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년 이상을 대구 서구(비산동, 평리동)에서 살았다. 과거의 서구를 색으로 표현하면, ‘칙칙한 회색’이다. 사실 ‘무색’에 가깝다. 서구는 대구에서 가장 낙후된 구역이다. 그래서 빛나고 화려한 구석이라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행정구역이다. 문화생활을 즐기려면 수성구와 중구에 가야 하는데, 확실히 서구가 다른 행정구역에 비해 아파트와 문화생활 공간의 수가 적다. 최근 서구에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고 있다. 예전 서구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아파트가 많이 생겼다고 해서 서구는 ‘낙후 지역’이라는 지긋지긋한 꼬리표를 금방 떼지 못할 것이다. 아파트가 많이 들어선다고 해서 구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품질 좋은 원두커피를 마시고, 수제 디저트를 사서 먹는 것은 ‘입이 즐거워지는 문화’를 즐기는 일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서구에 구민의 입을 즐겁게 해주는 카페나 디저트 전문 가게가 없었다. 원두커피 한 잔 마시거나 마카롱을 먹으려면 번화가(중구 동성로)에 가야 했다.
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제 마카롱을 파는 가게가 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 5분 정도 걸으면 마카롱을 먹을 수 있다니. 내가 서구에 오래 살면서 첫 번째로 가장 놀라웠던 일이 서구에 동네 책방(담담 책방)이 생겼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이고, 그 두 번째로 놀라웠던 일은 동네에 생긴 디저트 카페를 처음 알았을 때다.
마카롱과 그 밖의 디저트를 파는 카페 이름은 ‘카페 클리어(Cafe Clear)’다. 카페 건물이 상당히 튄다. 분홍색 건물인 데다가 카페 내부도 온통 분홍색으로 채워져 있다. 눈에 확 띄는 카페라서 그런지 건물 전체가 시내에 있다가 갑자기 서구에 뚝 떨어져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카페 근처에 지나가면 흘끗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밤이 되면 ‘카페 클리어’는 더욱 빛이 난다.
건물 1층이 카페, 2층은 대여가 가능한 공간, 3층은 공방이자 카페 사장의 개인 작업실이다. 건물에도 이름이 있다. 이름은 ‘18˚(18도)’다. ‘18˚’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반듯한 사각형 형태의 건물이 아니라 사다리꼴 형태다. 카페 사장의 말에 따르면 건물에서 살짝 기울어진 부분의 각도가 18˚에 거의 가깝다고 한다. 그리고 18˚는 ‘18℃’로 읽을 수 있다.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는 최적 온도가 18℃라고 한다.
마카롱이라 하면 작은 햄버거처럼 생긴 것이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카페 클리어’의 수제 마카롱은 흔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카페 사장이 손재주가 좋아서 코크(Coque, 마카롱의 과자 부분, ‘꼬끄’라고 부르기도 한다)를 아기자기하게 꾸미면서 만든다. 카페 사장이 정성과 노력을 들여 만든 마카롱의 비주얼을 보면 먹기 아깝다. 그렇지만 나는 그걸 하루에 세 개나 먹는다. 다 먹는데 10분도 채 안 걸린다. 나는 ‘1일 3 마카롱’을 해야 만족감을 느낀다. 한 개, 두 개만 먹어도 성이 차지 않는다.
주문한 마카롱 세 개를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먹지만, 마카롱을 먹으면서 느낀 점을 고작 문장 한두 줄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마카롱 만드는 일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잘 알기에 마카롱 사진 한 장 올려서 ‘맛있어서 좋아요’라고 간단히 쓰는 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려는 내 성격상 용납이 안 된다. 카페 사장은 마카롱을 만드는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 맛있게 먹는 손님의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고 했다. 그분은 눈과 입을 즐겁게 해주는 마카롱과 디저트를 어떻게 하면 잘 만들지 매일 고민하고, 그 생각들을 나를 포함한 손님들에게 밝힌다. 나는 마카롱을 어떻게 만드는지 잘 모르지만, 마카롱을 잘 만들고 싶은 카페 사장의 진심이 느껴진다.
* 한스 이저맨 《따뜻한 인간의 탄생: 체온의 진화사》 (머스트리드북, 2021)
진화를 단편적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강한 자’가 성공적으로 진화해서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따뜻한 인간의 탄생》은 상대방에게 체온을 줄 수 있는 ‘따뜻한 자’가 진화와 생존에 유리했다고 주장한다. 《따뜻한 인간의 탄생》은 인류 진화의 원동력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고 있다. 그 원동력은 타인과 접촉해 온기를 나누면서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이 책에 ‘게젤리그(gezellig)’라는 용어가 나온다. 게젤리그는 네덜란드어로 ‘아늑하다’라는 뜻이다.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공간은 사람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며 그 공간 안에 있는 상대방에게 친근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카페 클리어’는 ‘게젤리그’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공간이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면서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카페 사장의 친화력은 내가 ‘카페 클리어’에 자주 가게 만드는 매력이다.
나는 항상 ‘카페 클리어’에 가면 책을 읽는다. 이곳에 혼자 책 읽는 손님은 나 뿐이다. 카페 내부 공간이 넓지 않아서 다른 좌석에 앉은 손님들이 대화하는 소리와 스피커에 나오는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린다. 카페 사장은 흥이 많은 쾌활한 분(요즘 말로 하면 ‘텐션이 높은 사람’이다)이라서 자신이 고른 음악에 맞춰 콧노래를 부른다. 그렇지만 나는 주변의 소음에 신경 쓰지 않는다. 소음은 독서의 집중력을 방해하지만, 너무 집중하면서 생기는 졸음을 막아주기도 한다(여러 곳의 카페에 가본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다). 카페 내부에 조용한 분위기가 지속하면 졸음이 오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예전에 손님 한 명도 없는 조용한 카페를 선호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카페에 손님들이 많이 있을수록 좋다. 그러면 아늑한 온기를 제대로 느껴질 수 있다.
* 아쿠쓰 다카시 《어서오세요, 책 읽는 가게입니다》 (앨리스, 2021)
사실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은 책 읽는 손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손님은 음료 한 잔만 주문하고 몇 시간을 오래 앉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은 카페에 혼자 책 읽는 손님이 타인의 눈치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에 집중할 줄 아는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꼭 그렇지만 않다. 《어서오세요, 책 읽는 가게입니다》의 저자는 ‘카페에서 혼자 책 읽는 손님은 기본적으로 여리고 연약하며 섬세하고 순진한 존재(99쪽)’라고 말한다. 1인 손님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카페 사장의 눈치를 볼 정도로 소심하다.
나는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음료는 두 잔 이상 주문한다. 음료를 마시지 않고, 일하면 허전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1인 손님을 배려해주는 사장의 친절함에 보답하는 방법은 음료를 한 잔 더 주문하거나, 디저트를 또 주문하는 것이다.
아늑한 온기가 느껴지는 카페는 번창해야 한다. 그런 카페가 되려면 카페 사장은 손님들과 어울릴 줄 아는 친화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적인 온기를 느낀 손님은 음료와 디저트를 더 주문해야 한다. 카페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단골손님은 일방적으로 서비스받기를 원해선 안 된다. 또 자신을 VIP로 착각해서 사장에게 서비스 그 이상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게젤리그’가 있는 카페가 단순히 손님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온기를 서로 주고받는 동등한 관계가 있어야 생기는 소중한 곳이다.
※ 위에 있는 사진 세 장은 ‘카페 클리어’ 블로그(https://blog.naver.com/pandp486) 에서 가져왔다. 나머지 두 장의 사진은 필자가 찍었다. 이 글은 특정 가게를 홍보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다. 작년 8월 29일에 처음 ‘카페 클리어’에 갔는데, 그날부터 지금까지(어제도 방문했고, 그곳에서 두 시간동안 이 글을 썼다) 매일 카페에 드나들면서 느낀 좋은 감정들을 한데 모은 글이다. 카페 사장은 손님이 주문한 디저트를 사진으로 찍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진에 내가 주문한 디저트도 포함되어 있다. 그 사진들을 이 글에 넣고 싶었지만, 홍보성 짙은 글로 오해받기 싫어서 제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