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犧牲’의 詩的 形象化

 

Ⅰ. 緖論

 

  우리의 詩史에서 ‘희생’은 시적 주제로서 많은 시들을 통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나, 한용운 시인의 여러 시들에서 ‘희생’을 노래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희생’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나아가 전 우주적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자식은 성숙한 인간이 되고, 자연의 그것을 통해 인간들은 풍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사의 많은 일들은 그 ‘희생’을 전제로 이룩된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현실 속에 ‘희생’이 있는 이상, 시적 주제로서 ‘희생’을 노래하는 시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희생’은 각각의 시들에서 다양한 성격의 ‘희생’으로 주제화된다. ‘희생’이 필요한 이유와 원인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며, 그것을 통한 결과와 모습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희생’이 주제화된 두 편의 시를 통해 그 ‘희생’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르게 형상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각각의 시를 분석적으로 독해하면서 ‘희생’의 시적 형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확인하도록 하겠다.


 

Ⅱ. 本論

 

  “詩者持也, 持人情性”(劉勰,『文心雕龍』)이라는 말이 있다. “시에는 사람의 감정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모든 시에는 감정과 정서가 담겨있다. 여기서 살펴볼 두 편의 시에는 ‘희생’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정서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복 시인의 「금빛 거미 앞에서」와 김혜순 시인의 「추수(秋收)」두 편의 작품을 차례로 분석하면서 ‘희생’의 시적 형상화를 대비해 보겠다.

 

1. ‘强要된 犧牲과 아픔’으로의 形象化 ― 이성복의 「금빛 거미 앞에서」

 

        오늘은 노는 날이에요, 어머니

        오랫동안 저는 잠자지 못했어요

        오랫동안 먹지 못했어요 울지 못했어요

        어머니, 저희는 금빛 거미가 쳐놓은

        그물에 갇힌 지 오래 됐어요

        무서워요, 어머니

        금빛 거미가 저희를 향해 다가와요

        어머니, 무서워요

        금빛 거미가 저희를 먹고

        흰 실을 뽑을 거예요

            - 이성복, 「금빛 거미 앞에서」,『남해 금산』, 1986.

 

  제목이 “금빛 거미 앞에서”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금빛 거미”이다. ‘거미’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곤충이다. 독거미의 공포감이나 그 잔인한 살인행위―먹이를 실로 감아 조이고 말려 죽여 먹는 그런 잔인한 행위―를 기억하기에 우리에게 ‘거미’는 매우 부정적 이미지로 고정되었다. “금빛 거미”는 그러한 ‘거미’의 이미지 덕분에 다소 아이러니하다. ‘금빛’이라는 색체 이미지는 정지용의「향수」에서 보이는 “금빛 게으른 울음”에서 보이듯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는 모순형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적화자는 여성이다. ‘이에요’, ‘했어요’ 등의 어투에서 우리는 시적화자가 여성임을, 나아가 어린 나이의 소녀나 처녀 정도일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시적화자의 상황은 매우 처절하다. “잠자지 못했”고 “먹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울지’도 못 했다. 게다가 시적화자는 “갇힌 지 오래 됐”으며 무서움에 떨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다. “노는 날”에는 그저 ‘어머니’를 생각하고 마음으로 하소연할 뿐이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금빛 거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금빛 거미”는 모순 형용이며 반어적 표현이다. ‘금빛’으로 치장된 ‘거미’를 생각해보면 아픔답다기보다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른다. 이것은 ‘거미’의 이미지를 한층 공포스럽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의 두 행에서 이 “금빛 거미”가 시적화자를 먹이로 하여 “흰 실을 뽑을” 것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거미’에게 이 ‘실’은 삶의 필수 수단이다. 집을 짓고 먹이를 구하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빛 거미”는 시적화자의 희생을 강요하여 취하는 것이다. 시적화자의 상황을 고려할 때 시적화자가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쉽사리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는 시적화자를 착취하고 빨아먹는 악덕 자본가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시적화자는 그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 희생의 대가는 과연 무엇일지 알 수 없다. 시적화자는 희생을 강요당하면서도 분노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울지도 못하고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시적화자는 그저 마음속으로 울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다.

 

2. ‘自然의 獻身的 犧牲’으로의 形象化 ― 김혜순의 「추수(秋收)」

 

        다 이루었도다 하면서

        드디어 드러눕는다 너른 들판

        다 싸웠도다 하면서

        드디어 목을 내어 주는 가을 열매

 

        절대로지지 않으리 하면서

        폭양(暴陽)을 안고 뒹글던 것

        절대로 울지 않으리 하면서

        칠흑(漆黑) 같은 폭풍우 밤에

        두 주먹 불끈 쥐고 소리소리 지르던 것

        어느 것 하나 내색하지 않고

        다 이루었도다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지프라기 마른 가지 불쏘시게 잿더미로 스러져

        내려앉은 천만 년 묵은 어머니 품

                        ― 김혜순, 「추수(秋收)」, 1994.

 

  가을은 무엇보다도 결실의 계절이요,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에게 가을은 ‘추수’의 풍경으로 많이 기억된다. 풍요와 축복의 계절인 가을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질문의 해답을 제공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하며 생을 마감한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온 메시아로서 그 구원의 사역을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류를 위한 희생의 결과이며, 그 희생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아가페적 사랑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예수의 말을 인유하며 시작한다. “다 이루었”다는 말의 주체가 여기서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결실과 풍요를 주는 땅이요, 자연인 것이다. 그 자연은 예수와 같은 헌신적인 희생을 우리에게 바쳤기에 예수처럼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처럼 생을 마감한다. 우리에게 “목을 내어 주”고 “폭양(暴陽)을 안고 뒹굴”었으며, “칠흑(漆黑) 같은 폭풍우”를 감내 했던 자연, 곧 이 땅은 이제 “드러눕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이 땅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드러눕는” 것이다.

  자연의 이러한 헌신적 희생은 곧 우리의 ‘어머니’와 동일시된다. 말하자면 자연의 우리 인류의 ‘어미니’인 것이다. 이 땅은 곧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결실을 주고 풍요를 준다. 이 또한 우리의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적화자는 시 전체에서 예수와 자연, 그리고 ‘어머니’를 일치시킨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그 ‘희생’의 의미를 고취시킨다. 그 헌신적이고 무대가적인 ‘희생’은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인가? 그렇기에 이제는 “다 이루었도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화자의 어조는 다소 슬픔과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단순히 자연의 ‘희생’의 가치를 예찬하고 있지만은 않은 것이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여 울며 기도하듯이, 우리가 ‘어머니’의 그 헌신적 사랑을 회상하며 눈물로 통곡하듯이, 시적화자는 다분히 눈물을 머금고 자연과 이 땅의 그 ‘희생’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Ⅲ. 結論

 

  이상에서 살펴본 두 시에서 우리는 ‘희생’이라는 공통된 기류를 포착할 수 있었다. 하나는 강요된 ‘희생’이요, 다른 하나는 헌신적 ‘희생’이다. 결국 이 둘의 ‘희생’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의 ‘희생’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이성복의 시에서는 강요된 ‘희생’이 주는 비참함과 잔인함을 형성하며 그 ‘희생’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인가를 형상화하고 있다. 반면 김혜순의 「추수(秋收)」에서 보이는 헌신적 ‘희생’은 그 가치와 고귀함을 형성하며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깊은 인상을 형상화한다.

  시에는 감정과 정서를 담고 있다고 하였으되, 그 감정과 정서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재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이형기의 「낙화」에서 보이는 ‘희생’은 인생의 젊음에서 성숙을 위해 필요한 자기 수양으로써의 ‘희생’이며, 한용운의 시에서 나타나는 ‘희생’은 ‘님’에 대한 자기 사랑의 표현으로써의 그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희생’의 시적 형상화를 통해 우리는 ‘희생’의 의미에 대해 더욱 다각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된다. ‘희생’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 없으며 그 ‘희생’을 우리는 가벼이 볼 수 없음을 또한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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