망보다는 절망을 겪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이어 김이설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소소한 불행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에요. 그러니 저는 김이설의 주인공들이 겪는 절망 속에서 나름의 희망을 보고 있는 것이죠..
글쎄요.. 루쉰 님께 이 책을 자신있게 권할 수 있을지는 조금 망설여집니다.
왜 그런말 있잖아요. 임신했을 때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으라는... ^^;;
더위가 몰려오는 데, 두루두루 잘 이겨내시길 바라요.

루쉰P 2016-05-07 01:07   좋아요 0 | URL
이걸 어쩌면 좋죠 ㅎ 여기 하루 밥 값은 3,800원 입니다. 이 책이 가까운 신림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4천원에 판매 되기에 비 오는 날 한끼 굶고 굳이 걸어가서 사고 말았네요 ㅎㅎㅎ
그리고 지금 다 읽었습니다. 비의딸님이 추천하지 않을 만한 소설이라 깊이 납득을 하고 있습니다.
윤영의 남편 모습에서 제가 보이고, 윤영의 모습에서 제가 보이네요. 하지만 전 기질이 워낙 희망 쪽으로 강한 편이라 그런지, 고맙게도 이 소설이 개인적으로는 글을 잘 쓰는 소설은 맞지만 제 기준으로 안 좋은 소설이네요 ㅎ
전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얼 말하고 싶은 지 모르겠습니다. 깊은 절망? 아니면 삶의 구차함? 전 한국 소설을 무척 싫어합니다. 어쩌다 읽으면 죄다 이렇게 인물들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정해져서 가고, 그리고 끝이 없는 나락으로 밀고 갑니다.
그게 마치 현실의 피할 수 없는 진실인 것처럼 말이죠.
전 이 작가가 옥탑방 계단에 앉아 미친 여자처럼 웃으며 최악만을 생각하는 윤영처럼 지금보다 더 지옥만을 생각하며 현실을 버티는 그런 모습을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것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주제 넘지만 전 이 작가가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 진실에 대해 한 단면만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면 모르겠지만요 ㅎ
탈출구 없는 현실을 보여주며 도대체 무얼 바라는 것일까?란 생각도 들고 마치 선이 있으면 악,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듯이 그런 반사적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하는 생각도 들고 합니다. ㅋ
결론적으로 전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작가에 대한 반발심이 일어납니다.
당신이 생각하고 묘사하는 것만큼 인간의 삶은 단순하지 않고 그리고 한 방향으로만 정해져 가지 않는다고 말이죠 ^^
제일 좋았던 부분은 윤영의 가족들이 잠깐 모여 공사판 여자도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마음이 지금의 뉴스들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무조건 희망적인 것만 읽고 써야 한다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전 이 작가를 보면서 평생 정신병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말 것이라 여기다가 진짜 그렇게 망가져서 자살해 버린 아쿠타카와 류노스케가 생각이 나네요.
덕분에 어둠을 보니 빛이 보입니다. ㅎ 좋은 소설 이었습니다. 리뷰 감사합니다 ㅎ

비의딸 2016-05-09 11:39   좋아요 0 | URL
루쉰 님 말처럼 저도 한국소설이 좋진 않아요. 읽다보면 모두가 다 같이 절망을 향해 나란히 가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주인공에게서 나를 본다거나 상황에 나를 넣어보기가 때론 겁이 날 만큼 절망스럽죠. 그런데 이번엔 못말리게 불행한 주인공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김이설의 소설을 택했어요. <오늘처럼 고요히>를 시작으로 <환영>을 읽고, <나쁜피>를 지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어요. 절망도 이쯤이면 피해망상이다 라는 생각이, 더이상은 지긋지긋해서 못읽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도 인간을 제법 좋아하지 않는 부류이긴 하나, 작가 김이설을 따라갈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지만 어쨌든 저는 말도 안되게 불행한 김이설의 주인공들을 보며 기운을 차렸다고 하면 이해하실런지요. 행복은 부족한 것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태평한 나른함 속에 부족한 듯 차오르는 적당한 긴장감, 그래도 이만하면 살만 한 것 아니냐고 느낄만한 비교 우위의 위치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다소 천박한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결론을 얻었거든요. 소설을 읽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나를 대입시키는 것이아니라 무심한 가운데 스치듯 지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더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