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글새소식》423호(한글학회, 2007.11.)에 실린 국어학자 고영근 교수의 글을 옮긴다. 수긍이 가는 대목도 있고, 좀 지리하지 않은가 하는 대목도 있다. 간혹 시비도 걸어보자.

문법에 맞는 표현을 골라 쓰자 - 고영근(서울대 명예교수, 국어학)

지하철을 타거나 병원을 찾으면 전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표현을 더러 접한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와 같은 표현은 '내리시는 ……'로 바꾸어야 한다. 미래의 일을 표현하는 경우라도 그것이 확정적이거나 보편적인 사실에 관련되는 '-는'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주차장의 '出口'와 '入口'를 우리말로 다듬은 표현이 '나오는 곳'과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면 '내리시는 ……'이 옳다는 것을 누구든지 수긍할 수 있다. 병원에서 흔히 보는 '복도 앞으로 들어오실 분', '여기서 순서를 기다리실 분'과 같은 말씨도 당연히 '…… 들어오시는 분, …… 기다리시는 분'으로 다시 고쳐야 한다. 높임의 '-(으)시-'를 끼워넣는 것도 그렇게 좋지 않다. 특히 지하철의 '내리시는 문'은 '내리는 문'이 더 자연스럽니다.(이건 지하철공사에서 가급적 빨리 바꾸면 좋을 것 같다. 간혹 지하철을 탈 경우 차내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거북하게 느낀 적이 많다.)

약국이나 병원에 가면 "오늘 5일분 약이 나가십니다."와 같이 존경의 '-(으)시-'를 사용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으)시-'는 주어가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판단할 때 붙이는 것인데 '약'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청자를 의식하여 '-(으)시-'를 붙이는 것으로 보이나 이런 말씨는 문법에 어그러지는 과잉공대의 예이다.(약국이나 병원뿐만 아니라, 백화점이나 쇼핑몰, 그리고 각종 전화안내 등에서 이런 과잉공대가 많다. 과잉공대인지 잘못된 공대인지 잘 모르겠다. 한때 YTN에서 골프 강좌를 하던 세미프로는 시종일관 이런 '~십니다.'로 일관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이런 것은 문법을 떠나서 좀 지나치다 싶다. 우리말의 존대에 대해 일각에서는 문제의식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것을 오랜 전통이고 문화로서 인정하고 수긍하는 편이다. 그러면 이런 과잉공대는 좀 지나쳐 보인다.) 전화로 자신을 소개할 때 '김XX 변호사입니다', 'XX일보사 박XX 기자입니다', 'XX대학교 정XX 교수입니다'란 말을 예사로 듣는다. 얼마 전 일본 교수에게 일본에서도 이런 말을 쓰는가 물어 보니 어떻게 자기가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원래 직위나 직책은 'XX신문사 사회부 기자 XXX입니다'와 같이 성명 앞에 붙여야지 뒤에 붙이면 자기를 높이니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를 객관화시킬 때에는 "XX회사의 김XX 과장에게서 전화 왔다고 전해 주십시오."라고 쓸 수 있다.(이 점은 이미 입에 굳은 표현이 된 것 같아 뭘 이런 것까지 시비를 거느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것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지, 자신의 직책이나 직위를 붙여 권위를 들어내려고 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꼭 있는 놈들이 이런 표현을 자주 쓴다.)

신문지상이나 방송매체 등의 제호에서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행동을 요구할 때 명령형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이런 상황은 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직접 명령형을 써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의 신문의 제호를 보면 직접 명령형을 사용하는 일이 자주 보인다. 학교문법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상대로 행동을 요구할 때에는 '-(으)라'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받침 아래에서는 '-으라'를, 모음이나 'ㄹ' 받침 아래에서는 '-라'를 쓴다는 것이다. '교장 고소하게 부모 도장 받아 와라, 탈당 의원들은 행선지를 밝혀라, 시정 연설 대통령이 직접 해라'에 나타나는 '~와라, ~밝혀라, ~해라'는 모두 직접 명령형으로서 당연히 '오라, 밝히라, 하라'로 바꾸어야 한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간접 명령형어미 '-(으)라'는 중세 이래 광복 후의 남북한과 재외교민(고려인)의 언론매체에서 거의 정확하게 사용되어 왔다. 이런 경우 간접 명령형을 쓰기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수재민을 돕자'와 같이 청유형을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주어가 화자와 청자의 합동이어야 한다.(신문이나 잡지 등에서는 또한 자주 보이는 오류는 인용할 때이다. 우리 문법에서 인용에는 간접인용과 직접인용으로 나뉜다. 신문 등에서는 직접인용의 경우가 많은데, 그때 어미를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신문들이 보다 우리말 문법에 맞게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작년과 금년에 걸쳐 우리 고대의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텔레비전에서 여러 편 방영되어 왔다. 이들 사극에는 명령형어미로 예외 없이 '보이거라, 칼을 뽑거라, 들라 하거라, 앉거라, 술이나 마시거라, 말해 보거라'와 같이 어간에 '-거라'를 붙여 사용하고 있다. 우리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거라'는 '거라' 불규칙활용이라 하여 '가다' 등의 일부 자동사에 쓰인다는 것을 누구든지 안다. 앞의 예는 '보여라, ~뽑아라, ~하여라, 앉아라, ~마셔라, ~보아라'로 고쳐야 한다. 언론매체에서 규범에 어긋나는 말씨를 쓰면 그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다. 극작가나 연출가는 이런 점에 유의하여 출연자들이 규범에 어긋나는 말씨를 쓰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이것은 고영근 교수의 설명이 전적으로 맞으나, 현대 언중에게 있어 이런 구분은 모호해졌다. 고영근 교수대로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말 교육을 제대로 안 받은 사람들일테다. '-거라' 불규칙이 무의식적으로 지켜지고는 있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별반 오류를 느끼지는 못한다. 그런 불규칙의 규칙이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사극에서의 '-거라' 남용은 어느 정도 문제라고 보여지지만, 그것이 보다 고어적 표현 효과를 잘 드러내주고 있어서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씨 가운데는 입말에 알맞은 것이 있고 글말에 더 어울리는 것이 있다. 같은 명령형어미라 하여도 '-어라'는 입말에 어울리고 '-(으)라'는 글말에 어울리는 형태이다.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직접 명령형어미 '-어라, -아라, -여라, -거라, -너라'를 문법에 맞게 써야 하고, 글말을 작성할 때에는 -으라'는 받침 있는 말 아래, '-라'는 모음과 'ㄹ' 받침 아래 써야 한다.

국어문법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보급이 절실하다. 정확한 문법 지식은 맞춤법과 논리에 맞는 글을 쓰고 정확한 말씨를 골라 쓰는 기반이 된다. 실종된 문법교육의 강화가 시급하다.(맞는 말이다. 문법교육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긴 하다. 옳은 말씀이긴 한데, 공허해 보이는 건 왜일까? 이런다고 실종된 문법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애초에 문법이 실종된 적은 없다. 조금씩 성형수술을 해서 이전의 문법을 못 알아볼 따름이다. 문법교육의 강화는 어문 규범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창조적 사고력이라던가 언어가 가지는 여러가지 특성들을 창의적으로 탐구하게 하는 학습의 하나로 기능해야 할 것이다. 문법을 통해서 언어의 특성을 인지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언어를 가지고 논다면 어문규범이 그리 심각하게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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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알라딘에서 마련된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 일찍감치 서울엘 올라갔습니다. 서울과는 친숙하지 않은 터라, 강연장소인 문지문화원을 찾기가 수월찮더군요. 조금 헤매다가 용케 찾았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인지 한 3~40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석훈 선생의 강연도 무척 좋았고, 시비돌이님의 주선으로 이어진 뒷풀이도 무척 즐거웠습니다.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계십니다. 생일이라고 염치 없이 떠벌렸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께서 축하해주시고, 그리고 송구하게도 선물을 보내주셨어요, 이 자리를 통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Jade님, 마노아님, 혜경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프락사스님도요.ㅎㅎㅎ

*** 강연 후 뒷풀이가 그렇게 길어질 줄 몰랐습니다. 서울에서 밤을 보내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무튼 밤을 지새고 인천행 동반자 라주미힌님과 함께 아침 첫차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라주미힌님과 저는 같은 인천행이지만 신촌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가 그 목적지가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라주미힌님은 1300번을 저는 1600번이나 1601번을 타게 되죠. 그런데 그간 계속 제가 타야할 버스가 항상 먼저 왔었더랍니다. 라주미힌 님께서는 이번엔 본인 차가 먼저 올거라고 확신하더군요. 그런데 이번에도 제 차가 먼저 왔더랍니다. 쪼금 미안했지만.

**** 버스를 기다리면서(꽤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 추운 날씨에....ㅜㅜ;;) 라주미힌 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더라구요. "차에서 졸다가 연안부두까지 가면 어떡하냐"구. 웬걸 밤을 새운터라 차에 타서 잠깐 책을 보다가 이내 잠에 들었습니다. 일어나보니 연안부두 였습니다. 연안부두는 인천에 살면서도 이번이 2번째 였던것 같아요. 토요일 아침인데도 사람이 꽤 많더군요. 낚시꾼들과 군인들 그리고 여고생들....어디들 가는 것지 모르겠더라구요. 연안부두 터미널 안에 우동집에서 우동 한 그릇을 후루룩 마시고 얼핏 보이는 바닷가를 내다보면서 짠내를 물씬 마시고 왔더랍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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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8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이 손 꼬옥 붙잡고 인천까지 같이 가시는 줄 알았는데, 버스번호 한끝 차이로 신촌에서 바이바이하신 거로군요 ^^ 그 아침의 연안부두 우동집 우동, 정말 맛있었을 것 같아요 ^^ (반가웠어요, 저를 기억하지 못하신 멜기님! --> 알고보면 뒤끝 백만년)

멜기세덱 2007-11-18 23:54   좋아요 0 | URL
'그 아침의 연안부두'는 너무 추웠구요, 연안부두 여객 터미널엔 처음이라 궁금해서 들어갔다가 배가 고파, 그 안에 있는 유일한 음식점이 우동집이더군요. 그다지 맛은 없는...ㅋㅋ 뒤끝이 기시군요. 추운 겨울에는 뒤끝이 길면 욕먹습니다.ㅎㅎ 문을 잘 닫고 다녀야 하니까요.ㅎㅎㅎ

웽스북스 2007-11-19 00:24   좋아요 0 | URL
제가 뒤끝은 백만년 가는데 건망증이 심해서 다 까먹어요- 다음번에 먼저 반갑게 알아보시면 사르르르 다 까먹을 거에요 ㅋㅋㅋ

멜기세덱 2007-11-19 14:13   좋아요 0 | URL
뒤끝이 길다고 하셔서, 은근 긴장했는데요....ㅋㅋ

Jade 2007-11-1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라주미힌 님과 멜기세덱님이 두 손을 꼬옥 잡고 가셨어요? +_+

멜기세덱 2007-11-18 23:55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 님과 두 손을 꼬옥 잡고 가고 싶었다는.......막 이래....ㅋㅋ

마늘빵 2007-11-18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런. 연안부두까지 가셨군요. 이거 서울에서 처음 밤새신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드린 책은 어쩌면 맘에 안들지도 몰라요. 워낙에 저자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인지라. :) 저도 오랫만에 밤샜네요. -_- 토요일인 어제도 새벽에 들어왔는데. 오늘은 다행히 밤에 들어왔고요.

멜기세덱 2007-11-18 23:56   좋아요 0 | URL
역시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쩌면 매번 라주미힌 님보다 먼저가서 벌 받은 것 아닌지도 모르겠구요..ㅎㅎㅎ
예전에 한 두번 서울(영등포)에서 밤을 지새본 적은 있습니다. 바둑두면서요.ㅎㅎ
아참,,,,책은 워낙 맘에 든답니다...ㅎㅎㅎ

순오기 2007-11-19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안부두~~ 내 학창시절 추억이 서린 곳인데... 님은 그곳을 그렇게(?) 두번이나 가셨군요~ㅎㅎㅎ 감기는 안 걸리셨나요? 많이 쌀쌀해졌는데...
김씨네였나? 그들이 부르던 노래 '연안부두'가 생각나네요. ^^

멜기세덱 2007-11-19 14:14   좋아요 0 | URL
그렇게 두 번이나 간건 아니에요..ㅎㅎ
예전에 학원 알바뛰면서 회식한다고....전 회를 못 먹지만....ㅋㅋ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실고 오길래~~ 좋은 노래죠..ㅎㅎ
아~~ 막 노래방 가고 싶어지네....막 이래...ㅋㅋ

마노아 2007-11-1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개강연 못 간게 참 아쉬워요. 저는 신청날짜를 못 맞췄어요. 크흑...

멜기세덱 2007-11-19 14:15   좋아요 0 | URL
공개강연 못 오신게 참 아쉬워요.ㅎㅎ

라로 2007-11-2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뜬금없이 복면달호가 생각날까요?ㅎㅎㅎ
전 연안부두 한번두 못가봤어요~~~.
인천은 항구다~~~인가요???ㅎㅎㅎ

라로 2007-11-22 00:06   좋아요 0 | URL
에이, 첨으로 댓글달았는데 내꺼만 댓글 안달아주구,,,앞으로 댓글 안달까보다!!!흥

멜기세덱 2007-11-22 00: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진짜 처음이세요? 음...몇 번 달아주셨던거 같은뎅....ㅎㅎ
(실시간 댓글로 만회하려는 몸부림ㅋㅋㅋ)
그나저나, 왜 복면달호에요? 목포도 항구죠....ㅎㅎ
연안부두야, 배탈일 아니면, 회먹을일 있어야 가는거 아닌가요?
배탈일 없으시면, 회잡수러 한 번 들르세요....ㅎㅎㅎ
 

어제 있었던 박완서 선생의 강연 후기를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전날까지 감기몸살로 며칠을 고생하셨다는데 건강한 모습으로 강연에 임해주셔서 무척 고맙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첫인상은 뭐랄까, '곱게 늙으신 소녀'(어째 좀 싸가지 없는 표현같지만) 같다고 할까? 76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고은 인상과 조심스런 몸가짐이 마치 수줍은 소녀같았다. 강연 1시간여 전 도착하여 교수님들과 식사를 하러 가시던 중 학생들을 마주쳤을 때는 매우 쑥스러운 듯한 모습이었다. 그 느낌은 강연 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번 강연은 조금 졸속으로 추진된 면이 없지 않다. 일주일도 남지 않고 박완서 선생이 강연에 오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강연 준비도 준비랄 것 없이 부랴부랴였다. 이번 강연은 원래 크게 계획된 행사는 아니었다. 매년 학과 학생들이 학술제라는 이름으로 몇몇 동아리들의 발표회에 지나지 않았던 행사였다. 그 한 프로그램으로 문인이나 학자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데, 그런 강연들은 장연스레 조촐할 따름이다.

예년에는 김윤식 교수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유명세에 비해 대중적인 분은 아니셔서 역시 조촐했다. EBS 강사로 유명세를 탔던 모 야구선수와 동명의 학과 선배를 초청한 적도 있었다. 요새는 대형 학원에 스카우트되어 교사를 그만두었다고 알고 있다. 그 외에 여러분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던 것 같은데, 이번 강연 만큼은 여러모로 예년의 그 조촐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준비가 워낙 부족한 탓에 강연 후 사진이나 동영상 등도 전혀 남은바가 없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남겼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가 된다. 학생들이 휴대폰으로나마 찍어둔 사진이 있는지 만방으로 구해봐야겠다. 강연 하루 전 장소가 급변했다. 원래는 100여명 규모의 소강당으로 예정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봐도 좁지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2~300명 규모의 중강당이 자리가 나 급작스럽게 장소를 바꾸었다. 지금 생각하면 장소를 바꾸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강연 당일은 준비한 것 없이 분주했다. 연세가 많으셔서 앉아서 진행되어야 할 것 같아, 단상을 치우고 탁자와 편안한 의자를 마련했다. 마이크를 준비했었는데, 아마도 청중들과 질의응답이 있을 것 같아, 무선 마이크를 준비하느라 방송실을 뛰어다녔다. 이번 박완서 선생 초청에 지대한 공로를 하신 김명인 선생님께서는 전날 조금 우려하셨다. 몸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을 들으셨지는, 내일 혹시나 못 오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연 당일 전화를 주셨는데, 다행스럽게도 박완서 선생이 좀 좋아지셔서 강연엔 차질이 없을 거라고, 아직도 몸살 기운이 있고, 목이 좋지 않으니 강연 때 수시로 마실 수 있는 차를 좀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차를 준비하려는데, 있는게 별 게 없었다. 끽해야 싸구려 녹차였다. 이곳저곳 수소문 끝에 괜찮은 차를 몇 개 구했다. 지금 그 차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강연 내내 박완서 선생이 맛있게(?) 드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준간에 따뜻한 물은 한 번 더 따라드렸다.

오후 5시 30분 쯤 되니 학과 학생들뿐 아니라, 소식을 들은 선배들, 그리고 다른 학과 학생들, 근처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 강연 장소를 보다 넓은 곳으로 옮겨 천만다행이었다. 6시쯤 되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5분쯤 후에 박완서 선생님을 모시고 교수님들께서 도착하셨다. 청중들은 큰 박수와 함께 부끄럽게 웃음짓는 박완서 선생을 맞았다. 강단으로 올라 마련된 의자에 앉아 강연이 시작되었다.

몸도 편찮으셔서 강연 원고도 따로 마련하지 못하셨다고 했다. 김명인 교수님께서 미리 언질을 주신 것은 강연을 대담형식으로 진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이지만 그래서 더 좋은 자리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평론가이신 김명인 교수님과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대담을 2~300여명의 청중과 함께 듣는다는 것은 나름 행운이지 싶기도 하다. 대담이 시작되었다.

먼저 김명인 교수님께서 박완서 선생의 근황을 소개하면서 며칠 간 몸살을 앓으셨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와주신 선생께 청중들은 다시 한 번 큰 박수로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김명인 교수는 이상하게도 박완서 선생은 "대작가, 대문호란 수식어와 어울리지 않는" 작가라면서 "요즘은 국민여동생이니, 국민배우하는데, 박완서 선생은 국민어머니 혹은 국민할머니 같다. 또한 국민작가라는 표현이 매우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하여 청중들의 호응을 받았다. 40세에 『나목(裸木)』(1970)으로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최근 『친절한 복희씨』에 이르기까지 37년간의 "영원한 현역"으로서의 활발한 작품활동의 힘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를 첫번째로 물었다.

박완서 선생은 체력과 정신력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을 그 첫째로 꼽았다. 그러면서 자신은 76의 나이지만 "500년, 1000년을 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단다. 1931년생으로 "이조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골에서 태어나" 일제시대, 해방, 전쟁, 군사독재, 경제성장 등 격동하는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그 "스쳐간 문화의 깊이"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한 박완서 선생은 슬그머니 어린 시절의 어머니, 할머니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조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시골마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선생은, 그 당시 본인의 고향을 "자급자족하던 마을"로 기억한다. 어찌나 세상물정에 어두웠던지, 할아버지가 사오신 물감이 덕국(德國) 물감이라고 했는데, 그 덕국이라는 것이 독일임을 아주 나중에야 아셨다면서 "다른 나라가 있다는 걸" 몰랐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런 선생에게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셨다.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많이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어머니는 언문도 깨치고 한문에도 밝았다. 어머니가 시집 올 때 필사본의 이야기책 한 궤짝을 가져 왔다면서 "무궁무진한 이야기꾼"으로 어머니를 기억한다. 항상 말씀 하실때도 이러저런 이야기를 비유삼아 하셨다. 그런 선생은 한 시구절을 빌려와 "나를 키운 건 8할이 이야기"이고 그건 모두 '엄마의 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박완서 선생이 지금까지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는 그 근원에는 이런 "무궁무진한 이야기꾼"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는 답변이었다.

이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활발한 독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은 전쟁터에 나갈 군인에게는 부족함없는 총알이 마련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찾아보기 귀한 시절, 어린 나이의 선생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한 독서의 경험이였다고 할 수 있다. 뒤에 한 청중이 박완서 선생 작품 속의 아름답고 다양한 우리말 어휘를 칭찬하며 그러한 어휘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물었는데, 박완서 선생은 다시한번 이 시절의 경험으로 그 답변을 대신했다.

박완서 선생은 여러층의 문학세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하면서 이전의 전쟁, 7~80년대의 경제성장과 군사독재, 여성 문제 등 다양한 층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데, 근작 『친절한 복희씨』에서는 또 이와는 다른 박완서 문학 세계를 보여준다고 김명인 교수는 말했다. 말하자면 "'노년의 눈(시선)'으로 사회와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완서 선생은 "어쩌다 보니 노인 이야기가 많았"단다. 장편 『그 남자네 집』이나 『아주 오래된 농담』등에서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썼지않느냐며 반문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욕심이 연애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 본인은 아직도 "연애감정이나 정서를 잘 알고 있다"면서. 그런데 문제는 "연애의 소도구"랄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요즘의 젊은이들은 사랑을 어떻게 해야할지 추측"을 할 수 없다면서, 그렇기때문에 연애소설을 못 쓰고 있다고 아쉬워한다.

손녀를 만나러 서울 도심에 올라왔을 때의 재미난 이야기를 아울러 덧붙인다. 길을 지나다 어느 "젊은 꽃미남이 아는 척"을 하며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선생은 "이게 웬 떡이냐"하며 좋아하셨단다. 그런데 웬걸 그 꽃미남을 사인을 받으며 "우리 엄마가 팬이에요"해서 씁쓸하셨다는 농담에 청중들은 자지러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알고 싶어하고 끊임없이 젊음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것이 박완서 선생이 여전히 활발한 작품을 생산해 내는 원동력은 아닐까? 노년이 되면서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선생은 그것은 "많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란다. 노년에서의 그런 자유의 느낌을 이번 근작 『친절한 복희씨』에 담아 놓은 것이 아닐까?

이 외에도 얼마간 대담이 오고 갔는데, 박완서 선생은 목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히 조목조목 길게 답해주셔서 몇가지 질문에도 금방 1시간 반이 지나가버렸다. 연신 준비된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다 흐뭇해졌다. 예정된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청중들의 반응이 뜨거워 몇 사람의 질문을 받기로 했다.

첫 질문은 아마도 내가 기억하기로, 박완서 선생의 작품 특징이랄 수 있는 과거 경험의 서술이 오늘날의 어린 학생들에게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렸지 않느냐, 이런 것을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라는 요지의 질문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질문을 선생은 많이 받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선생은 지난날의 아픈 추억을 언급하면서 "아무도 없는 전쟁의 도시 서울에서의 고초"는 "나만 본 것"이었고 이것을 "글로 쓰고 싶"고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언젠가 글로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이런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내가 경험한 것으로 안온한 세상에 도움과 자극을 주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끝에도 그런 언급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옮겨 본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 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 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 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박완서 선생은 종교와 문학의 한가지 공통점으로 바람직한 것들을 세상에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한다는 의미의 말씀을 했다. 일제시대 말기 쌀을 감쳐둔 것을 찾아내려고 온 순사를 위안부에 끌고 갈 처녀들을 잡으러 온 것으로 알고 딸을 숨겨두었다가, 쌀을 어디 숨겨두었는지 검사하는 쇠꼬챙이에 숨겨둔 딸이 찔려 죽는 모습들을 시골의 고향마을에서 어린 시절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선생은 자신이 글을 쓸 것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의 참상과 참척의 고통을 겪으면서 선생은 아마도 이런 것들을 공감하지 못하는 세상에 전해서 다시는 이런 아픔과 고통이 이 땅에 없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닐까? 선생의 따뜻한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씀이지는 모르지만 본인은 아직 "젊은 감수성은 잃지" 않았다면서 "위험한 것은 진부해지는 감수성"이고, 선생은 그런 "감수성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을 당당하게 하셨다. "위험한 것은 진부해지는 감수성"이란 말씀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그 말씀이 가슴 깊이 울린다.

박완서 선생의 작품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평론가(김윤식 교수)가 병을 뒤집어 물이 흐르듯이 읽힌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쉽게 읽히니 쉽게 쓴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에피소드 하나, 어떤 기자가 원고지 10매 정도의 분량의 글을 써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래저래 바빠서 거절했단다. 그런데 이 기자의 대구가 가관이다. 선생은 글을 쉽게 쓰니 그 정도야 몇 시간이면 쓰지 않느냐고 말이다. 선생은 "어디 이런 싸가지 없는 기자가 있나" 하고 생각했다면서 또 한 번 청중에게 웃음을 주었다. 지난 시절의 아픔과 참척의 고통을 글을 옮기면서 어찌 쉽게 그것을 쓸 수 있었겠는가? 선생은 글을 쓰면서 글자 한 자에 때문에 막혀서 진도를 나가지 못한 적도 많다면서, 본인도 힘들게 글을 쓰는 작가라고 말해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 외에도 여러 질문이 오가며 대략 2시간 가량의 강연이 모두 끝났다. 선생은 다소곳이 앉아 진솔하고 솔직하게 모든 질문에 답변을 해주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김명인 교수는 선생이 청중들의 할머니, 자신에게는 어머니 뻘이신데,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까지 친절히 강연에 임해주신데 대해 깊은 감사를 전했다. 모든 청중들도 그 이상을 고마움을 전했다.

강연을 마치고 청중들의 큰 박수 속에 선생은 자리를 나왔다. 2시간 가량 한 자리에 앉아서 많은 말씀을 전하신 분이 76의 고령이시라는 데 다시한 번 놀랐다. 8시가 넘어 끝난 강연 후 선생은 화장실에 잠시 들렀다. 그 앞에 학생 두 명이 대기하서 섰다가 선생이 나오시는 걸 보고 다짜고짜 사인을 요청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사인을 받고 싶어 했지만, 2시간을 강연하신 선생께 감히 그 피곤함을 끼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학생들의 사인 요청을 받아주셨다. 이를 어쩌랴, 주위에 감히 요청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나는 급하게 책상을 들고 뛸 수 밖에 없었다. 3~40명 가량이 모여들어 갑작스럽게 팬 사인회가 열렸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히 사인을 해 주신 선생께 나도 끄트막에 사인을 받았다. 사인을 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 사인하시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은 노년의 나이를 속이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곱게 늙은 손을 가지고 있을까 무척 궁금해졌다. 한 청중이 이런 말을 했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눈가의 주름을 닮을 수 있을까요"라고. 나도 어떻게 하면 선생의 그 곱게 늙으신 소녀같은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 무척 궁금해지는 지금이다. 아마도 선생의 작품 속에 그 비밀이 숨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많이 남기지 못해 무척 아쉽다. 학생들이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구하는 대로 이 페이퍼에 올려야겠다. 강연이 끝나고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너무 좋았고 감동을 받았단다. 다음날 김명인 교수님께 선생께서도 "너무 행복했다"고 말씀을 전하셨단다. 박완서 선생님, 행복하셨다구요? 이 말씀을 전해듣고 나는 더 많이 행복해졌다. 정말 잊지 못할 선생과의 만남이었고, 다시 한 번 선생께 깊이 고마움을 전한다. 단언하건대, 앞으로 나는 선생의 "꽃미남 팬"이 될 것이라고 굳게 약속한다. "박완서 선생님, 더 행복하시죠?"

* 이전에 선생의 많은 작품을 이상하게도 읽은 것이 별로 없다. 그마나 읽은 것이라고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여자네 집」이 고작이었다. 오신다고 해서 집에 사 두었던 <20세기 한국소설>의 『박완서』에 실린 몇 작품과 근간 『친절한 복희씨』를 부랴부랴 읽었다. 읽으면서도 술술 읽히는 것이 왜 아직까지 선생의 작품을 이렇게 안 읽었을까 의아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은 것은 느낌표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군생활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겠다. 앞으로 선생의 작품을 최대한 읽어볼 작정이다.

* 어느 서재지기께서 몇 가지 질문을 해달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내 입장이 선생께 질문을 드릴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질문하고 싶은 것은 무척 많았는데, 다짜고짜 해볼 것 하는 아쉬움은 조금 있다. 질문 주신 그 분께도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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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1-15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한 자리에 있는 것 같은 후기에 감동 ^^ 저도 나목부터 이분의 팬이었는데, 호미부터 읽기를 쉬었답니다. 멜기님의 글을 보고 다시 친절한 복희씨부터 봐야겠어요.
확인해보니 집에 있는 이분의 책이 12권있네요. 열심히 사들였는데, 사람들이 와서 하나씩 집어가기 딱 좋은 작가라 손이 많이 탔어요. ㅠㅠ
박완서님의 사진과 긴 후기를 올려주신 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멜기세덱 2007-11-15 21:43   좋아요 0 | URL
ㅎㅎ 많이도 가지고 계시네요. 저도 열심히 사서 읽으려구요.ㅎㅎ

순오기 2007-12-13 10:45   좋아요 0 | URL
우리 언니의 생일선물로 보내려고요. 다시 읽어봐도 감동적인 후기예요!

2007-12-14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11-15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부하지 않은 감수성, 힘들게 쓰지만 쉽게 읽히는 글, 벌레의 시간을 증언해야
벌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깁니다. 언니(^^)의 미소가 아름답네요.
저도 친절한 복희씨, 읽어봐야겠어요. 자세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세덱님^^

멜기세덱 2007-11-15 21:45   좋아요 0 | URL
ㅎㅎ 언니....ㅋㅋ
완서 누님이 완소긴 하지만, 혜경님이 언니라 그러면....욕먹어요...ㅋㅋ

2007-11-1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6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1412년  오늘(조선 태종 12년) 사헌부의 요청에 의해 부녀들의 외출시 얼굴 가리도록 조처한다.

1487년  오늘은 압구정의 주인공 한명회(1415-)가 세상 떠난 날이다.(조선 성종 18)

1831년  오늘, 독일에서는 철학자 헤겔 세상을 떠났다. 독일관념론의 완성자로 正, 反, 合의 3단계 변증법 창시자다. 그의 대표저서로는 『정신현상학』, 『논리학』, 『법철학 개요』등이 있다.

1840년 11월 14일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 태어난 날이다. 모네는 개인전에서 <수련이 있는 못>을 발표했을 때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그냥 팔레트를 문질러 아무렇게나 발라버린 그림"이란 혹평을 받았지만 그 당시 열린 만국박람회 전시회에서 비로소 인정받게 되었다. 모네는 자기 식의 정원과 수련이 있는 연못을 직접 꾸미고 그곳에서 40여년을 작업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인상-해돋이>는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들을 인상파로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의 색은 태양의 광선에 따라 수시로 바뀌므로 대상물 자체의 고유색은 없다고 주장, 새로운 색채 감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1915년 11월 14일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표한다.

1917년 오늘은 불운하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났다.

1921년 11월 14일에는 국내 최초로 영화 <월하의 맹서> 제작에 들어간다.

1922년 오늘, 양정고보생들은 일본인교사를 배척하여 이른바 맹휴(盟休)에 들어간다.

1953년 오늘, 한국화가 오숙환이 태어난다. 후에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 미술학부 한국화전공 교수가 된다.

1968년 오늘,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체코의 자유화운동이 소련의 탱크에 무참히 짓밟히고 80여일이 지나 소련군이 체코를 점령한 가운데 체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열린다. 자유화 운동을 지도했던 두브체크 공산당 서기장등 개혁파들이 친소보수파 당원들에게 호된 비판을 받았다. 두브체크는 이후 공산당 서기장직에서 해임되고 공산당에서 제명된다. 21년 뒤인 1989년 12월 체코의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연방의회의장으로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1969년 오늘 불국사 중창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우주선 아폴로 12호가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됐다. 4개월여전 발산된 아폴로 11호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번째로 발사된 유인 달 탐사선 아폴로 12호는 달에 착륙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카메라의 고장으로 아폴로 11호 때와 같은 달 착륙 모습을 지구로 전송하지는 못했다. 아폴로 12호는 달의 운석들을 채취하는 등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발사 열흘뒤인 11월 24일 지구로 무사히 귀환했다.

1972년 11월 14일에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유명한 소설가 주요섭이 세상을 떠난다.

1973년 오늘 호남-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됐다. 전주에서 순천에 이르는 호남고속도로와 순천에서 부산까지의 남해고속도로는 총길이 358킬로미터로, 광주와 부산의 운행시간을 7시간에서 3시간 반으로 단축시켰다. 두 고속도로는 호남과 영남지역의 경제와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1979년 11월 14일은 다행스럽게도, 멜기세덱이 태어났다.

1980년 오늘, 한국신문협회와 방송협회는 언론통폐합 및 새로운 통신사 설립을 결의한다. 지방지는 1도 1사, 합동통신과 동양통신 통합, 중앙지의 지방주재기자 철수 등,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물리적 강제력으로 언론매체를 폐지 또는 통합한 조치로 언론통폐합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아일보를 경향신문에, 서울경제는 한국일보에, 지방지는 1도1지 원칙하에 흡수 통합하고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은 합병, 연합통신으로 발족하며, 동아방송과 동양방송은 KBS에 통합한다는 것 등이다. 또한 지방주재 특파원 제도를 폐지하여 신문이 발행되는 지역 밖의 뉴스는 정부지배하의 통신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제도화하는 한편 KBS와 KBS가 주식의 70%를 소유한 준관영 MBC로 2원화함으로써 방송매체를 완전히 장악했다.

1983년 11월 14일에는 아이슬란드 시인 토마스 그뷔드뮌드손 세상 떠난다.

1984년 오늘 동작대교가 개통됐다. 14번째 한강교로 길이는 1,330m에 달한다.

1987년 오늘,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제13대 대통령 선거일을 12월 16일로 결정했다. 6월항쟁의 결과로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치러지게될 제13대 대통령 선거로 전두환 대통령은 이틀 뒤인 11월 16일 선거일을 공고했다. 민정당 노태우후보, 민주당 김영삼후보, 평민당의 김대중후보, 공화당의 김종필후보등 4당후보들은 대통령 선거일 공고직후 후보등록을 했다. 1971년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이래 16년만에 다시 치러지게 된 대통령 직선제 선거는 네후보의 4파전으로 압축됐다. 대권주자들은 대통령 후보 등록을 마치고 30일동안의 격전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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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4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희 팀장님이랑 생일이 같으시네요 ^^ 생일 축하드려요 멜기세덱님! 시간이 지나고 지날수록, 1979년 오늘의 일을 더욱 '다행하고 감사한 일'로 만들어나가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멜기세덱 2007-11-14 23:46   좋아요 0 | URL
뜻밖에도, 박정희와 생일이 같아서....기분 쪼매 나빠요...ㅋㅋ

마늘빵 2007-11-14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이군요! 축하해욤.

멜기세덱 2007-11-14 23:4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삭스 형님...ㅋㅋ

마늘빵 2007-11-15 09:28   좋아요 0 | URL
아아아니. 제가 왜 형님입니까아. 동갑인데에에. 나이 먹는거 싫어요.

멜기세덱 2007-11-15 15:52   좋아요 0 | URL
저보다 생일이 빠르시지 않겠어요? ㅋㅋㅋ
그러니 정확히 하면 형님이시죠...ㅋㅋ

2007-11-14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1-14 23:48   좋아요 0 | URL
ㅎㅎ 생일날 선물 못받은 궁상을 눈치채셨군요.... 전 대놓고 고르겠습니다.ㅋㅋㅋ

2007-11-15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7-11-15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날짜가 지났지만 생일이셨군요. 축하~~~~
내가 인천에서 만나면 좋을 분 1순위입니다!
이 정도 멘트면 생일축하로 괜찮을까요? ㅎㅎ

멜기세덱 2007-11-15 21:45   좋아요 0 | URL
이러면, 제가 인천을 뜰 수가 없잖아요....ㅋㅋㅋ
딴데 살면 막 100순위 처지는거 아니에요? ㅋㅋㅋ

프레이야 2007-11-15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다행스럽게도!!
세덱님, 어제였지만 생일 축하 많이 드려요^^
어여 보관함에 담아두신 책이나 음반 골라서 메모 남겨 주시어요~~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세요^^)

2007-11-15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1-15 21:46   좋아요 0 | URL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 맞춰 보세요....ㅎㅎㅎ

2007-11-15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1-15 21:46   좋아요 0 | URL
원수를 너무 심하게 갚으신거 아닌지 몰라요...ㅎㅎ
 

최근 김포외고 입시 문제 유출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학교 선생이란 작자가 학원 원장한테 문제를 넘긴 것이 발단이 된 이 사건이, 오늘 뉴스를 보니 어느 학부모한테도 다량의 시험문제를 유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이 문제의 교사란 작자는 벌써 어디론가 튀어버렸다니, 그 발빠름 하나는 배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목고는 무슨 개뿔, 그 특수목적이라는 것이 오로지 대학이니, 시험문제 빼내는 것이 문제일리 없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욕을 좀 제대로 드시면 좋겠다.

김포외고 입시 문제 유출 사건으로 경기도 교육청이 궁지에 몰린 듯 한데, 예전에도 문제 유출은 아니지만 교육청이 크게 혼줄난 일이 있었다. 지금 들으면 재미있는 일화지만 당시에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문제가 된 것은 중학교 입시에서였다. 1964년 12월 7일 실시된 서울지역 전기 중학입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당시에도 교육열은 펄펄 끊었다. 얼마나 끓었으면 중학교까지도 시험봐서 들어가겠는가.

당시 전기 중학입시의 공동출제된 선다형 문항 가운데 다음 문제가 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1. 찹쌀 1kg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2. 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3. 이 밥에 물 3L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위 3.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 1964년 12월 7일 서울지역 전기 중학교 입시 자연과목 18번 문제

 
   

이 문제의 답으로는 ①디아스타제였다. 그런데 보기 ②에 무즙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당시 민간에서는 무즙을 넣어서 엿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즙을 답으로 써서 떨어진 학생의 학부모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실제로 무즙을 넣어 엿을 만들어 관련 기관에 찾아가 항의하면서 "엿 먹어! 이게 무로 쑨 엿이야. 빨리 나와 엿먹어라! 엿먹어라! 엿먹어라!" 했단다. 이른바 무즙 파동이다.

이 무즙파동이 파동이 된 데에는 당시 해당 교육당국의 우왕좌왕한 대처에 원인이 있었다. 무즙을 답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가 반발이 거세자 하루만에 이 문제를 무효로 한다고 발표했다. 그랬더니 원래 이 문제를 맞춘 학생들의 부모들이 더욱 거세게 반발하자, 다시 이를 무효화 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좌충우돌했으니 파동이 날 수 밖에. 결국 이 문제는 법정으로까지 가게 된다. 서울고등법원 특별부는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 하며, 이 문제로 인해 불합격된 39명의 학생들을 구제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막을 내렸다. 또한 이로인해 청와대 비서실장, 문교부 장관과 차관, 서울시 교육감 등 줄줄이 8명이 옷을 벗게 된다.

다들 잘 아는 이야기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엿먹어라'라는 욕이 유래했다는 속설이 있다.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것 같은 것이, 오늘날 '엿먹어라'는 비교적 유효적절히 욕으로써 기능하고 있는데에 이 파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기실 '엿먹어라'의 유래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후기 남사당 패들의 은어로 '엿'은 여성의 성기를 가리켰다. 그로부터 '엿먹어라'라는 욕이 시작됐을 것이다. 이것이 보다 근거가 있었보이는데, 무엇보다 '엿먹어라'의 지위가 오늘날과 같이 확립된 데에는 이 무즙파동이 적잖이 기여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무즙파동에 이어 이듬해 창칼파동이 일어나 중학교 입시가 철폐되기에 이른다. 이 두 파동은 당시의 과열된 입시양상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흔히 거론되는데,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과는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즙파동과 '엿먹어라'의 유래가 하나의 오분석이랄 수도 있지만, 무즙파동하면 '엿먹어라'를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이 파동의 피해당사자들은 이 '엿먹어라'에 혼신의 혈기를 담어 당시 교육당국에 내뱉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왕좌왕하는 교육당국으로 인해 울었다가 웃을 수 밖에 없는 이들에게 '엿먹어라'는 욕이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정확히 전달하는 기조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페이퍼의 제목을 거창하게도 '욕의 정치학'이라고 붙였지만, 나는 그 거창한 담론을 소화할 능력이 전무하다. 다만 가만히 우리들의 욕들을 살펴보면 소시민들의 정치성을 다소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택시 기사가 손님을 태우고 "이런 노무현 어쩌구"하는 것에서부터 공사판 막노동자들의 세상한탄들에 욕설은 친근하게 올라온다. 이 썩을 놈의 세상에 대한 어쩌면 소극적 반항이랄 수 있는 이러한 욕설은 하나의 정치적 발언은 아닐까?

무즙파동이 '엿먹어라'의 기원이 되지는 않을지언정, '엿먹어라'가 사용되는 맥락하에서는 지극히 정치적일 수 있다고도 보여진다. 이 엿같은 세상에 대고 '엿먹어라'를 외치는 이 민중들은 그 욕설 가득히,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하지만, 자신이 정치적 존재임을 실어내고 있는 것이다.

욕을 보면 그 세상의 모든 부조리들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욕을 하면 교양없는 사람, 못 배운 놈, 저질로 폄하하는 세상만큼 엿 같은 세상도 없을 것이다. 욕은 우리에게 간혹 구수한 맛과 재미를 주기도 하지 않는가. 우리가 가진 모든 정치성을 가득히 실어 세상에 대고 욕이라도 시원히 해낸다면, 그런 욕에 우리 사회가 작게나마 귀 기울인다면, 민중들의 욕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살핀다면, 이 사회는 조금이나마 살만한 세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욕의 정치학은 그런 의미에서 차근차근 따져보아도 좋지 싶다. 하여간에 우리 사회의 수많은 부조리들에 대고 욕이라도 시원스레 배설해 내자. 우선 김포외고 파동 책임자들에게 '엿먹어라'를 날려주고 싶다.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엿먹어'야할 놈들에게도 한 방 제대로 날려들 주자. 욕의 정치학은 그나마 우릴 시원하게 해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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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14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헝. 저 사건이 진실이에요? 저런 재밌는(?) 일이.

멜기세덱 2007-11-14 23:44   좋아요 0 | URL
진짜에요....ㅋㅋ

가시장미 2007-11-1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도 욕 잘하는데....으흐 -_-; 근데, 제가 하는 욕은 정치적의미가 아니라는게...아쉽네요. ㅋㅋ 남에게 상처주는 욕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 자제하려고 굳게 다짐했는데.. 이 페이퍼보니... 음.... 조금 다른 생각도 하게되네요.
<- 줏대없는 가시장미 _-_)~ <- 이 이모티콘 이제 좀 식상한데... ㅋㅋ

멜기세덱 2007-11-14 23:45   좋아요 0 | URL
줏대가 좀 없으면 떠 어떻습니까. 가시만 도도히 달고 사셔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바람돌이 2007-11-15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엿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엿 맛있는데 말예요.
보통 욕에서 "개"자가 많이 쓰이잖아요. 개가 불쌍해요. 개가 도대체 뭘 어쨌다고 말입니까? 개보다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