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뢰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뢰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요한복음 21장 15~18절

 
   

어느날 그녀가 내게 물었다. "오빠, 나 사랑해?" 나는 "어." 또 그녀가 물었다. "어, 그래." 또 물었다. "그럼." 그녀가 울었다. "왜 울어." "그냥 눈물나." 그리고 볼 수 없었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가 있었더랬다. 사랑하냐고 묻더니 삐쳐버렸다. 남자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바보 같은 놈.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나?

자꾸 묻지 좀 말아라. 그깟 사랑이 대수냐? 아니 대수다. 그래서 말 못 했다. 미안하다. 그렇다고 가 버리냐? 아니 가야 했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았었나 보다. 생각나냐고? 왜 생각이 안 나겠냐? 그냥 눈물 한 번 흘리고, 또 묻고, 두 번 흘리고, 또 묻고, 세 번 흘리면, 그땐 뭐든지 간에 대답해 줄 수 있었을 것을.

너는 몰랐다. 나도 몰랐다. 바보 같은 것들. 너는 알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지도 아직 모른다.

네가 예수님도 아니고 세 번을 묻고 울더니, 마냐? 세 번에 세 번을 묻고, 그것에 세 번을 더 물었으면 어땠을까? 사랑은 나비처럼 3자를 그리며 날아가 버렸다. 또 어느 남자에겐가 이 밤에는 사랑을 묻겠지. 아마 그 놈은 똑똑해서 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것.

난 아직 사랑을 모른다. 그러니 내게 사랑하냐고 묻지 말아라. 그러나. 문제는 묻는 사람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 시원할 것 같으냐면, 물을 걸 물어라. 아 내가 먹이고 칠 양은 어디에 있는거지. 나도 언젠가 이 팔을 벌리고 어데 먼 곳으로 사라지겠지. 그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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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1-17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반전에 마음이 아프군요. 빨리 양을 찾으시길... ^^

멜기세덱 2008-01-17 23:05   좋아요 0 | URL
양들의 침묵입니다...ㅋㅋ

순오기 2008-01-17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제목이 바뀌어야 할 듯... '제발, 제게 사랑하냐고 물어주세요!'로

멜기세덱 2008-01-17 23:06   좋아요 0 | URL
아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워" ㅋㅋㅋ

무스탕 2008-01-1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리있지 않을겁니다. 날 풀려서 바깥으로 다 나가기전에 우리안에 있을때 잘 돌아보세요 ^^

멜기세덱 2008-01-17 23:07   좋아요 0 | URL
이런 노래가 불현듯....
"먼 곳에 있지 않아요. 내 곁에 가까이 있어요. 하지만 찾을 순 없네요. 그대 마음 아주 먼 곳에"

2008-01-17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8-01-18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의 글은 이해가 가는데, 위의 성경 구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사옵니다.=_=
특히 마지막 대사요. '띠 띠우고' 무슨 뜻입니까? (긁적)

그런데 말이죠.
주님은 외로운가 봅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까...(웃음)

멜기세덱 2008-01-18 11:41   좋아요 0 | URL
마지막 구절은, 베드로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띠라는 건 말하자면 허리띠 같은 것이겠죠. 스스로 옷을 정갈히 차려입고 맘대로 다녔지만, 나중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가서 팔을 벌리어 죽게된다(십자가에 달린다) 뭐 그런 의미입니다.ㅎㅎ

참고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는 얘기도 있죠.

저도 외롭습니다.

비로그인 2008-01-18 14:4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주님은 시몬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나요?
양을 먹이고 치면(기르면?) 안 죽는건가요? 우웅..정말 어렵습니다.=_=
지구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다는 성경은 왜 저렇게 어려운 글자로 있지요?
지구인들은 다 이해를 할 수가 있는건가요? (긁적)

나는 동화같이 쉬운 것이 좋아요. 하지만 성경서점은 주말에 열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지구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먹을 수가 없어요.

프레이야 2008-01-18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물어드리면 안 되겠죠? ㅎㅎ
물면 아플거에요.호호~
세덱 님, 반전에서 저 쓰러져요^^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계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16장 13~20절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내 친구들은 나를 '누구'라고 여길까? 내 부모, 형제, 친척들은 내가 '누구'이길 바랄까? 혹여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나 궁금해 할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묻는데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나'일까? 아니면 나는 내 '이름'일까? 어쩌면 나는 '야'일까? 그렇다면 나는 '멜기세덱'일까? 멜기세덱은 이미 저 먼 구약 시대의 인물. 나는 '이 새끼'일지도 모르고, '저기요'일지도 모른다. 때론 '안 조교'이기도 한 걸까?

모두들 나를 제외하고는 나를 '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아니다. 나는 어디에고 내 '이름'으로 표시되지만 그 표시는 또한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아니다. 자꾸들 건방진 것들이 나를 '야'하고 부르지만, 그 건방진 것들에게 '왜'라고 대꾸하고 짜증을 확 부리는 걸 보면 그 '야'도 나는 아닌 것 같다. 사이버 세상에서는 '멜기님, 세댁님, 멜기세덱님, 간혹 새댁님, 이님, 저님'하지만 난 누구에게도 '님'이 되어본 적이 없다.

나는 어느 누구의 '새끼'였고, 적어도 단 한 사람에게는 귀한 '새끼'이기도 하니, 잘 하면 나는 정말 '새끼'인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누구냐 하면, '저기요'하고 부르길래 '어디요' 했더니 대꾸가 없어서 아직은 어디에도 내가 '누구'로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책 속에 나는 무수히 많다. 그게 다 나이면서도 책을 덮으면 나는 아니다. 누군가 나를 진정으로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은 어느 것도 '나' 아닌 것이 없지만,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미칠 것 같은 세상은 자꾸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내가 아니어서 나는 자꾸 사라지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나는 예전부터 생각했다. 그 사라지는 것이 '나'라면 그 '나'는 무엇이고 누구이기에, 그 어디에서의 실체이기에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 아무 것도 사라지는 것은 없는 것일까?

예수님, 내게 당신 이 누구인가를 물으시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가르쳐나 주세요. 정말,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일까? 그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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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1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엠 후 아이 엠 (죄송합니다 =====3333333)

멜기세덱 2008-01-17 02:14   좋아요 0 | URL
죄송할 짓을 왜 하삼33333 ㅋㅋㅋㅋㅋ

순오기 2008-01-16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이 누군지는 이번에 인천 가서 만나고 나면 답할 수 있을지도~~ ^^

멜기세덱 2008-01-17 02:16   좋아요 0 | URL
ㅎㅎ 인천오신다고요?(아 나 막 긴장....ㅋㅋㅋ)

2008-01-16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7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7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01-17 02:18   좋아요 0 | URL
앗 미안 죄송 쏘리.....ㅠㅠ;;
아주 잘 받았는데, 깜빡하고 인사도 못 드렸어요...ㅎㅎ
님도 새해 복 터지삼....ㅋㅋ
 

어제(그러니까 14일) 눈길주기를 써놓고 나니 알라딘 배너창이 나를 심하게 유혹한다. 아 글쎄 박노자의 신간이 나왔단다. 이름하여 "만감일기". 그리하야, 어제는 유난히 많았지만, 오늘은 딱 하나, 이 책만 눈길준다.

 [인문/칼럼]
 박노자, 『박노자의 만감일기』, 인물과사상사, 2008.

 부제가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이다. 나는 전에 박노자를 두고 경계인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 경계에서 그 경계를 구획짓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경계를 이젠 뛰어넘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도무지 들어먹지 않는 마당에, 제목도 걸죽히 한국틱한 '만감'이다. 박노자의 그 교차하는 '만감'이 무엇인지 함께 엿보는 것은 우리에겐 즐거움, 혹은 행복이다.

알라딘 상품 소개 페이지에 있는 출판사 책 소개와 목차를 옮겨온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박노자의 새로운 얼굴
사적 번뇌의 벽을 넘어 더 넓은 소통의 세계를 꿈꾼다


‘노르웨이의 한국인’ ‘우리 시대의 반항아’ 박노자는 궁금하다. 대체 어째서 인터넷의 악플들은 사라지지 않는 건지, 한국에서 유난히 ‘거절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뭔지,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에 표를 몰아주고, 경제만 살리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지……. 그런 궁금증을 박노자는 ‘번뇌’라고 부른다. 그간 인터넷 블로그에 쓴 그의 일기들은 이러한 ‘번뇌’의 흔적이며,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바로 그 흔적을 모은, 최초의 사적 기록이다.

<박노자의 만감일기>에는 개인과 가정,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적인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궁금증과 생각이 담겨 있다. 그간 너무 민감해서 혹은 너무 개인적이라서 신문, 학술지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단상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걱정, 민족주의와 국가, 폭력과 사회변혁에 대한 염려까지, 다양한 소재와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고민들은, 때로는 학자적 통찰을 담아, 때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입장에서 진술된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누군가의 일기를 들춰볼 때 느껴지는 은근한 즐거움과 함께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넓은 관심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목차

일기를 쓰는 의미에 대하여: 번뇌가 깊어지면 ‘꽃’이 핀다

1부 나를 넘어

조국애란 무엇인가 | 타향살이, 불안의 일상화 | 거절의 미학 | 부처님 오신 날 | 절망을 느끼는 순간 | 너무 쉽게 망각된 그들, 고려대 출교자 | 자리가 사람을 명예롭게 만든다? | 학문의 의미, 미국의 아시아 학회에서 돌아와서 |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 근대적 ‘민중’에 대한 생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 그리고 군인과 아이 | 노르웨이 직장의 송년회 | 성욕과 종교에 대한 짧은 생각 | 등수 없는 학교의 추억 | “코리안 호스티스가 필요하세요?” | ‘친절’이라는 국제자본주의체제의 코드 | 불만과 불안의 수위,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 | 우리들의 중독(들) | 마광수 교수의 연구실을 보고 | 인권, 아직 오지 않은 ‘근대’ |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인가 | 권위주의 사회엔 권위가 없다 | <효자동 이발사>와 지배?복종의 심리 | 군 폭력 관련 보도를 보고

2부 우리를 넘어

한국 유학생들의 핸디캡 | ‘테러리스트’는 욕인가? | <겨울연가> 열풍, 그렇게 자랑스럽기만 한가? | ‘악플’의 문화 | 한국 자본주의 미래 비관 | KTX 여승무원의 단식을 보며 | 여행잡감, 영어를 못(안)하는 유럽 | 포섭, 감옥보다 더 무서운…… | 유사 성행위와 유사 신앙행위 | 한국의 자유주의, ‘말의 잔치’ | 보수가 표를 얻는 비결? | 전교조 죽이기, 골프 버금가는 한국 지배계급의 취미 | 아니, ‘백인’이 뭐가 좋다고 이러는가? | 대학 신문을 보다 눈물 흘리다 |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한다 | 내가 현실정치를 평생 못할 이유 | NL파 세력이 유지되는 이유 | 한국사 교과서를 쓰면서 역사 속의 선악을 생각하다 | 숫자놀이의 무의미함에 대해서 | 내가 방효유 선생을 내심 좋아하지 않는 이유 | ‘삼성관’에서 회의를 해본 느낌 | 제 손으로 제 무덤파기, 과잉성 혹은 예방성 폭력 | 강정구 선생 유죄 판결, 혹은 절망의 시간 | 우리가 도대체 그때 노무현에게 왜 기대를 걸었을까? | ‘바람직한 우익’, 한국에서 가능할까?

3부 국가와 민족을 넘어

‘민족주의자’를 포용하는 방법 | 희망과 절망 사이, 북한 학자들과의 ‘만남’ | 사회주의자가 ‘예수쟁이’ 구출에 사활을 걸어야 할 이유 | 국기에 대한 쓴웃음 | 통일, 디스토피아의 그림자 | 한국 사랑? | ‘일심회’ 판결 유감 | 의사 폴러첸의 강의를 갔다 와서 | 귀화인도 ‘한국인’인가? | ‘노무현’에 대한 가장 위험한 착각 | ‘국민’, 해체되지 않는…… | 미국의 주요 일간지가 전하는 북한의 ‘진짜 의도’ | 김일성 대학 기숙사의 국제 사랑 이야기 | 황장엽의 회고록을 읽다가…… | ‘그들’의 ‘민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 북한 인권 문제를 생각한다 | ‘반미’보다 차라리 ‘반미제’ | 역사학자들이 파업을 벌인다면? | 극단주의는 왜 위험한가 | 남이 하면 ‘우경화’, 우리가 하면? | 김영남, 그리고 ‘일본인 납치’ 문제 | 월드컵, 스포츠, 그리고 국가 |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 북한은 과연 ‘깡패 국가’일까? | 불교는 평화의 종교? |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4부 경계를 넘어

러시아의 ‘인간 사냥’ | 악의 일상성에 대한 명상 | ‘고향 방문’의 슬픈 회상 | 노르웨이 국치일 | 발이 빠지기 쉬운 징검다리 | 원칙을 배반한 타협의 결과 | 일본 잡감 | 일본공산당원이 서대문 감옥을 둘러보는 심정? | ‘진짜 사회주의’? 슬랴프니코프와 트로츠키 | 배울 것만 배우자 | 노르웨이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오해 | 사담 후세인과 서구인들의 인종주의 | 러시아에 스킨헤드라는 망종이 생긴 까닭 | ‘주니어 제국주의자’들의 발흥 조짐? | 우리가 영어에 매달리는 이유 | 후쿠오카 단상, 의아한 평화 | 성개방과 보수성의 관계? | 일본공산당을 생각한다 | 트로츠키 아이러니 | 모리타 어민의 죽음 | 다민족 국가 미국의 진일보한 인재등용책 | 미 제국이 몰락해버린다면……? | 언어를 빼앗긴 자의 언어, 프랑스 무슬림 청년들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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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15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노자라서 찜합니다! ^^ 만감이 교차할 심정이 짐작은 됩니다만... 자세히 봐야겠죠!

멜기세덱 2008-01-16 00:28   좋아요 0 | URL
멜기때문이 아니구요? 쪼끔 질투날려그래요...ㅋㅋ
근데,,,언제부턴가, 눈길주기 쓸 때마다 순오기님을 생각하게 되네요...ㅎㅎㅎ 순오기님께서는 이 책을 좋아하실까! 막 이러구....ㅋㅋ
꾸준히 살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이에요...ㅎㅎ

순오기 2008-01-16 14:44   좋아요 0 | URL
ㅎㅎㅎ~ 당연히 순오기를 생각하셔야죠~~ ^^
이 책이랑 안도현시집 벌써 질러버렸어요. 적립금 3만냥 받았으니~~~~ㅋㅋㅋ
1월 26일 우리딸 학교에서 소집해서 인천갑니다. 그때 주안역사에서 만날 수 있으려나~~~? 만나면 책도 사드리고 맛난 것도 사드릴게요.^^

바람돌이 2008-01-15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제 보고 저도 찜해놓았어요. 다음번 주문에...

멜기세덱 2008-01-16 00:29   좋아요 0 | URL
얼런 리뷰써 주세요...ㅎㅎ

2008-01-15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할 일이 없어서는 아니고, 아무튼 새로나온 책들이 뭐 있나, 슬그머니 살펴보는데, 웬걸, 이것저것 관심가는 책들이 많다. 이건 하나의 복이면서도 재앙이다. 오늘은 일단 복스럽게 눈길만 주자.

 [인문]
 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청어람미디어, 2008.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로 '유명한' 일본의 독서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새 책이다. 뭐 유명하긴 한데, 주위 평이 그리 좋게만은 들리지 않아서 이전 다카시의 책을 읽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이번 새 책의 제목이 눈길을 끈다. 제목이 품고 있듯이, 이 책의 전반부에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그동안 읽었던 책 중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들에 관한 이야기, 에피소드를 담고 있단다. 어쨌든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다카시의 이 책은 언제나 관심 도서 목록에 포함될 것이 분명하다.

 [동양고전]
 사마광, 『자치통감 13, 14, 15』, 권중달 역, 도서출판 삼화, 2007.

 지난해 12월에 한꺼번에 13권~15권이 출간 되었다. 2000년 세화출판사에서 출간하였던 것을 다시 고쳐서 펴낸 개정판이란다. 1~12권도 2007년 6월부터 나와 있는 것으로 검색된다. 하여간 대단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15권이 원문 권 135부터 144까지를 번역한 것이라는데, 원문의 전체 분량은 294권에 달한단다. 최종 완간은 한 30권쯤 될라나보다. 아무튼 이런 작업을 눈여겨 보는 나같은 사람이 있으니 끝까지 해주시길 역자에게 부탁드린다. 근데, 맨입으로 부탁드리는 것은 하등 도움이 안되는데 말이야.

 [경제학]
 김수행 외,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지난해 서울대학교의 김수행 교수가 정년퇴임했다는 소식이 간간이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다. 『자본론』을 번역해낸 교수가 그 정년을 채웠다는 사실이 쪼금 놀랍기도 하다. 이 책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정년기념으로 엮은 것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일단 '시장사회주의론'이라는데, 그 구체적 모습은 이 논문집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자본주의가 좀 바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바 이 책에 눈길을 주었는데, 되려 내 눈길을 끄는 것은 김수행 교수가 정년퇴임을 하고 현재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총장으로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시]
 안도현, 『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비, 2008.

 창비시선 283번째는 또다시 안도현이다. 이번 시집이 안도현의 9번째 시집이고, 2004년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이후 4년만의 시집이란다. 창비에서 낸 게 그렇다는 건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안도현 시인을 지난 2006년에 전라북도에서 뵌 적이 있다. 그때 시집에 사인을 여러권 받았는데, 이번 시집 출간 기념으로 『가만히 좋아하는』의 시인 김사인과 함께 북콘서트를 연단다. 나는 거길 또 가볼 생각이다.

 [사회과학]
 신동준, 『인식과 재인식을 넘어서』, 인간사랑, 2008.

 "이 책은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역설하고 있는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의 당부를 검토하기 위해 <아리랑>의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의 실체를 검토한다"고 한다. 인식도, 재인식도, 아리랑의 김산도 아직 준비중에 있는 나로서는 이 책에 다만 눈길을 줄 뿐이다. 민족주의라는 게 사실 참 아리송한 것인데, 이 책을 빌미로 그 인식이건 재인식이건 아리랑이건 간에 뭐라도 좀 읽게 했줬으면 좋겠다.

 [사회과학]
 이갑영, 『자본주의에 유죄를 선고한다』, 박종철출판사, 2007.

 이갑영 교수의 칼럼집니다.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의 그는 말 그대로 "자본주의에 유죄를 선고한"단다. 자본주의가 유죄면, 사형인가? 자칫 집행유예로 금방 풀려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인문/종교]
 알리스터 맥그라이스 외, 『도킨스의 망상』,  전성민 역, 살림, 2008.

 도킨스의 화제작 『만들어진 신』의 원제가 "신이라는 망상" 정도로 번역되는 것으로 안다. 결국 이 책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전면적 비판서인 셈이다. 도킨스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듯이, 그에 대한 반론과 비판이 어떻게 이루어 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도킨스 비판은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저자 소개에 보니, 비슷한 제목의 책이 또 있다. 『도킨스의 신』이란 책인데, 이 책은 두 달 전, 그러니까 지난 11월에 번역되어 출간됐다. 이 책도 함께 눈길을 주도록 한다. 하여간 이 두 권의 책을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비교해 보면서 읽어보려면, 짬이 좀 나야되는데, 오늘은 눈길만 애매하게 주고 말자.

 [인문/종교]
 알리스터 맥그라이스, 『도킨스의 신』, 김태완 역, SFC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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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1-1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첫번째 책 제목이 정말 끝내주네요. 앞의 것보다 피도살도 안되는 100권이 왜 더 궁금할까요? ㅎㅎ

멜기세덱 2008-01-14 17:04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그게 더 궁금해요.ㅎㅎㅎ

순오기 2008-01-1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궁, 오늘은 안도현 빼고는 찜할 책이 없네요. 요즘, 어려운 책 기피증이 심해서요.^^
지난번 찜했던 '호기심'은 구입해서 읽고 어설픈 리뷰도 올렸어요.

멜기세덱 2008-01-14 17:04   좋아요 0 | URL
참 빠르시네요...ㅎㅎㅎ 저도 순오기님께 "땡스투" 누르고 얼런 호기심 사봐야징./...ㅋㅋ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날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눈이 퍼부슬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허-연 북조선(北朝鮮)이 보이느니.

가끔 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래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여다가
치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볼을 때리느니.

칩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南國)에 돌려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립어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둥켜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최는 이방인(異邦人)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北國)은 춥어라, 이 치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짱 깔리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눈이
북새(北塞)으로 가는 이사꾼[移徒] 짐짝 우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김동환, 「눈이 내르느니」)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홀로 밤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女人)의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追憶)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슬픔 그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설야(雪夜)」)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긔롭어라.

옹송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정지용, 「춘설(春雪)」)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이용악, 「그리움」)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하루 낡아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가는 한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斷層) (- 박용래, 「눈」)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박용래, 「겨울밤」)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이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이마에
불현 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김종길, 「성탄제(聖誕祭)」)

겨울의 뒤를 따라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바람은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리어카를 끌고 새벽길을 달리는 행상(行商)들에게나
돌가루 냄새가 코를 찌르는 광산촌의 날품팔이 인부들에게
그리고 오래 굶주릴수록 억세어진 골목의 아이들에게
바람은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일러주었다
바람은 언제나 같은 어조로 일러주었다
처음 우리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반복의 강도 속에서 원한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원한은 되풀이 되풀이 되풀이하게 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여인을 또다시 벌거벗게 하고
저녁거리 없는 자를 또다시 저녁거리 없게 하고
맞아죽은 놈의 자식을 또다시 맞아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없게 하는 것이다
아아 짓밟힌 풀포기 밑에서도 일어나는 바람의 시인이여
어쩌다 우리는 괴로운 무리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나
어쩌도 또다시 칼날 앞에 머리를 내밀고
벌거벗은 여인이 사랑을 말하려고 할 때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사랑이 그들의 머리칼을 장대같이 꼿꼿하게 하고
불더미 속에서도 죽지 않는 영생으로 단련하는 것같이
단단하고 매몰차게 세상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아 바람의 시인이여 이제야 우리는 알겠다
그들의 골수 깊은 원한이 사랑을 가지게 한다는 것을
쇠붙이는 불길 속에서 단련되어진다는 것을
바람은 그것을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말하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겨울의 견고한 사랑을 말하여주고 있는 것이다. (- 최하림, 「겨울의 사랑」)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슴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大雪注意報)」)

겨울강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돌 하나를 던져보다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쩡, 쩡
돌을 튕기며, 쩡,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이, 쩡
봄이 오면 녹아 흐를 것들이, 쩡, 쩡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쩡, 쩡, 쩡, 쩡, 쩡,

겨울 강가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본다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서 제
바닥에 닿을 돌들을.
쩡 쩡 쩡 쩡 쩡 쩡 쩡 (- 박남철, 「겨울강」)

날 새고 눈 그쳐 있다
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 장의 수의(壽衣)에 덮여 있다
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는 걸
일어주는 눈발
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우에 짐 부린다 (- 황지우, 「설경(雪景)」)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없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 마종기, 「겨울 기도 1」)

덮인 하이얀 눈 속에서
더 붉은 사랑.

푸득푸득 꿩이 날아오르는
후미진 산등성이 옆에
더욱 푸르러 뜨거운 몸뚱이

매운 찬바람 속에서도
이제 삶을 죽음이라
죽음을 삶이라 말하며

밟힐수록 힘이 솟는 우리들,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끼리끼리 그림자 만들어
마침내 더불어 큰 산을 이루었네. (- 조태일, 「겨울 보리」)

눈보라는 무섭게 휘몰아치고
끝없는 벌판에
보지 못하던 썰매가 달리어간다.

낯설은 젊은 사내가 썰매를 타고
달리어간다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미칠 것 같은 나의 기쁨은 어디에 있느냐
모든 것은 사나운 선풍(旋風) 밑으로
똑같이 미쳐날뛰는 썰매를 타고 가버리었다. (- S.A. 에세닌,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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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12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소리 들으며 '눈'내리는 시를 감상하는 빛고을 아지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